젊가19003바램24동서양
행복? 해탈, 평천하, 신 앞의 평등
자연배후학(형이상학): 우주(자연과 물질, 원자), 시간, 공간, 이데아(관념, 이미지 상상), 미(점과 원, 산술학 기하학 등등), 선(도덕, 장하다), 성(훌륭타, 정의), 행복(좋다. 종교, 죽음), 진실(진리, 실재) 등을 다룬다.
서양철학사를 읽다가 보면, “우리는‘이라는 생각이 내내 따라 다닌다.
우리 역사에서 천년의 불교, 오백년의 유교, 그리고 실학이라는 실증적 과정을 스스로 만들기 전에, 일제의 강점이 있었고, 미국 제국의 지배, 그리고 규소의 시대(소통, AI, 쳇GPT)의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의 철학사를 읽으면, 그들은 기원전 역사가 없어서 그리스 사상과 로마 공화정을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알다가, 자기의 학문으로 토대로 삼았다. 그 프랑스도 들여다보면 천오백년의 카톨릭 종교시대, 350여년의 자연탐구와 추리의 시대(합리론)를 거쳐서 이것들을 토대로 실증의 시대를 거치면서 세상사와 자연사를 함께 다루는 노력을 하고 있다. 1953년이래로 DNA와 규소의 시대라고 한 것은 들뢰즈였다.
연대의 차이가 나더라도 거쳐 가는 길에는 상동성, 상사성, 근친성이 있다. 인간의 의식의 확장과 발전은 느린 듯, 다른 듯,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인간이란 삶은 같은 평면위에 푸꼬가 말하듯이 배치 방식에 따라 틀이 달리 보이지만, 들뢰즈의 표현으로, (맑스의 물질변화가 의식을 변하게 한다는 견해에 따라) 발생의 다양성으로 배치가 틀들을 달리 만들고(때에 맞게, 카이로스), 각자의 다른 터전에서 삶의 방식(니체의 놀이방식)에 따라 다른 드라마를 만든다. 가장 흥미로운 드라마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리라, 평천하, 용화세계, 신 앞의 평등을 이루려는 놀이는 계속될 것이다. 크리스트교에서 신 앞에 평등이라고 하나, 신을 바깥에 두면서 이상한 놀이를 드라마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 바깥에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세상 만들기가 없다. 유대 크리스트교는, 첫 문장에 쓰여 있듯이, 명령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명령 체계와 틀이 음모론(L'État profond, the deep state)의 뿌리이다. 심층(le profond)은 자연이며 기억이고 역사이다. 표면(la surface)은 현존이며 현실의 사건들의 연관이다. 상층(le dessus)은 하늘나라니 천상의 상제니 하는 것은 이름뿐이 유명론일 뿐이라고 유럽의 중세가 얼마나 논쟁을 벌였던가! 이런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과 마남사냥 다음으로 그리스의 민주와 로마와 황제정 이전 시대의 공화정에서 배우자는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그리스 사상에서 삶은 터전에서 자치, 자주, 자율, 자발성을 찾으려 한 것이다. 묘하게도 그리스어 자동운동(autokineton), 자동장치(αὐτόματος)의 자동이란 의미의 확장이 의미상으로 자율성, 자발성으로 이어진다. 물질과 신체가 움직이는 인형의 자동장치와 같다는 것에서 인간의 신체가 자율 자발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철학사의 발전이 아닌가.
*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유학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알아가면서부터(格物致知)) 시작하여 인(仁)을 구하여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길을 완수하는 것을 덕성(德性)을 완수한다고 하며, 성인 또는 군자라 하고, 학문 또는 도학을 하는 기본이라 한다. 이에 비해 불교에서는 삶의 고(苦)를 해소하며 의식의 정진과 돈수(頓修)를 통하여 해탈(解脫)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 한다. 서양 철학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영혼의 완성을 자유로 보았으며, 영혼이 자유롭다는 것을 해명하기에는, 모든 인류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의식과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다. 로마의 공화정을 무너뜨린 황제정하에서 크리스트교가 개입하면서 신에 의한 영혼의 주입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의 나라로 가는 행복이 주제가 되었던 것 같다. 이로부터 서양 중세사상은 행복의 획득을 위한 노력(스토아 사상을 받아들여)으로 신 앞에 평등이라 한다.
삶에는 불교가 말하듯이, 의식은 인연연기로 이어져 있다. 인연연기는 의식의 문제이지, 흄이 말하는 물질과 물질의 관계에서 법칙을 찾으려는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리스 사상에서 원인은 귀결들을 만들지,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만든 다는 것이 아니라 한다. 점의 움직임은 직선, 곡선, 타원, 원 등을 다양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점이 차원이 없다는 것을 그리스인들은 잘 알고 있다. 이 점(點)의 무차원을 이용하여 바늘꼭대기 천사가 무한정하게 앉을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는데, 선승들이 모든 것에 불성이 있고 먼지 속에서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 사상에 영향을 입은 12세기 중국의 신유학자는 음양 앞에 태극이 있고 태극 앞에 무극이 있다는 논리를 끌어냈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에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검증할 수 없는 공리 또는 원리가 있다고 했다. 중세 크리스트 학자들은 신을 마치 기하학처럼 생각하여 신과 신의 세계는 선전제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명있는 존재로서 현실에서 사는 인간의 삶에는 과거를 달고 있다. 과거를 마치 별똥별의 흔적처럼 달고 사는 것을 무엇을 설명하는 알레고리일까?
개인의 과거에는 남에게 설명할 수 없고, 표현을 잘 해낼 수 없고, 그리고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추억들이 있고, 그 추억들이 뒤엉켜 어느 하나를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가 한 수 배운 고르기아스이라 한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소피스트들을 궤변자로만, 오직 그렇게만 선전되었던가? 자기 이야기만 맞다고 또는 진실하다고 하면서 허황된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는 자들의 허수아비(악마) 논법일 뿐이다. 허수아비(악마)의 논법에 음모론(그림자 정부론)이 개입해 있다.
기억은 추억들의 모임과 달리, 살아있는 삶에서 의식 활동 뒤에 따라다니는 활동성(시간, 운동)이 있다. 그것은 기억이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화두였을까? 당연히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왜 도덕론을 중심으로 다루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되어 “행복”이 주제라고 생각할까? 아마도 서양 사상이 일본으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굴절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서양철학에서 주제가 자유라고 할 때, 그 자유는 사회와 제도에서 자유가 아니라, 물질이라는 자연세계의 변화무쌍에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숙명에 휘말리지만, 인간으로서 자기의식에 의한 자유 행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논의의 시초는 민주화를 실행하려고 아고라광장에서, 시장통에서, 노동작업장에서, 고등학교(김나지움) 앞에서, 소위 말해 시도 때도 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토론을 하면서, 대담자, 또는 청년의 의식의 정제와 확장을 노력했던 소크라테스에 있다. 그럼에도 그는 깨달으려 노력하는 자의 귀감이 되었지만, 이미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의 미움을 받는다. ‘니가 아는 게 먼데’, 좀 더 나아가면, 그가 마치 선승처럼, ‘니가 불성이냐 신성이냐’에 질문에 그들이 말이 막혀, 그를 없애야만 자기들의 깨달았음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말씀(명령)할 수 있기에, 그를 재판에 걸어 사약을 받게 했다. 선승이나 소크라테스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제기를 학문으로 그리고 문자로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로 남기지 않았다. 불립문자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막내 제자인 플라톤은 이야기를 전개했다. 소크라테스의 문제제기들을 분류하고, 각각게 만게 여러 방식으로 다양하게 논쟁의 과정과 귀결[결론이 아니다]들을 해석도 하고 설명해 보려했다고들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자연이다. 그의 표현의 아페이론은 인간이 또는 어느 제작자들도 어쩔 수 없는 기능 또는 역량이 있다. 이를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방황하는 원인)라고 부른다. 들뢰즈가 ‘무작위적 폭력을 행사하는 왕관을 쓰지 않은 폭군’처럼 설명하였는데. 인간의 신체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무자비한 자연에서 자유를 행사할 수 있을까라는 것을 서양학자들은 자유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인간사의 거래에서 자유, 명령하여 지배할 수 있는 자유는, 인간 중심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자의적 행사(liberal, 아담 스미스 표현으로 자유주의)일 뿐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것들을 해결할 수 없어서, 인간이 자연에게 가하는 역량만큼의 획득하는 자유를 생각한 것이 데미우르고스의 아페이론(물질, 자연)에 대한 실행이었다. 자연에 대해 어느 정도 행사할 수 있는 틀(유기체적 조직화)이 갖추어 지면(맑스 식으로 물질적 구조와 생산양식이 갖추어지면), 사회 제도에서 조직화에 응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그는 길고 긴 법률편을 쓴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양심)이 선한 이데아, 선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 착함은 아름다움을 모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선의 이데아는 하나뿐인데, 천구의 운동이다. 이 하늘의 운동은 매년 같아서 영원히 동일한 방식을 유지한다. 그 천구의 운동은 원운동이며 완전하다고 보았다. 그의 상상은 완성된다. 원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착함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따라 착한 행위를 하는 것이 훌류한 삶이라 한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은 모든 공산주의자의 꿈이 었다. 진실로 꿈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학당을 찾아와 공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에서 아름다움과 착함, 그리고 행복을 구하기보다, 지상에서 현실적으로 실현하자고 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의 연속은 2천5백여년 동안 이어져 왔다. 여기서 행복을 화두를 제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산술적 평등이나 기하학적 평등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행복은 죽음 이전의 이야기로서, 이 터전과 여기서 사는 노력에 있다. 이 노력이 평천하에도, 용화세계(화엄세상)에도, 신 앞의 평등에도 소중하다. 그 노력들이 강도를 가지고 때에 맞게 솟아나는 것이 저항을 넘어 항쟁과 혁명이다. 벩송이 말하는 “저항의 저항”이란, 그것은 극우의 마남사냥과 그에 세뇌당한 민중과 신도들이 변역에 대한 저항이 거세었던 만큼이나, 인민의 “(극우의)저항에 대한 저항”은 그 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 거세었다. 자유, 해탈, 평천하, 평등의 열망은, 기득권들의 이기주의를 넘어선다. 과거에는 조직화가 잘 안되어 도덕적 영웅인 “소크라테스와 예수”도 독사 같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규소의 시대의 누리 소통은 때와 터전에 맞는 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다.
(3:32, 58MKC)
첫댓글 누구의 철학이든 종교든, 봄여름가을 겨울이 있고 시베리가있듯이 남아공도 있다.
천명이 모여도 신은 하나가 없다 千神이다.
그천명도 그때 그자리에서 그토양의 먹거리를 먹고 자란 자연의 일부이다.
철학도 종교도 시간따라 공간따라 변하는것이 신이다 생각도 그러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철학은 종교는 천명이 모두 다르게 생각하겠지 누가 페거리잘 만드는냐가 교주가된다.
나도 교주가되어야할것 같아 창교를 할 계획이다.
나라고 신이 되지말라는 법이 있겠나.
자연의법은 센놈이 파괴와 건설을 한다
학파란것이 뭐 있나 페거리지 같이 나눠먹기 공동 고기잡이지요.
고래를 잡기위해서는 새우잡이배로는 안 되겠지요, 큰배를 만들기위해서 페거리가 많아야겠지요.
페거리 좋지, 박사님과 나는 한 페거리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다른 페거리라 볼것이다
바로 우리는 좋은 페거리야 하하하
악마가 없으면 하나님은 무얼먹고사나.
하하하
우리의역사는 악마와신의 역사다
아니 인간의 역사는 그러했다.
악마로 평생을 살다보니 내가 악마 맞긴 만는건가.
아니야 내가 신인것같다.
내가 신임을 선언 하면 신이 되는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