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요즘 실용음악 같은 것 뿐만 아니라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시 관료로서의 실질적 교육이 된다. 또한 그는 좋은 음악을 연주하고, 듣고, 부르는 과정에서 심성이 교화된다고 믿었다.[27] 유교 텍스트에서는 문화 자체를 예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참고할 것.
.[27] 뇌신경학적으로도 음악은 전전두피질, 거울 뉴런, DMN(default mode network) 등을 자극하며, 행동 개선을 위한 치료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전전두피질은 의사 결정에, 거울 뉴런은 공감에, DMN은 자기성찰에 관여하는 부위다.
사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라 할 것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기관도 귀족 한정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지배계층에 필수적인 기술과 매너를 폐쇄적으로 가내에서 전승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물로 육포 한 다발만 가져온다면 다 가르쳐주었고,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성어로 굳어졌다. 여기서 육포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육포는 남에게 주는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스팸이나 참치캔 정도 지위였다. 즉 배우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르치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백성들이 많으면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고, 넉넉하게 되면 가르쳐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공자에게 교육이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다만 실력이 안 되면 그딴 거 없고 공짜는 아니라는 의미도 숨어 있긴 하다. 이 육포를 촌지로 잘못 해석하는 반(反)유교인이 있지만 상술했듯 육포는 격이 낮아 고급 예물로는 부적절했다. 고로 '최소한의 성의, 의지'를 육포라는 것에 대유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논어 향당편을 보면 공자의 음식 취향이 나타나는데 말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조선도 마찬가지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료면 자식이 음서로 관직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음서로 커리어 시작한 사람들도 절대 다수가 공부해서 과거를 다시 본다. 음서는 그냥 호봉이랑 짬밥 좀 쌓으려고 깔아두는 것일 뿐. 게다가 음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낙하산 인사라는 경멸의 시선이 엄청났기 때문에 음서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현대 한국, 일본, 중국의 공부열이 설명될 수 있고 나아가 공부에 집착하는 서양의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이 생긴것도 이런 연유라고 할 수 있다.[31] 다만 불교 국가 고려에서는 유교의 교세가 조선만큼 강하지 않았던 데에다 문벌 귀족의 관직 독점 문제가 심각하여 음서 출신도 조선처럼 멸시받지 않아 과거에 목 맬 필요가 없었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35]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36] 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공자는 작가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전해져 오는 것을 정리했을 뿐, 스스로 만든 책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시경을 정리하고 주역에 해설을 달고 (계사전), 춘추를 지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이 중에서 분명히 공자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춘추의 경문이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계사전도 공자가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주역은 공자의 영향력이 아주 큰 경전이다.)
[6] 공자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시경》(時經)의 시를 외거나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즐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