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 존재의 존재다움을 여는 것!
박코드 ・ 2024. 12. 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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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양 화가, 작업실에서
니체는 예술가의 충동을 자기 내면에 질서의 성소를 건축하려는 아폴론적 충동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을 향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구분했다. 각 코스모스와 카오스, 에토스와 파토스의 구분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다. 하나의 인격 속에 두 충동이 길항하고 부침한다고 본 것이지만, 보통은 어느 한쪽이 발달된 경향성을 보인다. 그렇게 경향성 여하에 따라서 아폴론적 유형의 작가가 있고, 디오니소스적 유형의 작가가 있다. 코스모스 형 작가가 있고, 카오스 형 작가가 있다. 에토스가 발달된 작가가 있고, 파토스가 강한 작가가 있다. 모든 유형화의 기획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작가의 성격(개성)을 부각하는, 작가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개념적 도구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유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박신양 작가의 회화적 기질은 상대적으로 디오니소스가, 카오스가, 그리고 파토스가 강한 편이다. 그 선례로 치자면 표현주의가 있고, 작가의 그림 역시 그 바탕에는 표현주의에서 이식된 영향 관계가 확인된다. 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 그리고 통독 이후 라이프치히 화파로 대변되는 독일 표현주의의 회화적 성과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형식적으로 드로잉과 프리페인팅, 그리고 해체주의가 부수된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도 그렇게 정의하는 미술사가들이 없지 않거니와, 어쩌면 표현주의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하나의 이즘(-ism) 이상의, 시대를 초월해 재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항상적으로 유효한 개념이며, 일종의 회화적 기질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표현주의는 감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런 만큼 객관적 현실보다는 현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강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객관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가? 어떻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놓는가?
그림(그리고 작가노트)에 나타난 작가의 육성으로 유추해 보자면, 작가는 가면에 가려진 얼굴을 그린다고 했다. 얼굴에 숨겨진 자기를 그린다고 했다. 그리움을 그린다고도 했다. 예술가 신화를 그린다고 했고, 자유혼을 그린다고 했다. 바람의 신부, 그러므로 아마도 격정을 그린다고도 했다. 하나의 사과에 담긴 행복의 의미를 그린다고 했고, 당나귀로 표상되는 아마도 삶의 알레고리를 그린다고도 했다. 하나같이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것들이고, 우연적이고 비결정적인 것들이다. 결국 없는 형태를, 색깔을 찾아갈 수밖에. 그 과정에서 객관적 현실을 참조할 수 있지만,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객관적 현실을 넘어 주관적 해석을 여는 것이며, 존재를 넘어 존재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며, 자기를 넘어 자기-타자와 만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라면 존재의 존재다움을 여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순간적으로 그린 그림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리고 지우고 뭉개고 덧칠하기를 무한 반복한 그림들이 많다.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멈칫하고, 내지르고, 거둬들인 흔적이 여실하다. 매 순간 긍정과 부정이 교차되고, 확신과 주저가 교직되는 치열한 과정이 오롯하다.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결국 그 치열한 과정이고 흔적이지 않을까. 바로 그 과정과 흔적이 그리움(절실한 그리움, 그러므로 그리움의 질)을 암시하고, 얼굴은 얼굴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저마다 존재의 존재다움을 열어놓는 것이 아닐까.
토마스 만은 예술이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결핍(간절함, 절실함, 진정성, 그러므로 어쩌면 내적 필연성)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도 했다. 작가의 그림에는 결핍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결핍이 밀어 올린 동력으로 존재의 극적인 순간을, 존재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을, 그러므로 어쩌면 육화된 파토스를 열어놓고 있었다.
박신양, 「무무, 게라심」(2018년, 162.2×130.3cm)
마지막으로, 여기에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게라심과 무무」. 정작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는 못 본 그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향후 작가의 그림이 나아갈 방향을 잡아줄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무무」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사랑, 죽음을 부르는 사랑은 낭만주의의 핵심 테마이지만, 여기에 구러시아 농노제의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결부된, 아픈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아픈 작가가 아픈 이야기에 끌렸을 것이고, 아픈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 아픔의 강도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흥미롭게도 이 그림이 예술가의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조각배에 두 사람(아니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주검?)이 노 저어가는 그림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엽편주, 그러므로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외로운 배는 삶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서 배는 마치 덕지덕지한 물감의 바다를 노 저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그림의 바다를 항해하는 예술가의 초상을 보는 것 같다. 문학적인, 서사적인, 극적인, 알 수 없는, 낯선, 암시적인, 그러면서도 현실과 연결된 끈을 끝내 놓지 않는 라이프치히 화파의 알레고리 강한 회화를 보는 것도 같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고충환 미술평론가 아트코리아방송 문화예술대상 평론부문 대상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제2회 아트코리아방송 문화예술대상 시상식에서 평론부문에 고충환 미술평론가가 평론부문 대상을 차지했다.고충환 미술평론가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신춘문에 미술평론에 당선 및 성곡미술기획 공모대상, 월간미술 대상 등 학술평론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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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평론] 존재의 존재다움을 여는 것!|작성자 박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