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절의 침묵
내 사는 청주를 벗어난 군에 위치한 도서관이다. 주말을 맞아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겸해 책도 읽을 겸 처음 찾아온 곳이다. 아담한 규모에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는 곳으로 보인다. 1층 휴게실인 듯한데 소리는 없이 화면만 돌아가는 자체 영상이 작동하고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덕인지 배려심인지 커피기계가 있다. 창가로는 컴퓨터가 놓여있어 누군가 조용히 사용하고 있다. 커피를 빼는 방법을 모르니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기도 애매하고 그럴만한 이도 보이지 않는다. 난감하다.
우리 처지를 눈치 챘는지 컴퓨터를 하던 이가 다가와 컵을 사야한다고 알려준다. 곧이어 칫솔을 입에 문 사무원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 무료라며 종이컵을 건네주고 아예 작게 쓰여 있는 글씨를 따라 우리 눈치를 보며 연한 아메리카노를 눌러 준다. 드륵 드륵 지이이 하고 조금씩 커피가 흘러내린다. 커피 잔을 들고 차탁이 놓인 구석으로 가 조용히 차를 마신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고 무언가 몰두하는 이가 있으니 민망하다. 다른 누군가 또 구석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 같다.
침묵이 어색한 곳이 있다. 휴게실에 침묵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휴게실이 아주 조용한데 그런 곳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니 신경이 거슬려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조금 소음이 있으면 나을 것 같다. 크게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음악이 흐르거나 자체영상에 낮은 음량이 겹치면 어색함이 어느 정도 상쇄되리라. 그런 분위기에서는 안면이 있는 이들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어도 좋을 듯싶다. 때로는 숨 막히는 고요함이 힘들 수 있다.
전통적인 사고로는 도서관은 침묵이 깔려야 할 곳이고, 벽 한쪽에 “정숙”이라고 쓰인 액자라도 걸려있어야 할 것 같다. 시대와 함께 도서관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도서관에서 책 토론을 한다. 때로 이야기가 격해지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문화교실도 개설되어 지역민이 원하는 강좌가 학교 수업처럼 진행된다. 어쩌면 경직된 학교 수업보다 더 활기찰 것이다.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강좌가 아니고 언제든지 사정이 있으면 수강생들이 빠질 수 있으니 강사로서는 긴장을 풀 수 없을 게다.
수강하는 이들의 연령대와 지식수준이 다양하고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으면 흥미가 반감되어 느슨해질 테니 수시로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한다. 모두가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를 하면서 수업을 진행하기가 어렵고도 어려우리라. 듣는 이들은 부담이 없고 학습결과를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사에 대한 평가가 정기적으로 있으니 노력 없이는 못할 일이리라.
차를 마시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책이 가득 진열된 공간에 몇 개의 도서 열람용 긴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다. 삼층도 있는 것 같지만 둘러보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 아니니 빛이 빗겨드는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메모가 필요할지 몰라 가져온 샤프와 지우개를 한쪽 옆에 나란히 두고 책갈피가 꼽힌 책을 펼친다. 며칠 후에 토론이 예정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하권이다. 무려 450여 쪽에 이르는 분량, 그것도 상하권이니 900여 쪽이 넘는다. 집중이 필요한 책이 아니라 쉽게 넘어가는 책을 가져온 것이다.
가끔 몇 안 되는 이들이 일어나고 앉기 위해 의자 빼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굳이 신경 쓰지 않으니 주변에 누가 오고 가는지도 의식할 수 없다. 어느 순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탁자위에 꺼내 놓는다. 책을 읽으며 익숙하지 않은 어휘를 검색하기 위함이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궁금함이 일어 대화방이나 뉴스 창을 힐끔거리기도 한다. 약간의 불편함에 안경을 벗어 휴대폰 옆에 나란히 두고 눈가를 누른다.
조용한 도서관에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 햇살을 빗겨 맞으며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에 젖어든다. 어린 시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님의 미숙한 행동으로 지적능력을 잃고 엉뚱하게 고양이들과 의사소통을 하게 된 노인이 살인사건에 연루되고 어떤 힘에 이끌려 살던 곳을 멀리 떠나 본인도 모르는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경찰서로 찾아가 자신의 범죄를 신고해도 헛소리로 여기고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사건의 구성과 전개가 흥미로우면서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몇 가닥의 사건이 얽혀있는데 끝까지 읽어봐야 줄거리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가란 이들이 존경스럽다.
세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내가 다가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점심을 어떻게 해결해 보잔다. 도서관 주변에 식당들이 많으니 간단한 것으로 먹고 몇 시간 더 있자는 눈치다. 짐을 챙겨 나오니 마음이 또 달라진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곳보다는 차라리 청주로 가거나 집에서 간단히 먹고 그 근처 도서관을 가자고 내가 제안하자 아내는 그렇게 하자고 한다.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침묵과 잘 어울리는 침묵을 함께 경험한 날이다.
낯선 길을 차량 길안내에 의지해 간다. 보수중인 국도로 간다. 가까이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첩첩산중에 굽이굽이 고갯길이 펼쳐진다. 앞뒤로 오가는 차량도 눈에 띄지 않는 침묵에 쌓인 길이다. 자연 속 침묵은 나를 사색에 들게 한다. 한쪽 산기슭엔 눈이 허옇고 다른 골짝으론 가다가다 집들이 한두 채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 고개를 갸웃할 순간, 눈에 익은 공간이 나타나고 차량과 사람들이 늘어나 침묵을 뚫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한 나절 잠겨본 뜻밖의 가붓한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