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입능가경
10. 게송품(偈頌品)(2)-2
분별은 유ㆍ무가 아니니 그래서 유(有)에 분별 생기지 않고 보는 것이 오직 마음뿐임을 깨달으면 분별이 곧 일어나지 않느니라.
분별 일어나지 아니하므로 의지처를 바꾸어 집착하는 것 없어 곧 네 가지 주장[四宗]을 차단하나니 말하자면 법에 인이 있다 하는 등이니라.
이것은 다만 이름이 다를 뿐 세운 바(주장)는 모두 이루지 못하나니 능히 만들어진 인[能作因:창조자]을 마땅히 알라. 또한 다시 성립되지 않느니라.
능작이라 함을 막기 위하여 인연 화합을 설하고 항상하다는 것의 잘못을 막기 위하여 인연 이것은 무상(無常)하다 설하였느니라.
어리석은 범부는 무상이라 말하나 실은 생멸하지 않으며 괴멸[滅壞]하는 법 보지 못하면서 능히 지은 것[所作]이 있다 하느니라.
어찌 무상법(無常法)이 있고 능히 생기는 것이 있으며 하늘ㆍ사람ㆍ아수라 귀신ㆍ축생ㆍ염라(閻羅) 등이 있으랴.
중생 가운데 태어남을 나는 설하여 6도(道)라 하나니 업(業)의 상ㆍ중ㆍ하에 따라 그 가운데서 생(生)을 받느니라.
모든 선법(善法) 수호하여야 수승한 해탈 얻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 위해 태어나는 것을 설한 것이니라.
생각마다 모두 생멸함을 청하건대 저희를 위해 설하여 주소서. 색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마음마다 또한 생멸함을 설해 주소서.
내가 제자 위해 설하였느니 옮기고 옮겨 태어남을 생각하여라. 색색 가운데서 분별함에 생멸함도 또한 다시 그러하느니라.
분별함은 중생이고 분별 떠나면 중생 있지 않느니라. 나는 이런 인연으로 생각마다 생긴다고 설하노라.
만약 색(色)을 취착(取着)하는 데서 떠나면 불생이요, 또한 불멸(不滅)이니라. 인연에서 생김과, 인연에서 생기지 아니함, 무명과 진여 등은
두 가지 법 때문에 일어나나니 둘이 없으면 곧 진여이니라.
만약 연(緣)과 연 아님[非緣] 그리고 생법(生法)에 차별이 있다면 항상함 등 모든 인연 능작(能作)과 소작(所作)이 있음이니라.
이것은 곧 대모니(大牟尼)와 모든 부처님의 설법에서 능작과 소작이 있다고 한 것이니 외도와 다름없으리라.
내가 제자 위해 설하나니 몸, 이것은 세간의 고통[苦:苦諦]이며 또한 이것은 세간의 집[集:集諦]과 멸(滅)ㆍ도(道)도 모두 다 갖추었느니라.
범부는 허망하게 분별하여 3자성(自性:변계ㆍ의타ㆍ원성실성)을 취하기 때문에 능취와 소취와 세간과 출세간법이 있다고 보느니라.
내가 먼저 상대[待]함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자성을 가지고 설하였으니, 지금 모든 견해를 막기 위하여 마땅히 허망한 분별하지 말라.
잘못된 것을 구하는 것과 법 아닌 것[非法]도 또한 마음을 삼매[定]에 들지 못하게 하니 모두 두 가지를 취함으로 일어남이라 둘이 없으면 곧 진여이니라.
만약 무명(無明)과 애업(愛業)에서 식(識) 등이 생겨난다면 삿된 생각이 다시 인(因)이 되어 이것은 곧 끝없는 허물이 생하느니라.
지혜 없는 이 모든 법 설하되 네 가지 괴멸함이 있다 하여 허망하게 두 가지 분별 일으키나 법은 실로 유ㆍ무를 떠났느니라.
4구(句)를 멀리 떠나고 또한 2견(見:斷ㆍ常)을 떠나 분별에서 일으킨 두 가지 깨닫고 나면 다시는 생기지 않으리라.
불생(不生) 중에서 생(生)을 알고 생 중에서 불생을 아는 것은 그 법이 동등한 까닭이니 마땅히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저희를 위해 2견(見)을 막는 이치를 설하시어 저와 다른 중생들이 항상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모든 외도에 섞이지 않고 또한 2승 떠나며 모든 부처님 깨달으신 경계 불자들은 증득해야 하리라.
해탈의 인과 비인(非因) 동일한 무생(無生)의 모양인데 미혹한 까닭에 다른 이름에 집착하나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항상 여의리라.
법은 분별에서 생기며 털 수레바퀴ㆍ환(幻)ㆍ아지랑이 같은데 외도는 허망하게 분별하여 세간은 자성에서 생긴다 하느니라.
무생(無生)과 진여 성공(性空)과 진제(眞際)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설한 것이니 마땅히 집착하여 없다 하지 말라.
손[手]에 많은 이름이 있듯이 제석(帝釋)의 이름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마땅히 집착하여 없다 하지 말라.
색(色)과 공 다름이 없고 무생(無生) 또한 다시 그러하니 마땅히 집착하여 다르다 하지 말라. 모든 견해에 과실이 이루어지리라.
총(總)과 별분별(別分別)과 변분별(遍分別) 때문에 모든 사물의 모양[事相]에 길고 짧고 모나고 둥근 것 등으로 집착하나니,
총분별(總分別)은 마음[心:8식]이요 변분별(遍分別)은 뜻[意:7식]이며 별분별(別分別)은 식(識:6식)이니, 모두 능상ㆍ소상 떠나 있느니라.
나의 법 가운데 견해를 일으킴이나 외도의 무생(無生)은 모두 허망한 분별로서 과실(過失)이 같아 다름이 없느니라.
만약 능히 내가 설한 무생과 무생의 하는 바[所爲]를 통달한다면 이 사람은 나의 법을 알리라.
모든 견해를 깨뜨리고 무생(無生)과 무주처(無住處) 이 둘의 뜻 알게 하려고 나는 무생을 설하였느니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무생법을 만약 있다거나 없다 하면 곧 모든 외도와 같아 무인불생론(無因不生論)이니라.
내가 오직 마음뿐이라 설한 것은 유ㆍ무를 멀리 떠났고 혹은 생겼다거나, 혹은 생기지 않았다는 견해를 마땅히 모두 떠났느니라.
무인론(無因論)이면 불생(不生)이고 생(生)이면 작자(作者)에 집착하며 만들었다면[作] 모든 견(見)에 섞이고 없다면[無] 자연히 생김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방편과 정견(正見)과 대원(大願) 등 일체법이 만약 없다면 도량(道場)은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능취ㆍ소취를 떠나고 생(生)도 아니요, 멸(滅)도 아니며 보는 법과 법 아닌 것은 모두 자기 마음에서 일어났느니라.
모니(牟尼)께서 설하신 바 전후가 서로 어긋납니다. 왜 모든 법 설하시고 다시 불생(不生)이라 하십니까?
중생들은 능히 알지 못합니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저희를 위해 설하시어 외도의 잘못과 저 전도된 인(因)을 떠나게 하소서.
오직 원하건대 훌륭하신 설법자시여, 생(生)과 멸을 설하시어 모두 유ㆍ무를 떠나 인과를 허물지 않게 하소서.
세간은 2변(邊)에 떨어져 모든 견에 미혹되어 있으니 오직 원컨대 청련안(靑蓮眼)의 부처님이시여, 모든 보살지[地]의 차례를 설해 주소서.
생(生)과 불생(不生) 등을 취함은 적멸인(寂滅因)을 깨닫지 못함이니 도량(道場) 얻을 바 없고 나도 또한 설한 바 없느니라.
찰나법 모두 공하여 생도 없고 자성도 없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이견을 청정히 하셨나니 2견이 있으면 과실 이루어지리라.
악견(惡見)에 덮여 분별하여 여래 아니라 하고 허망하게 생멸 헤아리나니 원컨대 우리를 위해 설해 주소서.
희론(戱論)을 모아 쌓아 화합하여 생긴 것 그 부류를 따라 앞에 나타나 색과 경계를 모두 구족하느니라.
밖의 물질[外色] 보고 나서 분별 일으키나니 만약 능히 이것을 깨달아 알면 곧 진실한 뜻 보리라.
만약 대종(大種) 떠나면 모든 사물 다 이루어지지 않고 대종이 이미 오직 마음뿐이니 생기는 것 없음을 마땅히 알라.
이 마음 또한 불생(不生)이니 곧 성종성(聖種性)에 수순함이니라. 분별을 분별하지 말라. 무분별이 지혜이니라.
분별을 분별함은 2견(見)으로 열반이 아니니라. 만약 무생종(無生宗)을 세운다면 곧 환법(幻法)에 무너지리라.
또 무인(無因)에서 환이 일어난다 하는 것도 자기 주장[自宗]이 손감되나니 마치 거울 속의 영상 같아 비록 같고 다른 성품을 떠나도 보이는 것 없는 것 아니요 생긴 모양[生相]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건달바와 환 등이 모두 인연을 상대하여 있는 것같이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 생(生)은 불생(不生)이 아니니라.
인(人)과 법(法)을 분별하여 두 가지 나[人我ㆍ法我]가 일어나나 이것은 다만 세속의 말이요 어리석은 범부는 깨달아 알지 못하리라.
서원이 인연과 함께 모음으로 말미암아 자력(自力)과 가장 수승한 다섯 가지 성문법으로 아라한 등이 있느니라.
시간의 간격과 괴멸함과 승의(勝義:진실)와 체천(遞遷:변천)을 네 가지 무상(無常)이라고 어리석은 이 분별함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니라.
어리석은 범부는 2변에 떨어져 덕(德)ㆍ번뇌[塵]ㆍ자성이 창조하였다 하여 유ㆍ무의 주장을 취함으로써 해탈의 인(因)을 알지 못하느니라.
대종(大種)이 서로 어긋나는데 어찌 능히 석질이 일어나랴. 나만 대종성(大種性)일 뿐 대종으로 만들어진 색법은 없느니라.
불은 색을 태우고 불은 다시 썩게 하여 무너뜨리고 바람은 능히 흩어 없어지게 하는데 어찌 색이 생기겠는가.
색온(色蘊)과 식온(識薀) 오직 이 둘뿐이고 다섯(5온)은 아니요, 나머지는 다만 이름이 다를 뿐 나는 그것[蘊]을 원수 같다 설하느니라.
마음[心]과 마음[心所]에 속한 것의 차별이 현행법을 일으키나 모든 색을 분석하면 오직 마음뿐 만들어진 것 없느니라.
푸르고 흰 것 등이 상대적이듯이 지음과 지은 것도 또한 그러하고 생긴 것[所生]과 성공(性空) 차고 더운 것의 상(相)과 소상(所相) 유ㆍ무 등 일체는 허망한 분별이라 이루어지지 않느니라.
마음[8식]ㆍ뜻[意:7식]과 나머지 여섯[6식] 모든 식은 같이 상응하며 모두 장식(藏識)에 인하여 생기니 같지도 않고 또 다르지도 않느니라.
수론[數]ㆍ승론[勝]과 노형(露形) 외도는 자재천이 능히 만들었다 하니 모두 유ㆍ무의 주장에 떨어져 고요한 뜻[寂靜義]에서 멀리 떠나 있느니라.
대종(大種)이 형상(形相)을 만들었다 하고 대종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고 또 다른 외도는 대종을 말하되 대종과 색을 만들었다고 하느니라.
무생의 법[無生法] 밖에 외도는 만든 자[作者:창조주]가 있다고 하여 유ㆍ무의 주장에 의지하나 어리석은 범부는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청정한 진실의 상(相)은 큰 지혜[大智]를 함께 갖추나 다만 같은 마음으로 상응할 뿐 뜻[意] 등과 화합함이 아니니라.
만약 법이 모두 색을 만들면 모든 온의 인과 어긋나니 중생은 마땅히 취하지 말 것이며 색이 없는[無色] 데로 머물지 말라.
무(無)라 이름한다면 중생 또한 마땅히 없는 것이니 무색론(無色論)은 단견[斷]이 되어 모든 색이 마땅히 생기지 않아야 하리라.
식은 네 가지[受ㆍ想ㆍ行ㆍ識]에 의지하는데 어찌 무색(無色)이 이루어지겠는가. 내외(內外)가 이미 이루어지지 않으니 식도 또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만약 중생의 식이 없다면 자연히 해탈 얻을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외도의 논인데도 허망하게 분별하는 자는 알지 못하리라.
혹은 어떤 이가 즐거움에 집착하여 중유(中有:中陰) 가운데서 모든 온(蘊)이 무색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고 하면 어찌하여 무색이 있겠는가.
무색 가운데 색은 그것을 볼 수 없으니 무색이라 하면 주장에 어긋나 가르침[乘]이나 가르치는 것[乘者]이 되지 못하느니라.
식은 습기에서 생기어 모든 근과 화합하여 여덟 가지(8식)가 찰나에 생기나 취하여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모든 색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근(根)은 근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러므로 세존께서 설하시되 근과 색은 찰이가(刹膩迦:찰나)라 하였느니라.
어떻게 색을 깨닫지 못하고 식이 생겼다 하며 어떻게 식이 생기지 않았는데 생사를 받는다고 하는가.
모든 근과 근의 경계에 대해 성자(聖者)는 그 뜻을 깨달았으나 어리석어 지혜 없는 자는 허망하게 집착하여 그 이름을 취하느니라.
마땅히 6식에 집착하지 말라. 유를 취하거나 무를 취하는 모든 과실 여의게 하려고 성자는 결정하여 설함이 없느니라.
모든 외도는 지혜 없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두려워하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헤아리며 나와 차별이 없다고 하느니라.
혹은 헤아려 마음과 같다 하나 혹은 뜻 등과는 다르다 하며 한 가지 성품을 취할 수 있다 하고 다른 성품이 있는 것도 그러하다 하느니라.
만약 이것을 취하여 결정코 밝힌다면 심(心)ㆍ심소(心所)라 이름하는데 이것을 취하면서 어찌 능히 한 성품임을 결정코 밝히지 못하리오.
유(有)를 취하고 또 업을 지으면 생(生)을 받을 것이니 마치 불이 이루어짐과 같거늘 외도의 이치가 진리와 같은 듯하나 같지 않느니라.
불이 갑자기 탈 때 타는 것과 탈 것이 다 갖추어지듯 허망하게 ‘나’를 취함도 또한 그러하니 어찌 취하는 바가 없겠는가.
생(生)이거나 불생(不生)이거나 마음의 성품 항상 청정하거늘 외도가 세운 ‘나’는 어찌 깨닫지 못하는가.
미혹한 식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허망하게 분별하여 참된 법 떠나 있고 아론(我論)을 즐겨하는 까닭에 여기 저기 쫓아 구하느니라.
안으로 깨달은 지혜로 행하는 바 청정하고 진실한 나의 상, 이것이 곧 여래장(如來藏)이니 외도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모든 온(蘊) 분별함에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니 만약 능히 이 모양 깨닫는다면 곧 진실한 지혜 생기리라.
이 모든 외도들은 아뢰야 장식(藏識)에 뜻[意]이 나와 함께 있다 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설한 것 아니니라.
만약 능히 이것을 분별하여 안다면 해탈하여 진제(眞諦)를 보고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의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어 모두 청정하리라.
이 청정한 마음의 중생을 미혹하여 취하려 하나 때 없는 여래장은 변(邊)과 무변(無邊) 멀리 여의었느니라.
본식(本識:8식)이 온(蘊) 가운데 있음이 금과 은이 광석에 있는 것 같아 만들어 불리어 다듬고 나면 금과 은이 모두 드러나느니라.
부처님은 사람이 아니요, 온(蘊)도 아니며 다만 무루지(無漏智)이니라. 깨달아 알아 항상 청정하니 이곳이 나의 돌아갈 곳이니라.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수번뇌(隨煩惱), 뜻 등과 나와 상응함을 원컨대 부처님께서 해설하여 주소서.
자성이 청정한 마음인데 뜻 등이 다른 것을 생각하여 거기에 쌓아 모은 업이 잡되게 물든 까닭으로 둘이 되느니라.
뜻 등 나[我]의 번뇌가 청정한 마음을 오염(汚染)시킴이 마치 저 깨끗한 옷이 모든 때에 물듦과 같으니라.
옷에서 때를 씻어내고 또 금이 광석에서 나오되 옷과 금이 함께 허물어지지 않듯이 마음이 허물을 여읨이 또한 그러하느니라.
지혜 없는 자가 공후(箜篌)ㆍ소리ㆍ북 등에서 묘한 음성 찾듯이 온(蘊) 가운데 나[我]를 찾음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마치 땅 속에 묻힌 보물같이 또한 지하에 흐르는 물같이 비록 있지만 볼 수 없으니 온(蘊) 가운데 진아(眞我)도 또한 그러하네.
심(心)과 심소(心所)의 공능이 모든 온과 상응함을 지혜 없으면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온(蘊) 가운데 나란 것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여인이 태를 품고 있어도 볼 수 없듯이 온 가운데 진실한 나도 지혜 없는 이는 능히 알 수 없으리라.
약 가운데 뛰어난 힘이 있듯이 또한 나무 속에 불과 같이 온 가운데 진실한 나를 지혜 없는 이는 능히 알지 못하리라.
모든 법 가운데 공한 성품[空性]과 또 무상의 성품[無常性] 있듯이 온 가운데 진실한 나를 지혜 없는 이는 능히 알지 못하리라.
모든 지(地:보살지)에 자재한 신통, 관정(灌頂)과 수승한 삼매, 만약 이 진실한 나 없다면 이들은 모두 없으리라.
어떤 이가 부정하여 말하되 만약 ‘나’가 있다면 마땅히 나에게 보여 주시오.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대답하리라. 그대의 분별이 곧 나를 보이는 것이라고.
진아(眞我)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법을 훼방하고 유ㆍ무에 집착함이니 비구는 마땅히 갈마(羯磨:참회 작법)하여 물리쳐 버리고 함께 말하지 말라.
진아를 치연(熾然)하게 설함이 마치 겁화(劫火)의 불이 일어나듯 하여 무아의 빽빽한 숲 태워 모든 외도의 과실을 여의게 하라.
소(蘇)ㆍ락(酪)ㆍ석밀(石蜜)과 마유(麻油) 등 이것은 모두 맛있으나 맛보지 못한 자는 알지 못하듯
모든 온의 몸[蘊身] 가운데서 다섯 가지에 나[我]를 추구하면 어리석은 이는 능히 알지 못하나 지혜로운 이는 보면 곧 해탈하리라.
밝은 지혜로 세운 비유로도 아직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모여 있는 뜻 어찌 능히 명료(明了)하게 알겠는가.
모든 법의 다르고, 다른 모양이 오직 한 마음뿐임을 깨닫지 못하고 헤아리는 자는 허망하게 집착하여 무인(無因)과 무기(無起:無生)라 하느니라.
선정을 닦는 자는 마음을 관하나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느니라. 견해는 보는 바를 따라 생긴다면 보는 것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기는가.
나의 성(姓)은 가전연(迦旃延)이고 정거천(淨居天:四禪天)에서 나와 중생 위해 설법하려고 열반성(涅槃城)에 들어오려 하였느니라.
본주법(本住法:진리)을 인연하여 나와 모든 여래께서 3천 경(經) 가운데서 널리 열반법을 설하시느니라.
욕계와 무색계 그곳에서 성불하지 아니하시고 색계의 색구경천에서 욕심 여의고 보리 얻었느니라.
경계가 얽매임의 인(因)이 아니요 인이 경계에 얽매이니라. 수행의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저 번뇌를 베어 끊느니라.
어찌 무아(無我)가 있으며, 환(幻) 등과 법의 유ㆍ무를 어리석은 이도 마땅히 진여를 나타내는데 어찌 진아(眞我)가 없으리오.
이미 만들었고 아직 만들지 않은 법 모두 인에서 일어난 것 아니니 일체가 다 무생임을 어리석은 범부는 능히 깨닫지 못하느니라.
능히 만든 자는 생기지 않았고 만든 것과 모든 인연 이 둘은 모두 무생인데 어찌 능작을 분별하랴.
허망하게 분별하는 자는 능작이 있다고 말하며 앞ㆍ뒤가 동시에 인이 되며 물병과 제자 등을 나타내어 모든 만물이 생긴다고 말하느니라.
부처님은 유위(有爲)가 아니나니 갖추신 모든 상호는 전륜왕의 공덕이므로 이것을 여래라 이름하지 아니하느니라.
부처님은 지혜로 상(相)을 삼으며 모든 견해를 멀리 여의어 스스로 안으로 깨달아 행하는 바라 일체의 허물 다 끊느니라.
귀먹고, 눈 어둡고, 벙어리 등 늙고 젊고 워한 품은 이, 이들의 매우 무거운 업보는 모두 범행[梵行分:청정행]이 없었던 탓이니라.
좋아함을 따라 숨기면 하늘이 되고 상(相)을 숨기면 전륜왕이 되나니 이 둘은 방일에 집착함이니 오직 드러낸 자가 출가하리라.
나 석가는 멸한 후에 마땅히 비야사(毘耶娑:廣博) 가나(迦那:勝論派 시조)ㆍ리사바(梨沙婆:신선) 겁비라(劫毘羅) 등이 나오리라.
내가 멸한 백 년 후 비야사가 설한 바 바라다(婆羅多) 등의 논(論)이 나오고 다음에는 반택사(半擇娑)와
교랍바(憍拉婆)와 라마(囉摩)가 나오고 다음에 모리왕(冒狸王)과 난타(難陀)와 굽다(毱多)가 나오며 다음에 멸리차왕(篾利車王)이 나오리라.
그 후 병기와 군사[刀兵:전쟁]가 일어나고 다음에 말세가 되리니 그때에는 모든 세간이 정법을 수행(修行)하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은 등이 지난 후에 세간은 수레바퀴같이 굴러 해와 불이 함께 합하여 욕계(欲界)를 불태우리라.
다시 모든 하늘에서 세간이 다시 이루어지고 모든 왕과 네 가지 성[四姓]과 모든 신선이 법을 세워 교화하리라.
위타(韋陀:베다)ㆍ사시(祠施:제식) 등 마땅히 이런 법이 흥하며 담론(談論)과 희론(戱論)과 긴 글과 해석이 함께 하리라.
내가 듣건대 이러한 것들이 세간을 미혹하여 받은 바의 여러 중생들 가운데 혹은 올바른[正色:正法] 자 있으리라.
푸른 진흙ㆍ쇠똥 등으로 물들여 회색이 되게 하여 입는 일체 옷을 외도의 모양과 다르게 하리라.
수행자가 모든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또한 허리띠를 매고 물을 걸러 마시며
차례로 걸식하고 가지 못할 곳에는 가지 아니하며 수승하고 미묘한 하늘[勝妙天]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 인간 가운데 태어나기도 하며
보상(寶相)이 구족한 이로서 하늘과 사람의 왕으로 태어나거나 왕이 사천하(四天下)를 주고 법을 가르쳐 오래 머물게 하리라.
중생은 천궁(天宮)에 올라갔다가 탐욕으로 말미암아 모두 물러나 잃게 되며 순선(純善:正法時代) 삼시(三時:삼계) 이시(二時:제3의 우주기)와 아울러 말세를 거치느니라.
다른 부처님은 선할 때 출현하시고 석가부처님은 악세에 출현하시며 나는 열반 후에 석가 종족 실달다(悉達多)로 태어나리라.
비슈누[毘紬]와 대자재천 외도들이 함께 나오며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등의 석사자(釋師子:여래)의 가르침 설하여지느니라.
옛 이야기와 재미있는 이야기 비야사(毘夜娑) 신선의 말 내 열반 후에 비슈누와 대자재천이 나와 이와 같은 말을 하리라. 내가 능히 세간을 만들었다라고.
나의 이름은 이진불(離塵佛)이고 성은 가다연나(迦多衍那)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세간주(世間主)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구재(具財)이니라.
나는 첨바국(瞻婆國)에 태어나며 나의 선조부(先祖父)는 월종(月種:月天子의 자손)에서 태어나서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하느니라.
출가하여 고행을 닦아 천(千)의 법문(法門)을 연설하고 대혜(大慧)에게 수기를 주고 그럼 후 마땅히 열반하리라.
대혜는 달마(達摩)에게 부촉하고 다음에 미거리(彌佉梨)에 부촉하며 미거리는 악할 때 태어나 법을 펴고 겁이 다할 때 법도 마땅히 멸하리라.
가섭(迦葉)과 구류손(拘留孫)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또 나 이진구(離塵垢)는 모두 순선(純善)할 때 출현하리라.
순선이 점점 멸할 때 혜(慧)라는 도사(導師)가 있어 큰 용맹 이루어 5법(法:相ㆍ名ㆍ分別ㆍ五智ㆍ如如)을 깨달았느니라.
이시(二時)와 삼시(三時)의 악한 때도 아니고 또한 말세도 아니요 저 순선에 나타나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리라.
옷은 비록 찢어지지 않았으나 여러 조각으로 기워 입고 공작의 꼬리털과 눈 같아 다른 사람이 빼앗으려 하지 않고
혹은 두 손가락, 세 손가락 넓이의 조각으로 사이가 어긋나게 기워 입으며 이와 다르게 만든 것은 어리석은 이 탐착한 것이니라.
오직 3의(衣)만 지니고 항상 탐욕의 불 끄고 지혜의 물로 목욕하며 밤낮으로 삼시(三時) 수행하느니라.
시위 떠난 화살같이 세력 강하여 한 번 떨어졌다 다시 한 번 튀듯이 또한 타락[酪]에 젖는 막대기같이 선(善)과 불선(不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만약 하나에서 능히 많은 것이 생긴다면 곧 별다른 상(相)이 있는 것이니 베푸는 자는 마땅히 밭과 같고 받는 자는 마땅히 바람 같으리라.
만약 하나에서 많은 것이 생긴다면 일체는 인(因) 없이 있는 것이니라. 만들어진 인이 괴멸하리니 이것은 허망한 분별로 세운 것이니라.
만약 허망한 분별로 세운 것이면 등불과 종자 대하듯 하나에서 능히 많은 것이 생기는 것은 다만 서로 비슷할 뿐 많은 것이 아니니라.
호마(胡麻:깨)에서 콩이 생기지 않고 벼는 귀리밀[穬麥]의 종자[因]가 아니며 팥은 곡식의 종자가 아닌데 어떻게 하나에서 많은 것이 생기랴.
명수(名手:선인의 이름)는 성론(聲論:五明의 하나)을 짓고 광주(廣主)는 왕론(王論)을 지으며 순세론(順世論:쾌락주의)의 허망한 말은 마땅히 범장(梵藏)에 들[生] 것이며
가다연(迦多延:육사외도)은 경을 만들고 수피선(樹皮仙)은 제사를 말하고 휴류(鵂鶹:외도)는 천문(天文)을 내어 악한 세상 때에 마땅히 있으리라.
세간의 모든 중생의 복력(福力)이 왕을 감화시켜 법이 일체를 제어하듯 국토를 수호하리라.
청의(靑蟻)와 적두(赤豆) 측벽(側僻)과 마행(馬行) 이들 큰 복의 선인들이니 미래세에 마땅히 출현하리라.
석씨의 아들 실달다(悉達多) 보다(步多)의 다섯 상투[五髻]와 구력(口力)과 총명한 지혜로 또한 미래세에 출현하리라.
내가 숲에서 수행할 때 범왕(梵王)이 와서 나를 도와 사슴 가죽의 옷과 삼기장(三岐杖)3)과 허리띠와 물병을 주리라.
이 대수행자는 마땅히 이구존(離垢尊)을 이루어 진해탈(眞解脫)을 설하며 모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되리라.
범왕과 범중(梵衆:梵衆天) 모든 하늘과 하늘 대중 나에게 사슴가죽의 옷을 주고 자재궁(自在宮:자재천 궁전)에 돌아가리라.
내가 숲 사이에 있을 때 제석천과 사천왕이 나에게 미묘한 의복과 걸식하는 발우를 주리라.
만약 불생론(不生論)을 세운다면 이 인(因)으로 생(生)하여 다시 생함이니
3)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힌두교의 지팡이이다.
이와 같이 무생(無生)을 세우는 것은 오직 이 허망한 말일 뿐이니라.
무시이래로 쌓아온 것 무명이 마음의 인이 되어 생멸하여 상속하나니 허망한 분별로 분별한 것이니라.
승거론(僧佉論:육파철학의 하나)에 두 가지가 있나니 승성(勝性:原資)과 변이(變異:근원에서 변해감)와 승성 중에 만든 것[所作] 있으니 만든 것은 마땅히 스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되느니라.
승성과 사물이 함께 하고 구나(求那:原資)와는 차별된다고 말하나 작(作)과 소작(所作)은 갖가지라 변이(變異)함을 얻을 수 없느니라.
수은(水銀)이 청정하여 먼지와 때가 능히 더럽히지 못하듯 장식(藏識)이 청정함도 또한 그러하여 중생이 의지하는 바이니라.
흥거(興渠)와 파와 소금의 짠맛과 태에 아기 숨었듯이 종자도 또한 이와 같은데 어찌 생기지 않았다 하겠는가.
같은 성품과 다른 성품 함께하고 함께하지 아니함 또한 그러해 취할 바가 있는 것이 아니요 무위도 아니요, 유위도 아니니라.
말 가운데는 소의 성품 없고 온(蘊) 가운데 나도 또한 그러하니 설한 유위(有爲)ㆍ무위(無爲) 모두 다 자성 없느니라.
이교(理敎) 등으로 ‘나’를 찾으나 이것은 허망한 때[垢]의 악견(惡見)이니라. 깨닫지 못하므로 있다고 말하나 오직 허망하게 취한 것이고 다른 것 없느니라.
모든 온 가운데 나란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모두 성립하지 않아서 그 과실이 뚜렷하건만 허망하게 분별하는 자는 깨닫지 못하느니라.
수경(水鏡)과 눈에 갖가지 그림자 나타나나 같다거나 다르다는 성품 멀리 떠나듯 온 가운데 ‘나’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수행자 선정 닦아 견제(見諦)와 도(道)로써 이 세 가지 부지런히 닦으면 모든 악견에서 해탈하리라.
마치 틈 구멍 속에는 번갯불이 속히 사라지듯이 법이 옮겨 변함도 또한 그러하니 마땅히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
어리석은 범부는 마음 미혹하여 열반이 있다 없다고 취한 만약 성인의 견해 얻으면 여실히 능히 깨치리라.
마땅히 변이(變異)하는 법 알아 생멸 멀리 떠나고 또한 유ㆍ무도 떠나고 또 능상(能相)과 소상(所相)도 여의느니라.
마땅히 변이법을 알아 외도의 논도 멀리 여의고 또한 이름과 모양도 떠나고 안에 내가 있다는 견해도 멸하느니라.
모든 하늘에서는 몸의 감촉 즐기고 지옥에는 고통이 몸을 괴롭히나니 만약 그 중유(中有) 없다면 모든 식(識)이 생기지 못하리라.
마땅히 알라. 모든 세계에 갖가지 중생의 몸 태(胎)ㆍ난(卵)ㆍ습(濕)ㆍ화(化) 등으로 태어남은 모든 중유(中有)를 따라서 생기느니라.
성인이 가르치는 바른 이치를 떠나 비록 멸하고자 하여도 도로 증가하나니 이것이 외도의 미친 말이니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말하지 말라.
먼저 마땅히 ‘나’와 분별하여 모든 것을 취하는 뜻을 결단코 밝힘이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으니 분별하여 뜻을 결정하여 밝힐 수 없느니라.
내가 육안(肉眼)을 떠나 천안(天眼)과 혜안(慧眼)으로써 모든 중생의 몸을 보면 모든 행의 모든 온을 떠났음이니라.
모든 행을 관찰하여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해탈한 자와 해탈하지 못한 자 하늘 가운데 머무는 자 있느니라.
모든 중생 받는 몸 오직 나만이 능히 통달하여 아나니 세간에서 아는 바를 뛰어넘어서 헤아려 분별하는 경계는 아니니라.
무아(無我)인데 마음이 생긴다면 이 마음은 어떻게 생기며 어찌 마음이 생긴다고 말하지 않고 강과 등불 종자 같다고 하겠는가.
만약 무명(無明) 등이 없다면 심식(心識)은 곧 생기지 못하고 무명을 떠나면 식도 없는데 어떻게 상속함이 생기겠는가.
허망하게 분별하는 자 말하는 것 3세(世)와 세간 아님과 제5의 세간은 설할 수 없나니 모든 부처님이 아실 바이니라.
제행(諸行:有爲法)을 취하고 머무는 것 그것 또한 지혜의 인(因)이 되는데 마땅히 지혜라고 말하지 말고 제행이라 이름하여야 하리라.
이 인연이 있는 까닭에 이 법 생김이 있으며 달리 작자(作者)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내가 설한 바이니라.
바람이 불을 생(生)할 수 없으나 불을 맹렬히 타게 하고 또 바람으로 말미암아 꺼지기도 하거늘 어찌 ‘나’에 비유하겠는가.
설한 바의 유위와 무위는 모두 모든 취착함을 떠났는데 어찌 어리석게 분별하여 불로써 나를 성립시키려 하는가.
모든 인연의 전전력(展轉力) 때문에 능히 불이 생기나 만약 분별함이 불과 같다면 ‘나’란 것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뜻 등이 인이 되는 까닭에 모든 온(蘊)과 처(處) 모아지고 무아의 주인[商主]은 항상 마음과 함께 일어나느니라.
이 둘(商主와 마음)은 항상 태양 같아 능작과 소작 멀리 떠나 불로써 능히 성립(설명)할 수 없나니 허망하게 분별하는 자는 알지 못하리라.
중생심과 열반의 본성은 항상 청정하나 무시이래의 잘못된 습기에 물들었을 뿐 허공과 같아 다름이 없느니라.
상와(象臥) 등의 외도 모든 견해에 어지럽게 오염되고 의식(意識)에 덮여 불[火] 등을 분별하여 청정하다 하느니라.
만약 실다운 견해를 얻는다면 곧 능히 번뇌 끊고 삿된 많은 비유 버리고 성인 행하는 곳에 이르리라.
지혜와 아는 것의 차별을 각각 다르게 분별함을 지혜 없는 이는 알지 못하는데 마땅히 말하지 아니할 것을 말하였느니라.
마치 어리석은 이가 다른 재목으로 전단향[栴檀]이나 침수향[沈水] 만듦과 같이, 허망한 분별과 참된 지혜도 또다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식사를 마치고 발우 가지고 돌아와 깨끗이 씻고 청정하게 하며 양치질로 입 안의 남은 냄새 씻으며 마땅히 이와 같이 닦을지니라.
만약 이 법문(法門)에서 이치대로 바르게 사유하며 청정한 믿음으로 분별 여의면 가장 훌륭한 선정 이루어 집착 여의고 옳은[義] 데 처하여 금빛 법의 등불 이루리라.
유ㆍ무를 분별하고 또 모든 나쁜 견해의 그물과 3독(毒) 등 모두 떠나면 부처님 손으로 관정(灌頂)해 주시리라.
외도는 능작(能作:창조주)에 집착하고 미혹한 방법과 무인(無因)과 연기에 놀라고 두려워하며 단멸하고 성성(聖性:無漏智의 종자)이 없다고 하느니라.
변하여 모든 과보 일어나서 말하자면 모든 식(識)과 뜻[意]이니 뜻은 아뢰야에서 생기고 식은 말나(末那:7식)에 의지하여 일어나느니라.
아뢰야식이 모든 마음 일으킴이 바다에 파랑 일어나듯이 습기가 인(因)이 되어 인연 따라 생기(生起)하느니라.
찰나에 서로 쇠고리처럼 얽혀 자기 마음의 경계를 취하여 갖가지 모든 형상과 뜻의 뿌리[意根] 등 근과 식이 생기느니라.
무시이래의 악습으로 말미암아 밖의 경계와 같이 생기나 보이는 것은 오직 자기 마음일 뿐 외도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것을 인(因)하고 저것을 연(緣)하여 다른 식이 생기니 이 까닭으로 모든 견해 일어나 생사에 유전하느니라.
모든 법은 환ㆍ꿈물속의 달ㆍ아지랑이ㆍ건달바성 같나니 마땅히 알라. 일체법은 오직 자기가 분별한 것임을.
바른 지혜와 진여에 의지하여 모든 삼매 일어나니 여환(如幻)삼매와 수능엄(首楞嚴)삼매 이와 같은 등의 차별이 있느니라.
모든 보살지에 들어가 자재와 신통과 여환지(如幻智) 성취하면 모든 부처님께서 그 이마에 관정해 주시리라.
세간 허망한 것임을 보면 이때 마음이 전의(轉依:보리열반의 二果)하여 환희지(歡喜地)를 얻고 모든 지(地)와 불지(佛地)에 이르느니라.
이미 전의(轉依)를 얻고 나면 온갖 색의 마니보배처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물속의 달같이 응하여 나타나느니라.
유ㆍ무의 견해와 구(俱:有而無)ㆍ불구(不俱:不有而不無)를 버리고 여의면 2승(乘)의 행을 넘고 또 제7지(地)도 넘느니라.
자기 안으로 현재 증득한 법[現證法]을 지(地)마다 닦아서 모든 외도를 멀리 여의고 마땅히 대승을 설하리라.
해탈 법문 설하니 토끼뿔ㆍ마니 보배 같음이니라. 분별 버리고 떠나 죽음과 변하여 멸함[遷滅] 여의리라.
가르침[敎]을 이치[理]로 연유하여 이루고 이치는 가르침을 연유하여 나타나나니 마땅히 이 교(敎)ㆍ리(理)에 의지하고 다시 다른 분별하지 말지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