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世 이흘(李忔)/국당공후 문정공파
[문과]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丁酉) 중시(重試) 을과(乙科) 1[亞元]위(2등/5명)/합격연령 30세
[문과]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위(22등/34명)/합격연령 24세
[생원시]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24위(54등/100명)/합격연령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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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선조 1)∼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상중(尙中), 호는 오계(梧溪). 설정(雪汀)· 은신(殷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흥(興)이고,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從六品의 무관직) 천일(天一)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염(濂)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학유(學諭-성균관의 從九品)가 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假注書-승정원의 正七品)로 왕비를 해주에 호종하였다. 1594년 홍문관(弘文館-正三品衙門)에 등용되고 이듬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正九品)· 저작(著作-正八品)· 박사博士-正七品) 등을 거쳐 전적(典籍-성균관의正六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사헌부의 正五品), 문학(文學-세자시강원의 正五品)을 거쳐 공조정랑(工曹正郞-正五品)이 되었다. 그 해 왜적이 재침하자, 명나라 말에 능통해 명장(明將) 진우충(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치는데 공을 세웠다. 그 뒤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正五品을 겸하고, 다시 형조정랑(刑曹正郞-正五品)이 되었다.
이어 보령현령(保寧縣令-從五品)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을 당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거쳐 배천군수(白川郡守-從四品) 때에 관에서 봄에 백성들에게 관곡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10배를 거두어들이는 악습을 폐지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장단부사(長湍府使-從三品), 1621년(광해군 13) 종부시정(宗簿寺正-正三品 당하관)을 거쳐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지제교(知製敎)가 되었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였다.
1629년(인조 7)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배를 타고 명나라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윤안국은 익사하고 그만 홀로 살아서 하표(賀表 : 명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조선에서 올리는 축하의 글)와 변무주문(辨誣奏文 : 명나라에서 오해하는 일을 바로잡도록 변론하는 글)을 전달한 뒤 그 곳 옥하관(玉河館)에서 쓸쓸히 일기를 마쳤다.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從一品)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저서로는 『조천일기(朝天日記)』·『오계문집』이 있다. 묘(墓)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교하리에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大東野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8,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