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은 후 우리는 화성 제암리교회로 향했다. 제암리교회는 3.1운동 당시 수원 화성 인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제암리교회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고 일제가 집단 학살한 곳이다.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리던 스코필드 선교사는 그 사실을 듣고 현장에 가서 사진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밝힌 분이다. 담당자 설명을 듣는 동안 친구들은 진지하였다. 사진과 설명이 아마 친구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으리라!!
2,000년이 되면서 일본 기독인들은 큰 결심을 한다.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일본의 기독인들이 제암리를 방문하여 회개와 화해의 예배를 한국 기독인들과 함께 드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모은 헌금으로 제암리 기념교회를 봉헌하였다.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아베와 같은 이들이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발톱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점심은 화성 신도시 돈까스 뷔페로 향했다. 방금 튀긴 돈까스가 일품이었다. 녀석들은 누가 많이 먹나 내기를 했다. 많이도 먹었다. 배불리 먹고 차 안에서는 잠을 청했다. 원래는 전라도 ‘ㄱ자교회’로 유명한 김제 금산교회에 가서 조덕상 이자익 장로님 이야기를 만날 계획이었으나 대전에서 차를 멈추었다. 때도 저녁시간이었다. 대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이지연 전도사를 만났다.
이지연 전도사는 대학동기이다. 학창시절부터 벧엘의집이며 서울 새빛교회 꿈이있는푸른학교에서 함께 사역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소아당료로 고생했다. 실명위기도 있었고 네 번째 발가락은 당료 때문에 현재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항상 밝다. 그리고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항상 웃음을 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신앙이다. 벧엘의집 노숙인 아저씨들이나 서울 꿈이 있는 푸른학교 아이들도 이지연 전도사만 가면 항상 웃고 행복했다. 카페에 가서 이지연 전도사 간증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송익찬 교수님 충대병원 혈액암 전공의사다. 둘이 결혼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이야기도 해달라고 했다.
송익찬 교수가 퇴근하고 카페에 왔다. 카페 인근 고기집에 가서 저녁으로 소고기를 구워주었다. 녀석들 얼마나 잘 먹는지. 언제 돈까스 뷔페를 다녀왔는지 싶다. 사실 늦은 점심을 먹은 지 3시간이 안 된 시간이었다. 얼마나 과식을 했는지 호세는 나중에 간증 시간에 급하게 나가더니 토하고 들어왔다. 유럽에 갔을 때도 친구들은 호세를 놀렸다. 많이 먹지 말라고 또 토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평신도인 송익찬 교수의 말씀이 더 은혜가 된다. 친구들도 훨씬 집중도 잘하고 잘 듣는다. 나는 우스게 소리로
“목사보다 평신도가 낫구먼.”
이렇게 이야기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어쩌면 평신도 사역의 시대가 아닐까?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성찬식과 성경을 해방했다면 지금 시기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사역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다. 말씀과 사역이 성직자들의 고유물로만 여겨졌으나 이제 말씀 연구와 공부 그리고 사역을 평신도와 함께 공유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송익찬 교수의 간증은 대성공이었다. 친구들은 다른 곳보다 그리고 역사적 누구를 만난 것보다 그를 만난 것을 더욱 좋아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의대교수가 되고 또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신앙 위에 있는 것이 감동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둘째 날도 마무리했다. 아니 그건 나와 박 권사님 착각이었다.
잠자리에 든 것은 우리 둘이었다. 녀석들은 이 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자는 틈에 녀석들은 신나게 자신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핸드폰이 있고 컴퓨터가 있는데 무엇이 부러우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