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msIiyCRf4hA
영남대학교의 교정을 떠나던 날,
삼십오 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뒤를 돌아보는 듯했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던 길,
여름이면 짙은 녹음 아래로 학생들의 웃음이 번지던 길,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강의실로 향하던 길.
그 길들은 어느새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은 하나의 문이 닫히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앞에는 끝보다 넓은 여백이 먼저 펼쳐졌습니다.
그 여백 속에서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조용히 되살아났습니다.
젊은 날 유학 시절, 낯선 식탁 위에서 스쳐 지나갔던 와인 한 잔의 빛과 향.
당시에는 그것이 다만 이국의 풍경 중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그 기억은 문득 내 삶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 스쿨 문을 두드렸습니다.
낯선 교실, 낯선 언어, 수많은 이름과 품종들 앞에서 처음에는 조금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잔 속에 담긴 붉은 빛을 들여다볼수록,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병의 와인 안에는 한 해의 햇빛과 비가 들어 있고,
포도밭을 스쳐 간 바람과 흙의 결이 스며 있습니다.
그 땅을 오래 지켜 온 사람들의 손길,
해마다 다른 기후를 견디며 포도를 돌본 농부의 기다림,
마침내 어두운 저장고에서 시간을 견뎌 낸 술의 침묵까지 들어 있습니다.
와인은 자연과 인간, 과학과 예술, 노동과 기다림이 함께 빚어내는 하나의 긴 문장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별만큼 많은 와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한 병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품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때의 햇빛과 비, 절제된 손길,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서두른 포도는 깊은 향을 내지 못하고,
시간을 견디지 못한 와인은 제 빛깔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 시간을 바라보며 나는 늦게야 한 문장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이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와인이다"라고 했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와인 자체를 말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익어 가는 것들,
기다림 끝에 비로소 제 향기를 드러내는 삶의 비밀을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이 끝을 향해 닳아 가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오래 살아낸 날들 속에서 경험은 천천히 가라앉고,
기쁨과 상처는 서로를 녹이며,
한 사람의 품격은 조금씩 깊어집니다.
젊음이 앞을 향해 달리는 계절이라면,
노년은 지나온 시간을 향기로 바꾸는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잔 속에 붉게 차오르는 와인처럼,
묵묵히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포도나무처럼,
우리도 여전히 익어 갈 수 있습니다.
배움은 젊은 날에만 허락된 특권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끝까지 건네는 초대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새로운 문 앞에서 망설이지 마십시오.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아직 살아갈 이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배움이 계속되는 한,
우리 삶의 향기는
시간 속에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참고*
1. Evergreen Wisdom - 정시련 교수- https://sites.google.com/view/evergreen-wisdom/%EC%A0%95%EC%8B%9C%EB%A0%A8-%EA%B5%90%EC%88%98
2.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xKaB3FfOud3zDquyyzmwDUzxa3UVXdfh&si=WtDmrkFczBgex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