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結)-문순공(文純公) 후조당(後彫堂) 전계문(傳係文)의효용성(效用性)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전계문(傳係文)이란 것은 예조(禮曹) 입안(立案)의 공문(公文)인 예사(禮斜)와는 달리 그 본질이 상속(相續) 문서이기 때문에 입후(立後) 혹은 계후(繼後)를 법적으로 완전하게 보장받을 수는 없는 바였다.
그러나 후조당 재세(在世)에도 계후(繼後) 입양(入養)의 방법으로 예조 입안의 예사를 통하지 아니한 다른 방법도 분명히 있었다. 예조를 통하는 계후는 그야말로 법적으로 특별한 필요성을 가진 사람이 특별한 경우로 추구(追究)함이었으므로 조선 500년에 예조를 또한 계후의 결과를 모아 편찬한 계후등록(繼後謄錄)이 겨우 문집(文集) 여나믄 권(卷) 분량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형제에서 유일자(唯一子)일 때에는 무후(無後)한 쪽을 조부(祖父)에게 반부(班祔)하지 아니하고 소위 형제일사(兄弟一嗣) 양고동봉일묘(兩考同奉一廟)로 연안정위(連安正位)하는 일, 곧 양가일자(兩家一子)로 후사를 해결토록 한 바도 당시에 너무나 흔하였다. 곧 족보(族譜)의 간행, 제사상속(祭祀相續) 등 가법(家法) 내지는 문의(門議)를 통하여서 등 얼마든지 다른 법도에 의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사를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빌미로 근시재가 문순공의 후사(後嗣)인 것을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말이 안 된다.
한 가지 비근(卑近)한 예로 무후(無後)한 선조(先祖)가 자신의 후사(後嗣)를 정하는 일이 예조(禮曹)의 입안(立案)은커녕 유언(遺言) 하나로서 처리한 경우를 실록(實錄)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성종실록(成宗實錄) 10년(1479, 己亥, 成化15년) 8월 11일자 기사로 임금이 역대 정승(政丞)을 불러 한성윤(漢城尹)을 지낸 신효창(申孝昌)의 장자(長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신자근(申自謹)에게 첩자(妾子)뿐이라 후손들 중 현명한 자를 골라 후사를 세우도록 유언(遺言)하고 죽었으므로 그 셋째 아들 신자수(申自守)의 장손(長孫)인 신승민(申承閔)으로 후사를 정하는 게 좋겠다는 것을 묘당(廟堂)이 논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묘당의 논의가 그러함은 그 증조부 신효창과 사촌대부(四寸大父=從祖父) 신자근의 유언이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그 기사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종 107권, 10년(1479 기해/명 성화(成化) 15년) 8월 11일(갑오) 1번째기사
역대 정승과 대신·대간 등을 불러 신승민이 신효창을 봉사하는 것을 의논케 하다
증경 정승(曾經政丞),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의 당상관(堂上官), 대간(臺諫)을 불러 신승민(申承閔)의 봉사(奉祀)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윤사흔(尹士昕)·한계희(韓繼禧)·박중선(朴仲善)·어유소(魚有沼)·권감(權瑊)·이극증(李克增)·이철견(李鐵堅)·이승소(李承召)·윤계겸(尹繼謙)·이숙기(李淑琦)·이극돈(李克墩)·이극균(李克均)·여자신(呂自新)·이육(李陸)·한천손(韓千孫)·이길보(李吉甫)·박안성(朴安性)·배맹후(裵孟厚)는 의논하기를,
“적장(嫡長)을 세워 봉사(奉祀)하게 함은 고금(古今)의 통의(通義)이나, 적자(嫡子)가 무후(無後)하면 차자(次子)가 봉사하는 것 또한 《대전(大典)》에 실려 있습니다. 신효창(申孝昌)의 장자(長子) 신자근(申自謹)은 적자(嫡子)가 없고, 단지 첩자(妾子)만 있으나, 차자(次子) 신자경(申自敬)은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으니, 신효창의 뒤를 계승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신승민(申承閔)은 증조(曾祖)인 신효창과 사촌 조부[四寸大父]인 신자근(申自謹)의 유서(遺書)에 의거하여 신효창의 뒤를 계승하려고 합니다. 그 신효창의 유서(遺書) 안에 을미년 에는 아들 신자근(申自謹)으로 하여금 막내아들 신자수(申自守)를 수양(收養)하여 뒤를 계승하도록 하고, 갑인년 에는 차자(次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 신윤동(申允童)으로 후사를 삼게 하였으며, 신윤동(申允童)이 죽은 뒤인 기미년에는 여러 손자 중에서 어진 자를 택하여 후사를 삼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말미암아 보면, 신효창이 처음에는 비록 뜻을 신자수(申自守)에게 두었더라도 그가 죽어서는 자손(子孫) 가운데 어진 자로써 후사를 삼고자 하였음이 바로 그 본의(本意)이었습니다. 신자근(申自謹)은 아비의 뜻으로 인하여 아비가 부탁한 신자수의 아들 신윤관(申允寬)으로 후사를 삼으려고 하니, 정법(情法)은 옳은 것 같으나 다만 첩자(妾子)가 있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자근은 그 첩자(妾子)가 봉사(奉祀)하고, 신자경은 그 아들이 봉사하며, 신자수는 또 그 아들 신윤보(申允甫)가 봉사하고, 조부(祖父) 신효창(申孝昌)은 손자 신윤관이 봉사합니다. 그렇다면 신효창은 아들이 없는 게 되고, 신윤관은 아비가 없는 게 되니, 한갓 소목(昭穆)의 서차(序次)를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또한 정법(情法)에도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이런 이치는 단연코 없습니다. 신효창의 뜻은 자손 가운데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를 삼으려고 하였는데, 신승민(申承閔)과 신종년(申從年)의 현부(賢否)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현부를 알지 못하고 또 소목(昭穆)을 어기었으니, 신종년을 맏이[長]로 하여 봉사(奉祀)할 것이며, 신윤관(申允寬)은 아비와 이조(禰祖) 버리었으므로, 그 시비 득실(是非得失)은 요연(瞭然)합니다. 더구나 유서(遺書)란 것도 그 집의 난명(亂命)이 아닙니까? 또 그 증거로 삼은 조근(趙瑾)·김견수(金堅壽)의 일은 이와 다릅니다. 조근의 아비 조말생(趙末生)과 김견수의 아비 김연지(金連枝)는 모두 장자(長子)의 손(孫)으로써 봉사(奉祀)할 수가 없게 되자, 이를 논파(論破)하는 글을 손수 써서 바로 조근(趙瑾)·김견수(金堅壽)로 후사를 삼고, 그 아들로 아비를 계승하고 아비로 할아비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이는 이치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효창(申孝昌)이 한 사람을 분명하게 가리켜서 후사를 삼지 못한 것과는 같지 않고, 또 신윤관(申允寬)이 할아비를 아비로 삼은 것과도 같지 않으니, 신효창의 봉사(奉祀)는 《예전(禮典)》에 의거하여, 차자(次子) 신자경(申自敬)의 장손(長孫)인 신종년(申從年)으로 후사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맏이[長]로써 적사(嫡嗣)를 세우는 것은 비록 만세(萬世)의 없앨 수 없는 법(法)입니다. 그러나 유서(遺書)가 있으므로 유서(遺書)를 따름이 진실로 《대전(大典)》의 법이 됩니다. 신효창(申孝昌)이 유서(遺書)를 남긴 뒤에 신자근(申自謹)·신자수(申自守)가 모두 아비의 뜻을 받들어 신윤관(申允寬)에게까지 전해 왔고, 신승민(申承閔)으로 하여금 그 사손(祀孫)을 세우게 한 것이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빼앗아서 다른 데에 주면 조선(祖先)의 뜻이 아니니, 진실로 정리(情理)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또 조근(趙瑾)·김견수(金堅壽)의 일은 이미 정원(情願)에 따른 것이므로, 일국(一國)의 법을 나누어 둘로 만들 수 없는데, 하물며 세 차례나 결정(決定)함이 모두 당대(當代)의 일이 아닙니까? 분운(紛紜)하게 갑자기 고치는 것은 특히 미편(未便)하니 그전대로 신승민(申承閔)이 후사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07권 7장 A면
※ 乙未-태종 15년, 1415., 甲寅-세종 16년, 1434., 己未-세종 21. 1439., 소목(昭穆)-종묘(宗廟)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 이조(禰祖)-아버지와 조상을 모신 사당., 난명(亂命)-거의 죽게 되어 정신이 혼미할 때에 하는 유언.
그러기에 후조당은 당신의 형제에게서 오직 일자(一子)이라 아우 읍청정(挹淸亭)의 후사를 차마 끊어지게 할 수가 없어서 일부러 예사를 마련함이 없이 당신의 글에 더하여 부인의 공함(公緘) 사촌 아우들의 증필(證筆) 초사(招辭) 등을 구비(具備)한 후 관부(官府)의 확인을 받아 입안(立案)으로 성급(成給) 받은 관부문서(官府文書)인 전계문을 통하는 일종 편법(便法)으로 종사(宗事)를 의탁(依託)하였다. 곧 전계문 가운데에 국법이 가장 손쉽게 계후를 허용하는 바인 삼세(三歲) 전(前) 수양(收養) 사실, 모부인(母夫人) 조씨(曺氏)가 아들 삼아 국양(鞠養)토록 한 하명(下命), 유산(遺産)과 함께 분명하게 막중 종사(宗祀)를 의탁한 내용, 재주(財主)이신 당신 내외를 분명하게 ‘양부(養父), 양모(養母)’로 밝힌 점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당시 종중(宗中)의 사정에서 후조당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는 상위(上位)의 사손(使孫)으로 아우 읍청정, 조카(姪子) 근시재뿐이어서 기타의 친족으로서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후조당으로서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전계문만을 통한 종통(宗統)의 승계(承繼)를 충분히 고려할 수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곧 법적으로 종통의 문제를 두고 송사(訟事)를 제기하거나 시비를 할 사람이 없는 한(限) 전계문만으로도 후조당과 근시재 간(間) 종계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조(父祖)들께옵서는 예안파(禮安派) 종파(宗派) 후손들에게 가르쳐 가로되 주저없이 ‘후조당의 자손’으로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나 혹 어떤이는 후조당(後彫堂)의 “전계문(傳係文)에 대하여 면밀히 살펴보아도 그 어느 구절에서도 근시재(近始齋)가 후조당(後彫堂)께 입후(立後)하였다는 말이 없으며 그렇게 확대 해석할 구절도 없다”라고 그야말로 미물(微物)이 웃을 말을 하는데 말이 되지 아니한다. 삼세(三歲) 전(前) 수양(收養) 사실과 모부인(母夫人)의 하명(下命) 등등 도대체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지 모를 일이다. 말 그대로 확대 해석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수양 입후를 명증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혹 어떤이는 지금까지도 종택에 엄존하는 정해년입지(丁亥年立旨)를 가리켜서까지 종계변무(宗系辨誣) 연관의 양자(養子) 문서가 아니라 하였는데, 절대로 그렇지 아니하다. 정해년입지에서 예안현(禮安縣)은 “예전에 노미를 삼세전 수양하여 가사(家舍) 전민(田民)을 전계한 사실을 입안함[向前老眉乙,三歲前收養,家舍田民傳係成文的只乎等用良-밑줄 부분은 이두]”이라 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수양과 전계”를 함께 확인하고 있다. 그 입지가 단순히 상속 연관 일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근시재가 후조당을 양부(養父)로 기록한 것을 확인하고자 하되 분재(分財)와는 전혀 무관한 점련문서(粘連文書)로 ‘가전초(家傳草)’ 기타의 문서가 섞여 들어갈 리가 없는 법이다.
여기서 후조당(後彫堂)께서 근시재(近始齋)께 남기신 바와 같은 전계문(傳係文)으로써 과연 계후사(繼後事)가 가능한가, 과연 법적(法的)인 효력을 발생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당사자인 형제 사이가 우애(友愛)롭고 위아래 대(代) 상속이 가능한 범위의 친속(親屬-친족)인 사손(使孫)들에서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다면 국사(國事)가 아닌 가사(家事)요 문사(門事)이므로 충분히 가능하며 아무런 문제도 발생할 소지가 없었다.
다만 그 일에 대하여 후일에 만약 의법(依法)토록 요구하거나 송사(訟事)할 사람이 나타나 시비(是非)를 일으킬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곧 국법이 요구하는 계후사의 법적 효력을 위하여 생양가의 부모가 예조(禮曹)에 소지(所志)를 올려 공권문서(公券文書)로 입안(立案)한 예사(禮斜)를 받아두지 못하였을 때는 합법적인 입후를 주장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문순공(文純公)의 시호(諡號) 연관 시비(是非) 때에 어떤 족인(族人)이 문순공 부자 사이의 후사(後嗣) 관계를 부정하는 사례가 있었다거나 그 유명하였던 권송암(權松巖-好文)의 종계사(宗系事) 송사에서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보기도 한다.
위처럼 전계 내지 계후사가 발생할 당시에 공문(公文)을 구비하지 않아 후일에 다툼이 일어난다면 부득이 관가(官家)에다 다시 소지(所志)를 올려 예사(禮斜)가 아닌 다른 방식 내지는 절차에 따라 판결을 얻은 결과의 적법한 입안, 입지를 갖추어야 했다. 후조당의 경우 앞에서 본 바 1827년(순조 27)의 예조(禮曹)에 소지(所志)를 올려 판결을 받은 결과와 정해년입지(丁亥年立旨)가 바로 그런 예(例)가 된다.
한 마디로 정리하여 비록 예조 입안의 예사(禮斜)가 아니더라도 나라가 계후 입양을 인정, 허용, 보장하는 그런 법도(法度)가 훌륭히 있었다. 그러한 사실, 실제를 우리 예안파 광김 후손은 정해년에 예조로부터 받은 판결 결과인 제사(題辭)가 웅변(雄辯)하는 바를 통하여 확인을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그 제사를 여기에 옮겨 적고자 한다.
『이 집안의 문적(文蹟)을 살펴보니 이미 조부인(曺夫人)의 정륜(定倫)을 위한 거조(擧措)가 있었고 양자(養子)를 들인 처지(處地)를 양부(養父)라 칭하고, 낳은 바의 처지를 생부(生父)라 하고 있는데, 세상에 어찌 계후(繼後)를 하지 않았으면서 양부라 칭하며, 자기 자신에게 계후한 바도 없는데 양부라 칭하며, 자기가 낳은 아들에 대하여 [굳이] 생부라 하는 이가 있으리요. 하물며 퇴계 선생의 서간에서 ‘그 부자’로 일컬었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요새 사람들이 사람의 윤리를 다한다고 해서 그 누구가 선생보다 더한 이가 있으리요. 그러므로 한림공이 문순공의 후사(後嗣)가 된 것은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바꿀 수가 없으리라. 요사이의 밝고 밝은 언설이 모두가 이치에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먹고 잠자는 일을 가지고 어찌 위로 임금의 들으심을 번거롭게 하는가 할 일임.觀此家文蹟,則旣有曺夫人定倫之擧,所後之地則稱養父,所生之地則稱生父,世焉有不繼後而稱養父,向己不繼後而稱養父,向己子而生父者乎.況退陶先生之書,稱其父子者,非止一再,則今人雖自謂盡人之倫,孰有加於先生乎,然則翰林公之爲文純嗣,聖人復起不能易.今此曉曉之說,皆不合理之說,自當寢息,何之於上煩天聽乎向事.』
후조당의 종계 문제는 전계문만으로도 수백 년 아무런 시비가 없다가 이른바 문순시비와 연관으로 갑자기 무함(誣陷)하는 일이 불거진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운암공(雲巖公)의 장자로 종자(宗子)인 후조당이 이제 더는 자식을 둘 희망을 포기해야 할 즈음인 50대가 되었을 때 종사(宗嗣)를 물려 줄 후사(後嗣)를 정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막중대사인 것이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종자(宗子)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더하여 결코 가볍지 아니한 문제가 세전지물(世傳之物)인 막대한 가산(家産)을 종가로 고스란히 영전(永傳)할 임무 또한 컸음인데, 그래서 종통(宗統)을 전하는 최선의 길은 조카인 근시재를 수양(收養)하여 후사를 삼는 방법이었다. 근시재가 생후 칠일(七日)에 모친을 여의자 태정부인(太貞夫人) 조씨(曹氏)가 거두어 아들로 삼으라 한 명(命)을 받들어 국양(鞠養)하였고, 삼세전(三歲前) 수양(收養)이라 국법(國法)으로 계후(繼後)가 가능하게 되어 있는 법률에 따라 근시재를 후사로 세우는 데 문제될 바는 전혀 없었다.
혹자는 형제 중 아우에게만 유일자(有一子)인데 그 아들을 형에게 입후할 경우 본생부(本生父)의 대(代)가 끊어지므로 당시의 국법이 허용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아니했다. 매원공(梅園公)이 후사가 없어서 동생제(同生弟) 계애(溪厓) 공의 제3자 묵재(黙齋)를 입양하였는데, 묵재공이 또한 후사가 없게 되자 동생제 휘 선(石+先) 공의 독생자(獨生子) 과헌(果軒)을 입양하여 종손(宗孫)으로 삼았으며, 그 일에 예조(禮曹)의 예사(禮斜)가 내려 엄존(儼存)하는 바를 오천고문서(烏川古文書)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후조당이 만약 대종손(大宗孫)인 자신의 종통(宗統)을 위하여 예조를 통하여 근시재를 계후한다면 필연적으로 읍청정은 절손(絶孫)이 될 수밖에 없다. 명목(名目)으로만 근시재를 입양하고 가장 중요한 일로 국법에 따른 공문(公文)인 예사(禮斜)를 구비할 일을 일부러 피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후조당은 근시재를 입후하되 법률적으로 뒷받침하는 공문까지 구비하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곧 종자(宗子)로서의 당신의 처지를 위하여 결국 아우의 후사를 끊으며 본생부자(本生父子) 사이의 천륜(天倫)과 은의(恩義)가 끊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종통을 전할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국법이 확실히 보장하는 예조(禮曹)의 예사(禮斜)를 통하지 아니하고 편법(便法)인 전계문(傳係文)을 관부문서(官府文書)인 입안(立案)으로 만들어 수양자(收養子)임을 확인받게 되었는데, 그러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 등에 대하여는 이미 필자가 평생을 통한 많은 글을 통하여 충분히 밝힌 바가 있었다.
그러한 모색의 결과로 결론에 도달한 방법이 법률적인 입후를 위한 공문을 바라지 않고 가산을 전계하되 그 전계문에다 수양(收養)의 사실 등을 밝히는 방법이었다. 원문의 내용 중에 이두(吏讀)가 섞인 관부(官府) 문서로 성급(成給)받은 전계문으로 유산을 전하되 그 내용 속에서 분명하게 당신 내외(內外)를 ‘양부(養父), 양모(養母)’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부조(父祖)들께서 전하신 바에 따르면 그렇게 작성된 전계문으로서도 후조당의 종통이 훌륭히 이어져 수백 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융경(隆慶) 원년(1567, 明宗 22, 丁卯)으로부터 시작하여 1825년 후조당에게 문순(文純)의 시명(諡命)이 내리자 1826년부터 소위 ‘문순시비’가 일어났고, 그 때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이씨(李氏)들에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한 김정교(金庭敎) 무리들이 후조당의 종계를 무함(誣陷)하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260여 년간 실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예사를 받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서자(庶子)와 계후자(繼後子)가 30여 년 동안 종통을 다툰 송사가 후조당의 고향인 예안현, 안동부를 포함하여 가까운 곳에서 이미 앞서 있었다. 곧 1620년(仁祖 7, 己巳)부터 1650년(孝宗 元年, 庚寅)에 이르기까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 中宗 27-1587, 宣祖 20)의 첩자(妾子) 희일(希馹)과 계후자 행가(行可)의 아들 중정(中正) 사이에서 벌어진 종통 다툰 송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었다. 그 송사는 송암에게 오직 첩자가 있었는데 그가 대(代)를 잇지 못하도록 형의 아들 행가(行可)를 입후하여 글로써 후사(後事)를 의탁하되 예사를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빌미로 송암 사후 30년도 넘어 희일이 송사를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결국은 문순공의 시호 연관 시비의 과정에서 같은 소란이 발생한 셈인데, 우리들 후손이 문순공께서 근시재를 3세 전 수양하시어 종사를 의탁하였으되 이른바 예사(禮斜)의 국법(國法)이 아니라 형제일사(兄弟一嗣)가 가능하도록 전계(傳係)라는 편법(便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계후의 입양과 수양이 가능하도록 처결하였다는 굳게 믿으면 그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후조당의 자손이되 또한 읍청정의 후손으로 떳떳한 것이다. 종파(宗派) 아닌 사람들이 언필칭(言必稱) 그 방법은 상속(相續)이지 계후(繼後)가 아니요, 국법이 허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는 주장에 굳이 괘념(掛念)할 필요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