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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광해군
● 본명: 이혼, 선조의 둘째아들
● 출생-사망:1575 ~ 1641
● 재위기간: 1608~1623(15년 1개월)
● 주요 업적: 왜란으로 인한 전국적인 피해 수습,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과 이와 대립하는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 정책 실시, 북인 세력(특히 대북파) 등용, (양어머니)인목대비 폐위, 영창대군 살해 등 폐모살제(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의 죄로 인조반정 때 폐위되면서 제대로 된 시호와 묘호를 받지 못함.
[제15대 광해군일기]
[1.전란이 가져다준 왕위]
선조는 아들이 14명이나 되었지만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은 없었다. 그녀가왕비에 책봉된 이후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없이 서자들 중에서세자를 선택해야 했는데 서자가 너무 많아 이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선조는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던지정비 의인왕후가 와병중이라 더 이상 적자를 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세자책봉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나이가 40세를 넘기자 대신들은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루어서는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40세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때문에 혹여라도 선조가 미처 세자를 결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불시에 죽는다면조정이 혼란에 휩싸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혼란을 미연에방지하기 위해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문제를 거론했는데, 이 문제를 가장 먼저내놓은 사람은 좌의정 정철이었다.
1591년, 좌의정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사헌 이해수, 부제학이성중 등과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논의 결과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이 과정에서 음모가 진행되었다. 서인의 거두 정철을 궁지로 몰기 위해 동인의중심 인물인 이산해는 은밀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빈을 찾아가 정철이 광해군을세자로 옹위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한 뒤 인빈과신성군을 모함하여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인빈은당장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인빈을 총애하고 있던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심하게 분개하며 정철을 벼르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세울 것을 주청했다가 선조의 진노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이때 동인인 유성룡과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가세했다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그 후 세자 책봉 문제는 거론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분조(비상사태에 즈음하여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 될 상황에 처해서야 비로소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다.
당시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가는 몸이었기 때문에 후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처지였고, 또한 조정을 분리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해야 되는 입장이어서 평양성에머무를 때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 때 선조의총애를 받던 신성군은 이미 병사하고 없었고,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임금의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 대상에서 제외된상태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자 책봉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다. 세자를 책봉하면명나라에 보고를 해야 했으며, 명에서 고명이 내려와야 정식으로 세자로확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전란 중인 1594년 선조가 윤근수를 명에파견하여 세자 책봉을 주청했지만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거절했다. 때문에 광해군은 비록 왕으로부터 세자로 선임되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불안정한 처지였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분조의 소임을 다하여 조야의 명망을얻게 되었으며, 명의 고명 여하에 관계 없이 모든 대신들은 그를 세자로 받들었다.
그 후 광해군의 계승권은 요지부동한 사실로 인식된 듯하였다. 하지만전란이 끝나고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면서 광해군의 입지는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606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선조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적자가 태어난것이다. 선조는 적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 눈치 빠른 신하들은 선조의 속내를 파악하고 서서히 영창대군을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게다가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몇몇신하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상황이 이쯤 되자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분리되고 말았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재위를 향한 기나긴 여정이 끝난 것이다. 이때가 1608년 2월 2일로 광해군나이 34세였다.
[2.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 정치](1575-1641,재위 기간 1608년 2월-1623년 3월, 15년 1개월, 유배 기간 18년)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공빈김씨는 그가 세 살 때 죽었으며, 임해군은 그의 동복 형제이다. 그의 이름은 혼으로,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분조 체제 아래에서 조정의 일부를 이끌며 소임에 최선을다했고, 선조가 죽던 1608년 2월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초당파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던남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시키고 전란 중에 타버린 궁궐을 창건, 개수하여왕실의 위엄을 살렸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했다.
하지만 왕권 안정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우선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다. 또 선조의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광해군이 임해군을 유배시킨 것은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의 세자 책봉 과정에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서얼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게되자 명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그래서 현장 실사를 위해 사신이파견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하여 그를유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임해군은 왕위를 도둑맞았다면서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녔기 때문에 집권당인 대북파는 이를 그냥 묵과할수 없었던 것이다.
명의 현장 실사로 광해군의 심사는 무적 괴로웠다. 이미 세자 책봉 과정에서광해군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명을 거부했던 명나라였다. 때문에 명에 대한광해군의 감정이 좋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왕위를 계승한이후에도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는 것은 그야말로 조선 조정과 광해군을 무시한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노는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소북파, 그리고 명분론과대명 사대주의를 강조하던 유생들에게로 돌려진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사신을보내어 현장 실사를 한 것은 조선 내부의 친명 세력이 요청한 것이라는 판단을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해군의 분노를 부추킨 것은 대북파 정치인들이었다.그들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들을 제거하게끔 종용했고,광해군은 왕권 안정을 목표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오히려 많은 정적들을 양산해 결국 이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폐위되는지경에 이르게 된다.
1611년에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성균관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소북파 인사 1백여 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나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위에 울타리를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삭직시킨다(위 두 사건은 '광해군의 왕권 위협 세력 제거 과정'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은 물론 이에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아들로 일찍이 임진왜란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으로써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민생 안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조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중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때문이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여진족의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그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양감사에 박엽,만포 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강홍립에게 1만 군사를 주어 응하게 했다. 그러나 부차 싸움에서 명나라가 후금에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투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는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1619년 3월 강홍립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감사 박엽은 강홍립의가족을 모두 하옥시켰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투항한강홍립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며 그의 가족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광해군은 대신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 가족들을 서울로 데리고 오게 해물품을 하사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강홍립의 투항은 사실 광해군의 책략이었다. 즉 명나라에 대해서는 겉으로만협력하는 체하면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았고, 후금에 대해서는 명의 강요에 의해서출병했을 뿐 그들과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의 계책을 폈던 것이다. 강홍립은광해군의 이런 계책을 충실이 이행한 인물이었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있으면서 계속해서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밀서 덕택으로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고, 그렇게파악된 정보에 따라 대책을 세워 후금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고 있었다.이러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론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1609년 일본과 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 외교를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로써임진왜란 이후 악화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벗어날 수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적 정치관은 도성을 옮기는 계획으로도 이어졌다. 당시일반에는 이씨 왕조의 기운이 다해 정씨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문이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이는 민심을 동요시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또한한성이 전란으로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복구 사업에 엄청난
재원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는 민간에 널리 유포된 정씨왕조설을 일소하고임진왜란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도성을 파주의 교하로옮길 것을 결정했다.
광해군이 새로운 도읍지를 교하로 설정한 것은 철저한 실리주의적 판단에따른 것이었다. 교하는 위치적으로 볼 때 임진강을 끼고 있어 물 사정에어려움이 없고 대평야로 둘러싸여 있어 식량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또한 중국과의 해상 교통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도적당했다. 군사적으로 보아도 한성보다 안전한 위치였다.
즉 한성보다 지리적으로북쪽에 있어 일본의 위협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고, 임진강이 가로막고있어 중국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제격이었다. 또한 주위의 산이 낮아 산성으로사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중국과 해상로가 가까워 수군에 의한위협이 있는 곳이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중국은 해상전에 약한 국가였기에그다지 염려할 바가 못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천도 계획은 명에 원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에밀려 연기되다가 결국 시행되지도 못하고, 축성 작업에 동원된 백성들의원성만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 천도 계획은 당시의상황으로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아주 기발한 착상이었다.요컨대 광해군은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외교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병화로 손실된 서적 간행에도 박차를 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을 다시편찬하여 정사 운영의 방향을 확립했고, 실록 보관을 위해 적상산성에 사고를설치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네 곳의 사고를 대신했다. 한편, 이 시대에 허균의(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나와 문학과 의학 부분에 획기적인 발전을이루었다. 1616년에는 류큐로부터 담배가 수입되기도 했다.하지만 광해군의 이런 실리적이고 과단성 있는 정책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고말았다.
그의 15년 재위 기간 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 유지를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인조반정과정은 인조실록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도에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1641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2명의 부인에 자녀도 세자 질과 옹주 1명을 얻었을 뿐이다.능은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에 있다.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 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건 이 같은 명분에는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중립 외교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왕이 무릅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대 치욕을 겪게 된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 등의 왕권 위협 세력들을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아간 부분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정사를 편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태종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죽였고 동복 형제도 유배시켰으며 또한 계모 강씨의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자행하고, 심지어 장자인 양녕이 왕이될 인물이 못된다 하여 폐세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게다가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철저한 심복 정치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는오히려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따라서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란에 불과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조반정을주도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대주의자 내지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그들의 반정이 순수한 구국 의지의발로라기보다는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조반정을 증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생각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단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종은 반정 세력의추대를 받은 경우였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이라고일컫는 사건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었다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정이자 역모였다고말할 수 있다.
[3.광해군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와 광해군의 유배 생활]
광해군이 폐위된 뒤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는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의 표출과 인조 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인목대비와 인조 반정 세력에 대해 종래와 다른 새로운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곳에 두지 않았다.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 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짐작컨데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 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려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윤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윤씨는 한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 정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폐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자신이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또 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오히려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했다고한다. 그래서 조정은 그의 유언에 따라 경기도 남양주의 공빈 김씨 묘 아래쪽오른편에 그를 묻었다. 그리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봉사하도록 하였다.
참고 : 제15대 광해군 가계도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나 조선왕조 제15대왕이 되었으며 1575년에 태어나 164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재위 기간은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15년 1개월이었으며, 인조반정으로 인한 유배 생활의 기간은 18년이었다. 두명의 부인과 자녀는 1남 1녀 였으며
첫번째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와의사이에서 폐세자 질을 낳았으며
두번째 부인 숙의 윤씨와의 사이에 박씨 집안으로출가한 딸이 있었다.
[4.광해군의 정적 제거 과정과 대북파의 득세]
광해군 시대는 왕권에 대한 위협이 극대화 되어 있었다. 선조 이후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방계 승통이라는 오점을 남긴데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민간에 이씨 시대가 끝나고 정씨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게다가 광해군 역시 서자였고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선택된 터라 중국의 고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였다.
게다가 그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왕위 세습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데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했기에 왕권에 대한 위협은 한층 심화된 상태였다. 왕권에 대한이 같은 위협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적 제거 작업에 몰두하게 했으며, 광해군 지지파였던 대북파가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지원하고 실천하게 된다.
광해군의 왕권 안정책은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임해군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해군은 세자 책봉에서 탈락된 이후 줄곧 광해군을헐뜯어온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처사는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의 광폭한 성격으로 인해 민간이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졌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의 집권을 반대하던 서인 세력과 소북 세력은 은밀히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집권당인 대북파는 임해군이 말썽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며 그를 유배시켜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임해군 이외에도 왕권을 위협하는세력은 적지 않았다. 특히 영창대군과 신성군의 양자 능창군이 대표적인인물이었다. 이리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몰아내고 영창대군과 능창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이 병역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는 자백이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 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 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허위자백하기까지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 사건이 '김직재의 옥'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모반의 주모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이때 고기와 술을 먹었다하여 칙첩을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 광해군 때에 늙은 어머니를 학대했다 하여 칙첩을 다시 빼앗겼다. 이 때문에 그는 광해군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고, 대북파가 이 같은 그의 약점을 이용해 소북파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소북파를 몰아낸 대북파는 어리지만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영창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때마침 '칠서의 옥'이 발생해 이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다.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 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타진 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후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은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 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또 다른 숙청 대상은 능창군이었다. 능창군은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의 아들로서 인빈의 소생이자 한때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로 책봉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당시 17세로서, 주변에서 그를 중심으로 역모를 감행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뿐만 아니라 '능창군은 기상이 비범하다'든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매우 성하다' 혹은 '인빈의 무덤 자리가 좋다'는 등의 말들이 소문을 통해 광해군의 귀에도 들어왔다. 따라서 대북파와 광해군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 작업은 '신경희의 옥'을 통해 이루어진다.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이라는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버린다. 이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렇듯 왕권 위협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했음에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우선 정적의 제거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적을 양산했는데도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로는 대북 세력이 조정을 독점함으로써전체를 균형 있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군 원조에 병력을 동원한 탓으로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했던 점 등이다.
[5.변혁의 시대에 핀 문화의 꽃]
비운의 혁명가 허균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최초의 한글 소설을 남긴 문사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는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였다.
그는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허엽의 아들이다. 자는 단보이고 호는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등 여러 가지를 썼다.그의 어머니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광철의 딸로서 명문 출신이었으나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따라서 허균은 비록 서출은 아니었지만 이복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면서 다분히 서얼들이 겪는 고통을 맛보았고, 이러한 경험이후에 (홍길동전) 속에서 서얼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양반 출신임에도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뛰어난 문인 집안 출신답게 허균 역시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둘째형 허봉의 친구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그 뒤 26세 때인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지만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 6개월 만에 파직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 등을 지내고 1604년 수안군수를 지내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계속 불교에 몰두하였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을 높이 평가 받고, 그에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세 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게 평가하던 조정은 그를 다시 공주 목사로 기용하였는데, 이번에는 서얼 출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직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또 다시 네 번째 파직을 당하게 된다.
파직당한 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기생 계생을 만나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냈고,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쌓아 인간 관계의 폭을 넓혔다. 그러다가 1609년 명나라 책봉사가 오자 종사관이 되어 영접했으며,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하지만 1610년에 있었던 과거에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와관련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시 실세로 자리를 굳히고 있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1615년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의 책임자가 되어 두 번이나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어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 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이 즈음 허균은 그 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서얼 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 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이 혁명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우선 한성을 장악할 것을 결심하고 수하들을 시켜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소문의 내용은 '북방의 오랑캐(여진족)들이 쳐들어 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고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점차 민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 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남대문에 전란에 관한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에는 황급히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균은 민심의 동요가 더욱 심해지면 그 틈을 노려 한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 계획은 엉뚱한 곳에서 탄로나고 말았다. 1618년 8월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가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한 것이다.
현응민으로부터 모반 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의 집을 내사하여그와 반란 핵심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리고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허균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 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렵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다섯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글로 된 (홍길동전)을 남김으로써 한국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대업을 이루었다. 허균의 혁명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홍길동전)은 당대에만 하더라도 누구의 저작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보다 18세 아래인 이식이 그의 (택당지) 잡저 부분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한 것을 통해 후대에 밝혀졌을 뿐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 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 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 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 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작품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자 양반 가정의 서얼 차별의 불합리에 항거한 사회 소설이다. 또한 이상향을 그리는 낙원 사상을 담고 있으며, 도교적인 둔갑법, 축지법, 분신법, 승운법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도교소설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성격은 사회 혁신을 꿈꾸는 사회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대하여 비교 문학적으로 고찰한다면 중국 명대의 (수호전),(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도적의 의적 행위에 관한 것은 (수호전)과 흡사하고, 분신법으로 팔도 감영에 방을 붙이고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속이는 것은 (삼국지연의) 제68회 좌자의 분신법에 의하여 조조를 희롱하는 것과 상통하며, 도술을 부리고 구름을 움직이는 것은 (서유기)를 본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모델은 조선 국내에 있었던 것 같다. 즉,연산군 6년에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름난 화적 홍길동과 명종대의 의적 임꺽정, 선조 29년 7월에 임란 와중에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종실의 서얼 이몽학의 난 등에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조합시킨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도국 같은 이상국의 건설에 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노출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허균 역시 이상향을 꿈꾸던 대표적인 선비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중기 사회의 양반과 민중들의 사고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소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얼 문제를 비롯한 사회 계급의 불평 등에 대한 것이 후대로 갈수록 점차 사회 쟁점으로 부각한 것을 볼 때 조선 중기 전반에 걸쳐 (홍길동전)은 혁명 사상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허균은 홍길동을 통해 자신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또한 소설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를 실천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하지만 그의 사회 변혁 사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이후에도 조선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일례로 홍길동은 후대의 박지원에 의해 (허생)으로 재탄생 되어 혁명의 사상을 잇게 되었고, 민간에게는사 실적 인물로 전해져 전라도 영광의 홍길동 마을에 대한 전설을 낳고 공주유구에는 홍길동이 쌓았다는 산성 전설을 남기게 되었다. 허균이 남긴 소설은 (홍길동전) 이외에도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남궁선생전), (장생전) 등이 있다.
동방의 편작 허준과 (동의보감)
허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 우수사를 지낸 허곤의 손자이며 용천에서 부사를 지낸 허윤의 아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1546년 김포에서 무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의간으로 내의원에 봉직하게 된다. 이후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이 높았고 동양의학을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조선 의학의 우수성을 청과 일본에 과시하기도 했다.
의과에 급제한 이래 그는 1575년 2월에 어위로서 명나라의 안광익과 함께 입진하여실력을 증명했으며, 1581년에 고양생의 (찬도맥결)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4권을 편성함으로써 맥법 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이후 그는 어의로 활동하며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해 선조로부터 당상관(堂上官--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임란 때는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계속 남아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정예남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각지로 흩어지는 바람에 작업은일시 중단 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 500여 권을 고증하게 했는데, 그는 내의원에서 어의로 종사하면서도 편집일에 전념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완성시켰다. 이 책은 그 당시의 의학 지식을 총망라한 임상 의학의 백과 전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탕핵,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대 강편 아래에 질병에 따라 항, 목을 정하고 그 항목 밑에는 해당되는 병론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하게 열거하여 각 병증에 관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병증에 따르는 단방과 침구법을 부기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용화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이 편집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예로 내경편의 진액항에 한증(땀병)의 처방을 보면,먼저 그 맥법과 원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자한, 도한, 두한, 심한, 수족한,음한, 혈안 등 8목으로 분류되어 있어 임상 의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약집방서), (의방유취)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 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천원옥색), 신농의 저작이라는(본초), (소문), (영추경) 등 83종의 고전 방서들과 (상한경), (맥경), (단계심법)등 한, 당 이래 편집된 70여 의방서가 인용되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 능력의 우수성으로 인해 동양 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 의학서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저작으로 이 책처럼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허준은 이 책을 완성한 이후에도 세조 때 편찬한 (구급방)을 (언해구급방)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의 (창진집)을 (두창집요)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하고간행하였다. 또 노중례의 (태산요록)을 (언해태산집요)로 개칭하여 간행하였으며,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편집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동의학사에 이 같은 많은 업적을 남기고 1615년 11월 70세를 일기로세상을 떴다.
[6.(광해군일기) 편찬 경위]
(광해군일기)는 총 64책으로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1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24년 춘추관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원래 1623년 이수광이 광해군 당시의 시정기를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한 이듬해 1월에 발생한 이괄의 난으로 많은 사료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광해군이 폐군이라는 이유로 편찬 작업을 하지 않고 시정기만 수정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시정기만으로는광해군의 실록을 대신할 수 없다는 춘추관원들의 주장에 따라 1624년 2월에(광해군일기) 편찬 작업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일기 편찬을 위해 남별궁에 찬수청을 설치하고, 총재관 윤방을 중심으로 3개조로 나뉘어 편찬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기본 자료인 (정원일기)등이 대부분 이괄의 난 때 없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광해군 즉위 이후의 조보와 사대부 집안의 소장 일기, 상소문의 초고, 야사, 문집 등과 사초를 합쳐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632년 2월에 다시 시작하여 이듬해 12월에 겨우 완성을 보아 곧 인쇄에 착수했으나 물자가 부족해서 한 달 동안 광해군 즉위년 2월에서 6월까지의 기록 5권과 그 해7, 8월에 해당하는 기록만 인쇄하는 데 그쳤다. 이에 조정은 정초본을 여러 벌 등사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분장하기로 하고, 1634년 정월부터 등록관 50인을 임명하여 4반으로 나누고 정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5월에 두 부의 정초본을 작성하였다.
실록의 편찬을 완료하면 원래 초초와 중초는 세초하고 정초본만 인쇄하여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광해군일기)는 불과 2부를 동시에 등 사했을뿐이어서 중초본을 세초하지 않고 이를 64권으로 꾸며서 태백산사고에 보관하였다.그리고 정초본 2부는 강화도 정족산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에나누어 분장했다. 이 때문에 실록 중에 유일하게 (광해군일기)만 중초본과정초본이 함께 남게 되었다. 그 후 이 책은 숙종 대와 정조 대의 두 번에 걸쳐 인쇄와 출판이 논의된 바 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광해군일기)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으로 수정하여 삭제하거나 보첨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중초본은 실록 편찬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이 비록 '일기'라는 표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중초본을 통해 실록과 다름없이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이 책을 편찬한 사람들이 인조반정을 주동하거나 또는 방조한 서인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 : 광해군 시대의 세계 약사
광해군 시대는 동북아 뿐만 아니라 유럽, 아메리카, 인도 등 전세계적으로 변혁이 시작되는 때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정치, 사회, 문화분야에서 근대화를 시도하고 중국에서는 후금 세력이 강성해져 명의 멸망이 가속화된다. 유럽은 한동안 평화기를 맞이하다 30년 전쟁으로 전란에 휩싸이고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칼 등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국가들은 인도와 아메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한다. 또한 이 시기에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의 걸출한 문학가들이 사망하고,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한 죄로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왕조 제15대 광해군
세자책봉의 음모와 정철 의 퇴출
1591년, 좌의정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 대 사헌 이해수, 부제학 이성중 등과 세자 책봉 문제를 놓 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그리고 논의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 고 선조에게 주청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음모가 진행되었다. 서인의 거두 정철을 궁지로 몰기 위해 동인의 중심 인물인 이산 해는 은밀히 계략을 짜고 있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빈을 찾아가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광해군을 세자로 옹위한 뒤 인빈과 신성군 을 모함하여 죽일 계략을 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인빈은 당장 선조에게 달려가 정철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인빈을 총애하고 있 선조는 이 말을 듣고 심하게 분개하며 정철을 벼르고 있었다. 그 러나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 자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가 선 조의 진노로 그만 화를 당하고 만다. 이 때 동인인 유성룡과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인 이해수, 이성중 등만 정철의 주청에 가세했다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 났다.
광해군의 험난한 등극
영창대군 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 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 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 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 하자 현실 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 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 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 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 건을 알리 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 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 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 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왕권안정에서의 피바람
그는 즉 위 하자마자 우선 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 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 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 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 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인조반정의 명분 제공
1611년에 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 균과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 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 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 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 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 다. 그리 고 이듬 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 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 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서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 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 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 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 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
이 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는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 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 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 릴 때부터 총명 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 희의 추 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 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 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 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 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 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 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 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 하고 말았다.
민생안정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 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 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 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 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 서 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능양군의 반정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 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반 정에 성공한 이 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 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 된 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41년 67세를 일 기로 세상을 떴다.
폐위 그 이후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 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 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 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 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 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 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 지가 있었 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 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 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 용이 무엇인지 는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 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 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 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 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 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 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 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 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 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 정 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 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 몇 인사들의 부귀영 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 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 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 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 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 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 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 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긴 나머지 몇 번이나 그 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 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 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 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 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 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 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 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 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 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 하고 자 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 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 하며 멸시해도 전 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 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 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 하게도 그는 1641 년 귀양생활 18년 수 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 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적제 거
대북파 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 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 된다. 신률은 그 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 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 고 다 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 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 해군을 축출한다는 것 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 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 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 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 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 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 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 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 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 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 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 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 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 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 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 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 다. 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 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 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 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 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 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 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 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 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 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 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 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 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 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 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 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 하고 인목대비 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 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 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 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 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 위를 부 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 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 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 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 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 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 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 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 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작업
신경희 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 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 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 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 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 이 바로 능창군이 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버린 다. 이 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 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 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 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 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 기지 못한다. 이 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 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 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대강
이 소설 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 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 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 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 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 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 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를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 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 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 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 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 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 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