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처용설화> 연작을 쓰게 된 배경 2008.02.14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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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처용설화 . 2
층층의 육교를 맨몸으로 떠받치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점점 사라지면서
청청한 깃발을 품어 내일에 걸고자 했네
넘실대는 취기로 휘청이며 헌강왕은
역신을 끼고 앉아 오늘도 홍등을 켠다
그 아래 내팽개쳐진 한 떨기 아내여
숨기느냐 허방다리 번들대는 불빛 속에
시시각각 좁혀들어 처용을 모는 소리
쫓겨간 노루막이에 탈바가지 걸려 있다
어깨가 부러지도록 갈고갈아 벼리는 게
하늘을 휘어감는 춤사위일 뿐이랴
독 오른 꽃대궁이가 역란(逆亂)으로 환하다
- 시집 [먼 길](1999)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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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경험이 형상화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다시 쓰는 처용설화>를 다른 작품 몇 편과 함께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하였습니다.
<다시 쓰는 처용설화>가 표제작이었던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동아일보에 내심 욕심을 내 작품을 골라 보냈던 저로서는
제가 미는 작품과 심사위원이 뽑는 작품은 다를 수 있다는
참 당연한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쓰는 처용설화>는
나중에 동일 제목의 작품이 늘면서 번호를 매기게 되었으니
그때 투고 작품은 <다시 쓰는 처용설화 . 1>로 정정해야겠네요.
위의 작품은 <다시 쓰는 처용설화 . 2>입니다.
아이엠에프라고 흔히 쉽게 통칭하는 시기에
많은 가정이 와해되었습니다. 저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게
타의에 의하여 깨지게 되는 가족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처용과 처용아내는 소박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헌강왕은
역신과 홍등을 켜느라 바빠 백성들의 가정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시에서 무능한 정치력과 맞물려 파탄하는 한 가족의 비극을 형상화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처용이 궁금하였습니다.
향가 <처용가>를 알고 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노래에 얽힌 전설의 신비감이 저를 압도하였고,
개운포, 망해사, 처용암 등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도록 그 장소에 갈 기회를 얻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1995년인가 6년인가에 저는 김현우 선생을 만나러 울산에 가게 됩니다.
난생 처음 가는 길이었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였지요.
저는 우연히 [금호문화]에 실린 처용탈방 기사를 보았고
어찌어찌 김현우 선생과 통화하게 되었고 방문하게까지 된 것입니다.
김현우 선생은 매우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어렵게 구하셨을 자료를
성심성의껏 나눠 주셨으며 처용무를 추는 분까지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날 김현우 선생께 갔다 온 후 저는 더욱 처용이 궁금하였습니다.
처용이 누구인지 알고 온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알고 싶어 미치겠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처용, 처용 아내, 역신이 이루는 극적인 구도와 그들을 엮이게 한 헌강왕이라는 위정자가
항상 머리에 뱅뱅 돌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처용, 처용, 처용, 밤에 천장에서 처용이 맴돌 정도였지요.
하지만 작품으로 형상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첫 시집 [먼 길]에 수록된
<다시 쓰는 처용설화 1>과 <다시 쓰는 처용설화 2>는 그때 고심 끝에 나온 작품입니다.
작품을 두 편 썼으니 처용과의 인연은 이젠 끝났을까?
아닙니다. 웬일인지, 무엇에 씌인 것처럼 저는 계속 처용 이야기에 매달렸습니다.
2004년, 가을에 저는 드디어 <처용가>의 터전을 더듬게 됩니다.
대학원 수업 과제물을 써야 한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두 편의 처용 관련 시를 쓰면서도, 정작 처용의 처소에 가보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을
지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서적이나 그림에서 보고 수없이 상상은 했지만
직접 보는 것을 당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백문이불여일견! 게다가,
망해사와 처용암에서 저를 부르는 처용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거든요.
여러분도 아시지요?
마음에 그리고 그리던 곳에 갔다가 만나게 되는 허허로움을요.
처용암은 다만 바위였어요. 주변은 쉬지 않고 하얀 연기를 내뿜는 공단이었고요.
처용축제가 끝난 다음이라는 표시라도 하려는 듯 쓰레기가 흉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노옹을 만나지 못 하였다면, 그로부터
처용암의 옛날 풍모를 전해 듣지 못 하였다면, 저는 다만 쓸쓸함만 안고 돌아왔겠지요.
노옹에게서 물 맑고 고기 많고 오염은 없던 때의 이야기를 듣고
망해사로 갔지요. 벌새를 보았어요. 쉬지 않고 날갯짓하는 작은 벌을
사람들이 벌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릴없이 벌새에 잠깐 눈을 파는 사이에도
한낮의 적요를 깨며 망자를 부르는 살아 남은 자들의 곡성이 괴기스러웠습니다.
곡성이 끝나고서야 주지 스님을 만나 망해사의 흥망성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처용설화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계속 쓰려고 합니다.
무엇을 쓰게 될 것인지를 확연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처용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므로 제가 쓰는 <다시 쓰는 처용설화>도
쉽게 마감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시집 [무엇이 들어 있을까]에 저는 <다시 쓰는 처용설화> 한 편을 실었습니다.
이 작품은 잡지에 발표된 지 꽤 되었으니 요즈음의 제 심경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처용과 제가 어떻게 조우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지는 아침입니다.
첫댓글 처용은 그냥 설화가 아니다. 울산에는 설화에 나오는 처용암이 있고 망해사도 있다. 일연스님의 처용설화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과장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비형랑이 귀신을 부리는 것 처럼 처용의 이야기를 부풀린 것이다. 처용의 이야기는 *악학궤범*과 *악장 가사*에도 있는데 끝 구절이 사뭇 다르다.
* 이런저귀 처용아비 보시면 열병대신이야 횟갓이로다* 라고 역신은 처용에게 횟감, 즉 한주먹꺼리도 안되는 하찮은 존재이다. 그리고 역신은 국어사전을 찿아보면 남자가 아니라 삼신이나 조왕신 처럼 여자이다. 근대의 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역신을 남자로 해석하여 ... 김현우
처용과 처용의 처와 역신을 삼각관계로설정 하였는데 역신을 국어사전에 찿아보면 *역신:호구별성* 다시 호구별성을 보면 *집집마다 찿아다니며 열병을 퍼트리는여성신* 이라 되어 있다.결국 역신이 처용의 처에게 열병을 옮기는 과정을 일연스님의 처용가의 끝 구절 *빼았긴 것을 어찌하릿꼬* 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 때 부터 근대의 학자들이 논문을 쓰기 전까지는 어떤 기록에도 역신이 남자라서 처용의 처를 범했다는 기록이 없다.
김현우.
처용의 아랍상인설도 크게 잘못 되었다. 신라 때 부터 근대까지 아랍상인이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국대학교의 무하마드깐수 그는 신분을 세탁한 북에서 온 고정간첩 정수일 인데 그의 논문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증명을 하지 못했다. 그져 당시의 아랍쪽의 처용과는 전혀 상관 없는 기록 *신라에는 개도 금목걸이를 하고 다닌다.* 등 억지로 처용을 아랍 상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논문 발표 후 티브이 다큐멘터리에서 경주국립박물관의 아랍인 토용과 경주 쾌릉의 아랍인 무인상 앞에서 처용은 아랍상인이라 강변을 했던 것이다.
김현우.
처용탈.
하늘에서 본처용암.
처용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