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법문 019-2/퇴옹성철
6. 십이연기의 재해석2
그러면 다음에는
그 연기에
생사윤회의 시간적인 해석을
하게 된 까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할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 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
그 뒤로
십 수 개의 부파가 나뉘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승 불교는
바로 그 부파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 성립 이후의 교단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근본불교 정신으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운동이 처음 일어난 때는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장 잘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龍樹)를 중심으로 한
중관파(中觀派)이고,
그보다 다소 후에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을 중심한
유식파(唯識派)가 성립됩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을
오랜 세월 동안 수용하면서
전적으로
대승적인 교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천태종(天台宗). 선종(禪宗)등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근본이 되는 것인 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당시의 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만일 그 근본취지가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 변질된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이제 문제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해 온 바와 같이
근본경전에서 설해진
십이연기법의 근본성품은
진여이며 법계이며 중도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십이연기법을
시간적인 생멸법으로
해석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시불교 시대를 지나서
부파불교시대로 오면
각 부파가 서로
자기파의 변견을 고집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교설을
없다는 견해(無見)에
치우쳐 해석하고,
다른 쪽에서는
있다는 견해(有見)에
치우쳐 해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세력이 컸는데,
그것이 요즘 말하는
대승불교의 실세가 된 것입니다.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것이란'
일체의 모든 법에는
실체(實體)가 있다(諸法實有)'
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체가 있으므로
고정적으로
생사윤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서로 의지한다는
성격(相依性)때문에
연기란 것은 무아(無我)가
근본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파불교에서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즉 양변을 여윈 중도사상을 모르고
변견에 떨어져
'실체는 있다'는 견해를 고집했고,
따라서
십이연기를 그와 같은
실유론적인 성격이 강한
생사 윤회하는 법칙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최초로 나온곳이
원시경전에 나오는
가전연존자와는 이름만 같고
실제로는 다른
가전연자(迦전延子)가 지은
[발지론(發智論)]인데 ,
거기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써
설명한 것입니다.
그 뒤 오백 명의 존자들이 모여서
가전연자가 지은
발지론에 대한 주석서로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100권을 지었는데
거기서도
삼세양중인과설을 채댁하여
생멸법으로서의
십이연기연을 채댁했습니다.
그래서[구사론(具舍論)]등
유부(有部)소승불교 전체가
십이연기의 해석을
근본불교와는
다르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용수보살이 나타나서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생멸적인 견해로 곡해한
유부의 변견을 부수게 됩니다.
그는[중론(中論)]을 지어서
중도를 다시 선양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중도사상을 가지고
근본불교를 회복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인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근본 불교에로의 복구운동이
소위 대승불교운동입니다.
간략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연기설이 어떻게 해서
유부(有部)적인
소승의 생멸적 견해로
해석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이
대강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에는 어느 학자도
십이연기를
반드시 생멸적이며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멸적인 소승유부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등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문제가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이 사성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생멸사제(生滅四諦)입니다.
이것은 대개
소승의 유부(有部)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법의 자성을
'있다(有)'라고 보기에
이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제법은 생멸한다는
피상적인 관찰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보지 못하고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제를 순전히
생멸적으로 해석합니다.
둘째는
무생사제(無生四諦)입니다.
이것은 '생멸사제'의 반대로서
사제는
생(生)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대승불교 가운데
반야경(般若經)이나
삼론종(三論宗)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하여 주장한 해석입니다.
공사상에서 불 때는
사제란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라 합니다
셋째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이것은 주로 법화경을 받드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해석입니다.
여기서는
사제를 생멸(生滅).
무생(無生). 무량(無量)
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당체(當體)가
그대로 실상(實相)이라는 것입니다.
곧 생사(生死)가 열반(涅般)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므로,
끊어야 할 고(苦)도 집(集)도 없고
닦고 증득해야 할
멸(滅)도 도(道)도 없으므로
어떤 인위적인 지음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중도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와 마구니가 한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입니다.
원래 사제(四諦)는
자세히 알고 보면
십이연기와 별개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제 중에서
괴로움을 말하는 고제(苦諦)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에 해당합니다.
또 사제에서
괴로움이 멸하는 멸제(滅諦)와
그 멸하는 길을 말하는 도제(道諦)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므로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십이연기와 사제는
서로 대등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가
존재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법계 연기이고 보면,
사제 역시
생멸적인 사제만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나 현수대사가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여
아함의 연기를
생멸연기로 해석하고,
아함의 사제도
생멸사제로 간주한 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도를
정등각 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중도가 즉 연기이며,
연기가 즉 법성이며,
법성이 즉 법계이며,
법계가 즉 사제입니다.
이것은 전체가
다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중도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법실상이라든가
법계연기라든가
그 모두가 법계. 연기. 법성
이것을 벗어나서
더 묘한 이론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명하신 근본불법은
제법실상과 법계 연기를 주장하는
천태. 화엄과 같은
일승원교의 입장이지
절대로 소승의
생멸변견적(生滅邊見的)
인 불교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