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실 <인형의 집> 주인이자 디자이너 홍기는 점심을 먹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여자였는데 목소리가 우아했다. 다짜고짜 좀 만날 수 없느냐는 거였다. 자신이 누구란 것도 밝히지 않는 것이 약간은 무례하게 생각되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만나서 말씀 드리겠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예요."
"지금은 좀 바쁜데"
목소리만큼이나 얼굴도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언제 보았다고 생떼를 쓰다시피 한다.
"아이 그러지 말고 좀 만나줘요. 부탁이예요. 아주 중요한 일이예요."
"도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기에?"
"선생님 생사에 관한 일이예요."
"내 생사에 관한 일이라고?"
"네, 그래요."
"누군지 모르지만 꽤나 웃기는군."
그는 이를 드러내고 한참 동안 웃었다.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전화를 끊자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괜히 약속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떤 계집애가 장난하는 거겠지. 건방진 년 같으니. 여자들을 상대하는 직업이니 만큼 별의별 여자들을 다 겪게 된다.
<인형의 집>은 최고급 의상실이다. 부르는게 값이니 만치 돈으로 몸을 처바를 없는 사람은 밖에서 쇼윈도나 구경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고객의 대부분이 상류층 유한마담들이거나 그 딸들, 아니면 연예계의 내노라 하는 인기인들이다. 그가 그러한 여자들을 끌어 모으는 데는 2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먼 일가뻘 되는 여자가 경영하는 의상실에서 잔심부름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앞길이 콱막힌 불우한 신세였었다. 대학도 못가는 바에야 기술이나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밤이면 학원에 나가 디자이너 수업을 쌓았다. 그때만 해도 남성 디자이너가 전무하던 때였다. 미남에다 화술이 뛰어나고 붙임성이 있는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5년 후에 조그만 의상실을 하나 차릴 수가 있었다 적응력이 강한 그는 도시 생활에 필요한 섭첫갖추게 되었고, 고객들에게는 상품보다도 자신의 이미지를 심어 주는데 더 주력했다. 그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서 날이 갈수록 사업은 번창해 나갔다. 사업이 번창하는 것과 함께 그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사흘이 멀다하고 파티에 어울리는 남성미를 가꾸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는 계속 노력했다. 은밀히 영어 회화까지 배웠고, 교양 서적도 틈틈이 읽어 화술을 한층 높였다. 누구나 다 그가 적어도 대학 정도는 나온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여자의 허영심을 적당히 자극해 줌으로써 신통치도 않은 옷들을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정도에까지 다다랐다. 그때는 이미 그에게도 일류라는 딱지가 붙었고 그는 거기에 어울리는 권위의식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는 여자들 사이에서 스타로 군림하게까지 되었고, 그것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마흔넷인 지금까지도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독신이란 여자로 하여금 쉽게 연정을 품게 만드는 가장 매력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연정을 품었고 그는 그것을 잘 리드해 나갔다. 이제 그는 상호만 가지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었다. 공황이 불어닥치고 있었지만 그의 의상실만은 계속 호황이었다. 호황에 상관없이 돈을 뿌리고 싶어 하는 상류층 고객들이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굴까. 어떤 계집애가 또 꼬리를 치는 것일까.
그는 어깨까지 내려온 장발을 손질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장발은 물이 들어 누런 황금 빛이었다. 만일 장발을 걷어 치운다면 광대뼈가 튀어나온 앙상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커버하기 위해 그는 코밑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것은 함부로 자란 것이 아닌, 잘 다듬어진 수염이었다. 그 얼굴에다 그는 가는 검정테의 안경을 끼고 있었다. 쌍꺼풀진 두 눈은 커 보였다. 눈빛은 노리끼했고, 눈썹은 짙은 편이었다. 그 눈썹도 미장원에서 정기적으로 다듬고 있어서 그린 듯이 가지런해 보였다. 여자란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동물이었다. 새로운 얼굴, 새로운 육체, 새로운 섹스, 그건 정말 무궁무진하고 끝없는 거란 말이야. 그는 씩 웃으며 빨간 털 셔츠를 와이셔츠 위로 뒤집어 썼다.
약속 장소는 길 건너편에 있는 <달래>라는 경양식 집이었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의상실을 나와 길을 천천히 건너갔다. 첫번 만난 때는 부드럽게 대할 것, 그러나 결코 웃지 말 것. 그는 흑진주가 박힌 백금반지를 꺼내 왼손 무명지에다 끼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괴이한 모습에 쏠렸다. 그는 거만한 모습으로 그 시선들을 묵살하면서 실내를 둘러보았다. 실내에는 사람들이 반쯤 차 있었다. 실내장식이 우아한데다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비교적 교양미가 있어 보이는 손님들이 찾아드는 곳이었다. 구석구석 돌아보았지만 그를 보고 일어서는 여자는 없었다. 이런 제기랄. 그는 망설이다가 가운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비 넥타이를 맨 종업원이 다가오자 그는 쥬스를 한 잔 시킨 다음,
"나 찾아온 손님 없었어?"
하고 물었다.
"예, 있어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어디?"
"저기 저, 남자분이요."
그는 종업원이 가리키는 구석 자리를 바라보았다. 초라해 보이는 한 사나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창백한 인상이 왠지 기분 나빠 보였다.
"남자 말고 여자 말이야."
그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여자는 모르겠는데요."
디자이너 홍은 사나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왠 놈일까. 나를 찾아오다니, 이상한데, 저런 작자와 약속한 일은 없었는데, 왠 놈일까.
그가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사나이가 일어났다. 홍도 일어섰다. 사나이가 급히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디자이너 홍 기씨입니까?"
홍은 상대의 아래 위를 한번 훑었다.
"네, 그런데요?"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사나이 말투는 매우 직선적이었다.
"누구시죠?"
"아까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여자가 전화했었는데요?"
"네, 대신 왔습니다. 자, 앉으시죠."
홍은 얼결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빛을 드러내며 인상을 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난 바쁜 사람이니까 간단히 용건만 이야기 하시죠."
"네, 그러죠."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흐른다. 담배연기를 확 내뿜는다.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실망하셨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요."
"뭐라구요? 당신 도대체 누구요?"
초라한 사나이의 당돌한 말에 홍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차갑게 웃고 있었다.
"큰소리 내지 맙시다. 나야 괜찮지만 당신같이 유명한 사람이 창피를 당해서 되겠소."
"당신이라니,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말 조심해!"
"대접받고 싶거든 조용히 해!"
차가운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폐부를 찌르는 것같은 눈빛이었다. 홍은 숨을 헉 들이켰다.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 나한테 시비하는 거야?"
"시시하게 당신같은 사람한테 시비자 걸려고 찾아온게 아니야. 내가 깡패로 보이나?"
용건을 빨리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이쪽이 화를 내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뭐야? 빨리 말해."
"성질이 꽤 급하시군."
"얻어 터지기 전에 꺼져!"
홍이 벌떡 일어서자 사나이가 그의 손을 꽉 움켜잡는 힘이 아플 정도로 세었다.
"앉아! 앉으라구!"
중압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홍은 도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 애라 알지?"
"뭐라구?"
"여배우 오 애라 말이야. N호텔에서 떨어져 죽은 여배우 말이야.!"
"왜, 왜 그래?"
홍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다급하게 안경을 밀어 올렸다.
"묻는 말에 대답해! 알아 몰라?"
"아, 알지. 좀 알아. 그게 어쨌다는 거야"
비로서 상대가 형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적대감을 버리고 다소곳한 태도를 취했다.
"오 애라를 N호텔에서 떨어뜨려 죽인 놈이 누구야?"
홍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손님들이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나 않나 해서였다.
"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난 도무지"
"시침떼도 소용없어. 증거가 다 있으니까."
"실례지만 경찰에서 오셨나요?"
"그런 건 알 필요없어! 당신이 오 애라를 죽였지?"
"뭐라구요? 생사람 잡지 마시오!"
홍은 기절할 듯 펄쩍 뛰었다.
"생사람 잡는다구? 홍, 당신을 살리고 죽이는 건 내 손에 달렸어. 요즘도 섹스 파티를 열고 있나?"
""
"계속하고 있겠지.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환각상태에서 새파랗게 젊은 미인들과 혼음하는 쾌감이야 어디다 비하겠나. 안 그래?"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사람을 뭘로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홍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뭘로 아느냐구? 마약중독자에, 매음 조직의 일원이라고 하면 대충 어울리는 표현이 되겠지."
"닥쳐! 당신 경찰 아니지?"
"오 애라를 농락하고 나서 넘긴 곳이 어디야? 그 요정 이름 말이야. 마담 이름까지 말해주면 더욱 좋지. 자리를 옮길까? 더 조용한 곳으로 말이야."
"미쳤군."
"반반한 여자들을 낚어서는 야욕을 채운 다음 요정에 넘기고, 요정에서는 실컷 피를 빨아먹은 다음 일본으로 팔아넘기고 아주 대단한 조직이야. 가장 더러운 조직이고 말이야. 보스한테 전해줘. 나한테 손찌검한 거 잊지 않는다고 말이야."
홍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미친 놈"
사나이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는 카운터에서 재빨리 계산을 치른 다음 홍의 뒤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은 길 복판에서 서로 노려보았다.
"살고 싶으면 속시원히 털어놔. 만일 망않으면 갈기 갈기 찢어 버릴 테다! 알았지? 신문에 터뜨릴까? 다음에 만날 때는 그 머리를 좀 깎아! 구역질나서 혼났어."
"이 새끼 정말"
홍은 주먹을 부르쥐고 부들부들 떨다가 의상실로 뛰어들어 갔다. 그는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가 전화통을 끌어 당겨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급히 다이얼을 돌리다가 무심코 쇼윈도 쪽을 바라보니 그 사나이가 그 때까지도 가지 않고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사나이는 그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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