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榮山浦)1 나해철(1956년~)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邑內)의 바람이 달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榮山浦)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湖南線)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 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강심(江深)을 높이고 항시리 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 포구(浦口)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는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下行線)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 집의 제사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窓)의 얼굴이었지 십년(十年) 세월(歲月)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船艙)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榮山江)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湖南線)을 오르며 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감상: 강은 역사를 품고 있다고 말한다. 그 역사를 강이 기억하고 있어 우리는 애잔하게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지 모르겠다. 강에는 입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눈이 있어도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민중들의 삶이 숨쉬고 있다.
가장은 아버지였다. 가장이라면 집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야 하고 의식주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책임과 상관 없이 살았던 가장들이 1960년 70년대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름만 가장의 명패를 걸고 한 평생 베짱이처럼 살다간 아버지들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 자리를 엄마가 대신 했고 엄마가 메우지 못한 곳을 누나가 나누어 가졌다.
누나들이 흘린 눈물이 강물의 절반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살았던 누나들. 그 누나들의 삶을 기억하고 품을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언제 있었던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 누나의 삶의 그림자가 깊고 깊었지만 가정 안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딸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이름 없이 가장노릇을 한 우리들의 누나들의 삶을 시인은 영산강에서 만나고 있다. 아버지도 아니면서 엄마도 아니면서 장남도 아니면서 그 모든 일을 했던 누나들이 있었기에 가정의 울타리를 그나마 지킬 수 있었다.
가족을 위해 일했는데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다간 누나들. 장남의 흔적은 훈장처럼 남아있어도 누나의 삶은 울타리 밖을 떠돌아야 했던 그 시절. 소설책 10권은 더 묶을 수 있는 시간을 안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없이 묵묵히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삶을 강물에 흘려보냈다. 그렇기에 ‘누나’라는 이름 강물보다 깊고 푸르다.
| | | ▲ 김희정 |
◇<미룸에서 만난 詩>는 김희정 시인의 안내로 시 한 편 감상하는 코너입니다. 미룸은 미(美) + 룸(Room) =아름다운 방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순순 우리 말로는 미루다(어떤 일을 미루고 삶의 여유를 찾아보자) 이런 뜻도 있습니다. 김희정 시인은 2002년 < 충청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정신>에 당선돼 문단에 나와 시집으로 <백년이 지나도 소리는 여전하다>, <아고라>,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가 있으며 '큰시' 동인으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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