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산1-5번지에 있는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묘역 일대이다.
남구만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이 의령(宜寧)이며,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이다.
사마시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정세가 바뀌어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강릉으로 유배 당하였다가 풀려 났고, 갑술옥사(甲戌獄事) 후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었다.
약천은 장희빈에게 죄를 가볍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가 반대파의 주장에 의하여 조정에서 물러났고,
그 이후는 경사(經史)와 문장(文章)에 전념하였다.
약천이라는 호는 강릉으로 가는 도중 강원도 동해시 약천동에 들린데서 연유하였다.
그 곳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는데, 경치도 뛰어나고, 물 맛도 좋아 아에 그 곳에 집을 짓고
학문과 풍류의 세월을 보냈다. 서당을 열어 백성들에게 학문과 생업을 가르친 약천은 샘물의 이름을 자기의 호로 삼은 것이다.
약천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와 그를 상징하는 노래 권농가 시비가 찾는 이를 반기고 있다.
후손들이 1991년 약천의 묘가 용인 향토유적 53호로 지정된 데에 맞추어 성금을 모아 지금의 신도비와 유허비를 올린다.
그는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오달제의 처조카이며 시호는 文忠이다.
그는 文詞와 書畵에도 뛰어났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와 '藥泉集'이 있으며, 글씨로는 左相南智碑.
開心寺. 楊花樓. 迎送樓 등의 액자를 남기고 있다.
신도비가 있는 그 입구에서 '300보만 걸어가면 약천의 묘가 나온다'고 했다.
보통 걸음으로는 300보가 넘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왕릉 버금가는 약천 남구만의 묘이다.
사초지(沙草地) 자연의 언덕 강(岡)이 그 위세가 왕릉의 강 못지않은게 참으로 대단하다.
이 자리는 당시의 고승이신 일우(一愚) 스님이 남구만 생전 시에 동에는 청련사(靑蓮寺),
서에는 용연(龍淵)이 있는 명당이라고 천거한 곳이다.
이곳에 그보다 먼저 간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모셨다.
1711년 그가 나이 82세에 세상을 떠나자 처음에는 양주(楊洲)에 모셨다가 10년 후 이곳에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나라에서 세워준 석물은 그곳에 그대로 둔 채 이곳에는 장남의 간략한 친필 묘갈만을 세워 놓았다.
청렴 검소하신 뜻을 따른 것이었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속칭 거북이 마을)에서 약현 남구만이 태어날 때였다.
거북이마을 뒷산 보개산 상봉인 감투봉에 원인 모를 불이 났다.
그 불길이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 따라 남일성(南一星) 현감댁 뒤꼍에 이르자 스스로 꺼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가 명재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에 오른 약천 남구만이었다.
약천 남구만은 낙향하여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 파담마을에서 21년간 살았다.
그는 이곳 파담마을에서 살면서 비파를 연주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 마을 앞에 경안천이 흐르고 있다. 그 경안천이 호수처럼 넓었다고 한다.
그 호수처럼 넓디 넓은 경안천에서 그의 비파를 타는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해서
그곳을 사람들은 비파담(琵琶潭)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또 그 앞 산에서 정자를 짓고 비파를 즐겨 탔다고 해서 '구만이산'이라고 불리어오고 있다.
처음에 봉분은 낮은 호석을 두른 원형이었으며,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후손들이 묘역을 넓히면서 방형의 지대석 기단을 둘러 봉토했다.
묘소 앞에는 본래 석물인 묘표와 망주석, 향로석 등이 배열됐다.
낮은 호석을 두른 큼직한 봉분은 장명등과 상석 혼유석은 근래에 세운 것이고
묘비며 망주석․향로석은 옛 것 그대로이다.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의 묘역에는 문인석이 보이지 않는다.
본래 청렴한 분이라 석물을 간소하게 하려는 남구만의 뜻을 자손들이 따랐던 듯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 선생의 묘를 생각나게 한다.
이황 선생 묘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라고 쓴 비석과 그 옆에 퇴계 선생이 스스로 쓴 명문만 있다.
이황 선생 묘보다는 낫지만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이었기에 그의 청렴함을 보여준다 하겠다.
묘비에는 ‘朝鮮領議政致仕文忠 南公諱九萬之墓. 貞敬夫人 東萊鄭氏祔右’라 쓰여 있다.
보통 부인을 왼쪽에 모시는데 약천의 묘는 특이하게 오른쪽에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남구만의 청렴함을 상징이라도 하듯 부정한 관리를 혼내기 위해 팔작지붕형의 옥개석 상단 용마루 좌우에
해태를 조각한 묘표가 보인다.
약천의 묘 옆에는 생원을 지낸 손자 남극관(南克寬 1689~1714))의 묘가 있다.
생원 남극관은 약천의 손자로 호가 사시(謝施)이다.
남극관은 남구만이 환갑에 얻은 손자로 조부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
남구만은 죽기 직전 남극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비록 내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죽더라도 너는 장례에 참석하여 스스로 목숨을 재촉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중략) 아픈 몸으로 절대 내 장례에 참석하지 마라. 내가 당부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 네가 지켜야 하는 큰 효이니라.
만약 네가 내 뜻을 어긴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불효다. 그러면 저는 내 손자도 아니다.
병이 깊어 생각을 다 적을 수도 없구나. 나머지는 네가 깊이 헤아리거라."
독서광이었던 남극관은 죽기 1년 전 자신의 글을 모아 문집 《몽예집》을 펴냈고, 남구만이 죽은 지 3년만에
각기병으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 남학명이 나이 서른 여섯에야 겨우 본 귀한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또 아들을 못 잊어 〈죽은 아들의 어릴 적 이야기(書亡兒幼時事)〉란 글을 남겼다.
계유년 봄에 종숙 부평공께서 서울서 결성의 용촌으로 가셨다. 아이가 물었다.
“재작년에 제가 서울 있을 때 공께서 나귀를 타고 오셨는데, 이번엔 왜 안타고 오셨어요?”
다섯 살 짜리가 세 살 전에 보았던 일을 능히 기억했다.
여덟살 때 나를 따라 수표교 집에 살 적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들어와 내게 말했다.
“나라에 분명히 무슨 일이 났나 봐요. 전에는 할아버지께서 조정에 가실 적에 이곳을 지나다가 제가 나와 노는 것을 보시면
반드시 들르셨고, 그렇지 않을 때는 또한 반드시 꼼꼼히 살펴보셨는데, 지금 제가 문 앞에 서있는데도 한번 돌아보시지도 않고,
눈길을 다만 앞 길에만 두고 계시니, 반드시 근심이 있어서 그러신 걸거예요.
” 잠시 후 들으니 과연 옥사가 있어 부름을 받고 입궐하셨다는 것이다. 그 찬찬하고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
그 남극관의 묘비 바로 옆에는 ‘열녀비(烈女碑)’가 서 있어 눈길을 끌었다.
부인 대구 서씨는 남편 남극관이 세상을 뜨자 곡기를 끊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부인 대구 서씨에게는 열녀로 정려가 내려진다.
열녀비 뒷면의 비문이다.
약천의 장남 학명의 장자 극관의 처 서씨가 1714년 남편 극관이 향년 26세로 세상을 떠나자
1년 뒤인 을미년 1월 8일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는데 그 역시 향년 26세였다고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