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통도사 반야암의 가을 새벽...
내일이면 동안거 결재입니다...
"안거(安居)"란, 평안히 머문다는 뜻으로서
대부분의 스님들이 수행처에 들어 마음을 돌이켜 수행에 매진하는 10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수행하셨던 인도는 몬순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철에는 매우 많은 비가 내렸던 탓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 3개월은 유행하여 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수행을 하도록 정하였는데,
이 전통이 우리나라에 넘어 와서는 여름과 겨울 두 철에 용맹정진하는
동,하안거 체제로 정착된 것입니다.
"안거"를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대중'으로,
모든 의사결정의 판단은 '대중'의 의향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이렇게 스님들이 '대중(5인이상의 출가 수행자 모임)'을 형성하여 수행함에는
2가지 이로움이 있기 때문인데..
첫번째는, 수행함에 어려움을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재 전날이 되면, 안거에 들 대중들이 모여 '용상방'이라는 일종의 소임표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 소임표를 바탕으로 각기 주어진 임무와 역할에 따라 행동함으로서
수행공동체가 무리없이 운영되게 함과 동시에
수행자 개개인에 있어서는 개인 수행여건이 보장받게 되어,
좀 더 집중된 수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규율과 함께 전체 대중의 의사결정을 책임지는 소임자를 '입승'이라 하고,
대중을 살펴 어려움이 없게 하는 소임자를 '찰중'이라 이름하며
안거 기간 동안 '대중'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아상'을 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보다는 '대중' 모두가 이로울 수 있는 방향으로 수행공동체가 운영되기에
그 큰 흐름 속에서, 자칫 개인적인 요구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 혹시 자신의 색깔만을 내세운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안거'에 대한 이야기와 '대중수행의 2가지 이로움'을 말한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상(相)"에 대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회에 살던 사람이 출가할 마음을 내어 처음 절에 들어서면, 무조건 삼천배를 하게 하는데..
이는 출가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을 재확인하고, 자기 낮춤의 시작을 삼게 하기 위함입니다.
삼천배를 다 마친 사람들은 삭발식을 거쳐 '행자'라는 이름의 초심 수행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행자(行者)..
'행자'란 수행자의 줄임말로,
보통 사찰에서는 스님으로서 수계를 받기 전, 엄격한 규율생활과 쉼없는 운력을 통해서
사회에서 익혀 왔던 모든 습관들과 我相(아상)을 내려놓는 과정에 있는 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제가 있던 통도사에도 많은 행자님들이 있었고,
또 개울 물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2층 요사채 한 켠에 수행공간인 행자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발심하여 처음 출가하면 이 곳에서 모두 행자생활을 거치게 되는데,
그 곳 안쪽 문 입구를 보면..
"下心(하심)"과 "默言(묵언)" 두 가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下心(하심)이란 말은
여러 선배 스님들에 의해서 누누히 강조되는 말로서,
마음을 낮춘다는 것..! 즉, 상대방보다 항상 낮은 자리에 선다는 뜻입니다.
처음 발심하여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이 덕목이 강조되는 것은,
장차 함께 할 수행공동체로서의 삶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그 보다도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괴로움, 그리고 갖가지 번뇌가 모두 '나'라는 아만 때문에 생겨나기에..
'하심'을 통해서 이를 늘 관조하고 경책토록 하여 마음공부의 기틀을 마련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아만', '아상'이 외부로 드러날 때를 잘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유형에 따라,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이름하여.. 하나는 '직접적인 아상'이고, 또 하나는 '간접적인 아상' 이 바로 그것입니다...
"직접적인 아상"은,
말 그대로 '내 욕심과 자존심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서
자기자랑에서부터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 모두가 이에 해당합니다.
직접적인 아상은 생각과 말을 통해서 그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기에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채기 쉽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인 아상"은 매우 미세하여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을 간접적인 아상이라고 할까요?
저의 개인적인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처음 출가할 적에 저는 모든 아상을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큰절 생활의 힘든 과정을 묵묵히 수행으로 삼으며 거쳐왔다는 것은 그 반증이었지요.
그 때 느껴지는 기쁨에 오신채로부터 모든 육식을 끊고 100일 간을 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수행하던 스님 한 분이 게으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스님의 그 모습이 못마땅하게 여기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수행자로서 저렇게 할 수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것이 제 아상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이 게으른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스님을 게으르게 본 것이었습니다."
스님에 대한 못마땅함이 간접적으로는 제 스스로의 '아상'을 만족시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옳게 수행하고 있어... 나는 깨끗해..."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자기아상이 좀 더 미세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대중 생활 중에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의 예가 그 한 예입니다.
대중생활에서 개인 물건을 잃어 버리고 나면,
처음에는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생각만 하다가, 나중에는 다른 스님들이 의심가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눈 마주치는 모든 스님들이 마치 범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회논리로 볼 때, 이는 당연한 현상이며, 물건 잃어버린 사람은 보호 받아야 할 약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승가에서는 이러한 일로 소란이 일면, 물건 잃어 버린 스님을 참회시키도록 합니다.
수행하는 입장에서 마음에 중심을 두고 엄밀히 살펴보면,
물건을 잃어 버렸다는 피해의식..
자기는 물건을 잃어버린 피해자이고, 다른 대중들 중에 누군가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불특정의 다수 대중을 간접적으로 매도하여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대중에게도 피해가 되고,
수행하는 스스로에게도 간접적 아상이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피해자를 참회하게 하는 것은
'자신은 피해자'라는 미세한 "자기아상"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방법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아상'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작용되는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열거할 수 없지만,
최소한 타인에 대한 자기만의 평가만큼은 다시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도반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자기 아상에 기인하여 나온 것인지, 아니면 진정 자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를
분명히 살필 줄 아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눈 먼 僧이 세상이 어둡다고 쓸데없이 투정 몇 마디 해 보았습니다... 인경 拜 -
첫댓글 불대 주말반에서 인경스님 말씀 모셔옵니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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