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에 좋은 치매 케어를 바라며
직원 책읽기와 보호자 책 나눔으로 전달했습니다.
아래는 <사라지고 있지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책 내용 정리입니다.
따스함이 배어 있어 정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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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친 책을 덮고서, 책 표지에 적힌 '완치 없는 삶에 건네는 어느 정신과 의사의 위로'라는 글귀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의사가 풀어낸 치매의 관찰자 혹은 전지자의 시점이 아니라, 치매인(책의 '치매 환자'라는 표현을 바꿈)과 동반하며 삶을 나눈 그 이야기꽃을 흐드러지게 피었기 때문이다. 마침 겨울날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하는 여러 가족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직원 공부로도 나누면서, 겨우내 품은 위로가 한봄처럼 생활 방식으로 고이 싹트길 바란다.
1. 어느 순간부터 치매라는 병보다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존재하고 있지만, 어느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돼 버릴 것'에 대한 무서움으로, 평행우주처럼 떨어져 있다. 비베케 드레브젠 바흐는 치매를 '지구에서 달로 향하는 여행'이라는 은유로 풀었다. 이 여정(the journey)에서 치매인은 먼저 달 여행자 혹은 우주 비행사로서 우리의 선생님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달의 생활 언어를 이해하도록 배우고 적응하면서 계속 함께 할 기회를 얻는다. 치매인을 비롯한 우리 자신이 길 위의 사람(Homo Viator)으로 살고, 때로 그 길 자체가 되기에.
2. 멈춰 있는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 행복감은 찰나에 지나가는 반면 우울한 감정에 빠지면 시간은 점점 느려지고 공간 또한 왜곡되다가 심연 혹은 블랙홀에 빠진 듯 숨 막히는 시공간에 갇힌다. 어느 순간 서로 다른 세계로 분리되어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이런 단절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부르면서 다발성 통증, 피부의 이상 감각, 불면, 소화 불량, 심장의 두근거림과 같은 신체 증상에 압도된다. 즉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시간이 멈춰버린다. 한편 과도한 신체 증상의 호소는 가족 사이에 더 소외로 고립되고 더는 희망이 없다. 우울증에 치매가 진행되면 현실을 직시해야 할 시야를 잃는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를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 잠시 고통이 무뎌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로지 자신만 이 세계에 남아있을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한다.
3. 마치 220볼트로 작동하는 TV에 그보다 약한 전력만 흘러 전원이 켜지지 않는 것처럼, 알츠하이머로 뇌의 동기와 의욕을 담당하는 부위인 동기회로에 문제가 생기면 무감동증이 나타난다. 우울증에서 보이는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 불면증, 식욕 변화, 고통의 호소도 없다. 따라서 무의식적 심리나 감정을 달래는 접근이 아닌 '문간에 발 들여놓기'로 작은 긍정적 행동이 동기회로를 돌릴 연료가 된다. 즉 평범하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삶의 방식을 이해함으로써 힘을 찾을 수 있다.
4. 하세가와 가즈오가 전하는, 치매인을 돌보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은 '서두르는 것'이다. 재촉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막는다. 우리 사이에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케어자는 마음속으로 7초를 세면, 그 치매인은 마치 방금 들었다는 듯 대답한다. 시간은 7초의 틈을 두고 흘러간다. 서두르지 않는 수많은 선택이 이어지면 '느리게 사는 삶'이 된다.
5. 치매인의 현실 부정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방법 즉 누군가 훔쳐 갔다는 믿음을 갖는다. 망상은 현실 부정을 기반으로 하는 잘못된 신념이기에, 사고의 수준에서 설득하고 교정하려 하면 더욱 자극할 뿐이다. 망상에 휩싸인 치매인은 상대방이 자신을 이상하게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평범했던 현실을 잊어버린 상실감을 휩싸여 있다. 따라서 일단 망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돌린 후 감정을 읽어주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망상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 감정이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또한 파국 반응으로, 때때로 본인조차도 화가 난 이유를 알지 못해 며느리를 향해 화가 뜬금없는 쏟아진다. 분노의 이면에는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다. 외도 망상에서, 아내의 외도에 대한 초조함 아래에는 홀로 남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6. 엄마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웅크리고 있는 불안을 투사할 애착물을 찾는다. 더불어 수집으로, 처음 겪는 자신과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물건 안에 깃든 그동안 익숙했던 자신만의 평범한 세상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치매인은 평범한 것들이 하나씩 지워져 가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쌓고 모으는 저장 강박을 갖는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불안의 내용은 사라졌지만, 그 경험에 기인한 감정만 남는다. 자식이 옆에 있기에 불안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복적인 행동과 말, 감정에 귀를 기울여 욕구를 읽어내고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부드러운 표정과 따뜻한 스킨십으로 안심시킨다. 예측 가능한 생활의 틀을 만들어줌으로써, 무료함이 불안감을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7. 시신경 교차 상핵의 퇴행으로 수면 주기 장애가 유발하지만, 밤이 되면 자신을 확인시켜 줄 상황과 대상이 없기에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찾는다. 이는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이다. 더불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겪는 꿈과 환상에 대한 경험(ELDVs: End of Life Dreams and Visions)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무조건적 사랑을 다시 느끼고 꿈속에서 돌아온 고인을 통해 다시 소중한 사람이 되어 위안을 얻는다.
8. 우리의 시각은 친숙한 사람의 얼굴 외양 등 특징을 신경 신호로 바꿔 측두엽에 있는 방추이랑에 보낸다. 그리고 편도체에서 감정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착오 망상을 일으키는 카그라스 증후군(1923년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카그라스가 첫 보고)으로 편도체와 연결이 끊겨 친숙함이 낯섦으로 바뀐다. 따라서 시각이 아닌 청각 자극을 서로 길이 달라 편도체와 잘 연결되어 있기에 전화로 친숙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바로 알아챈다.
9. 치매 할머니들도 활기가 도는 때가 있다. 그건 바로 뒷담화할 때이다. 남편이랑 시어머니 흉보는 이야기는 여성 사이에선 만국 공통어다. 살아온 각자의 고단했던 무용담으로 다른 사람의 공감을 통해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며,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낀다. 결핍된 자기 이전의 또 다른 자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10. 케어자의 희생과 노력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취급받을 때, 돌보는 사람의 마음은 자신을 부정당한 고통과 유사하다. 힘든 현실과 내 복잡한 심경이 어느새 사명감과 열정을 무디게 만들고, 어떤 때는 두려움에 뒷걸음치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만남이 이어지다 보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나를 다독이고 있는 건 치매인이었다. 아마 그건 그들이 오랜 시간 어른으로 살아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다는 느낌'이다. 자존감 이전에 존재감으로 자신의 성장과 이에 따라 생각의 확장과 함께 변할 수 있다.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며 자신의 시간을 기다리는 힘 또한 존재감의 원천이다. 희망은 바로 살아가는 시시포스의 걸음에 있다.
11. 삶의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말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고 있나요?" 아이에게 아버지는 세상을 보여주는 창으로, 딸은 아버지를 통해 자기 내면의 아니무스를 품고 조화를 이뤄간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치매가 찾아온 순간부터, 아버지는 딸의 삶을 옥죄는 사람이 됐다. 자기 옆에서 아무 근심 없이 놀고 있는 딸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버지와 아집에 가득 찬 허약한 노인으로 기억하는 딸 사이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의 공백이 있다. 자식은 그 낯섦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싶고, 반대로 부모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기 싫다. 그래서 짐이 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딸을 위해 선택하면서 스스로 납득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 방식이다. 단지 당신은 자식이고, 당신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었을 뿐이다.
12. 병의 발생에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하면 안 된다. 무엇을 하지 못해서 병이 생겼다는 막연한 죄책감과 후회에 빠질 필요가 없다.
13. 윌리엄 어터몰렌(William Utermohln, 1933-2007)의 자화상 변화에서 알 수 있듯 치매는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케어자는 치매인이 어떤 감정과 표정에 잘 반응하는지 알고, 어떤 방식의 감정적 소통을 편안하게 여기는지 고민해야 한다. 삶의 문제는 처음에는 전체적인 모양을 알 수 없는 낱개의 퍼즐 조각 같다.
14. 동물에게 귀소 본능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노스탤지어(향수)가 있다. 개인의 노스탤지어가 자극될수록 연대감, 자존감, 삶의 의미, 긍정성이 더욱 회복된다. 이 여정 중,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과정이다. 죽음은 단지 그 순간 삶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물어보고 상기시킬 뿐이다.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15. 정작 우리 마음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투르다. 남의 마음만 헤아리다가 내 마음이 지쳐가는 것도 모른다. 또한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과 도움받고 있다는 느낌은 한 끗 차이다.
_사라지고 있지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장기중, 웅진지식하우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