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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 37:1-14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입니다.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일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선다'라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을 안고 다시 일어나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 우리의 여건이 어떻든 주님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갔더니 국가의 도덕적 풍조와 사회의 도덕적 풍조가 변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른 종교,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에 뭔가의 충격을 주어야합니다. 이 땅에 거룩한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오늘의 내 행위가 미칠 미래의 결과를 예언하는 일입니다. 아직 이 땅에 증거 되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오늘의 내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하는 미래의 결과를 예견하는 일,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멋있는 겁니다. 이것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지만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성령의 권능에 붙잡혀서 소극적인 행동과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빠져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생각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갑니다.
에멀슨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 땅은 기회의 땅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과연 지금 우리는 희망과 기회의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이 땅의 정치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까? 이 땅의 경제가 희망과 기회를 주고 있습니까? 사회 도덕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소위 빛과 소금이요,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 오늘 이 땅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절대적인 혼돈의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혼돈, 경제의 혼돈, 도덕적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이 땅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이 아무리 절망적인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죄악으로 캄캄했던 어둠의 시대에도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 민족의 꿈이 있습니다.
유태인 소녀 작가가 나치의 공포시대를 다락에 숨어살던 체험을 쓴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드디어 숨어있던 은신처가 발각되어 게쉬타포가 문을 부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올 때, 아버지 옷토 프랑크가 조용히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공포 속에 살아왔으나 지금부터는 희망을 품고 살게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실 때 어떤 생각과 환경을 가지고 나오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주 앞에서 말씀을 듣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 속에 거룩한 희망을 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거룩한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내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거룩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랑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잘 왔노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룩한 희망을 품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앞 뒤 좌우를 돌아보시면서 "이제부터는 희망을 품고 사세요!"라고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이스라엘이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은 사로잡혀 갔던 암울한 시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은 온 세계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했던 아름답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은 짐승들이 드나들게 되고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만을 의지할 것을 외쳤습니다. 그 세월이 자그만치 200년 동안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 많은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기근과 한발과 재난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귀를 막고 예레미야를 돌로 쳐 죽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결국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을 빌려 채찍을 드십니다. 그리고 유대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개처럼 끌려갑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포로로 질질 끌려갑니다. 바벨론에 붙들려 간 그들의 삶은 한마디로 비참, 그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없는 종의 삶입니다. 물질은 궁핍하고 가난합니다. 여기 가도 저기 가도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소망이 없다고, 이제 이 민족의 앞날은 끝났노라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이 섰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슬픔과 절망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국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느끼는 슬픔과 그들이 사랑하던 예루살렘 성의 함락으로 인한 공포와 바벨론에서의 압제로 인해 그들은 극심한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고 고립되었다는 느낌은 그들이 최악의 상태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부서졌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 이국 땅에 포로로 잡혀 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극심한 가난이 그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절망을 갖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이 가장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 그들이 끝없는 나락에 떨어져 절망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다는 이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더 깊은 절망감을 갖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유가 어떻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희망의 말을 전하기 위해 온 에스겔은 그 말씀을 전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은 어쩌면 그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절망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에스겔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희망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었을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찬란한 새 아침이 밝아오는 것처럼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이 희망을 품고 일어날 것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겔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에스겔도 이들처럼 동일한 절망감을 경험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겔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떻게 절망적인 상태가 희망적이 될 수 있는지를 에스겔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를 교육의 현장으로 불러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에스겔아,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에스겔을 사로잡으시고 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골짜기에는 사방으로 눈이 닿는 곳까지 얼마나 많은 뼈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 각각 앙상한 마른 뼈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아도 그것들은 오랫동안 뜨거운 태양에 노출되어 바짝 말라 버린 인간의 해골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뼈는 무엇을 말합니까? 절망을 말합니다. 죽음을 말합니다. 허무함을 말합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없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뼈가 심히 많다는 말은 절망의 상태가 온 백성에게 퍼져있었음을 말합니다. 이 절망은 어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전 민족적인 참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뼈들이 아주 말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한 가닥의 희망도 없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 뼈들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절망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뼈들이 온 지면에 흩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뼈는 본래 땅속에 묻혀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들이 온 지면에 흩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수치가 열방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 비극은 7년 동안 계속되어지고 있었습니다.
물 없는 모래땅을 사막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없는 마른 나무를 고목이라고 합니다. 살이 빠지고 뼈가 마른 상태를 사경에서 헤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이 앙상한 뼈들은 7000만 내 민족입니다. 굶주린 내 동포들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한국 교회요, 내 교회입니다. 빈들의 마른 풀 같이 시들어버린 내 영혼일 수 있습니다. 한없는 문제를 안고 있으나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내 가정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입니다. 세계 앞에서 커다란 수치를 당하고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백성과 위정자들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입니다. 부흥이 멈추고 예배가 메마르고 전도의 문이 닫혀졌습니다.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샤머니즘 무속신앙에 물들어져 있습니다. 영적 갈급함 속에서도 몸부림칠 줄을 모릅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고 찬송이 없습니다. 바로 이 한국 교회가 마른 뼈들의 골짜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나야 합니다. 주님 앞에 찾아 나올 때마다 드려지는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의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타락한 우리의 허울들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거룩한 신앙의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로 이 도시를 태우고 이 민족을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건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골짜기 저 골짜기마다 수북히 쌓여 굴러다니는 마른 뼈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선지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고 있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안타까와하는 남편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내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진리의 오묘한 세계를 맛보며 영광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목회자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두 눈이 뽑힌 채 질질 끌려가는 지도자를 쳐다보아야 했던 백성들처럼, 본이 되지를 못하고 당리당략에 빠져 이리 저리 휩쓸려 다니는 원칙없는 지도자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 땅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여러분, 가령 산소 호흡기를 꽂고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싹 마른 뼈들을 향하여 "여기 희망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는 것은 쉬운 대답이 아닙니다. 어떻게 뼈들이 살수 있겠습니까? 무덤에서 송장이 일어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질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묻고 계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말씀은 너희 민족의 해방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너의 이성과 경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에 포로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물음 앞에 에스겔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이 민족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살고 못 살고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하신다면 우리에게 무슨 두려움과 걱정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께서 아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더니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던 뼈와 뼈가 연결되고 거기에 힘줄이 붙으면서 살과 가죽이 덮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생기가 없는 마른 뼈들을 향하여 또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뼈들을 살려 내라." 그랬더니 마른 뼈들의 몸에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렇게도 황무하고 절망적이던 마른 뼈들이 완전하고 강력한 힘과 조직을 갖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을 하시면 아무런 소망과 희망이 없는 뼈들이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도 아닌 강력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던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시니까 홍해를 가르고 민족을 이끄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묻고 계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 뼈들에게 희망이 있느냐? 너희 민족에게 희망이 있느냐?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느냐? 영신교회에 희망이 있느냐? 그리고 그 희망을 너에게 걸어도 좋으냐?" 라고 말입니다. 이 물음 앞에 저와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아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 사람의 방법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이렇게 마른 뼈와 같고 소망이 없고 절망밖에 없지만, 그래서 어떤 희망도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늘 역사 하셨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할 때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노인을 불러 백세에 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 자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큰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사렙다 과부가 다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생명의 기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는 마지막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할 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희망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뼈들이 달라붙고 힘줄이 붙고 살이 붙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동감 넘치는 예배를 창출할 수 있습니까? 말씀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령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주님 앞에 찾아 나올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가정에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믿음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붙들어 사용해 주셔야만 여러분의 가정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이 강당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생기가 없는 나무는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나무는 마침내 죽고 말 것입니다. 죽은 고기를 보십시오. 물이 흐르는 데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으면 작은 피리새끼라도 폭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이 생명의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믿음에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부패했을지라도 거기에 편승하지 않는 믿음 있는 성도를 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산 믿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바칠 수 있습니다. 나의 향유 담은 옥합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산 믿음이 있어야 교회의 분부를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피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나의 기도에도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가 없으면 응답도 없고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죽으면 발전도 부흥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십년을 예수 믿어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기도에 생기가 없으면 생활이 죽고 신앙 인격이 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창조의 종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온 세상을 만들어 주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려내는 종교입니다. 창조가 없는 종교, 부활이 없는 종교는 부도 수표입니다.
여러분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펄벅 여사를 아십니까? 그의 작품 가운데 '어머니의 초상'이라고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펄벅 여사는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22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륙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본국과의 교통이 두절되어지고 아무런 연락도 되지 않은 채 굶주림과 많은 생명의 위험 속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합니다. 여기서 일곱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가운데 네 아들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리고 세 아들을 키워가는데 어릴 때 보았던 그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펄벅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어머니의 얼굴 속에서 고통스러운 모습을, 우울한 어머니의 노래를, 어머니가 꾸며준 우리의 방에는 어두운 그림들을 본적이 없다. 내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절망적인 이야기를 내가 들은 적이 없다. 언제나 희망이 넘치는 믿음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우리에게 들려주시곤 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펄벅 여사 어머니의 모습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곤고한 삶이 힘드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힘에 버거우십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마른 뼈들이 살아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외치십시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뼈들을 살려 내라." 그리고 절망스러운 얼굴을 걷어치우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에서 우울한 노래, 슬픈 노래를 멈추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서 어두운 그림들을 다 걷어치우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가운데 절망의 이야기, 근심의 이야기를 멈추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오늘 에스겔의 외침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절규입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에라도 우리는 소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른 뼈에도 소망이 있다고!"고 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성령 안에서 환한 웃음을 선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캄캄한 인생의 밤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등불을 밝혀주어야 합니다. "여기 길이 있다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희망이 있다고. 말씀을 들으면 당신과 당신의 가정이 살아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있었던 삼성과 LG의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 6차전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 이야기를 다시 전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9회 말 LG는 9―6으로 리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두들 7차전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고 삼성 더그아웃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짓게 깔렸습니다. 9회 말의 선두 타자 김재걸이 LG 투수 이상훈에게서 2루타를 뿜어냈지만 다음 타자 강동우는 맥없이 삼진으로 물러났습니다. LG의 승리는 바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다음 타자 브리또가 볼 넷으로 나가고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 타율 1할의 부진한 기록을 낸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9회 말의 기적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관중들의 연호를 받으며 들어선 이승엽은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LG의 '야생마' 이상훈의 2구를 통타, 오른쪽 담장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리고 이승엽의 감격을 이어 받은 마해영은 LG의 바뀐 투수 최원호의 3구째 직구를 노려 우측 펜스를 넘겨버렸습니다. 10대9의 극적 역전승.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대 역전극에 스탠드의 대구 팬은 그대로 울어버렸습니다. 20년 세월을 절치부심해 온 사자들도 그라운드에서 감격의 눈물을 뿌렸습니다. 그날의 한국시리즈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20년의 눈물과 기쁨, 좌절과 희망이 점점히 박혀 있는 새 역사를 썼습니다. 9회 말의 절망이 역전되는 감격적 스토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절망과 좌절에 익숙해져 역전의 의지를 포기해 버리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성공 뒤에는 그와 비례하는 실패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패를 당할 때마다 그 곳에 숨겨진 성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물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뼈들을 쳐다보며 일어서는 거대한 군대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성공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른 뼈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그 희망을 외치십시오. 뼈들이 일어나는 거대한 군대를 꿈꾸며 당당하게 승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