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24일 한문반(중용.고문진보)의 회원들이
전주 한옥촌.강암서예관.경기전.풍남문과 진안 마이산을 다녀왔다.
거창휴게소
거창의 관광지(사인보드)
명승 거창 수승대(명승53호) 거뷱바위와 현수교는
SBS연속극 그겨울 바람이 분다(조인성.송혜교 주연)가 촬영되었고, 그풍광이 화제가 되었다.
월성계곡 일원은 MBC 연속극 아빠 어디가 의 촬영지로
이곳은 남덕유산 자락에서 시작되는 서출동류 물줄기를 따라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진안 마이산 휴게소에서 본 마이산의 원경
진안 마이산 휴게소1
전주 한오마을 입구에서 관광객이 인증샷을
여학생들이 교복을 빌려입고 인증샷을...
요즈음은 이런 교복은 추억으로만...
교동 한복집으로 대여를 해준다고...
한복을 입고 한옥촌을 구경하러 다니는 학생들을...
전주 한옥촌의 돌길2
강암 서예관
아석재(我石齋)(전주 완산구 전주천동로(강암 서예관 옆)는 이곳 전주 한옥마을에서 작품생활을 했던
서예의 대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년-1999년)이 살았던 집의 당호로 깨끗한 산과 물사이 즉
자연에 살고자하는 마음을 뜻한다. 강암을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고 일컫는 것은 그의 의관이 전통적인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일상과 정신세계가 바로 선비였기 때문이다. 강암의 선친 유재 송기면
((1882년-1956년)선생은 간재(艮齋)전우(田愚)의 제자로 금재 고재와 함께 호남의 삼재로 불렀다.
김제의 벽산면 출신으로 오체와 사군자를 폭넓게 연구하였고 전통적 서법을 현대적 차원으로 승화시
키는데 새경지를 이룩한 서예인으로 알려졌다.
강암 서예관
천자문서
중국 양나라 주흥사(周興詞)가 찬하고
강암 송성용 선생께서 80의 나이에 쓴 작품이다. 종이를 이어붙이지 않고 한장에 썼다.
금오산 향일암(강암 송성용 작품)
토함산 석굴암(강암 송성용 작품)
해남 대둔사 일지암(강암 송성용 작품)
내장산 내장사(강암 송성용 작품)
강암은 정신이다
죽수이수(竹瘦而壽).석추이문(石醜而文).임술춘우중(壬戌春雨中) 강암(剛菴)-위
대나무는 깡마르게 여위었지만 장수하고, 돌은 비록 못생겼지만 문기가 있다.
임술년(1982년)에 봄비속에서 강암이 그리다.
고운선생 시
추풍유고음(秋楓惟苦吟).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홀외삼경우(惚外三更雨).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
가을바람이 불어 나로 하여금 아픈시를 읊조리게 하는데 세상에는 내마음을 알아주는 이 참으로 드물구나.
때는 삼경 창밖엔 비가 내리는데, 등잔불 앞에 앉은 내마음은 만리길 고향으로 달려가네.
무진(戊辰)(1988년) 추절(秋節) 강암(剛菴)-아래
죽림도(竹林圖)
화연아녀자(華硏兒女姿)-꽃의 고운 모습은 마치 아녀자의 자태와 같아서
영락일하속(零落一何俗)-한대 고왔다가도 쉬이 시들어 버린다네.
죽비군자덕(竹比君子德)-대나무는 군자의 덕에 비할 만하니.................
중략
지상월춘오숙(枝上月春烏宿)-대나무 가지위로 밝은달이 떠올라오고
여하자탈(如下姿脫)-그 대나무 숲에 새들이 잠들어 있네.
무진 개천절 강암 송성용사(戊辰 開天節 剛菴 宋成鏞寫)
산정일장(山靜日長)-강암(剛菴)
산은 고요하고 하루 해는 길어
산정일장은 옛 글에
산정사태고(山靜似太古) 일장여소년(日長如少年)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줄여서 산정일장(山靜日長)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행시차심망물아(幸是此心忘物我).갱종하처멱신선(更從何處覓神仙)-강암팔십옹
다행히도 이 마음이 사물과 나 사이의 모든 차별을 잊었으니
다시 어느곳으로 가서 신선이 되는 길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숙로미희산조어(宿露未晞山鳥語).춘풍불진야화명(春風不盡野花明)-강암
간밤에 내린 이슬은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새들은 지저귀고
쉼없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들꽃은 환하게 피어나네.
논어 윤집궐중(允執厥中)3
임신단양절(壬申端陽節).서어아석재(書於我石齋).강암팔십옹(剛菴八十翁)
그 중용의 도리를 정성을 다해 잡도록 하라.
임신년 단오절에 아석재에서 쓰다. 80세의 강암 늙은이가 쓰다.
윤집궐중(胤執厥中)-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논어 요왈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요왈(堯曰)-요임금이 말씀하셨다. 자이순(咨爾舜)-아 순아!.
천지역수재이궁 윤집궐중(天之歷數在爾躬 允執厥中)
-하늘의 운수가 너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
사해곤궁 천록영종(四海困窮 天祿永終)
-사해의 백성들이 곤궁해지면 하늘이 주시는 임금의 복록도 영원이 끊어질 것이다.
이 말은 중국 고대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임금이 왕위를 순임금에게 물려줄 때 부탁한 말이다.
훗날 순임금 역시 우임금에게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는다.인심유위(人心唯危).도심유미(道心唯微).유정유일(唯精唯一)
윤집궐중(允執厥中)고 했다. 여기서의 가운데란 시간과 공간과 상황에 딱히 알맞게 행동
한다는 뜻이다. 즉 중용(中庸)을 뜻한다.
전주 전동성당(사288호)(완산구 전동)
이 성당은 조선시대 순교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15년(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 바오로 윤지충과
야고보 권상연 그리고 순조원년(1801년)에 호남의 첫사도 아우구스티노 유항검과 프란치스코 윤지헌
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됐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908년 프랑스 신부
보두네가 성당 건립에 착수해서 1914년에 완공했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의 이 건물은 인접한 풍남문.경기전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융합의 상징
이 되고 있다.
殿洞聖堂의 내부
2014년 전주교구 순교복자24위 명단4
전주 풍남문(보308호)남문(완산구 풍남문 3길)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
재란 때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44년(1768년)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하였다. 풍남이란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위에 세운 누각 윗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된 점이 특징적이다. 도심에 자리한 단아한 성문에서 옛 전주성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풍남문의 남문(호남제일성)5
전주 경기전(사339호)(완산구 태조로)(사인보드)
이 곳 경기전 일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경기전을 비롯하여 많은 역사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본래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많은 부속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절반의 땅을 잃고 부속건물은 철거되었다. 이후 점차
복원하여 옛모습의 일부나마 되찾은 경내에는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묻어두었던
태실과 그것을 기념하는 비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다.
경내의 뒷쪽에는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셔둔 조경묘가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의 입구를 통과하여
경기전으로 들어가는 일행으로 홍살문을 지나고 있으며
이문을 통과하면 경기전 본당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전이 있는 곳으로6
한국관(한옥마을점)
한국관에서 회원들과 전주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으며7
(2016.10.24)
첫댓글 몇년 전에 한옥마을과 경기전을 돌러 볼 기회가 있었는데 더 잘 조성해 놓아서 잘 보았다네
한문반에서 1년에 한번 야외답사를 하는데 처음 참석했다네~~~~~~
난 옛날 세밀하게 본 곳이지만 회원
들과 함께 정도 쌓아가면서 여해을
하니 좋은 하루를 보낸것 같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