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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범수 채택열전 - 蔡澤
채택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사방에서 유학했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의 왕에게 유세하여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그는 당거(唐擧)를 찾아가서 관상을 보이면서 “제가 듣기로 선생께서 이태(李兌)의 관상을 봐주면서 그에게 ‘100일 안에 나라 정권을 잡는다.’고 했다는데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당거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채택이 “그럼 제 관상은 어떻소?”라고 묻자 당거가 그를 꼼꼼히 본 다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매부리코에 목보다 높은 어깨, 불거져 나온 이마, 복상투처럼 새긴 얼굴, 쭈그러진 콧대에 다리마저 활처럼 휘어 있군요. 제가 듣기에 ‘성인의 상은 봐도 모른다.’고 하던데 아마 선생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채택은 당거가 자신을 비웃는 줄 알고는 “부귀는 본디 갖고 태어나는 것, 나는 수명을 모르니 그것을 듣고 싶소.”라고 했다. 당거가 “선생의 수명은 지금부터 43년을 더 살 수 있소.”라고 했다. 채택이 웃고는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떠나면서 자신의 마부에게 말하기를 “내가 쌀밥과 고기반찬에 좋은 말을 타면서 황금으로 된 도장을 품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매고 왕 앞에서 절을 올리면서 녹봉을 받아 부귀하게 살 수 있다면 43년이면 충분하지”라고 했다.
채택이 당거와 헤어져 조나라로 갔으나 쫓겨났다. 한나라와 위나라로 가다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밥 짓는 도구까지 빼앗겼다. 그런데 응후가 추천한 정안평과 왕계가 모두 진나라에 큰 죄를 짓는 통에 응후가 속으로 죄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채택은 바로 서쪽 진나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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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見<昭王>, 使人宣言以感怒<應侯>曰 “<燕>客<蔡澤>, 天下雄俊弘辯智士也. 彼一見<秦王>, <秦王>必困君而奪君之位.” <應侯>聞, 曰 “五帝三代之事, 百家之說, 吾旣知之, 衆口之辯, 吾皆摧之, 是惡能困我而奪我位乎?” 使人召<蔡澤>. <蔡澤>入, 則揖<應侯>. <應侯>固不快, 及見之, 又倨, <應侯>因讓之曰 “子嘗宣言欲代我相<秦>, 寧有之乎?” 對曰 “然.” <應侯>曰 “請聞其說.”
장차 소왕을 만나려고 사람을 시켜 자신을 자랑하여 응후의 화를 돋우어 말하기를, “연나라 유세객 채택은 천하의 호걸로서 변론에 뛰어나고 지혜로운 인물입니다. 그가 한번 진나라 왕을 만나기만 하면 진나라 왕은 반드시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어 당신의 지위를 빼앗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응후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오제(皇帝 顓頊 帝嚳 堯 舜)와 삼대(夏 殷 周)의 일과 제자백가의 학설을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의 변론도 다 물리쳤다. 그가 어떻게 나를 궁지에 몰아넣어 내 지위를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채택을 불렀다. 채택이 들어와서 응후에게 읍을 했다. 응후는 처음부터 불쾌했는데 만나보니 또한 태도가 거만하므로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는 일찍이 나를 대신하여 진나라 재상이 된다고 큰 소리를 친 모양인데 어찌 그렇게 말 할 수 있소?”하니, 채택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응후가 말하기를, “그 말이나 들어봅시다.” 했다.
<蔡澤>曰 “吁, 君何見之晩也! 夫四時之序, 成功者去. 夫人生百體堅彊, 手足便利, 耳目聰明而心聖智, 豈非士之願與?” <應侯>曰 “然.” <蔡澤>曰 “質仁秉義, 行道施德, 得志於天下, 天下懷樂敬愛而尊慕之, 皆願以爲君王, 豈不辯智之期與?” <應侯>曰 “然.” <蔡澤>復曰 “富貴顯榮, 成理萬物, 使各得其所; 性命壽長, 終其天年而不夭傷; 天下繼其統, 守其業, 傳之無窮; 名實純粹, 澤流千里, 世世稱之而無絶, 與天地終始: 豈道德之符而聖人所謂吉祥善事者與?” <應侯>曰 “然.”
채택이 말하기를, “어,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아직도 모릅니까. 대체로 네 계절은 차례대로 제 할 일이 끝나면 물러납니다. 대저 사람도 세상에 태어나면 신체가 건강하고 팔다리가 성하고 눈과 귀가 밝고 마음이 지혜로운 것이 어찌 선비가 기대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응후가 말하길, “그렇소.” 했다. 채택이 말하기를, “인(仁)을 바탕으로 하여 의(義)를 지키며 도를 시행하여 덕을 베푼다면, 천하에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천하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흠모하여 군주로 받들고자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찌 변설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선비가 기대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응후가 말하기를, “그렇소.” 했다. 채택이 다시 말하기를, “부귀와 영화를 같이 누리며 세상의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각기 제 자리를 찾게 하고, 수명이 길어서 일찍 죽지 않고 하늘이 준 나이를 누리며, 천하 사람들이 그 전통을 물려받아 그의 사업을 지켜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고, 이름과 실제가 참되어서 그 은덕이 천리에 흘러넘치며 대대로 이를 칭송해서 끊이지 않게 하여 천지와 함께 시작과 끝을 같이한다면, 이야말로 도덕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인이 말하듯 상서롭고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응후가 말하기를, “그렇소.”라고 했다.
<蔡澤>曰 “若夫<秦>之<商君>, <楚>之<吳起>, <越>之<大夫種>, 其卒然亦可願與?” <應侯>知<蔡澤>之欲困己以說, 復謬曰 “何爲不可? 夫<公孫鞅>之事<孝公>也, 極身無貳慮, 盡公而不顧私; 設刀鋸以禁姦邪, 信賞罰以致治; 披腹心, 示情素, 蒙怨咎, 欺舊友, 奪<魏公子卬>, 安<秦>社稷, 利百姓, 卒爲<秦>禽將破敵, 攘地千里.
채택이 말하기를, “저 진나라의 상군과 초나라의 오기와 월나라의 대부 종 같은 사람은 마침내 또한 (선비들이) 바라는 인물이 되겠습니까?” 하니, 응후는 채택이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어 설득하려는 줄을 알아차리고 다시 속여서 말하기를, “어찌 그러기를 바라지 않겠소? 저 공손앙(商君)은 효공을 섬길 때 몸과 마음을 다하였고 나랏일에 힘을 다하여 자기 일은 돌보지 않았소. 그는 형벌을 만들어 간사한 행위를 금하였고 상벌을 믿을 만하게 하여 다스림에 이르렀소. 마음속을 털어놓아 진실한 감정을 보이는 데는 원망이나 허물을 무릅썼고, 옛 친구를 속여서 위나라 공자 앙을 사로잡았으며, 진나라의 사직을 평안하게 하여 백성을 이롭게 했소. 결국에는 진나라를 위하여 적의 장수를 사로잡고 적군을 깨뜨려 영토를 천리나 넓혔소.
<吳起>之事<悼王>也, 使私不得害公, 讒不得蔽忠, 言不取苟合, 行不取苟容, 不爲危易行, 行義不辟難, 然爲霸主强國, 不辭禍凶. <大夫種>之事<越王>也, 主雖困辱, 悉忠而不解, 主雖絶亡, 盡能而弗離, 成功而弗矜, 貴富而不驕怠. 若此三子者, 固義之至也, 忠之節也. 是故君子以義死難, 視死如歸; 生而辱不如死而榮. 士固有殺身以成名, 唯義之所在, 雖死無所恨. 何爲不可哉?”
오기는 (초나라) 도왕을 섬길 때 사사로운 이익으로 나라의 이익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헐뜯는 말로 충성스러운 신하를 가릴 수 없도록 하며, 말로 남에게 아부하여 환심을 사거나 행동으로 비굴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게 하고, 위험하다고 행동을 바꾸지 않고 의로운 행동이면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며 군주를 천하의 우두머리로 만들고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재앙도 마다하지 않았소. 대부 종이 월왕(句踐)을 섬길 때 군주가 곤경에 처하고 치욕을 당하더라도 충성을 다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군주의 대가 끊기고 나라가 망하려고 해도 재능을 다하여 떠나지 않으며, 공을 이루더라도 자랑하지 않고, 부귀한 몸이 되어서도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않았소. 이 세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의로움의 극치요 충절의 모범이오. 그래서 군자는 의로움을 위해서 어려운 일을 하다가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죽는 것을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쉽게 여기고, 살아서 치욕을 겪는 것보다 죽어서 영예로운 편이 낫다고 생각했소. 선비란 본래 자기 몸을 죽여서 이름을 남기니 정의를 위해서라면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소. 어찌 (세 사람이 선비가 바라는 대상이) 될 수 없겠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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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澤>曰 “主聖臣賢, 天下之盛福也; 君明臣直, 國之福也; 父慈子孝, 夫信妻貞, 家之福也. 故<比干>忠而不能存<殷>, <子胥>智而不能完<吳>, <申生>孝而<晉國>亂. 是皆有忠臣孝子, 而國家滅亂者, 何也? 無明君賢父以聽之, 故天下以其君父爲僇辱而憐其臣子.
채택이 말하기를, “군주가 성스럽고 신하가 어진 것은 천하의 큰 복입니다. 군주가 현명하고 신하가 정직한 것은 나라의 행복입니다.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성스러우며 남편이 성실하고 아내가 정숙한 것은 가정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비간은 충성스러워도 은나라를 보전하지 못했고, 오자서는 지혜롭지만 오나라를 온전하게 하지 못했으며, 신생은 효성스러워도 진(晉)나라는 어지러웠습니다. 이처럼 모두 충신이고 효자이지만 나라가 망하고 집이 어지러워진 까닭은 무엇입니까? 명철한 군주와 현명한 아버지가 없어서 충신과 효자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그 군주와 아버지를 더러운 사람이라 하여 하찮게 여기고 그 신하와 자식을 가엾게 여겼습니다.
今<商君><吳起><大夫種>之爲人臣, 是也; 其君, 非也. 故世稱三子致功而不見德, 豈慕不遇世死乎? 夫待死而後可以立忠成名, 是<微子>不足仁, <孔子>不足聖, <管仲>不足大也. 夫人之立功, 豈不期於成全邪? 身與名俱全者, 上也. 名可法而身死者, 其次也. 名在僇辱而身全者, 下也.” 於是<應侯>稱善.
지금 상군과 오기와 대부 종은 신하로서 훌륭했으나 그들의 군주는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 세 사람이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점을 칭송하지만 어찌 불우하게 죽은 것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만약 죽은 뒤에야 충성스럽다는 이름을 얻는다면 미자(微子)를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없고, 공자는 성인이라 할 수 없으며, 관중은 위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이 공과 이름을 세울 때 어찌 완전하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범이 될 만하지만 몸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그 다음이고, 이름은 욕되어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응후가 말하기를, “옳은 말이오.”라고 했다.
p 210 / 15
<蔡澤>少得閒, 因曰 “夫<商君><吳起><大夫種>, 其爲人臣盡忠致功則可願矣, <閎夭>事<文王>, <周公>輔<成王>也, 豈不亦忠聖乎? 以君臣論之, <商君><吳起><大夫種>其可願孰與<閎夭><周公>哉?” <應侯>曰 “<商君><吳起><大夫種>弗若也.” <蔡澤>曰 “然則君之主慈仁任忠, 惇厚舊故, 其賢智與有道之士爲膠漆, 義不倍功臣, 孰與<秦孝公><楚悼王><越王>乎?” <應侯>曰 “未知何如也.”
채택은 잠깐 말할 틈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저 상군과 오기와 대부 종이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공을 이룬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굉요(閎夭)가 주나라 문왕을 섬기고 주공이 주나라 성공을 보필한 것도 또한 충성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보면 상군, 오기, 대부 종과 굉요, 주공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을 선비들이 바랄까요?” 하니, 응후가 말하기를, “상군, 오기, 대부 종이 그들만 못하겠지요.”라고 했다. 채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의 군주가 어질어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신임하고, 옛 친구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도를 지킬 줄 아는 선비들과 굳게 사귀고, 의를 지켜 공을 세운 신하를 저버리지 않는 점에서 진나라 효공과 초나라 도왕과 월왕 구천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하니, 응후가 말하기를, “어떤지 모르겠소.”라고 했다.
p 210 / -7
<蔡澤>曰 “今主親忠臣, 不過<秦孝公><楚悼王> 越<王>, 君之設智能, 爲主安危修政, 治亂彊兵, 批患折難, 廣地殖穀, 富國足家, 彊主, 尊社稷, 顯宗廟, 天下莫敢欺犯其主, 主之威蓋震海內, 功彰萬里之外, 聲名光輝傳於千世, 君孰與<商君><吳起><大夫種>?” <應侯>曰 “不若.” <蔡澤>曰 “今主之親忠臣不忘舊故不若<孝公><悼王><句踐>, 而君之功績愛信親幸又不若<商君><吳起><大夫種>, 然而君之祿位貴盛, 私家之富過於三子, 而身不退者, 恐患之甚於三子, 竊爲君危之.
채택이 말하기를, “지금 군주께서 충신을 가까이하는 것은 진나라 효공과 초나라 도왕과 월왕 구천만 못합니다. 당신은 자기 지혜와 재능을 발휘하여 군주를 위해 위태로운 것을 안정시키고 정치를 바로잡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병력을 강화하며, 근심 걱정을 물리쳐 어려움을 이겨내고, 영토를 넓혀 수확을 늘림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군주를 강하게 하고 사직을 높이고 종묘를 빛나게 하여 천하에 누구라고 감히 군주를 업신여기거나 속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군주의 위엄이 국내를 뒤덮어 떨치게 하고, 공적이 만 리 밖까지 드러나 빛나는 이름을 천세까지 전하게 한 점에서는 당신과 상군, 오기, 대부 종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낫습니까?” 하니, 응후가 말하기를, “내가 그들만 못하오.”라고 했다. 채택이 말하기를, “지금 당신의 군주가 충신을 가까이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는 점에서는 효공과 도왕과 구천만 못하고 당신의 공적과 군주의 총애나 신임을 받는 정도도 상군과 오기와 대부 종만 못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봉록은 많고 지위는 높으며 가진 재산은 앞의 세 사람보다 많습니다. 만일 당신이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당신에게 닥칠 근심은 세 사람보다 클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하여 이 점이 위태롭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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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曰『日中則移, 月滿則虧』. 物盛則衰, 天地之常數也. 進退盈縮, 與時變化, 聖人之常道也. 故『國有道則仕, 國無道則隱』. 聖人曰『飛龍在天, 利見大人』.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今君之怨已讎而德已報, 意欲至矣, 而無變計, 竊爲君不取也. 且夫翠鵠犀象, 其處勢非不遠死也, 而所以死者, 惑於餌也. <蘇秦><智伯>之智, 非不足以辟辱遠死也, 而所以死者, 惑於貪利不止也. 是以聖人制禮節欲, 取於民有度, 使之以時, 用之有止, 故志不溢, 行不驕, 常與道俱而不失, 故天下承而不絶.
옛말에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곧바로 쇠약해지는 것은 천지의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가득 차고 쭈그러드는 것이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은 성인의 변함없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나라에 도가 시행되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시행되지 않으면 숨어야 합니다. 성인이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면 덕이 있는 자를 만나기에 이롭다.’라고 말했고, ‘정당하게 얻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원한을 이미 다 갚았고 은혜도 이미 갚았습니다. 마음속으로 하고 싶던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저 물총새, 따오기, 코뿔소, 코끼리는 그들이 사는 곳이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그리 멀리 벗어나 있지 않은데, 그들이 잡혀 죽는 까닭은 먹이를 탐하는 욕심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소진과 지백의 지혜는 욕된 것을 피하고 피살될 위험을 멀리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죽은 까닭은 욕심에 빠져 그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예의를 만들어 욕심을 절제하고,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데도 법도를 두었고, 백성을 부리는 데도 농사철이 아닌 때를 골라 일을 시키는 등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은 지나치지 않고 행동은 교만하지 않으며 언제나 도를 지켜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이 그를 끊임없이 본받아 이어 갔던 것입니다.
p 211 / 7
昔者<齊桓公>九合諸侯, 一匡天下, 至於<葵丘>之會, 有驕矜之志, 畔者九國. <吳王夫差>兵無敵於天下. 勇彊以輕諸侯, 陵<齊晉>, 故遂以殺身亡國. <夏育><太史噭>叱呼駭三軍, 然而身死於庸夫. 此皆乘至盛而不返道理, 不居卑退處儉約之患也.
옛날 제나라 환공은 제후를 아홉 차례나 규합하여 한번 천하를 바로잡았지만, 규구의 회합에서 교만하고 과시하는 뜻이 있어 아홉 나라가 등을 돌렸습니다.
오나라 왕 부차는 군대가 천하의 무적이었지만 용감하고 강하다고 제후들을 업신여겨서 제나라와 진나라를 능멸하려다 결국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했습니다.
하육과 태사교는 큰 소리로 고함을 쳐서 삼군을 놀라게 하였지만 몸은 평범한 사람에게 죽었습니다. 이는 모두 최고에 이르렀을 때 본연의 도리에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모르는 데서 생긴 재앙입니다.
p 211 / 10
夫<商君>爲<秦孝公>明法令, 禁姦本, 尊爵必賞, 有罪必罰, 平權衡, 正度量, 調輕重, 決裂阡陌, 以靜生民之業而一其俗, 勸民耕農利土, 一室無二事, 力田稸積, 習戰陳之事, 是以兵動而地廣, 兵休而國富, 故<秦>無敵於天下, 立威諸侯, 成<秦國>之業. 功已成矣, 而遂以車裂.
저 상군은 진나라 효공을 위해 법령을 정비하여 부정의 근원을 없애고, (공이 있으면) 직위를 높여서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저울을 공정하게 하고 길이를 재고 부피를 헤아리는 것을 바르게 하고, 논밭 사이에 둔덕을 없애 (농경지를 넓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풍속을 통일하였습니다.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여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고, 한 집에서 두 가지 생업을 못하게 하며 농업에 힘써서 식량을 비축하도록 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출동시키면 영토가 늘어나고 전쟁이 없으면 나라가 강해졌습니다. 진나라는 천하에 대적할 나라가 없으며, 제후들에게 위엄을 과시하여 공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공적이 이루어지자 상군은 거열형을 받았습니다.
<楚>地方數千里, 持戟百萬, <白起>率數萬之師以與<楚>戰, 一戰擧<鄢郢>以燒<夷陵>, 再戰南幷<蜀漢>. 又越<韓><魏>而攻彊<趙>, 北阬<馬服>, 誅屠四十餘萬之衆, 盡之于<長平>之下, 流血成川, 沸聲若雷, 遂入圍<邯鄲>, 使<秦>有帝業. <楚><趙>天下之彊國而<秦>之仇敵也, 自是之後, <楚><趙>皆懾伏不敢攻<秦>者, <白起>之勢也. 身所服者七十餘城, 功已成矣, 而遂賜劍死於<杜郵>.
초나라는 땅이 사방 수천리에 이르고 창을 든 군사가 백만입니다. 그러나 백기는 겨우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초나라를 쳐서 한 번 싸워 언과 영을 빼앗고 이릉을 불살랐으며, 두 번 싸워서 남쪽으로 촉나라와 한중을 병합했습니다. 또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강한 조나라를 쳐서 북쪽으로 마복군을 산 채로 묻고 40만 명이 넘는 군사를 장평성 밑에서 모조리 무찔렀는데,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고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떨게 했습니다. 이어서 한단을 포위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했습니다.
초나라와 조나라는 천하의 강국으로서 진나라의 원수였지만, 그 뒤 모두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진나라를 치지 못한 것은 백기의 위세 때문이었습니다. 백기는 몸소 칠십여 성을 항복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적이 이루어지자 칼을 받아 두우에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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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起>爲<楚悼王>立法, 卑減大臣之威重, 罷無能, 廢無用, 損不急之官, 塞私門之請, 一<楚國>之俗, 禁游客之民, 精耕戰之士, 南收<楊越>, 北幷<陳><蔡>, 破橫散從, 使馳說之士無所開其口, 禁朋黨以勵百姓, 定<楚國>之政, 兵震天下, 威服諸侯. 功已成矣, 而卒枝解.
오기는 초나라 도왕을 위하여 법률을 세우고 지나치게 무거운 대신의 권위를 낮추며, 능력 없는 관리를 파면시키고 쓸모없는 직위를 없애며, 필요하지 않은 관직을 줄이고 개인의 청탁을 막았습니다. 또 초나라 풍속을 하나로 통일시키며 백성이 유세하는 것을 금하고, 농부와 군사를 철저히 훈련시켜 남쪽으로는 양주의 월나라를 손에 넣고 북쪽으로는 진과 채를 병합시켜 연횡과 합종책을 깨트려서 유세를 일삼으며 다니는 선비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당파 만드는 것을 금하며 백성을 격려하여 초나라의 정치를 안정시켰습니다. 병력은 천하를 떨게 하고, 위세는 제후들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러나 공적이 이루어진 뒤에는 경국 사지를 찢겨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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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夫種>爲<越王>深謀遠計, 免<會稽>之危, 以亡爲存, 因辱爲榮, 墾草入邑, 辟地殖穀, 率四方之士, 專上下之力, 輔<句踐>之賢, 報<夫差>之讎, 卒擒勁<吳>, 令<越>成霸. 功已彰而信矣, <句踐>終負而殺之.
대부 종은 월나라 왕 구천을 위하여 깊고 원대한 계책을 만들어 회계의 위급한 상황에서 구천을 벗어나게 하고, 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치욕을 영예로 돌리며, 황무지를 일구어 새로운 고을을 만들고 토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으며, 사방의 선비들을 끌어들여 위아래의 힘을 합쳐 현명한 구천을 도와 오나라 왕 부차에게 받은 원수를 갚고 강한 오나라 왕을 사로잡아 월나라가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업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그의 공적은 너무도 분명하고 사람들도 다 그것을 믿었지만 구천은 끝내 그를 저버리고 죽였습니다.
此四子者, 功成不去, 禍至於此. 此所謂信而不能詘, 往而不能返者也.
<范蠡>知之, 超然辟世, 長爲<陶朱公>. 君獨不觀夫博者乎? 或欲大投, 或欲分功, 此皆君之所明知也.
이들 네 사람은 공을 이루고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앙을 입었습니다.
이른바 ‘펼 줄만 알고 굽힐 줄은 모르며, 앞으로 갈 줄만 알고 돌아올 줄은 모르는 사람’이지요. 범려는 이러한 이치를 알아 초연하게 세상을 떠나 도주공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도박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크게 걸어 단판에 승부를 내려 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씩 걸어 천천히 승부를 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도 잘 아는 일입니다.
今君相<秦>, 計不下席, 謀不出廊廟, 坐制諸侯, 利施<三川>, 以實<宜陽>, 決<羊腸>之險, 塞<太行>之道, 又斬<范><中行>之塗, 六國不得合從, 棧道千里, 通於<蜀漢>, 使天下皆畏<秦>, <秦>之欲得矣, 君之功極矣, 此亦<秦>之分功之時也. 如是而不退, 則<商君><白公><吳起><大夫種>是也.
지금 당신은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계책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꾀는 조정 밖에 나가지 않으면서, 앉아서 제후들을 제압하고 삼천(이수, 낙수, 황하)의 이익을 옮겨다가 의양을 충실하게 하고, 양장(羊腸)의 험준한 곳을 끊어 태행산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 다시 (진나라의) 범씨와 중항씨로 통하는 길을 끊어 여섯 나라가 합종할 수 없게 하고, 천리나 되는 잔도를 놓아 촉나라와 한중을 연결하여 천하 제후가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고 당신의 공로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진나라는 조금씩 공을 나누고자 할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상군, 백기, 대부 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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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聞之, “鑒於水者見面之容, 鑒於人者知吉與凶”. <書>曰 “成功之下, 不可久處”. 四子之禍, 君何居焉? 君何不以此時歸相印, 讓賢者而授之, 退而巖居川觀, 必有<伯夷>之廉, 長爲<應侯>, 世世稱孤, 而有<許由><延陵季子>之讓, <喬松>之壽, 孰與以禍終哉? 卽君何居焉? 忍不能自離, 疑不能自決, 必有四子之禍矣.
내가 듣기로는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가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또 옛글에 “성공했으면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화를 입었는데 당신은 어찌 그것을 이어받으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의 인수를 되돌려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도록 하고 물러나 바위 밑에서 냇가의 경치를 구경하며 살지 않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백이와 같이 청렴하다는 이름을 얻고 길이 응후라 불리며 대대로 제후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허유나 연릉의 계자(季札)처럼 겸양하는 마음이 있다고 칭찬을 받으며, 왕자 교나 적송자와 같이 오래 살 것입니다. 재앙을 입고 삶을 마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습니까? 당신은 어느 편에 몸을 두려 합니까? 지금 지위를 떠나는 게 아까워서 차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저 네 사람과 같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易>曰 “亢龍有悔”, 此言上而不能下, 信而不能詘, 往而不能自返者也. 願君孰計之!” <應侯>曰 “善. 吾聞‘欲而不知(止)[足], 失其所以欲;有而不知(足)[止], 失其所以有’. 先生幸敎, <睢>敬受命.” 於是乃延入坐, 爲上客.
<역경>에 “높이 올라간 용에게는 뉘우침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을 모르며, 펴기만 하고 굽힐 줄을 모르고,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을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은 이런 점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응후가 말하기를, “좋은 말씀이오. 내가 들기로 ‘욕심이 그칠 줄 모르면 하고자 하는 바를 잃고,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는다.’라고 하오. 선생께서 다행히 나에게 말씀해 주셨으니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소.”라 하고, 채택을 저택 안으로 맞아들여 상객으로 대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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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數日, 入朝, 言於<秦昭王>曰 “客新有從<山東>來者曰<蔡澤>, 其人辯士, 明於<三王>之事, <五伯>之業, 世俗之變, 足以寄<秦國>之政. 臣之見人甚衆, 莫及, 臣不如也. 臣敢以聞.”
며칠 뒤에 응후는 조정으로 들어가 진나라 소왕에게 말하기를, “산동에서 새로 온 손님이 있는데 채택이라고 합니다. 그는 변론이 뛰어난 사람으로 삼왕의 사적과 오패의 공적과 세속의 변화에 밝으므로 진나라의 정치를 맡기기에 충분한 인물입니다. 신은 지금까지 매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그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도 그만 못하므로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秦昭王>召見, 與語, 大說之, 拜爲客卿. <應侯>因謝病請歸相印. <昭王>彊起<應侯>, <應侯>遂稱病篤. <范睢>免相, <昭王>新說<蔡澤>計畫, 遂拜爲<秦>相, 東收<周室>.
진나라 소왕은 채택을 불러서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 매우 기뻐하면 그를 객경으로 삼았다. 응후는 병을 핑계로 재상의 인수를 내놓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소왕이 억지로라도 응후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려 하니 응후는 병이 깊다고 하면서 끝내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소왕은 채택의 계획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그를 진나라 재상으로 삼고 동쪽으로 주나라 땅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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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澤>相<秦>數月, 人或惡之, 懼誅, 乃謝病歸相印, 號爲<綱成君>. 居<秦>十餘年, 事<昭王>=<孝文王>=<莊襄王>. 卒事<始皇帝>, 爲<秦>使於<燕>, 三年而<燕>使<太子丹>入質於<秦>.
채택이 진나라 재상이 된 지 몇 달 지나서 그를 헐뜯는 자가 있었다. 그는 살해될까봐 두려워서 병을 핑계로 재상의 인수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소왕은 그를 강성군에 봉했다. 채택은 진나라에서 십여 년 동안 머물면서 소왕, 효문왕, 장양왕을 섬기고 나중에는 시황제까지 섬겼다. 그는 연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삼 년 뒤에 태자 단을 진나라에 볼모로 들어오게 했다.
<太史公>曰 <韓子>稱 ‘長袖善舞, 多錢善賈’, 信哉是言也! <范睢><蔡澤>世所謂一切辯士, 然游說諸侯至白首無所遇者, 非計策之拙, 所爲說力少也. 及二人羈旅入<秦>, 繼踵取卿相, 垂功於天下者, 固彊弱之勢異也. 然士亦有偶合, 賢者多如此二子, 不得盡意, 豈可勝道哉! 然二子不困戹, 惡能激乎?
태사공은 말한다. “한비자가 이르기를,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출 수 있고, 돈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진실로 옳은 말이다.
범수와 채택은 세상에서 말하는 뛰어난 변사로서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변론할 수 있는 유세가였다. 그러나 각국의 제후에게 유세하여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의 힘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두루 돌아다닌 끝에 진나라로 들어가자 잇달아 경상(卿相)이 되고 공을 천하에 떨친 것은 참으로 진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의 강하고 약한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선비에게는 역시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사람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범수 채택 열전 5
세상에 쓰임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였으나 마땅히 끌어줄 사람이 없어 위나라 수고의 가신으로 있던 범수는 수고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동행했다. 당시 제나라는 천하에서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던 터라 위나라에서 온 수고 일행에서 쓸 만한 인재를 물색하다 범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고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범수였으나 제나라는 범수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물밑 접촉을 했다. 그런데 이 일을 수고의 질투를 유발했다. 수고는 위나라로 돌아와서 범수가 제나라 사람들과 접촉했음을 위 재상에게 고했다. 위제는 간첩활동으로 오해하여 갈비뼈와 이가 부러지도록 범수를 두들겨 팼다. 맞다 죽겠다 싶어서 범수는 죽은 척을 했고, 그의 몸은 대자리에 싸여 변소에 버려졌다. 이후 술판을 벌린 위제는 객들로 하여금 범수에게 방뇨하게 하여 모욕을 더했다. 범수를 지키던 간수에게 하소연하고, 술취한 위제 덕에 아슬아슬하게 범수는 위제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맞으면서, 대자리에 싸이면서, 변소에 버려지고 취객들의 오줌세례를 받으면서 범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람으로서 당할 수 있는 모욕의 끝닿는 데까지 가본 것이다.
범수의 소식을 듣고 정안평이 도움을 줬다. 범수를 장록으로 이름을 바꿔 숨어 살았다. 위제는 계속하여 범수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범수를 죽이려 했다. 그때 진나라에서 왕계가 위나라에 왔다가 정안평의 소개로 장록(범수)을 만난다. 그리고 범수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비밀리에 진나라에 데려갔다. 진나라에 들어섰을 때 외국에서 온 객을 싫어하는 양후를 만났다. 당시만 해도 진나라의 실세 중 실세였던 양후인지라 범수를 양후의 눈을 피해 숨어야 했다.
진나라 소왕에게 왕계는 범수를 소개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소왕은 범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범수를 스스로를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 내용은 철저하게 충(忠)으로 일관되어 있다. 또 어리석은 군주와 영명한 군주를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고 범수는 진소왕에게 할 말이 많고, 중요하나 만나기 전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렵게 진소왕을 만나게 되는데, 첫 만남에서부터 범수를 진소왕의 아픈 구석을 찌른다. 일부러 내궁을 거쳐 들어가 환관의 꾸지람에 대해 진소왕의 실제적 지위가 선태후나 양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진소왕은 이 소리를 들었다.
진소왕과 대면한 범수를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진소왕의 요청에 세 번이나 "예 예"하고만 답하였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에 진소왕은 세 번이나 범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범수는 진소왕의 간절함을 확인한 후에야, 국가개혁 쪽보다는 외교와 정복사업에 대한 것을 먼저 알려준다. 이것이 이른바 원교근공책이었다.
범수의 원교근공책은 주효했다. 이로써 진소왕은 범수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에, 범수는 드디어 국가개혁을 착수한다. 그 대상은 진소왕의 권력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범수는 모두 4유형의 세력을 거론한다. 첫째, 선태후다. 왕을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유형이다. 둘째, 양후다. 외교 문제도 제멋대로 하고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는다. 셋째, 화양군과 경양군이다. 마음대로 백성들을 벌주고 살육한다. 넷째, 고릉군이다. 정책개정과 관리임용을 제맘대로 한다. 이들의 힘이 커질수록 진소왕의 입지는 약해지고 찬탈의 위험마저 있게 된다. 가장 폐해가 심한 것은 양후라고 지목한다. 이에 진소왕은 범수의 의견을 좇아 선태후는 패출, 양후,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축출했다. 이제 진나라 세상은 응후 범수가 제2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제까지 걸린 시간은 범수가 진나라에 들어온 지 대략 5년의 시간에 경과했을 때였다.
이때 위나라에서 수고가 왔다. 그는 범수가 진나라 재상인 것을 몰랐다. 허름한 옷을 입고 범수가 수고를 찾자, 수고는 옛정을 잊지못해 범수를 대접한다. 그리고 진재상 장록선생을 만나게 다리를 주선해주길 바랬다. 범수를 시치미 뚝떼고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 장록선생과 친하니 기별하겠다 하고 수고를 재상관저까지 동행하여 안내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수고는 너무나 놀랍고 황당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벌을 청한다. 범수는 수고의 모함한 말, 변소에 버려질 때 무심했던 행동, 취객들이 방뇨할 때 모른척 한 일을 거론하며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 수고가 이별을 고할 때 여러 나라의 사신이 참석하는 대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수고에게 소나 말이 먹는 여물을 먹이는 모욕을 준다. 그리고 돌아가는 수고에게 위제의 머리를 보낼 것을 위나라 왕에게 전하라고 분부했다. 이 일로 위제는 조나라 평원군, 위나라 신릉군의 집을 전전하다 결국 자결하였다.
한편 범수를 도왔던 정안평과 왕계는 범수의 천거로 진소왕에게 발탁되었다. 왕계는 하동 군수로, 정안평은 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후에 왕계는 다른 제후들과 내통하다 사형당하고, 정안평은 조나라를 공격하다 포위되자 군사 2만명과 조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응후 범수의 형편이 불안하게 되었으나 진소왕은 범수를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았다.
범수가 좌불안석에 있을 때 채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범수를 능가할 수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범수가 채택을 만났다. 사마천이 이르길 일체변사라고 평한 두 사람의 논변은 화려했다. 채택은 공손앙, 오기, 대부 문종이 선비들이 따를 모범이 될 수 있는가로 화두를 연다. 범수는 채택이 시비를 건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세 사람을 옹호하는 변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업적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그때 채택은 공손앙, 오기, 대부 문종이 신하로서 손색없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들의 임금은 그렇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범수에게 적용하면, 범수가 높은 지위에서 떠날 만한 때라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떠남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성명(=명성)과 공명론을 제시한다. 가장 좋은 것은 성명과 공명을 얻는 것, 두번째는 공명을 얻고 성명은 보존치 못하는 것, 세번째가 성명을 얻고 공명은 치욕을 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에 범수는 크게 공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채택은 본격적으로 범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때가 되었으니 이제 물러나라. 공명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공업(功業)을 이룩한 곳에 오래 머물리 말라"
범수는 드디어 채택의 의견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신병을 핑계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범수의 후임은 채택이 되었다.
공손앙은 조량이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무시했다가 결국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인생에서 기회란 상승세를 탈 때도 필요하지만, 안착하여 편안해질 때도 필요한 것이다. 공손앙에게는 조량이, 범수에게는 채택이 그런 기회를 제공했다. 공손앙은 그 기회를 부여잡지 않았고, 범수를 부여잡았다. 말년의 평온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인생의 복이다. 범수는 그것을 가졌다 하겠다.
사마천은 범수나 채택은 대양(大洋)에서 살아야만 할 큰 물고기로 비유한다. 다른 나라는 좁아서 그 기량을 펼칠만한 세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범수나 채택은 곤궁한 처지에서 많은 번민과 울분을 삭이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것도 공명기의 최정점에서 자리를 털고 버릴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되새긴다.
[네이버 지식백과] 채택 [蔡澤] - 한글 번역문 (사기 : 열전(번역문), 2013.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