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과 약인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업력을 강연으로 삼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원생심이 아무리 절실하고 아무리 강성하더라도 이는 단지 약인에 속한다는 것을 반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도대사께서 끝없이 깊고 넓은 탐욕의 강과 성냄의 강이라고 표현하신 두 강 가운데 ‘4,5치 넓이의 백도’는 자주 탐욕과 성냄의 물과 불에 의해 침습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범부의 이런 미약한 원생심으로도 의외로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업력의 강연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그가 큰 배위에 오르기만 하면, 그의 마음이 아무리 미약하고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아서 바다를 건너지 못할까봐 걱정하더라도 모두 상관없이 반드시 건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만일 그가 큰 배를 타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바다를 건너고 싶고 아무리 용감해도 건널 수 없습니다.
오직 불광만 보일뿐, 자신의 선은 보이지 않는다
‘선범부가 왕생하는 것도 완전히 부처님의 원력에 승탁하는 것이다’에 관해서 몇 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 일반인들은 항상 자신이 닦은 약간의 선행을 중시하다보니, 완전히 육자명호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겸허하고 공손한 염불인은, 자신의 선은 보이지 않고 그가 본 것은 단지 자신의 악뿐이기 때문에 완전히 아미타부처님의 구제에 의지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햇빛 아래에서 촛불의 빛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아직도 촛불의 빛이 보인다면 그것은 당신이 여전히 어두운 방구석에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무량수경』의 끝부분에 이런 경문이 있습니다. 그 당시 아난존자께서는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위신력과 극락세계의 장엄함, 일체 중생이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나서 매우 동경하여 서방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며 아미타부처님께 예배를 드림과 동시에 석가모니부처님께 아뢰옵기를 “세존이시어, 바라옵건대 저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와 모든 성중들을 뵈옵게 하여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 아미타부처님께서 즉시 몸을 나투시어 대광명을 놓았습니다. 아난존자가 본 광경은 모든 보살들의 광명이 보이지 않고 오직 아미타부처님의 광명만 뵐 수 있었지요. 경문에서 말씀하시길, “비유하자면 겁수劫水가 온 세상에 가득 차서 그 속에 만물이 모조리 잠겨 보이질 않고 오직 망망한 물바다만 보일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한없이 넓고 큰 물바다에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방사든 나무든 간에 전부 물에 잠겨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머리를 들어 보니 온통 끝없이 넓고 큰 물바다뿐이었지요. “저 부처님의 광명 역시 이러하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 역시 이러하였습니다.
“성문과 보살들의 모든 광명은 다 가려지고 오직 부처님의 광명만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뵈올 수 있었다”, ‘성문’은 아라한입니다. 우리가 불화를 보다보면 아라한의 머리위에 둥근 바퀴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에게 광명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보살의 머리위에도 동그라미가 있는데 이 역시 광명을 상징합니다. 성문이든 보살이든 그들의 광명이 전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이 보일까요? 오직 부처님의 광명만 뵐 수 있었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광명만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뵈올 수 있었다” 광명은 지혜와 공덕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의 광명 속에서 성문과 보살의 광명은 전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일단 염불법문으로 들어오면 모든 수행과 공덕, 모든 선근과 깨달음이 전부 비교되지 않고 언급할 가치가 없으며 심지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모두 부처님과 동등하게 진급되고 증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아라한 자신의 광명을 찾아볼 수 없고 그가 본 것은 단지 부처님의 광명뿐이었고, 보살도 보살 자신의 광명을 찾아볼 수 없고 그가 본 것도 역시 부처님과 같은 밝은 광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범부들의 작디작은 선행은 더욱 찾아볼 수 없겠지요!
따라서 우리 전수염불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면 ‘저 부처님 명호의 뜻과 같이 여실한 수행과 상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는 광명명호이고, ‘시방제불이 따라올 수 없는’ 광명명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수한 선이자 절대적인 ‘광명 중의 극존부처님 중의 왕’이신 아미타부처님의 명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수행의 힘과 자신의 선행공덕을 추호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일향전념’으로 아미타부처님의 지혜원력의 바다에 들어간 이상, 완전히 부처님의 원력에 수순해야 하는데, 완전히 부처님의 원력에 수순하는 것이 바로 여실한 수행입니다.
여실한 수행이란 본래 실상을 증득하신 대보살들의 진여실상에 수순한 수행을 가리키므로, 범부들은 절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불을 하며 자신의 지견을 내려놓고 완전히 명호의 힘에 수순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실한 수행으로서, 아미타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실상에 수순하여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앉은뱅이가 길을 걸을 수 없지만 자동차를 타면 자동차의 행이 그의 행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중간 결론
이 글은 제18원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인데, 대략 네 가지 점이 있습니다.
첫째, 제18원은 정토교의 근본입니다. 『관경』을 해석할 때도 제18원에 의거하였습니다.
둘째, 제18원은 『대경』의 종지입니다.
셋째, 제18원에 의지하면 일체 선악범부가 전부 왕생할 수 있습니다.
넷째, 일체 선악범부가 왕생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제18원의 강연을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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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강연에 수순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나모아미타불()()()
제18원
아미타부처님의 강연은
일향전념 전수칭명염불입니다.
강연을 믿지 못함은
어리석은 중생의 본모습을
드러냄입니다.
강연인 만덕홍명을 두고도
제선만행의 선근복덕을,
선정력을 추구하는등‥
죄악범부중생들은 무지에
가려 미타여래의 심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다겁생래동안 속고 속았던
물거품같은 자신의 거짓
망념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언제나 알일뿐, 병아리가 될수
없듯이 중생들은 정진에 있어
올바르지 못한 잘못된 망념의
틀에서 벗어나 염불과 동시에
평생업성을 성취해야만 합니다.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厭離穢土 欣求淨土
일향전념 나모아미타불
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나모아미타불 나모아미타불 나모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업력의 강연을 만난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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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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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일향전몀 전수칭명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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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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