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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유배길을 관광문화 상품으로”
기사승인 2018.01.17
김재호
(사)탐라문화보존회 회장/
수의사
제주도 유배 뒤 4년 만에 생 마감
중앙로에 유배터 표석 뿐
추사적거지 문화재 관리와 큰 대조
광해군 ‘개혁군주’ 등으로 재조명
역사야 말로 좋은 관광상품
인문학 차원서도 재평가 시도 필요
제주도의 대표적 유배인이라면 추사 김정희나 ‘오현(五賢)’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을 떠올리지만 조선조 15대 임금 광해군이 제주도에 유배 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내게 무슨 죄가 있길래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노라.” 1618년 10월 4일 “인목대비를 폐위하라”고 요구하는 대북파 신료들의 끈질긴 요청에 진저리치며 독백처럼 내뱉었던 광해군은 자신의 이 말이 씨가 되었는지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추사가 55세 되던 헌종 6년(1840년)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 제주도로 유배 와서 생활했던 대정읍성 동문 바로 안쪽의 초가는 문화재인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로 지정하면서까지 보호하고 있는데 반해 광해군의 유배지는 어느 곳인지조차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관헌의 서북쪽 이었다’라는 기록에 의해 중앙로 옛 주택은행 자리에 광해군 유배터라는 표석
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조선왕조실록
으로 표상되는 조선시대 기득권
층의 정사를 그대로 답습해온 때문이라 여겨진다. 광해군은 1623년 3월 14일 새벽 황해도 평산 부사 이귀와 경기도 장단 부사 이서가 몰고 온 군사 1400명에게 기습(인조반정)을 당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폐위됐다.
광해군의 패륜을 반정의 명분
으로 삼은 반정군이었기에 인조
의 숙부인 광해군을 죽이지
는 않았다. 대신 폐위 당한 광해군과 왕비, 그의 아들왕세자
부부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19년간의 유배 세월을 굴욕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옮겨진 광해군은 다시 먼 제주도로 이배되었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의 유배선은 제주 어등포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했다. 포구에서 하루를 보낸 광해군은 제주로 들어와 제주 서성(西城) 안에 감금하여 문을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감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 유배생활을 하면서 외부 출입은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귀양살이 19년, 제주 땅에 유배된 지 4년 만인 1641년 7월 1일 예순일곱
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
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은 광해군이 죽자 목사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로 염하였다고 적고 있다. 소식을 들은 인조는 7일간의 소찬으로 조의를 표하고 예조참의를 보내 초상 치르는 것을 맡아보게 하였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시각에서 다듬어진다. 기록은 광해군의 패륜과 실정을 적고 있으나 최근 들어 명·청 교체기의 탁월한 실리외교와 대동법 시행, 임진왜란때 전국을 누비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능력 등을 두고 개혁군주였다는 해석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세종대왕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성군으
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다.
조선 6대 임금 단종은 왕이 아닌 ‘노산군’이었다. 그래서 단종실록은 ‘노산군일기’
로 불리고 있었으나 숙종때 시행
된 단종 복권 이후에 ‘단종실록’
이 됐다. 다만 실록의 내용까지 고친 건 아닌 터라 그 형식은 여전히 연산군일기나 광해군
일기와 같은 형식이다.
올레길 조성으로 톡톡하게 관광
효과를 보고 있는 제주특별자치
도는 ‘제주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사업단’을 구성하고 제주 유배길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제주에 유배 온 광해군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콘텐츠로 개발하고 재조명하고 광해군 유배길을 관광문화 상품으로 개발한다는 보도만 있을 뿐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묻혀 있는 광해군 유배터에 대한 탐라문화
역사 차원의 새로운 탐색과 보존 사업 등을 서둘러 시행하길 촉구한다.
역사야말로 가장 좋은 관광상품
이다. 관광상품의 관점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탐라역사문화 보존’이라는 인문학 차원에서도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필요해 보인다.
김재호 (사)탐라문화보존회 회장/ 수의사
첫댓글 좋은 정보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