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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남산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벽송
추사김정희기념관 - 예산
(秋史金正喜記念館)
추사 김정희기념관은 추사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세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을 체계적으로 보존,전시하여 추사선생의 다양한 면모와 그 위상을 재정립 하기 위하여 2008년에 건립 하였다. 김정희는 유배전이나 이후에나 늘 마음을 다해 자신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은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림을 그려 그에게 주고자 했다. 당대 학예 연찬의 중심에 있다가 ?아오는이 하나없는 쓸쓸하고 초라한 유배객이 되어버린 김정희 자신의 처지와 스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서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은 이상적인 송백과 같은 의리를 그림에 담아 굳세고 골기있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쓴 발문에서 김정희는 ♥논어♥의 《자한》편중 『겨울이 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것을 알게된다』라는 구절을 언급한 《세한도》를 탄생 시켰다.
阮堂先生海天一笠像
화법유장강만리 (畵法有長江萬里) 서세여고송일지 (書勢如孤松一枝)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만리가 들어있고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
토위단록지영 (吐爲丹菉芝英) 결성주광검기 (結成珠光劒氣)
추사와인보 (秋史와印寶)
추사선생님의 인보 200과중 대표작 12과를 음,양각 전각하여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을 감상케 하고 전면에는 사야(史野)문자를 돌출시켜 인보(印寶)와 문자의 조화를 주었다.
추사체의다양성 (秋史體의多樣性)
우물정자 (井字)원형으로 추사서체 한자를 다양하게 음,양각하여 감상케 하고 상단에는 한글로 추사선생의 부모님과 본인의 편지글씨의 진수를 감상케 하였다.
고독한예술혼 (孤獨한藝術魂)
고고한 예술혼을 지니신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제주 유배시절을 상상하며
"옥돌괴" 위에서 망망대해(望望大海)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고독을 조각작품으로 표현 하였다.
추사의학문 (秋史의學文)
추사는 박세가에게 처음 학문을 배우면서 북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24세때 북경에서 옹방장,완원등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추사는 북학 즉 청나라의 학문에 몰두하였다. 특히 청나라의 경학은 고증학이라 하여 옹방장,완원등을 중심으로 고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추사는 이러한 청나라 고증학을 깊이 습득하였고 마침내 1816년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로 정리 하였다.
세한도 (歲寒圖) 국보제180호
세한도는 1844년 완당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 (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등 변함없이 사재의 의리를 지켜준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
세한도
유배지에서 보낸 추사의 편지
나무도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반은 神이 되어 있는 것을 보네
이 神의 이름을 세한도라고 함은
쓰러져 있는 내 생의 반을
일으켜 흰 눈 속에 세워두니
이제서야 푸른 솔빛을 두르고
부끄러움 없이 대할 수 있는
이 하늘의 뜻을 깨달음의
절창 한 소절을 홀로 소리없이
만고의 흰 눈 속에 묻혀 불러보네
진흥북수고경 (眞興北狩古境)
황초령 신라 진흥왕순수비 보호각의 현판으로 "진흥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옛 지경"이라는 의미다.
담계수찰첩 (覃溪手札帖)
완당 (阮堂)에게보내는 간찰 (簡札)
추사김정희초상 (秋史金正喜肖像) 보물 547호
권돈인이 이한철 (李漢喆)을 시켜서 그린 추사의 정본 초상이다.
관복을 입은 전신 교의좌상 (交椅坐像)으로 예산의 추사고택에 봉안되어 오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되었다.
간찰 (簡札)
조눌인(曺訥人)에게 보내는 간찰 (簡札)
김정희시 (金正喜詩)
신취미태사참유시첩 (申翠微太史暫遊詩帖)에 실린 10편 시 가운데 추사가 지은 것이다.
권돈인시 (權敦仁詩)
신취미태사참유시첩 (申翠微太史暫遊詩帖)은 취미 신재익(翠微申在翼)의 전별연에서 권돈인,김유근등이 지은 전별시를 추사가 적은 시첩이다. 권돈인이 지은 시이다.
경주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부기탁본
(慶州무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附記拓本)보물125호 경주 무장사지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추사가 1817년에 발견하여 고증한 뒤 비석의 옆면에 발견경위와 감희를 새겼다.
지란병분 (芝蘭竝芬)
지초 (芝草)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한다는 뜻으로 조희룡 (趙熙龍) 이하응 (李昰應)권돈인의 제발이 적혀있다.
임한경명 (臨漢鏡銘) 임한경명발문 (臨漢鏡銘跋文)
추사가 한나라 시기 동경(銅鏡)에 새겨진 글씨를 연습한 글이다. 한나라 예서를 독자적인 필치로 재 해석 하고있다.
염화취실난맹첩 (염華就實蘭盟帖)
추사의 난맹첩 상권 아홉째 폭에 실린 난으로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은 난을 그린것이다.
인천안목난맹첩 (人天眼目蘭盟帖)
사람과 하늘이 살펴주어 뜻과 같이 잘되어질지어다.
증청람란 (贈晴嵐蘭)
추사가 청람 (請嵐) 김시인 (金蓍仁)의 연행길에 선물로 그려준 난이다.
계산무진 (谿山無盡)
계곡과 산은 끝이 없구나 라는 뜻으로 계산 김수근 (金洙根)에게 써 준 글이다.
고사소요 (高士逍遙)
추사의 제주도 유배시절의 그림이다. 나무의 묘사나 바싹마른 먹선이 세한도와 비슷한 시기에 작품으로 추정된다.
추사의 문인화 중 인물이 그려진 유일한 그림이며. 뜻 높은 선비가 사색에 잠긴채 오솔길을 거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서언교필결후 (書圓嶠筆訣後)
추사가 원교 이광사 (書圓李匡師)가 쓴 원교필결 (圓嶠筆訣)을 비판하면서 지은 글이다. 원교의 서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세외선향난맹첩 (世外僊香蘭盟帖)
추사의 (蘭盟帖)11면에 실린 난으로 지초와 난초를 함께그림은 (지란명분두)의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소림모정 (疎林茅亭)
산과 강이 어우러진 강안의 성긴 숲속에 자리한 띠풀 지붕의 정자를 그린 것이다.
적설만산난맹첩 (積雪滿山蘭盟帖)
추사의 난맹첩 (蘭盟帖) 상권 첫 폭에 실린 난으로 겨울의 눈보라를 견뎌내고 피어난 난화 (蘭花)를 그린 것이다.
춘농로중난맹첩 (春濃露重蘭盟帖)
추사의 난맹첩 (蘭盟帖) 상권 둘째 폭에 실린 난으로 초봄에 피어난 혜초 (蕙草)를 그린 그림이다.
묵소거사자찬 (默笑居士自讚)
추사가 자신의 별호인 묵소거사에 대한 찬을 쓴 것이다. 침묵해야 할때 침묵하고 웃어야 할때 웃는다. 라고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산수 (山水)
추사김정희
★ 濟州道 流配地 ★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 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실사구시 (實事求是)
한서 (漢書) 하간헌왕전에 말하기를 "실제 있는 일에서 올바른 이치를 ?는다" 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길을 가르키는 것이다. 만약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 있지도 않은 것으로서 일을 삼아서 다만 속이 텅비고 엉성한 잔꾀로 방법을 삼는다거나 그 올바른 이치를 ?지않고서 다만 먼저 잘못얻어 들은 말로서 주장을 삼는다면 그것은 성현의 길에 어긋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추사김정희 (秋史金正喜)
북학파(北學派)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實學)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
모거리
(別寨)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선생은 1840년 (憲宗6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55세 나이로 이곳 대정현(大靜縣)에 9년 동안의 유배생활 중에 세한도(歲寒圖 국보180호)를 비롯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으며 고독과 역경 속에서도 학문과 서예에 정진 하여 이 고장 후진들에게 많은 영향을 남겼다.
안거리 (安寨)
이 건물은 강도순가옥(姜道淳家屋)으로서 강도순(姜道淳)가족들이 생활했던곳이다.
제주 전통 초가(草家)건물로서 안어리 밖거리 등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 배치가 이루어져 있으며 지역원로 및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원형복원 하였다.
밖거리 (바깥채)
추사 김정희 선생은 9년 적거생활중 (1840 ~ 1848)에 글을 배우러오는 지역주민과 유생들을 이곳에서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셨고 초가(草家)건물 4칸으로 크게 층축하였던것을 지역원로와 관계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원형 복원하였다.
통시
변소(便所)를 통시라 한다. 부엌 반대측에 마당에서 보이지 않는곳에 통시를 설치하여 돼지(豚)를 사육 하였다.
양면벼루 (銘文兩面)
추사 김정희 선생의 종가에서 전래된 벼루이다. 위아래 양쪽면 무도머을 갈수있도록 되어있다.
한쪽면에는 작은글씨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벼루는 문인들의 필수품이자 감상의 대상이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반드시 먼저 벼루부터 고른후예야 글씨를 쓸수 있다고 하였다.
인보 (印譜)
추사 김정희선생의 인장을 찍어 모은책.
사대부당유추기 (士大夫當有秋氣)
사대부는추상?은 기상이 있야한다.
거울명문 (銅鏡銘文)
이 서첩은 추사 김정희가 서한시대 거울에 새겨진 5개의 명문 (銘文)을 옮겨 쓴 것이다. 김정희는 한나라 청동거울에 새겨진 글씨를 깊이연구하여 자신의 서체를 확립하는데 응용하였다. 파임이나 삐침이 분명한 동한 (東漢)의 예서보다는 전서 (篆書)의 형을지닌 서한의 예서를 높이평가했다. 한나라 거울 글씨는 추사체가 이루어지는데 있어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반야심경 (般若心輕)
김정희가쓴 반야심경을 탑본으로 만든것이다. 불교에도 조애가 깊어 당대의 고승들과 교유하였다. 이 반야심경 역시 자신과 깊은 친교를 나누었던 초의선사 의순을 위해 써준 것임을 끝부분의 기록을 통해 알수있다.추사체로 쓴 이 반야심경은 종획과 흰획의 변화가 뚜렸하여 제주도 귀양시절 이후의 작품을 판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 (眞品)
추사가 아들에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문수원중수비편 (文殊院重數碑片)
고려시대 청평사에서 은거한 진락공 이자현 (李資玄)의 행적이 기록된 비석이다.
고려시대의 명필 탄연 (坦然)의 서체로 쓰여 있다. 탄연은 고려중기의 승려이자
서예가로 고려 최고의 글씨로 칭송을 받았다.
이위정기탁본 (以萎亭記拓本)
추사가 남한산성 이위정에 쓴 글씨이다. 현재는 소실되어 탁본으로만 남아 있다.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비편 (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碑片)
고려시대 청평사에서 은거한 진락공 이자현 (李資玄)의 행적이 기록된 비석이다.
고려시대의 명필 탄연 (坦然)의 서체로 쓰여 있다.
석봉서법 (石峯書法)
조선중기의 서예가 석봉 한호의 글씨를 탁본해서 만든 서첩 이다.
추수문장불영진(秋水文章不染塵)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
고회부처아녀손 (高會夫妻兒女孫)
대팽두부과강채 (大烹豆腐瓜薑菜)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손자 (아무리 높은벼슬을 하고 호화스런 생활을 해도 가족끼리 모여서 소박한 음식으로 즐기는 재미에 비할수 없다)
서세여고송일지 (書勢如孤松一枝)
화법유장강만리 (畵法有長江萬里)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만리가 들어있고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
차호명월성삼우 (且呼明月成三友)
호공매화주일산 (好共梅花住一山)
또 밝은 달을불러 세 벗을 이루고 즐겁게 매화와 함께 산에 머물다.
무량수각현판 (无量壽閣現版)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의 현판을 쓴 것이다.
침계 (枕溪)
침계 (枕溪) 윤정현 (尹定鉉)에게 써준 당호이다.
한나라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맞는 글자가 없어
북조 (北朝)의 금석문의 필의를 따라 해서와 예서를 섞어 썼다고 한다.
추사의벼루와도장 보물제547호
추사선생이 사용했던 도장은 추사,완당,예당,담재,시암등 200여개 이상되었으며
붓은 평생에 1,000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부남아 있는 도장,붓,벼루등 유물 56점 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추사아들글씨
어묵 (御墨)
영조대왕이 내린 어묵
휴대용족보
추사 둘째부인 예안 이씨 친정 족보
비문 (碑文)
예산종가 에서 전해지는 첩으로 중국 후한대 순우장을 지낸 하승(夏承) 의 비문을 임서한 것이다. 김정희가 썼다는 기록은 없으나 서체로 보아 비문을 옮겨 쓰면서 글씨를 연습한 것으로 보인다. 하승은 시경 서경등 경전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며 비석의 글씨는 후한의 학자아자 서예가인 채옹(菜邕)의 글씨로 전해진다.
서첩 (藏帖)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들의 글을 발췌하여 쓴 서첩이다. 글씨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 또는 서예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며 자신의 서체를 만들어 나갔다. 이 서첩에는 대체로 글자의획 붓의운용 서법에 관한 내용이 발췌되어 있으며
이글을 통해 김정희가 서법에 있어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해 볼수있다.
사대부당유추기 (士大夫堂有秋氣)
사대부는 추상같은 기상이 있어야 한다
인장 (印章)
추사 김정희선생의 종가에서 전래된 인장중 일부이다. 인장을 새기는 작업을 전각 (篆刻)이라고 하는데 인장에는 자(字)호(號) 이름 그리고 좋은 글귀들을 새겨 넣는다. 인장는 직접 새겨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각의 대가에게 부탁을 해서 새겨 받거나 선물을 받는 경우도 많다.
침사한조 (沈思翰藻) 불계공졸 (不溪工拙)
깊이 생각하여 글을 쓰다.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
추사김정희가쓴칠언시 (秋史金正喜筆七言詩)
추사김정희(1786 ~ 1856)의 글씨이다. 골기를 드러내고 비수가 강한 추사 서풍의 특징을 잘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젊은날 옹방강 (翁方糠)을 비롯한 청대 인물과의 교류를 통해 심화되고 발전된 그의 글씨를 잘보여주고 있다.
五岳圭榜河勢槪
오악의 장엄한 기상과 황야의 물결에서 글씨 쓰는법을 ?는다.
文章敬作生靈福
문장을 경건히 지어야 영험한 복이 생긴다.
첫댓글 미리 보여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