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13.
남편과 열흘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과의 여행은 늘 벼르던 커다란 과제를 하나 마친 느낌이다.
부부로 반백년 가까이 같이 살아오며 요즘 연예인들 이혼 사유로 늘 말하는 성격차이가 나 역시 힘들었다. 다행히 일찍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이해하여 아쉬움이 많아도 별 탈 없이 살았다. 나는 산책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걷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젊어서는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마음이 없기에 노년인 지금까지도 잘 나서질 않는다. 우리 집에서 외국 한 번 안 나가본 유일한 양반이다. 큰 딸네가 중국에 몇 년 있으며 한 번만 다녀가라고 해도 끝까지 안 갔다. 그러나 식구들이 다녀와서 이야기 하는 여행담은 언제나 기쁘게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부부 둘만의 여행은 17년 전에 남편 환갑 때 한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승용차로 전라도를 5일 다녔는데 남편은 그 때를 자주 떠올리며 추억한다. 남편과 더 늙기 전에 같이 오붓한 여행을 하며 즐거운 추억을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대접해준 남편이 나이 들어가며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언제나 나에게 여행의 자유를 주고 응원해준 남편에게 마음을 다해서 같이 다녀오자고 싶었다. 가까운 주위에서 아는 분들이 한 분씩 이승을 떠나는 소식을 들으면 서운해지며 괜히 내 마음이 바빠졌다.
마침 때맞추어 시동생이 와서 두 분 봄에 가까운 외국여행이라도 다녀오라며 금일봉 봉투를 주고 갔다. 내가 시집갔을 때 4살이고 자라면서 꼴통으로 애를 많이 먹였는데 지금은 형수한테 아주 잘 한다. 남편은 외국보다 국내여행을 원하여 기차여행으로 하였다. 남편을 위한 여행이어서 남편 뜻을 따르며 일정을 잡기로 하였다. 요즘 많이 소개되는 관광열차로 해안선을 따라 목적지를 정하고 사방팔방으로 연결 된 기차를 시간을 맞추어가며 일정을 짰다. 중간에 용인에 사는 딸네 집과 양평에 사는 언니 집도 가보기를 원하여 넣었다.
시작은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남해안 관광열차로 순천을 갔다.
보성의 녹차를 마시는 온돌식 방이 마련되어 있어 다탁에 팔을 괴고 앉아 유리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갔다. 승객들의 신청곡으로 귀에 익은 음악들이 나와서 그도 좋았다. 역 부근에 모텔을 잡고 이틀을 묵으며 선암사와 박람회를 하였던 국가정원을 돌아보았다. 30만평이 넘는 국가정원의 숲과 나라마다의 정원들은 온종일 다녀도 끝이 없었다. 큰 나무 밑에 놓인 길다린 선탠 벤치에 누워 햇빛과 솔솔 부는 봄바람을 즐기며 영화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남편과 나는 걷는 일이 좀 힘든 편이어서 하루에 한 곳을 천천히 걷고 쉬기를 반복하며 돌아보았다. 택시를 이용하며 기사가 추천해주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다음 날은 순천에서 KTX 기차로 익산을 갔다.
지나가기만 하고 들려본 적 없는 도시여서 군산으로 가기 전에 하루 묵었다.
4대 종교 중에 하나이며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고유종교 원불교의 발생지라서 가보고 싶었다. 원불교 성지와 그 앞에 있는 원광대학을 둘러보았다.
성지는 마침 100주년 기념행사로 창시자의 일대기가 조각으로 형상화 되어 있어서 보고, 조용한 정자에 앉아서 한참을 숲의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쉬었다. 개교 70주년이라는 원광대학은 80동이 넘는 건물이 들어차 있어 규모에 놀랐고, 나무와 꽃이 멋지게 조경되어 또 놀랐다. 잘 다듬어지고 연륜이 물씬 풍겨지며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는 소나무들이 곳곳에 위용을 자랑하듯 있었다. 구름다리를 건너 연못안의 카페에서 달달한 카페라떼 한 잔을 마시며 싱그러운 대학의 정취도 만끽하여 보았다.
다음 날은 새마을 열차로 익산에서 군산을 갔다.
20분 소요되는 짧은 거리인데 도시의 느낌은 완연 달랐다. 농촌과 항구도시의 다름이다. 군산역은 도심에서 벗어나 허허들판에 홀로 우뚝 있었다. 난 초봄에 가 본 곳이지만 남편에게 군산과 새만금 방조제를 보여주고 싶어서 갔다. 택시를 타고 모텔을 찾아 버스터미널 부근으로 갔다. 짐을 풀고 첫날은 시내 일식집에서 특산음식이라는 박대정식을 점심으로 먹었다. 부산사람은 서대라고 부르는 가재미보다 길쭉한 생선이다. 이 음식과 마지막 날 먹은 아귀 탕이 군산음식으로 좋았다.
시내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묻어 있는 건물들을 보고, 예전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찍었던 초원 사진관도 갔다. 다음날 군산대학 앞에서 버스를 타고 새만금 방조제를 가고, 은파호수에 가서 돌았다. 마지막 날은 김제평야와 만경평야에서 나오는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축조된 부둣가에 가서 뜬다리(부교)를 보고 근대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오후 늦게 기차를 탔다.
금빛 서해안 관광열차를 타고 수원을 향했다.
기차 안에서 차창을 바라보며 족욕을 하였다. 따로 선택하여 하는데 눈앞의 저녁풍경과 뜨끈한 족욕이 피로를 가시게 하여 기분과 신분까지 업시켜 주는 듯하였다.
용인 딸네 집에서 이틀을, 양평 언니 댁에서 하루를 보냈다. 남편은 낯선 곳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족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더 좋아하였다.
양평역에서 정동진행 무궁화열차를 탔다.
4시간을 강원도 산골을 굽이굽이 돌아서 도착하였다. 남편이 일출을 보자며 정동진을 가보고 싶어 하여서 갔는데 날씨가 밤부터 비가 시작하더니 새벽 5시에 일어났어도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 세차지더니 강풍과 비를 몰고 와서 중간의 하루 일정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바로 왔다.
정동진에서 부전역까지 오는 무궁화 열차는 묵호항과 동해항을 지나고, 협곡열차가 다니는 철암역과 승부역을 휘돌아 영주와 안동을 거쳐 오는 8시간의 긴 여행이었다. 열차 안에서 판매가 없다하여 과일과 간식을, 저녁으로 김밥까지 준비하여 먹으며 왔다. 남해안, 서해안, 동해안으로 해서 팔도를 다 돌았고, 기차는 종류별로 다 타 본 것 같다.
그런대로 만족해하며 무사히 귀가를 하였다.
남편은 까다로운 입맛 때문에 먹을거리가 힘들었다 하고, 난 남편과 같이 느끼지 못 하는 감성이 좀 힘들었다. 남자와 여자, 느끼는 감성이 다르다고 나를 다독이면서도 수시로 으~~윽 하는 못마땅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남편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남편을 위한 여행으로 꼭 해야 할 나의 버킷리스트 2번을 실행하였지 싶다.
첫댓글 잔잔한 여행의 여운이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버킷리스트 하나씩 실천하는 모습도 존경스럽구요 우리회원님 모두 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