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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자 초호화 건물로서 서울의 가장 중심인 소공동에 문을 연 웨스틴조선호텔이다.
일제감점기인 1914년에 조선철도호텔로 출발한 이 호텔은 지금껏 한국의 정치, 사교, 경제의 중심에 서서
수많은 희노애락의 역사를 함께 해 왔다.
1945년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를 맡은 미군은 이 호텔에 군정청 사령부를 두었다.
귀국한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집무실로도 이용했으며 1948년 일본식 명칭인 '조선호테루'를
'조선호텔'로 개칭하였다.1979년 외국인 투자자에 의해 세계적 호텔 체인인 웨스틴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뀐다.
1995년 신세계가 웨스틴체인의 지분을 완전히 인수하며 순수 국내 자본으로 운영된다.
이 호텔의 100년 가까운 역사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양택 대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 대가인 육관 손석우와 거봉 김혁규는 이렇게 풀이한다.
"조선호텔 터는 남산의 중심 맥을 따라 둥글게 다시 솟아 있는 금반형기(金盤形氣)의 형국으로
행운과 복이 넘치는 양택 대명당의 아주 길한 터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하늘의 뜻으로
신선이 황금 소반에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즐겨 먹으며 노는 형상(仙人舞袖形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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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는 전미지지(全美之地)는 없다고 했다.완벽한 풍수조건을 갖춘 명당은 없다는 뜻이다.
명당은 명당이되 부족한 면을 안고 있다는 말이다.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비보(裨補)책이 있다.
조선호텔 정문 오른쪽 기둥 옆에는 이 터를 찾는 이들에게 재물과 행운을 안겨달라는 상징물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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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상자 가운데는 행운을 상징하는 거북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돌상자에는 물이 흘러든다.그 상자에는 항상 물이 가득 차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물과 재물의 관계를 말한다.
“물은 재록(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시내와 계곡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
터에서 물을 봐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택리지’의 논리는 조선 사대부들이 집터를 고를 때 빠뜨리지 않은 지침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물은 부자 혹은 재물과 연결된다는 풍수적 믿음은 여전하다.
물이 왜 부와 연결되는 걸까. 이는 풍수의 기본 원리와도 그 맥락이 이어지므로 잠시 짚어보기로 하자.
흔히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이해되는 풍수는 ‘바람길을 갈무리하고 물길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조건을 갖춘 곳에선 부귀나 무병장수 같은 좋은 생기(生氣)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게 풍수의 원리다.
문제는 득수, 즉 강가나 해안가 등 물길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과 장풍, 즉 바람길을 막아주거나 갈무리해주는 산속
혹은 산기슭에서 사는 것은 삶의 질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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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틴 조선호텔 서북쪽 후문 앞에는 돌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일본은 그들의 왕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다며 원구단을 헐어버리고 초호화 러브호텔인 철도호텔을 지었다.
조선의 민족정기를 없앤다는 일제의 음습한 음모가 깔려 있다.조선의 신성한 제사 터를 잠자는 자리로 바꾸고
땅을 파헤쳐 양명한 지기를 손상시켜 음기의 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쓸데 없이 음기가 강한 터라면 양기를 키워줘야 복지(福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동물 중 힘이 가장 세고 양기 강한 놈이 바로 사자다.
돌사자상을 호텔 정문 좌우에 배치해 음기를 덜어내고 양기를 힘껏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
이같은 비책의 효과인지 호텔 내 레스토랑 나인스게이트는 사업 상 어려운 문제도 이곳에서 협상하면
잘 풀린다는 비즈니스 명당으로 소문나 있다.또 이곳에서 남녀가 맞선을 보면 결혼까지 성사된다는 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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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慶貞) 공주의 궁이 있었던 곳이다.
처음에는 소공주골, 작은 공주골이라 불리던 것이 소공주동이 되었다가 줄여서 소공동으로 되었다.
경정 공주는 고려 말인 1384년(폐왕 우 10)에 출생하여 조선 개국 이후인 1403년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을 간다.
그 슬하에 1남 4녀를 낳았다. 경정 공주는 72세의 수명을 다하고 1455년 6월 6일에 사망한다.
경정 공주와 부마 조대림이 살던 궁은 1583년(선조 16)에 다시 화려하게 꾸며 선조의 셋째 아들로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 의안군(義安君) 이성(李城)에게 주었다. 그러나 9년 뒤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면서 일본의 무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종묘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밤마다 군사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변사하자 우키다 히데이에는 진지를 의안군의 집으로 옮겨 1년간 주둔하였다.
우키다 히데이에의 군대가 철퇴한 뒤에는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의 이여송이 한양에 입성하여 사령부를 이곳에 두었으며
이후로 중국 사신이 입경하면 이 궁에서 머무는 것이 관례화되어 남별궁(南別宮)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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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157 호로 지정된 원구단(圓丘壇)터다.
일명 구단 또는 원단이라고도 하는 원구단은 고종 황제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함에 따라
천제(天帝)의 뜻을 받들고 하늘에 치제하는 뜻으로 임금이 있는 덕수궁에서 정동이 되는 위치에 천단을 쌓은 것이다.
원구단은 하늘의 형상을 본떠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1897년 단을 쌓고 그해 10월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가 천제에게 제사를 지낸 뒤 제위에 오르는 식을 거행하였다. 황제 즉위식 이듬해인 1898년에는 이를 기념하여 천단을
쌓은 자리 북쪽에 원구단을 완공하였으며, 1899년에는 천신지기(天神地祇)를 기리고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여
위패를 모신 황궁우(皇穹宇)를 지었다.
1901년에는 지역 유지의 발의에 따라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석고문(石鼓文)을 새긴 석고단을 만들었다.
석고단은 주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돌비에 새겨 열 곳에 세웠다는 고사를 본뜬 것이다.
황궁우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사당으로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팔각당(八角堂)의 3층 건물이며, 옆의 석고 3개에는
조선 말기의 조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용문(龍紋)이 새겨져 있다.
원구단을 비롯하여 황궁우와 석고단은 목수 심선석(沈宣碩)의 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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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1910년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다.
그 이듬해인 1911년에는 원구단 일대는 총독부 소관으로 넘어간다.
일제는 1913년 원구단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지어 이듬해 9월 준공하였다.
조선 철도 호텔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이를 세계만방에 선전할 목적으로
‘시정오년 기념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기로 하며 내외국민을 숙박시킬 호텔이 필요하여
조선총독부철도국이 주관이 되어 1914년 10월 10일에 완공한 현대식 호텔이다.
이 호텔은 수차에 걸쳐 개축되어 비록 그 규모와 형태는 다르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최고급 호텔 겸 다방으로서 그 기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