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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10.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서원(9)
1. 소 수 서 원 (사적 제55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
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3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
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
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
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
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
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
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
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
·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
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
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
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
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2. 남 계 서 원 (사적 제499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藍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
년에 나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
건하였다.
1634년(인조 12)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과 정온(鄭蘊)
을 병향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
(순조 20) 정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후 1868년 별사는 훼철(毁撤)되었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
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전사청(典祀廳)·명성당(明誠堂)·양정재(養正齋)·보인재(輔仁齋)·애련헌(愛蓮軒)·영매
헌(詠梅軒)·풍영루(風咏樓)·묘정비각(廟庭碑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성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集義齋)라 하며,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인 양정재와 서재(西齋)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
매헌이 있다.
이 서원은 1974년 2월 16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후,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
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은 『어정오경백편(御定五經百編)』·『고려
사(高麗史)』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만 4500여 평, 대지 6000평, 임야 1.5정보 등이 있다.
3. 옥 산 서 원 (사적 제154호)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1572년(선조 5)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다음 해에 서악(西岳)의 향현사(響絃詞)에 있던 위패를 모셔왔으며, 1574년 ‘옥산(玉山)’이라고 사액(賜額) 되었
다.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된 묘우를 비롯하여, 구인당(求仁堂)·암수재(闇修齋)·민구재(敏求齋)·무변
루(無邊樓)·역락문(亦樂門)·신도비각(神道碑閣)·경각(經閣)·판각(板閣)·제기실(祭器室)·어서각(御書閣)·포사(庖舍)·
정대문(正大門)·상당(上堂)·체인문(體仁門)·세심문(洗心門)·감생문(監牲門) 등이 있다.
체인묘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구인당은 강당으로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제기실은 향례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며, 암수재와 민구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또
한 무변루는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고, 역락문은 무변루의 문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나
오는 ‘불역낙호(不亦樂乎)’의 뜻을 취하였다.
신도비각은 1577년에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셨으며, 경각과 판각에는 각종 판각 및 어서를 보관하였다. 매년 2월
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7변(籩) 7두(豆)이다.
유물로는 필연(筆硯)·연수병(硯水甁)·관대(冠帶)·사모(紗帽)·마상배(馬上坏)·관영(冠纓)·옥적(玉笛)·직인(職印)·유
서통(遺書筒)·옥관자·금관자·옥죽(玉竹) 2본과 『회재선생문집』 외 1000여 권의 문집과 책이 보관되어 있다.
1970년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보물 제525호)과 국내 최고의 활자본인 『정덕계유사마방
목(正德癸酉司馬榜目)』 1책(보물 제524호), 『해동명적(海東名蹟)』 2책(보물 제526호)이 보물로 지정되었고,
이언적 수필 고본(古本)은 1975년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었다.
재산은 전답 2만 600평, 대지 3500평, 임야 35정보가 있다.
1967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서원은 전면에 강학처소(講學處所)를 두고 뒤편에 사당(祠堂)을 둔 전학후묘(前學後
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문(樓門)인 무변루에 이르게 되며, 이 무변루 밑으
로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의 안마당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구인당 좌우로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
잡고 있어, 구인당과 함께 강학처소를 이루고 있다.
구인당 뒤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이 있고, 체인문을 둘러싼 담장 안에 체인묘와 제기실이 자리잡고 있
다. 서원의 중심부 남측에는 부대시설인 고직사(庫直舍)·판각(板閣) 등이 있으며, 담장 밖 남측에 경각, 북측에 신
도비각이 있다.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의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
위에는 주좌(柱座)를 둥글게 솟아오르도록 만든 초석들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圓柱)들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굽면이 사면으로 끊긴 주두(柱頭)를 놓고, 끝이 위로 향한 소 혀 모양 장식인 앙서[仰舌]가 뻗은 부
재를 기둥 윗몸에서 내었다.안쪽으로는 기둥과 보 사이를 보강해 주는 보아지 형태로 하여 주두와 보머리를 결구
하여 이익공(二翼工)처럼 보이지만, 부재의 구성 방법은 초익공식(初翼工式)이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그 위에 파련각(波蓮刻)으로 된 동자주(童子
柱)를 세워 종보[宗樑]를 받친 후, 여기에 꾸밈새인 첨차(檐遮)와 소호로 이루어진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
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이 우물마루로 된 대청과 좌우는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인당 앞쪽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민도리집 계통의 건축물
이다.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기와집으로, 1층의 어간(御間)에 대문을 달고, 양측은 2층 온돌방
의 구들과 아궁이를 두었다. 2층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이 양측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둘레에는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러 개방하였다. 구조는 초익공식
으로 5량가구(五樑架構)를 이루고 있다.
중심 전각인 체인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초석
들을 놓아 두리기둥(원형기둥)들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소 혀 모양 장식인 쇠서[牛舌]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을 취하고 있으며, 가구는 5량으
로 겹처마를 이루고 있다.
4. 도 산 서 원 (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
이 건립되었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
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원 전체 영역의 앞쪽에 자리잡은 건물들
은 도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도산서원 영역에 속한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영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 1546년 퇴계가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
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하였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
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
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퇴계종택(宗宅)이 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는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도산으로 왕래하였고,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퇴계는 1557년 쉰일곱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하였고, 이듬해에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완성하였다.
도산서당터를 찾은 기쁜 심정을 퇴계는 시 몇 편으로 남겼고, 도산서당을 짓고 난 다음 해인 1561년 11월에는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썼다. 이 시에 붙인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는 서당 주변의 경개(景槪)를 비롯
하여 퇴계가 「도산잡영」을 읊은 동기 등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퇴계는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더니,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도산서당 일곽에 있는 건물로는 도산서당·농운정사·역락서재(亦樂書齋)·하고직사(下庫直舍) 등이 있는데,
모두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퇴계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기타 시설물과 자연 경관으로는 유정문(幽貞門)·
열정(洌井)·몽천(蒙泉)·정우당(淨友塘)·절우사(節友社)·천연대(天淵臺)·운영대(雲影臺)·곡구암(谷口巖)·탁영담(濯
纓潭)·반타석(盤陀石)·부용봉(芙蓉峯) 등이 있는데, 이 모든 이름들은 퇴계가 손수 붙여 성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도산서당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
은 퇴계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1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건물을 남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齋)'를 서쪽에 두고 '헌(軒)'을 동쪽에 둔 것
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퇴계는 서당의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작은 연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이라고 하였으며, 또 그 동
쪽에 몽천이란 샘을 만들었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평평한 단을 쌓아 암서헌과 마주보게 하고, 그 위에 매화·대나
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라고 불렀다. 암서헌 대청에서 정우당, 절우사를 지나 낙동강으로 경관이 이어지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합일하려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 봄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두어 걸음 나아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
기로 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진도문에 이르러 올라오던 길을 돌아서서 내려다보면, 남쪽으로
낙동강 물줄기를 가둔 안동호 일대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도산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제향(祭享)공간을 형성하는 상덕사(尙德祠)·내삼문(內三門)·제기고(祭器庫)·주청(酒
廳) 등이 있고, 강학(講學)공간을 형성하는 건물로는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동재인 박약재(博約齋), 서재인 홍의
재(弘毅齋) 등이 있으며, 기타 부속 건물로는 동광명실(東光明室), 서광명실(西光明室), 장판각(藏板閣), 상고직사
(上庫直舍) 등이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 임금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과 철폐된 역동서원(易東
書院)에서 옮겨온 서적, 그리고 퇴계의 문도(文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둔 곳이다.
강학공간은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는 전교당을 중심으로,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며 엄격한
좌우 대칭의 배치를 하여 규범을 보이고 있다. 전교당은 유생들이 자기 수양과 생도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정면 4
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에 대청마루와 한존재(閑存齋)라고 이름 붙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임금 앞에서 쓴 것이다. 사당인 상덕사와 사당 일곽 출입
문인 내삼문, 그리고 사당 주위를 두른 토담은 모두 '도산서원상덕사부정문및사주토병(陶山書院尙德司附正門及四
周土屛)'이란 명칭으로 1963년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일곽 서쪽에 있는 옥진각(玉振閣)은 유물 전시관인데, 퇴계 선생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도산
서원은 원래 예안군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속한다. 서원
일곽은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과 197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도산서원은 흥선대
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곳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5. 필 암 서 원 (사적 제242호)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
1590년(선조 23) 호남 유림들이 김인후(金麟厚)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
여 위패를 모셨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
(配享)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
齋)·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
살문·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
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보관되어 있고,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
재(東齋)·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장판각에는 『하
서집(河西集)』 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보물 제587호인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계생비는 향사에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 놓는 비로, 제관(祭官)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제물로 쓸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1957년 사우를 우동사(佑東祠)라 현액(縣額) 하였으며,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유물로는 벼루와 기준(奇遵)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붓 등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만 2700평과 임야 10정보가
있다.
주요 전각들은 남북 자오선(南北子午線)을 중심축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남북이 길게 장방형으로
담장을 쌓고 정면 중앙에 누문(樓門)인 확연루를 두었으며, 그 중심축 선상 북쪽에 청절당이 위치하고 있다.
강당 뒤쪽 좌우 대칭되는 곳에 동재와 서재를, 그 북쪽 따로 쌓은 담장 중앙에 내삼문(內三門)을 두고, 안쪽에 사
당이 위치함으로써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수법을 이루고 있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원기
둥)을 세워 주두(柱頭)·첨차(檐遮)·소로[小累]·쇠서[牛舌]로 결구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청절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온
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이는 본래의 진원현(珍原縣) 객사를 1672년에 옮겨 온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청절당은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꾸몄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일반적인 가구
수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우동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전면 반
칸은 툇간(退間)으로 개방하였고, 나머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은 바른 층 쌓기로 처리한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툇간의 초석은 단면이 팔
각형인 장주형 초석(長柱形礎石)을 이루고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두 개를 놓아 이익공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쪽 박공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중요 전각 외에 진덕재·숭의재는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되어 있고, 목판고는 이익공식의 팔작기와집이다.
6. 도 동 서 원 (사적 제488호)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조선조 유학사를 더듬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의 정몽주에게서 비롯되어 길재·김숙자·김종직에게 차례로 전해진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조선조 사림파
의 적자(嫡子)라고 일컬어진다. 서울 정릉동(지금의 정동)에서 태어났으나 증조부가 현풍 곽씨에 장가들어 서흥
김씨의 세거지가 된 현풍에서 성장하였다. 청소년기의 그는 매우 호방하여 놀기를 좋아하고 남의 눈치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 때 이루어진 박씨 부인과의 혼인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합천군
야로의 처가 근처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동시에 세거지 현풍, 처가인 야로 그리고 처
외가인 성주의 가천 등지를 오가며 그곳의 사류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혔다.
무엇보다 김종직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결정지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20세 되던 1474년 봄, 김종직은
가까운 고을 함양의 군수로 있었다. 이때 그는 김종직을 찾아 그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해서 마침내
김종직의 수제자로 성장함으로써 조선조 유학의 적통을 잇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 단지 그의 제자라는 이유만으
로 끝내 죽임을 당하게 된다.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도 줄곧 학문에만 정진하던 그는 나이 마흔에야 경상감
사 이극균의 추천으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섰다. 그뒤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연산군 4년(1498) 김
종직의 「조의제문」1)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
(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어 5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은 끝장이 났고,
끝내는 연산군 10년(1504) 일어난 갑자사화2) 때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명목으로 이배(移配)된 귀양지 순천
에서 50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굉필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까닭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곧 복권되었다. 중종
은 신진사림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삼았고, 그 선두에 조광조가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직계제자
였다. 당연히 김굉필의 명예는 회복되어 죽은 지 3년 뒤인 중종 2년(1507)에 사면되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그
뒤로도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선조 8년(1575)에는 영의정에 증직되면서 문경(文
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다시 광해군 2년(1610)에는 대간(臺諫)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
소에 의하여 동방오현3)
그는 조광조·김안국·성세창·이장곤 같은 쟁쟁한 인물들을 제자로 배출할 정도로 생전부터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
고, 사후에는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사림의 추앙을 한몸에 모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
은 쉽지가 않다. 두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그의 저술이 거의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문장 중심, 정치 중심
으로 아직 철학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그때까지의 유학이 실천 중심, 도학 중심의 이학적(理學的)인 성리학의 단
계로 나아가는 물꼬를 튼 인물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이다.
도동서원은 바로 한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원래 1568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지금의 자리
로 옮겨 건립했다.
1604년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공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
이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뛰어난 예학자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었다. 1607년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되
었는데,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자부심 넘치는 의미가 그 이름에 담겨 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
로 꼽힌다.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된
다.
현풍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다람재에서는 도동서원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오른편으로는 멀리 잦아드
는 산줄기 사이로 꼬리를 감추며 낙동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왼편으로는 다복솔 들어찬 대니산이 몸을 낮추며 강
으로 다가드는 산자락, 고가 두어 채가 보이는 강마을을 곁에 두고 낙동강을 바라보며 동북향한 서원건물이 정연
하다.
다람재를 내려서면 서원 건립을 기념하여 한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늙은 가지를 잔뜩 드리운 서원의 앞마당
에 이른다. 앞을 바라보면 나직나직 막돌허튼층쌓기한 4단의 석축이 가지런하다. 도동서원에는 이런 석축이 유난
히 많아 사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18개의 석단이 폭과 높이를 바꿔가며 전개된다. 경사진 터를 적절히 나누어 넓은
곳에는 건물을 앉히고 좁고 가파른 곳에는 뜰을 가꾸었는데, 쌓아올린 기법이 동일하여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높
고 낮게, 넓고 좁게 변화를 주어 율동감을 만들어낸다. 직선이 만들어내는 율동감이다.
네번째 석축 위에 나래를 편 이층누각이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이다. 수월루는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
설 때는 없었던 건물로 1855년 창건되었다.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을 출
입하기에 가파르고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은 지 얼마 안된 1888년 불타버려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
3년 복원되었다. 다른 건물의 담박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부재들이나 구조도 빈약하여 오히려 도동서
원의 품격에 흠이 된다. 누각 아래가 문이지만 늘 닫혀 있어 지금은 관리사로 쓰이는 전사청(典祀廳)을 통해 드나
들어야 한다.
수월루 안쪽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좁고 가파른 공간이다. 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진입영역으로, 가운데 좁장
한 계단이 가볍게 휘어지며 환주문까지 이어진다. 환주문(喚主門) ―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
주인은 내 마음의 주인일 수도 있겠고 문 안에 있는 주인일 수도 있으리라. 이 환주문이 아마 도동서원에서 가장
귀엽고 매력적인 건물이리라. 갓 쓴 유생이라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작은 크기에 절병통이 얹
힌 사모지붕을 이고 있는 모습을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말밖에 다른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 문턱이 있어야 할 자
리엔 꽃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잠시 머물기를 유도하는 재치도 부려놓았다.
환주문의 안쪽이 강당인 중정당(中正堂)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로 이루어진 강학공간으로 서원의 중심영역이다.
높직한 기단 위에 중정당이 중정(中正)하고 그 앞 양쪽으로 동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서재인 거의재(居義齋)가 공
손하다. 환주문에서 중정당에 이르는 마당 가운데로는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 만한 돌길을 내
었다. 그 끝에는 낮은 축대를 횡으로 쌓아 중정당이 들어선 지대와 동서 양재가 앉은 지대를 구별하였다. 돌길과
만나는 축대의 중앙에는 돌거북의 머리가 돌출되어 있는데, 양쪽의 송곳니가 비죽이 나온 길게 찢어진 입을 앙다
물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인상을 쓴 모습이 제법 사나워 보인다. 중정당의 동쪽에는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
이 있고 서쪽으로는 담장을 격하여 전사청이 자리잡았다.
계단의 디딤돌을 일곱 단으로 쌓을 만큼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평면구성은 간단하여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며 그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반 칸에 마루
를 깔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덤벙주초에 굵직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주심포를 짜 올렸으며 창방의
중간마다 화반을 받쳤다. 지붕 끝은 겹처마로 정리하고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주심포식 건물로 기단이
높은 탓인지 크기보다 웅건해 보인다. 마치 흔들림 없는 도학자가 의젓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앉은 듯하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정당에서 무엇보다 흥미와 애착이 가는 부분은 기단이다. 정면은 길이가 17m 정도, 높이가 140㎝ 남짓 되며
측면은 대지의 상승과 비례하여 점차 낮아진다. 다듬은 돌을 쌓아올라가다가 앞으로 약간 내민 판석을 가지런히
깔아 갑석을 삼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갑석을 들여 깔아 마무리하였다. 정면 중앙에는 양쪽으로 나누어 계단을 내
었다. 갑석 바로 아래에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머리만을 내밀고 있는가 하면 다람쥐를 닮은 작은
짐승이 꽃송이를 옆에 두고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 조각된 돌이 박혀 있기도 하다. 측면에는 같은 수법으로 기단 위
에서 다시 마루와 엇비슷한 높이까지 돌을 쌓아올리고 쪽마루를 깔듯이 판석을 덮어 ‘돌쪽마루’를 만들기도 하였
다.
기단을 쌓아올린 솜씨는 기교라기보다는 정성 그 자체다. 주변에서 나는 돌을 똑같은 크기가 하나도 없게 다듬어
마치 조각보를 깁듯이 하나하나 짜맞추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게 네모진 돌보다 여섯 모 이상 각이 진 돌
들이 더 많아 보일 정도로 공력을 들였는데, 심지어는 12모 진 돌이 있을 정도다. 전체의 모습은 커다란 조각보를
길게 펼쳐놓은 듯도 하고 몬드리안의 추상 작품을 돌로 번안한 듯도 하다. 그러나 중정당 기단이 가진 색감은 조각
보에도 몬드리안에도 없는 이 기단 고유의 것이다. 쑥빛, 연한 잿빛, 엷은 가짓빛, 이런 빛깔들이 농도를 달리하며
만들어내는 은은한 색감과 그 조화는 어떤 화려한 빛깔로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물 가운데 이만
큼 아름다운 기단을 가진 것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동재와 서재는 구조와 크기가 같아 서로 대칭을 이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한 칸은 마루이
고 두 칸은 온돌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연 방위상으로는 서쪽에 놓인 거인재를 동재라 부르고 동쪽에 있는 거의
재를 서재라 일컫는다는 점이다. 서원의 좌향이 북향인 데서 오는 변화로서 자연방위에 관계없이 인간의 인식을
우위에 두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작은 표현이라 하겠다.
중정당을 돌아들면 잘 가꾸어진 사대붓집의 후원 같은 경관이 나선다. 가파른 경사지를 5단의 얕은 축대를 쌓아
분할하고, 그렇게 생겨난 터에 모란을 듬성듬성 심었으며 배롱나무에게도 한 자리를 베풀었다. 가운데에는 내삼문
으로 오르는 계단을 내었다. 거칠긴 하지만 봉황으로 보이는 짐승을 새긴 소맷돌까지 갖춘 계단은 지세에 맞추어
자연스런 곡선을 그린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다. 제향공간으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
지붕 건물이다. 정면과 측면의 칸수가 같지만 정면의 칸살이 넓어 평면은 장방형이다.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
정하지만 기단은 서원이 지어지던 때의 것으로 본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면석을 한 줄로 세우고 그 위를 판
석으로 덮었다. 정평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심포를 짜 올렸다. 정면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으
며 내부는 통칸으로 틔웠다. 자못 근엄해 보이는 건물이다. 사당이 되다보니 제향을 받드는 날이 아니면 거의 언제
나 공개되지 않아 찾는 이의 출입이 어렵다.
서원에서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예법은 봄 가을의 향사와 매월 두 차례 있는 분향례이다. 도동서원에는 이러한
제례를 위한 설비들이 남아 있다. 중정당 서쪽 마당에 모를 접은 사각형 돌기둥에 받쳐진 정사각형의 판돌이 하나
놓여 있다. 생단(牲壇)이라는 것이다. 생(牲)이란 향사 때 제수로 쓰일 소나 돼지·염소와 같은 짐승을 말하며, 생단
은 제사 전날 제관들이 그 생을 올려놓고 품질이 제수로 적합한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현존하는 생단 가운데 규모
는 크지 않으나 비교적 정교하게 가공된 예이다. 강당의 대청 앞 기단의 중앙에 놓인 정료대(庭燎臺)는 긴 돌기둥
과 사각형의 상석으로 이루어졌다. 정료대란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
다. 서원의 정료대는 야간에 치르는 제례 때 쓰이며, 보통 사당 앞마당에 설치된다. 도동서원처럼 강당 바로 앞에
놓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사당의 동쪽 담장에는 차(次)라고 하는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 제사에 쓰인
제문을 태워버리는 설비이다. 여느 서원에서는 별도의 차를 두지 않고 사당 기단의 한 모퉁이에서 제문을 태워버
리지만 도동서원에서는 이렇게 특수한 장치를 마련하였다.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과 통
하도록 수키와를 끼워 굴뚝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사당 앞에는 화사석이 분실된 석등이 서 있다. 절집의 팔각석등
과는 달리 사각을 기본으로 했다. 정료대와는 조명방법이 달라 등잔이나 호롱불을 넣어 어둠을 밝히던 시설이다.
도동서원의 담장은 중정당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드문 일이다. 담장은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아올린 다음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가 지붕을 덮어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래위 두 줄로 듬성듬성
수막새를 박아 무늬를 내었다. 수월루를 복원할 때 새로 쌓은 담장을 제외하면 도동서원의 담장은 모두 이런 모양
이다.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견고한 축조기법이나 수막새의 장식무늬도 귀하지만, 이 담장이 지형에 따
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며 만들어내는 담장 면의 변화와 담장 지붕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우리 건축에서나 경험
할 수 있는 눈맛을 준다. 한 가지 흠이라면 새로 복원한 것이라 거기에 세월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서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서원의 측면과 후면에서 보면 여러 건물들의 지붕선과 어우러지며 각지게 흘러내리
는 담장의 모습은 무척 상쾌하다.
도동서원은 부분과 전체가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도동서원이 유교적 규범과 예법에만 충실
했다면 건축적 평가가 지금처럼 높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뒤늦게 지어지고 건축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자연
을 끌어들이는 수월루, 수월루가 없었다면 서원의 정문이면서 자못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 환주문의 미묘한
크기와 모양, 중정당의 기단을 비롯한 요소요소에서 빛나고 있는 석물들, 담장의 선과 면들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분위기― 이런 파격과 유희적 요소들이 있음으로 하여 도동서원은 건축적으로 완성되고 균형잡힌 건축공간으로 남
을 수 있었던 것이다.
7. 병 산 서 원 (사적 제260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낙동강의 물돌이가 크게 곡선을 그리며 하회를 감싸안아 흐르는데, 그 물길의 중심에 있는 화산 자락의 양쪽 끝
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병산서원으로 가려면 하회 가는 길에서부터 왼쪽으로 갈라진 샛길로 들어서야 한다. 왼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풍
산 들 한자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굽이를 끼고 돌면서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
다. 느티나무가 의젓하게 버텨선 효자마을 입구를 거쳐 몇 굽이를 돌아가면 너른 시야가 펼쳐지면서, 낙동강변의
모래사장이 멀리 바라보이는 위치에 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
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
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
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
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
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
데 하나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는 병산서원의 사적지 면적은 6,825평에 이른다.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담장과
그 주위를 통틀어 그러하다. 그러나 병산서원이 시야로 누리는 땅과 강과 하늘이 어찌 6천 평에 한정되랴. 보이는
모든 풍광을 병산서원은 다 끌어안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이곳을 찾는 까닭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서원 설립의 역사에서 보면, 초창기인 16세기 초반도 아니고 남설기인 18세기 이후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지어졌다. 서원이라는 사설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후에 건립된 서원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병산
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서원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원의 기본 배치는 성균관 문묘나
고을의 향교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외삼문·누각·강당·내삼문·사당을 놓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
를 놓으며, 강당 뒤쪽에 전사청과 장판교를 두었다. 그리고 외곽에는 이 모두를 감싸는 낮은 돌담을 두르고, 사당
공간에도 특별히 담을 둘러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 병산서원은 이 기본 배치를 충실히 살리면서 살짝 축을 비껴
사당을 두었는데, 전체적인 조화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없으니 엄격하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공간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병산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면 마주하는 문이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克己
復禮’에서 따온 듯한데, 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삼문 안
쪽은 물건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서쪽 칸의 가마는 향사 때 제수를 운반하는 의례용 가마이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
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번 추스리게 하는 역할도 한
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이 집은 ‘입교’,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당으로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
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
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서재도 각각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들였
다. 이 건물들은 남향하지 않고 동향 또는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강당을 향하도록 한 것이니, 서원이 지녀야 할
엄격성을 고려한 배치이다.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빠져나가면 정면에 길고 높은 계단이 마주한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로 오르는 길이다.
사당은 문과 담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데, 단청이 칠해져 있는 문은 아무 장식이 없는 다른 건물들과 대조를 이
룬다. 삼문으로 된 신문(神門)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음력 4월과 10월의 첫째 정일(丁日)의 향사 때에만 열린다.
존덕사 동쪽에는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서쪽에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
각(藏板閣)이 있다. 전사청이나 장판각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촐한 집들이다.
지금까지 올라가면서 건물을 보았다면 이제는 건물에 앉아서 직접 이곳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사람의 눈으로
살펴보자. 병산서원의 건물들은 겉에서 보면 매우 무심히 지어진 듯 보이지만 실은 기거하는 사람의 눈이나 마음
을 곳곳에 담고 있다. 먼저 존덕사의 신문 앞 계단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지붕들 너머로 멀리 강이 보인다. 가
장 중요한 공간인 강당 마루에서는 만대루가 길게 펼쳐진 지붕 위쪽으로 위엄이 서려 있는 병산과 하늘이 보인다.
강물은 만대루 누각의 기둥 사이로 찰랑거린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두보의 시 한 귀절인 “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 만대
루를 오르자면 통나무를 깎아 걸친 나무계단이 먼저 눈에 띈다. 신을 벗은 발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
없다. 만대루에 오르면 머리 위로 휘어진 굵은 통나무 대들보가 물결치듯 걸쳐 있다. 역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으
로 살려 편안함을 주고 있다.
만대루에 앉아 바라보는 승경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사람을 취하게 한다. 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병산(甁山)은, 『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는 뜻일 게다.
가까이로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원의 바깥 앞쪽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복례문에 이어진 담장 구석에
는 1칸짜리 뒷간이 있는데 서원 뒷간이어선지 깔끔하다.
서원 마당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특히 복례문에 들어서서 만대루로 오르는 계단 앞의 화단과 사당
계단 양옆, 장판각 주위에 많다. 장판각 앞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을 심고 제자들을 가르
쳤다는 얘기에서부터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져오던 나무이니 서원과 잘 어울린다. 병산서원에 그밖에 별다른 조경
시설이 없는 것은, 주변 풍광 자체가 뛰어나서 보기만 해도 자연을 가득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한가운
데 들어감으로써,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자연을 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병산서원에는 정문말고도 옆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그 옆집이 바로 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사는 고직
사이다. 지금은 서애의 후손이 살면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이 집도 꽤 오래된 집이라 민가로서 해묵은 맛을 잘
간직하고 있다.
8. 무 성 서 원 (사적 제166호)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326
통일신라 때 태산고을이었던 칠보면 무성리에는 우리나라 유학자의 효시로 꼽히는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원래는 태산현 군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태산사(泰山祠)를 태산서원이라고
불렀는데, 숙종 22년(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그 사이 조선 성종 15년(1484)에 퇴락한 태산사를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고, 중종 39년(1544)에는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을 합사(合祠)했으며, 그 밖에도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함께 배향하게 되었다.
입구에는 낡은 홍살문이 있고, 비각, 현가루, 강당, 태산사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태산사 건물은 성종 15년(148
4)에 세워져 헌종 10년(1844)에 중수했고,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타 없어져 순조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같은 위세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대로 오랜 세월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고종 5년(1868)에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제외
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9. 돈 암 서 원 (사적 제383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1634년(인조 12)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그의 사상을 잇기 위해
창건되었다.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
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돈암'은 서원이 창건되었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현재 서원의 자
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다. 돈암서원은 1880년(고종 17) 현재의 위치인 연산면 임리 74로 이
건하였는데, 이는 원래 서원이 있던 자리의 지대가 낮아 홍수로 서원에 물이 들어와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계 김장생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문하에서 성
리학을 배우고 이어받아 17세기 사림의 시대에 걸맞게 조선 예학(禮學)을 정비한 예학의 대가이다.
김장생은 3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황강(黃崗) 김계휘(金繼輝, 1526∼1581)가 세상을 떠나자, 상례와 제례를 한
결같이 가례대로 하였는데, 이듬해에 김장생은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제서(喪制書)」를 정리하고 절충하
여 일반인이 쓰기에 편하도록 정리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하였으며, 52세(1599년)에는 관혼상제의 예
를 고찰한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김장생이 예론(禮論)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라고 보고, 그것을 '예'라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돈암서원은 예학을 대성한 사계 김장생을 모시면서부터 창건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
의 산실이 되었다.
연산 땅에 돈암서원이 창건되기 이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1557년(명종 12) 연산 대둔산(大屯山) 고운사
(孤雲寺) 경내에 정회당(靜會堂)을 설립해 후학 양성과 향촌 교화에 전념하였고, 김장생은 1602년(선조 35) 연산
으로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양성당은 김장생을 따르고 그에게 배
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모여 강학하던 서재이다.
돈암서원은 양성당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고, 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창건했던 강경(江景)의 죽림
서원(竹林書院, 옛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서원은 동쪽을 향해 앞으로 펼쳐진 일대
의 들판을 내다보고 있다. 서원 경내의 건물과 시설물로는 사당인 숭례사(崇禮祠), 강당인 양성당, 동재와 서재, 응
도당(凝道堂), 장판각, 정회당, 산앙루, 내삼문, 외삼문, 하마비, 홍살문 등이 있다.
서원 경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당은 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앞쪽의 담은 꽃담(愼獨齋)이다. 김집(金集, 1574
∼)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오른쪽인 남벽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의 위패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앞쪽 열은 퇴칸이다. 사당 내부에는 주벽인 서벽 중앙에 사계, 왼쪽인 북벽
에는 안에서 밖으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오른쪽
인 남벽에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위패가 모셔져있으며 이들 네 분은 모두 문묘에 종사
하였기 때문에 돈암서원은 선정(先正)서원이기도 하다. 내삼문 앞에 위치한 양성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전후에 퇴를 둔 대청이며, 좌우에는 온돌방 각 1칸씩을 두었다. 강당 앞에는 마당을 마주
보며 최근에 재건한 동재와 서재가 서 있다. 강당 앞 오른쪽인 동남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인 응도당이 자
리하고 있다.
응도당은 옛터에 남아 있던 강당 건물이었는데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이 건물은 성리학자들에게
중요시되는 예제(禮制) 중에서 묘침제(廟寢制)에 근거하여 영건된 점에서 돈암서원에 모셔진 김장생의 예학을 반
영하는 건물로 주목을 받는다. 묘침제는, 사묘 건물에서 제례를 행하는 묘(廟)는 봉향 대상이 되는 침(寢) 앞에 세
우도록 규정하며 건축 형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서원의 강당은 묘(廟)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