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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 채번암 제공 의 묘소에 올리는 제문〔祭樊巖蔡相國 濟恭 墓文〕
본관이 평강(平康)인 번암(樊巖) 선생 채 상공(蔡相公)께서 기미년(1799, 정조23) 정월 18일에 서울의 자택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때에 경대부들이 조정에서 서로 조문하고 사서인(士庶人)들은 재야에서 서로 조문하면서, 모두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하였고 또 “우리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대개 분주히 달려가 염하고 장례 지내는 것을 보려는 자들이 도로에서 서로 이었는데, 유독 평소에 알아줌을 받았던 진양(晉陽) 정종로(鄭宗魯)는 멀리 영남 지역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또 바야흐로 외롭게 병으로 오래 고생하여 영전에 달려가 한 번 곡할 계기가 없었기에 이에 몇 줄의 글로 공사 간의 애통함을 묘사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끝내 그 일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다음 해 경신년(1800, 정조24) 3월 모일에 맏아들 상진(象晉)의 서울에 관광(觀光)하러 가는 행차가 상공의 묘소로 길을 지난다는 것을 듣고는, 서 유자(徐孺子)가 황 태위(黃太尉)를 곡한 고사에 의거하여 닭 한 마리와 술에 담궜던 솜을 가지고 가서 재배하고 공경히 올리며 고하게 하였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 상공은 천지를 지탱하는 힘이 있고 강하(江河)의 물을 받아들일 국량이 있으며, 시귀(蓍龜)와 같은 지혜는 신령하였고 규벽(奎璧)과 같은 문장이 빛이 났습니다. 천하의 지극히 중요한 일을 맡아도 어려워하지 않았고 천하의 지극한 험난함을 겪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량에는 일세(一世)를 포용해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가슴에는 만 가지 물품을 빚어 내어도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미에 임하여 계책을 결단함에 한마디도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고, 날이 개면 가고 비 오면 그쳐서 한 걸음도 망녕된 행동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계책을 도움에는 가의(賈誼)의 대책문과 육지(陸贄)의 주의문(奏議文)으로 글자마다 세상을 상서롭게 할 수 있었고, 문단에서 으뜸으로 주도함은 사마천(司馬遷)의 골수와 반고(班固)의 근육으로 편편마다 후대에 전할 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 있어서는 주석(柱石)의 대신(大臣)이 되었고 유림(儒林)을 통솔함에는 영수(領袖)의 거공(巨公)이 되었습니다. 그 성대한 덕망과 큰 절개 그리고 풍성한 공로와 위대한 공렬은 이미 당시를 진동시켜 빛났고 사방에 전파되어 외워졌습니다. 또 그 일월을 꿰뚫는 정충(精忠)과 천지를 세우는 대의(大義)는 더욱 영조(英祖)에게 많은 권우(眷遇)를 받았고 정조(正祖)에게 깊은 계합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석양에 시민당(時敏堂) 뜰 가운데서 피눈물을 뿌리며 하소연함과 만년에 화성(華城)에서 실성 통곡하며 상소문을 올린 것은 황천(皇天 임금)의 안색을 변하게 만들며 귀신을 감읍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방의 천지의 바른 도리가 이에서 드디어 일세에 크게 빛나고 밝아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수백 년 만에 나타나는 광악(光嶽)의 기운을 홀로 품부받았거나 천지 가운데 서서 강상(綱常)의 이치를 홀로 온전히 가진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시종 뜻을 잡음을 확고하기가 금석 같고 잠깐 사이에도 부지(扶持)함을 우뚝하게 동량(棟樑)이 되어, 아홉 번 죽음을 겪어도 변하지 않고 천고에 우뚝하여 비견하기 드물기가 이와 같은 데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오당(吾黨)의 선비들이 태산과 북두성처럼 우러름에 더욱 간절하고 속마음의 정성을 더욱 드러내 보이는 까닭입니다.
또 몇 년 동안 가슴에 안고 있던 의리를 상공의 덕택으로 비로소 소리와 기운을 천양하고 발휘하여 중외에 서로 의지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상공께서 별도로 오당(유교)을 위해 한 일의 경우에는 비유하건대 하나의 큰 장막으로 감싸고 두루 덮는 것과 같으며 또 특별히 조화옹의 손으로 돌려서 열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번갈아 이르는 비바람을 막아 하룻저녁 사이에 추로(鄒魯)로 돌아가게 하여, 여러 곳의 그늘진 데에 모두 비치는 햇볕을 받게 하였고, 고가(故家)의 교목(喬木)에 모두 일어나는 춘풍을 입게 하였습니다. 비록 비가 하늘에서 내리더라도 사악(四嶽)에서 구름이 일어났기 때문이니, 곧 이구동성으로 그 공적을 칭송하게 만드신 것을 어찌 오랜 시간이라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기유년(1789, 정조13) 가을에 제가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 벼슬로 왕명을 받고 궁궐에 갔을 때에 처음으로 상공의 댁에서 상공을 뵈었는데 광휘(光輝)를 접함에 심복함이 더욱 깊었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황 단명(黃端明)에게 배우기를 원하였던 것을 비록 감히 스스로 비견할 수는 없지만 구양공(歐陽公)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반드시 이보다 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공의 감식력에도 불구하고 이에 도리어 흘러다니는 이야기를 지나치게 듣고서 외람되게 저를 천거하고 발탁하여 어르신의 명기(名器)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으니, 또한 헛된 이름으로 등용된 것이 비록 혹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민심을 받아들인 것과 같다 하더라도 패배하는 날 마침 사마휘(司馬徽)의 수경(水鏡)처럼 밝은 안목을 손상시키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제가 벼슬에 부임함을 삼가며 머뭇거리는 데 여가가 없었으나, 감격의 마음은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오직 사직과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타인보다 뒤지지 않아서 만수무강의 산가지로 매양 하늘에 축원하였으나, 하늘이 현자를 남겨 두지 않아 공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태산이 무너지고 황하가 끊어졌습니다. 지금 이후에 공의 업적을 이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상공의 정대(正大)한 기상과 충만한 정신은 반드시 대중들과 함께하며 소멸되지 않을 것이니 현재 바야흐로 하늘에 뻗쳐 엉겨 모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장차 오궁(五宮)과 구천(九天)의 별이 되어 건상(乾象 하늘의 형상)을 장식할 것입니까. 아니면 장차 팔간(八干)과 사유(四維)의 신이 되어 곤축(坤軸 지구의 축)을 견지할 것입니까.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혹 먼저 뇌정(雷霆)과 벽력(霹靂)이 되어 천지 사이의 사특한 기운을 격파하고 그 뒤에 화풍(和風)과 감우(甘雨) 그리고 경성(景星)과 경운(慶雲)이 되어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성세(聖世)를 상서롭게 하여, 현준(賢俊)에게 길이 탄탄대로를 열어 주며 나라에 태평의 운수를 길이 회복하려 합니까. 어둡지 않은 신령은 능히 살펴 주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1] 채번암(蔡樊巖) : 채제공(蔡濟恭, 1720~1799)으로,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ㆍ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43년(영조19) 문과에 급제하였다. 1788년(정조12)에 우의정, 1790년(정조14)에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하기도 하였다. 1799년(정조23)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순조1)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순조23)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주2] 관광(觀光)하러 : 관광은 《주역》 〈관괘(觀卦) 육사(六四)〉에 “나라의 휘황찬란한 빛을 봄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이 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진 문물을 접하여 견식을 넓힌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과거에 응시하여 임금의 빛나는 성덕(盛德)을 본다는 뜻이다.
[주3] 상공의 묘소 :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북동(北洞)에 있다.
[주4] 서 유자(徐孺子)가 …… 고사 : 서 유자는 후한(後漢) 때 서치(徐穉)이며 황 태위(黃太尉)는 태위를 지냈던 황경(黃瓊)이다. 서치는 집에서 구운 닭 한 마리를 준비한 다음 술에 적신 솜을 햇볕에 말려 닭을 싸 두었다가 문상을 가서 솜을 물에 적셔 술을 만들고 닭을 앞에 놓고 애도한 뒤 떠났다. 《後漢書 徐穉列傳》
[주5] 규벽(奎璧) : 규수(奎宿)와 벽수(璧宿)의 병칭으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로 알려져 이 별의 정기를 모아 태어난 사람은 대문호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채제공이 바로 규벽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 대문장가가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6] 날이 …… 그쳐서 : 일신의 행지를 천명에 맡긴다는 말이다.
[주7] 가의(賈誼)의 대책문 : 가의(기원전 201~기원전 169)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명신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참소를 입고 장사태부(長沙太傅)로 좌천되었다가 33세로 요절하였다. 그는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대책문을 잘 지었다.
[주8] 육지(陸贄)의 주의문(奏議文) : 육지는 당(唐)나라 가흥(嘉興) 사람으로,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宣公)이다. 18세에 진사가 되어 덕종(德宗)의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가 되고 이후로 천자의 곁에서 문한(文翰)을 담당하여 조서(詔書)를 기록함에 사정을 곡진히 하여 기회(機會)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고, 주의(奏議)를 잘 짓기로 더욱 유명하였다. 저서로는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가 있다.
[주9] 일월을 꿰뚫는 정충(精忠) : 전국 시대 자객이었던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을 위해 진 시황(秦始皇)을 살해할 목적으로 진나라에 갈 무렵, 태자와 빈객들이 역수(易水) 가에 이르러 전별하였다. 형가가 이에 화답하여 노래하기를 “바람이 소소히 불고 역수가 차니, 장사가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으리라.[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하였다.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고 한다. 《史記 刺客列傳》
[주10] 석양에 …… 하소연함 : 1758년(영조34)에 사도세자를 폐(廢)하는 하교가 담긴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지자, 공이 비망기를 가지고 임금을 대하여 말하기를 “이 전교(傳敎)는 신하가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죽음이 있을지언정 결단코 반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대노하여 일어나자 공이 갑자기 앞에서 옷자락을 끌고 “죽음을 무릅쓰고 환납(還納)하게 할 것입니다.” 하며 울음소리가 나고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그 지성에 감동하여 환납하였다. 또 1760년(영조36)에 영조가 도승지도 나의 말을 들어주었다고 하면서 사도세자를 심하게 독책(督責)하였다. 이에 채제공이 시민당(時敏堂)의 뜰 가운데에서 노숙하며 대죄(待罪)하고 있는 사도세자에게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채제공의 〈현륭원개장만사(顯隆園改葬輓詞)〉에 “뜰 가운데에서 지신사를 인접하시고, 푸르고 서늘한 돌 위에 앉아 석양이 되었네. 예모를 공손히 들으심은 겸손하신 것, 시의를 자세하게 의논하였네.[庭心引接知申事, 石上蒼涼坐夕陽. 恭聽睿謨皆挹遜, 細將時議與商量.]”라고 하였다.
[주11] 만년에 …… 것 : 1794년(정조18)에 공이 화성에 있으면서 사도세자의 기일을 맞으니 충정이 더욱 격동하여 피눈물을 뿌리며 〈변예무소(辨睿誣疏)〉를 올렸는데, 거기에 “임금께서 입은 적삼 소매에 눈물이 흘러 피가 되었으니, 지극한 원통함이 하늘을 관통하여 억울한 마음을 펴지 못한 눈물이 아니라면 어찌 피가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주12] 광악(光嶽) : 삼광(三光)과 오악(五嶽)을 말한다. 삼광은 해ㆍ달ㆍ별로서 하늘을 뜻하고, 오악은 동악(東嶽)인 태산(泰山), 서악(西嶽)인 화산(華山), 남악(南嶽)인 형산(衡山), 북악(北嶽)인 항산(恒山), 중악(中嶽)인 숭산(嵩山)으로, 땅을 뜻한다.
[주13] 소리와 기운 : 원문 성기(聲氣)는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에서 빌려 온 말이다.
[주14] 장막 : 원문 ‘병몽(帲幪)’은 차일과 휘장 등의 장막을 말한다. 위에 치는 것을 병(帲), 덮는 것을 몽(幪)이라 한다. 《양자법언(揚子法言)》 권2에 “비바람이 친 다음에 큰 집이 나를 덮어 줌을 안다.[震風凌雨, 然後知夏屋之爲帡幪也.]”라고 하였다.
[주15] 비가 …… 때문이니 : 하늘은 임금을, 사악은 대신을 가리키니, 임금이 백성에게 은혜를 내린 것이 모두 채제공의 건의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16] 오랜 …… 있겠습니까 : 원문의 ‘경복(更僕)’은 하인을 차례로 교대시키는 것인데, 오랫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뜻한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선비의 행실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갑자기 세자면 그 수를 다 말하지 못하고, 다 세자면 오랫동안 앉아 있어 모시는 하인을 바꾸어도 마칠 수 없습니다.[遽數之, 不能終其物, 悉數之, 乃留更僕, 未可終也.]”라고 대답한 말씀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儒行》
[주17] 황 단명(黃端明) : 이름은 중(中), 자는 통로(通老), 시호는 간숙(簡肅)으로, 단명전 학사(端明殿學士)를 지냈기에 황 단명이라 한다. 주희(朱熹)가 평소에 사모하여 만나 보고 싶었던 인물이다. 《주자연보》에 “건도(乾道) 정해(1167) 8월에 주희(朱熹)가 남헌(南軒 장식(張栻)의 호)을 방문할 때에 소무(邵武)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황 단명에게 편지를 보내고 배알했다.”라고 하였다. 《주자대전》 권37에 〈상황단명(上黃端明)〉과 권91에 〈단명전학사황공묘지명(端明殿學士黃公墓誌銘)〉이 실려 있다.
[주18] 구양공(歐陽公)을 …… 것 : 구양공은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말한다. 그는 여릉(廬陵) 사람으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한림학사와 참지정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기(韓琦)와 마음을 합하여 정사를 도왔고, 희령(熙寧) 초에 왕안석(王安石)과 불합하여 태자소사로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소순(蘇洵, 1009~1066)이 그를 만나 보고자 간절히 바랐던 내용의 글이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에 실려있는 〈상구양내한수서(上歐陽內翰脩書)〉이다.
[주19] 명기(名器) :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등급을 표시하는 관직과 작위를 말한다.[주-D020] 사마휘(司馬徽)의 …… 것 : 사마휘는 한(漢)나라 말기의 영천(潁川) 사람으로 자는 덕조(德操)이다. 청아(淸雅)하고 사람을 잘 알아보았는데, 방덕공(龐德公)이 그를 두고 수경(水鏡)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을 유비(劉備)에게 천거하였다. 이에 유비가 삼고초려하여 제갈량을 등용하였으나, 유비가 223년에 죽고 제갈량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蜀漢)을 부흥하려 하였지만 234년에 54세의 나이로 죽어 결국 삼국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처럼 수경과 같았던 방덕공도 실수가 있는데, 아무리 지혜가 뛰어난 번암이라 하여도 정종로 자신을 등용하면 실수가 없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주21] 만수무강 : 원문 ‘해옥(海屋)’은 해옥첨주(海屋添籌)의 준말로, 남의 장수를 축하하는 뜻이다. 옛날 세 노인이 함께 만난 자리에 어떤 자가 나이를 묻자, 모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 그때마다 산가지 한 개를 놓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하나씩 놓은 산가지가 열 칸 집에 이미 가득찼다.”라고 하였다 한다. 《東坡志林 卷2》
[주22] 하늘이 …… 않아 : 원문 ‘천불은유(天不憖遺)’는 하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弔辭)에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23] 오궁(五宮) : 28수의 사방 별자리인 동서남북궁과 북극을 중심으로 하는 중궁(中宮)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주24] 팔간(八干) : 갑(甲), 을(乙), 병(丙), 정(丁), 경(庚), 신(辛), 임(壬), 계(癸)이다.
[주25] 사유(四維) : 건(乾)ㆍ곤(坤)ㆍ간(艮)ㆍ손(巽) 등 사방의 간방(間方)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방(四方)의 뜻으로 쓰였다.[주-
[주26] 경성(景星)과 경운(慶雲) : 경성은 덕성의 별이름으로 서성(瑞星)이라고도 하며, 경운은 상서로운 구름으로 경운(景雲) 또는 경운(卿雲)이라고도 하는데 태평세대가 올 징조로서 오색 구름이 끼는 것을 말한다. 모두 요 임금 때 나타났다고 한다.
祭樊巖蔡相國 濟恭 墓文
樊巖先生平康蔡相公。以己未正月十八日卒于京師之第。于時卿大夫相弔于朝。士庶人相弔于野。咸曰國其如何。又曰吾其如何。蓋奔走以視其殮葬者。相屬于道。而獨平日辱知如晉陽鄭宗魯。遠伏嶺表。又方煢焉在疚。無由一哭於靈几之下。則念以數行文。瀉其公私之慟。終不可以遂已也。乃於越明年庚申三月日。因長子象晉觀光之行。聞路經相公之墓。倣徐孺子哭黃太尉故事。使以隻雞漬綿。再拜敬奠而告之曰。嗚呼相公。有撑拄乾坤之力。有呑納江河之量。有靈若蓍龜之智。有炳如奎璧之文。任天下之至重而不以爲難。歷天下之至險而不以爲懼。容一世於度內而不以爲足。陶萬品於胷裏而不以爲衆。臨機決策。無一言之不中。霽行潦止。無跬步之妄動。黼黻乎皇猷則賈策陸議。字字可以瑞世。冠冕乎藝苑則馬髓班筋。篇篇可以傳後。用是處廟堂而爲柱石大臣。統儒林而爲領袖巨公。其盛德大節。豐功偉烈。旣已震耀於一時。而傳誦於四方。又其貫日月之精忠。建天地之大義。尤能受深眷於先朝。結奧契於當宁。夕陽庭心。灑血涕而有訴。暮年華城。哭失聲而陳疏者。足令皇天動色。鬼神感泣。而我東方天經地誼。於是乎遂得大彰明於一世。是非光嶽之氣。間百年而獨稟。綱常之理。中兩儀而獨全。其孰能終始秉執。確乎如金石。造次扶持。隆焉爲棟樑。歷九死而靡變。卓千古而罕比。乃至於如此乎。此吾黨之士所以益切山斗之仰。冞輸肝肺之誠。而又自幸積幾年所抱之義理。賴相公始得其闡揮聲氣。與同中外相倚者也。至若相公之別有造於吾黨。則譬如一箇大帲幪。包涵而徧覆。又如特地造化手。斡旋而開闢。禦震凌於交至之餘。返鄒魯於一夕之間。而使夫幾處陰厓。皆被白日之照臨。故家喬木。咸蒙春風之發生。雖零雨之自天。寔四嶽之興雲。卽令交口而致頌。豈可更僕而勝數哉。往在己酉秋。宗魯以金吾郞承命詣闕也。始獲拜相公於其第。光輝所接。聳服愈深。竊謂黃端明之願學。雖不敢自比。而歐陽公之得見。未必能過此。顧以相公之知鑑。乃反過聽於遊談。猥加薦拔。致玷名器。則又懼夫虛名之用。雖或同諸葛公人心之收。見敗之日。適以傷司馬氏水鏡之明。踧蹜不暇。感激何論。惟是爲社稷生靈之心。不後於人。以海屋無疆之籌。每祝於天。天不憗遺。公遽棄捐。泰岳崩矣。黃河絶矣。不知今後。繼蹟伊誰。抑相公正大之氣磅礴之精。必不共衆人而消滅。見方亘長空而凝聚矣。其將爲五宮九天之宿。以賁乾象乎。抑將爲八干四維之神。以持坤軸乎。是莫得而知之。然意者或先爲雷霆霹靂。以擊破天地間邪氣。乃後爲和風甘雨。景星慶雲。以澤萬物瑞聖世。而長闢亨衢於賢俊。永回泰運於邦家耶。不昧之靈。尙兄有以鑑之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