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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 귀신의 본질/ † 구원의 확신과 귀신 축사
유대인들의 신앙은 죄에는 저주가 온다고 믿는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죄만 없어지면 저주는 없어진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다. 다만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예수가 과연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이시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기회도, 그보다 더 큰 구원은 없기 때문이었다.
“죄값은 사망이다.”는 율법 하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으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에서 자유할 수 있다고 선포하셨다. 죄만 떠나면 자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과연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가?’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죄 사함을 받으면 구원을 받는 줄은 아는데, 그들이 아는 예수는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목수인 그가 어떻게 죄를 사하겠느냐?’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9:5-6절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환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너희로 알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중풍환자를 곧 일어나게 하셨다. 예수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라고 믿어지기만 하면,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한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당시 유대인에 비해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들의 입장은 어떤가?
우리는 “죄값은 사망입니다” 하면, “아멘”하고 대답은 잘하지만, 진정 신앙으로 받으려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을 잘 알고 이해하게 되면 속죄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기 전에 먼저 귀신 들린 자에게 이를 잘 설명하고 이해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 속죄함을 받아야 산다고 말은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속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근심하며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이다. 주님이 약속하신 속죄의 사건(십자가상의 죽음과 보혈)을 자신이 믿고 인정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망을 가져다주는 죄만 무너져 버리면 마귀는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마귀는 우리를 해칠 만한 합법적인 권리가 상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죄가 있으면 마귀가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고전5:5절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죄인의 영은 구원받게 하고, 죄인의 육체는 귀신에게 내어주어 귀신이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가 귀신을 이기는 가장 큰 방법은 구원의 확신이다. 예수님의 보혈이 내 죄들을 진멸했다고 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참으로 믿게 되면, 귀신 축사는 대단히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체험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도무지 귀신을 제어할 길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와 사람을 지배한다고 하는 사실을 관념이나 교리로 생각할 뿐 사실로 생각하지를 않는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한다. 마귀는 율법에 정죄된 사람을 하나님께 참소한다. 그러면 의로우신 하나님은 법대로 형벌하신다. 곧 사탄에게 내주어 형벌하게 하신다. 사람은 율법 때문에 정죄를 받는다.
그래서 율법이 정죄하게 되면 그 정죄된 것으로 마귀가 하나님께 참소하게 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를 형벌하시는데, 이를 사탄에게 맡긴 것이다. 그래서 형벌을 저주라고 말한다.
욥기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마귀가 형벌하는 것은 죄인을 형벌하는 것이지 의인을 형벌하는 것은 아니다. 죄에 속한 사람, 곧 세상에 속한 사람은 사탄이 형벌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서슴없이 저주를 자초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거룩한 신자들은 저주를 자초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이다. 그분이 죽으셨다는 말은 그분께서 죄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다. 그것은 그분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죽게 되었던 죄의 경험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고 하는 증거는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에게는 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율법이 정죄할 것이 없게 되었고, 정죄할 능력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율법이 정죄할 것이 없으므로 마귀가 참소할 것이 없어졌다. 마귀는 정죄된 것만 참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죄 없는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가?” “죄가 있었기에 죽었구나?” “그러나 죄가 있어 죽었다면 어떻게 죄인이 다시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자기 죄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구나?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이었구나? “
그렇다면 이제 우리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우리의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고, 우리는 의인이 되고(칭의), 성령께서 그 보증으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시는구나! 우리에게는 죄가 없어졌으니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고, 마귀에게는 참소 거리가 없어졌고, 하나님의 형벌도 없어졌구나?” 하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피를 주고 우리를 사셨다(행20:28). 우리는 그의 피의 사람이 된 것이다. 구약의 모세가 광야를 지나다가 열병에 죽게 되었을 때, 모세의 부인이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그 피를 하나님께 보임으로써 재앙을 거둬지게 하였다. 그때 모세의 부인은 자기 남편을 피로 산 남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도 주님의 피의 사람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건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인정받게 되었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 마귀로부터 자유,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주심으로 우리 죄는 장사 지낸바 되었다. 이는 그분 자신이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법적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피를 마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죄가 그분께 옮겨가고 그분의 피뿌림으로 우리가 피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를 갖는 것이다.
그분은 피를 흘려 우리를 사셨고, 이로 인해 우리는 그의 피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피와 예수를 증거 하는 말씀이다. 롬10:10절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한 것과 같이, “예수가 나를 구원하셨다.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마귀를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쫓겨 내려와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괴롭히는 원수를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자들은 즐거워 하지만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하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하늘에 속해 있는 자들은 즐거워 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대로 “예수의 피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이는 죽기까지 계속해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에게 혹 어떤 박해가 오든지 육신에 고통이 와서 우리 마음에 심한 좌절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끝까지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그분의 죽음이 나에게 구원이 되었으며 그분의 피흘리심이 나를 죄에서 구속하셨다. 이제 나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또 일어나 끝까지 시인할 때에 이기는 것이다. “주님의 피가 나를 사셨다. 나는 피의 사람이다.”라고 시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믿음으로 주장하면 결코 귀신이 역사하지 못하고 떠나간다. 예수의 피로 인해 일단 귀신이 떠났는데, 다시 들어오면 왜 그것을 다시 박멸하지 못하는가? 묵인하지 말고 귀신이 떠날 때까지 계속 대항하고 쫓아야 한다. 원수를 대항하지 않기 때문에 귀신은 자기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철저히 대항해야 한다. 예를 들면 길가의 풀포기를 땅에서 쑥 뽑게 되면 즉시 죽지 않고 싱싱한 색깔 그대로 있다. 그러나 약간 시들었을 때 그것을 다시 심게 되면 본래대로 다시 살게 된다. 그러나 뽑아 놓은 풀포기를 햇빛 아래 놔두면 시들어 말라 죽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뽑았던 풀포기를 다시 심어 놓듯이 원수를 묵인해 버린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 그 나무에 열매 없음을 아시고 꾸짖어 저주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을 귀로 듣기는 했지만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와 보니 그 나무가 말라 있어 “주여, 주님이 어제 저주하신 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계속 지속하라는 뜻이다. 한번 저주하면 그것이 그대로 된 줄 알고 계속 믿고 진행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귀신에 의해 폐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물론 폐병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귀신에 의할 경우의 예이다). 이는 귀신이 폐에 균을 파송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세상의 방법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으므로 약으로써 균을 죽이기도 하고 심하면 수술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수류탄을 던져 적군을 죽이는 것과 같다. 귀신은 2차, 3차 끈질기게 균을 파송한다. 파송하다가 지쳐서 나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면 그대로 훌쩍 떠나게 되지만, 끝까지 균을 파송해서 죽이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약하는 동안은 견딜 수 있겠지만, 대신에 점차 약을 더 강한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육체에 무리가 올 수도 있고 그러다가 투약을 그치게 되면 죽게 될 위험도 있는 것이다. 귀신이 끈질기게 대항해 오면 그때는 결국 감당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투약하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고 명령하여 떠나게 한다.
이때 귀신은 곧 떠나지만 균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양식하는 자가 떠나 버렸기 때문에 잠시 후 그 균은 죽게 된다. 이는 앞의 예에서 뽑아 놓은 풀이 죽게 되는 것과 같다. 균이 죽는 기간은 적어도 몇 시간에서 하루 정도는 걸리게 된다. 그동안만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그 병은 곧 완치된다.
그때 밖으로 나갔던 귀신은 다시 들어오고 싶어서 몸부림을 친다. 이때 본인의 신앙 상태가 태만해진다든지 또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방어하지 않고 의심하게 되면 다시 들어와 병이 재발하고 만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죄를 진멸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이를 지속하게 되면 나갔던 귀신은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마12:43-45절은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하여 나갔던 귀신이 다시 들어올 때에는 더 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귀신을 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이 약해 다시 들어오게 될 때에는 전보다 더 심해지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귀신을 내쫓고 싶거든 쫓겨난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사하셨다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 하는 말로 인해 저를 위해서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 것처럼, 자신이 한번 입으로 증거 한 것은 끝까지 시인하고 이를 지속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번 세 번 주장하다가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귀신에게 당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귀신이 나간 다음에는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를 철저하게 방어해야 한다.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예수의 피를 증거 하는 자신의 신앙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귀신은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지 인간의 영속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육체와 혼의 중간인 신경계통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육체만 깨어지면 귀신은 있을 곳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영으로 들어오며, 믿음의 성숙에 따라 혼으로 확장된다. 영이 받은 그 힘이 혼과 육체에 확대되어 나타나게 되고 이로 인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은 밖에 있는 육체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에 있는 영과 혼에 주어진다.
사람의 영에 주어진 권리를 혼에 사용하게 될 때 육체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계시록에서는 칠 배로 강화된 영의 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육체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귀신이 들어가 있는 것은 귀신이 그 사람의 육체를 저주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그 영과 혼이 보상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영에 받아들여서 영의 힘을 혼과 육체에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42:5절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자기 영혼을 깨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영에 받아들여서 그 힘을 혼과 육체에 공급함으로 저주받은 영들을 박멸해야 한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영은 공기이고 혼은 튜브와 같고 육체는 타이어와 같다. 영이 충만하지 않아 튜브에 공기가 빠지면 쭈굴쭈굴해져 버리지만 공기가 들어가 팽팽하게 되면 밖에 있는 타이어도 팽팽해져 자동차가 잘 달린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영에 충만히 채워 혼과 육체에 공급하면 육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므로 육체에 붙었던 귀신들이 거할 곳이 없어져 떠나게 된다.
귀신에 의한 병은 혼으로 인한 육체 안에 있는 것이므로 실상은 큰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만찬을 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 떡과 포도주는 육체가 먹는다. 그러나 이는 육체가 의식을 통해 기념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영과 혼이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이다.
내 영과 영이 확장되어 혼에도 예수의 피와 살이 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 육체가 먹고 소화시킨 떡과 포도주 그 자체가 예수의 피와 살은 아닌 것이다. 예수의 피, 성령, 주님의 약속, 주님의 이름은 다 우리의 영에 주어져 우리의 영 안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같은 떡이지만,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다.
여러분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누구든지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라고 말씀한다.
모세가 준 것은 육체에 들어가 소화되는 것이지만, 내가 준 것은 영과 그리고 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우리의 영과 혼에 받아들인 그 힘을 육체에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영이 충만하지 않고 혼,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영이 확장되지 않고 혼의 변화가 없다면, 육체 또한 의욕이 없다.
그렇게 되면 육체가 환경을 지배할 능력이 없게 된다. 그러나 영이 충만하고 힘이 강하면 혼이 변화되어, 영의 생각과 영의 감정과 영의 의지로 변화되어 육체를 지배하게 되고 그로 인해 육체가 힘이 있으면 환경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삼1:2절은 “사랑하는 이여, 네 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몸이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살전5:23). 혼은 몸과 영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기관이다. 이 혼에는 자의식이 있으므로 사람마다 각자 개성과 기질과 인격을 갖게 된다. 혼은 몸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또한 혼은 영을 둘러싸는 그릇이다. 믿는 이의 거듭난 영안에는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롬8:9, 16).
그분은 믿는 이의 영에서부터 퍼져 나가시어 혼을 적시심으로써, 믿는 이의 혼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신다(롬12:2; 고후3:18). 이것이 바로 믿는 이의 혼이 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영을 통하여 우리의 혼을 점유하시고 다스리심으로써, 혼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다스리고 사용하게 될 때, 혼이 잘되는 것이다.
요삼1:2절은 “사랑하는 이여, 네 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몸이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한다. 혼이 잘되어 변화된 형제가 그의 혼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잘 되었듯이, 모든 일이 잘되고 몸도 건강하기를 바랐다. 우리의 영이 혼과 육체를 지배할 수 있도록 영이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영에 받아들여야 한다. 주의 보혈을 믿어야 한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인 것이 확실히 인정될 때에 귀신은 우리 속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그 피가 마귀의 참소에서 해방시켰고 하나님의 형벌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귀신을 축사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피의 능력이 우리 영 안에 충만하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영의 힘이 강화되어 혼과 육체를 점령할 수 있도록, 육체의 힘이 환경을 지배할 수 있도록, 자신이 예수의 피의 사람인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귀신을 축사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피의 능력이 우리 영 안에 충만하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영의 힘이 강화되어 혼과 육체를 점령할 수 있도록, 육체의 힘이 환경을 지배할 수 있도록, 자신이 예수의 피의 사람인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감사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