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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조차 사라지고 살짝 가파른 오르막 도로가 예전에는 산이었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백운고개생태육교가 보인다.
▲백운고개(사당이고개): 상도1동 숭실대학교에서 사당동 총신대학교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백운고개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고개 부근에 큰 사당이 있었다고해서 붙혀진 이름이며 옛 날 사당고개 옆에 있는 나무시장이 성시를 이루었는데 지금의 미륵암과 숭실대학교 부근으 로 가난한 사람들이 자녀들의 학비조달을 위해나무를 배다가 새벽 일찍 이곳에서 팔고 다시 나무를 하러 가던 곳으로 주로 장작, 솔개비, 깔지 등이 매매 되었으며 이곳의 나무들은 부자와 일본인들이 사갔다고 한다.
▲사당이고개(백운고개) 생태통로로 건너간다.
▲살피재란 동작구 상도1동 숭실대학교 아래 로터리에서 관악구 봉천동 넘어가는 고개로서, 높고 험한데다 숲이 울창하였으며, 도둑이 나타나 길손들을 괴롭혔으므로 고개를 넘는 길손들을 살펴서 가라고 당부하였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또 고개는 험하고, 백성들의 생활은 고달프고 어려움이 많아 슬프다는 뜻으로 슬피재로 하였다가 變音이 되어 살피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당이고개(백운고개) 생태통로 위에서 관악산으로 연결되는 마루금을 뒤돌아본다.
▲생태통로에서 상현중학교를 뒤돌아보고
▲가파르게 데크계단으로 오르고..
▲서달산 입구에서 돌아보니 고충아파트 사이로 관악산이 보인다.
▲데크길로 내려가면 이정표(상도중학교, 현충원, 동작역) 우측 동작역
방향으로 간다.
▲국립현충원 갈림길. 우측으로 가면 국립현충원(옛 동작동 국립묘지)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현충원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냥 좌측 지맥길로 향한다.
▲현충원 상도출입문으로 들어가면 지장사란 절이 있고 현충원 내부 순환로와 연결된다. 현충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로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 묘역과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배려로 김영삼 대통령 묘가 조성되어 있고 광주 5.18 묘역으로 가실 분이 비집고 들어온 김대중 대통령 묘도 만난다. 최고의 명당자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젠 더 이상 대통령을 모실 묘터는 없다. 상도출입문은 동작충효길 1코스(고구동산길), 3코스(현충원길), 6코스(동작마루길), 7코스(까치산길) 분기점이다.
▲동작충효길안내도 (녹색울타리)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동작대 방향으로 간다. 우측은 국립현충원이다.
▲구석구석 동작이야기 안내판
▲현위치번호이정표(동작대/배수지공원, 승실대입구역) 우측 동작대 침목계단으로 올라간다.
▲서달산 정상 동작대 정자가 보이고 올라간다.
▲서달산 (西達山)(179m): 동작구 동작동, 상도동, 흑석동 에 소재한 산으로 현충원을 둘 러싸고 있는 산이다. 서달산(西達山)[179m]은 북쪽 사면에 달마사(達摩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왔다는 불교의 화두(話頭)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전해진다. 또, 산 에 돌이 많아 서덜산이라 부르던 봉우리가 음이 바뀌어 ‘서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 다. 과거에는 달마사가 있는 산이라고 하여 달마산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 호국지장사(護國地 藏寺)로 부르는 화장사(華藏寺)가 위치했기 때문에 화장산(華藏山)이라고도 불렸다. ‘재강굴 산’이라는 명칭은 붉은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세의 형태가 날개를 펼친 공작의 형태와 비슷하다 하여 공작봉(孔雀峰)이라고도 불렸다. 서달산은 남쪽의 관악산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다. 전체적인 지형은 주봉인 서달산을 기점으 로 하여 북동-남서, 북서-남동, 남서-북동으로 이어지는 말발굽 형태의 산릉을 이룬다. 선 캄브리아 시대의 흑운모 호상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전반적으로 토산(土山)을 이루지만 곳곳 에 화학적 풍화를 받은 뒤 지표면 삭박(削剝)에 의해 노출된 핵석(核石)과 토르(Tor) 등이 분포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을 둘러싸며 분포하는 서달산은 송산통의 인셉티솔(Inceptisols) 토양으로써 양토 표토와 사양질의 심토를 지닌다. 서달산의 토색은 황갈색이며, 표토에 바위가 많다. 배 수등급은 매우 양호하며, 유효토심은 50~100㎝이다. 서달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북동쪽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과거에는 밭으로 이용되었으나 국립묘지 를 건설하면서 제방과 같은 인공시설물을 조성하여 하천을 정비하였다. 소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혼합림의 목본류와 100여 종의 다양한 초본류가 분포하 여 도시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다. 서달산 정상에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 일본인 부호가 별장을 짓고 한강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하여 명수대(明水臺)라는 명칭을 붙여 주거지로 사용하였으 나 광복 후에 철거되었다. ‘명수대’라는 명칭은 흑석동에서 마을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1953년 국립묘지의 부지가 동작동으로 확정되어 1954년부터 1968년까지 현재의 국립서울 현충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동작충효길 7개의 코스 중 서울지하철 9호선 노들역에서 시작하 는 제1코스가 서달산 서쪽 산록의 국립서울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끝나 제2코스로 이어진 다. 제2코스는 현충원길로 국립서울현충원 상도출입문 인근에서 시작하여 서달산의 남동쪽 사면 둘레를 따라 조성되어 있다.
자연환경
서달산은 남쪽의 관악산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다. 전체적인 지형은 주봉인 서달산을 기점으로 하여 북동-남서, 북서-남동, 남서-북동으로 이어지는 말발굽 형태의 산릉을 이룬다. 선캄브리아 시대의 흑운모 호상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전반적으로 토산(土山)을 이루지만 곳곳에 화학적 풍화를 받은 뒤 지표면 삭박(削剝)에 의해 노출된 핵석(核石)과 토르(Tor) 등이 분포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을 둘러싸며 분포하는 서달산은 송산통의 인셉티솔(Inceptisols) 토양으로써 양토 표토와 사양질의 심토를 지닌다. 서달산의 토색은 황갈색이며, 표토에 바위가 많다. 배수등급은 매우 양호하며, 유효토심은 50~100㎝이다.서달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북동쪽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과거에는 밭으로 이용되었으나 국립묘지를 건설하면서 제방과 같은 인공시설물을 조성하여 하
천을 정비하였다. 소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등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혼합림의 목본류와 100여 종의 다양한 초본류가 분포하여 도시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동작구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받친 호국영령을 모신 현충원과 사육신묘,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이 서 있는 장승배기, 양녕대군이 올라가서 국사를 걱정했다는 국사봉 등 문화유산도 많다. 동작구의 15개동 이름들도 조선 역사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백로가 노딜던 나루터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기 위한 진이 설치된 데서 유래한 노량진, 용산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도진의 하나였던 동작진을 조선시대 동재기나루라 부른데서 유래한 동작동, 큰 사당이 있었다는 사당동 등이 그렇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사육신(死六臣)묘와 노량진: 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가 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을 가리키며, 조선 중기 이후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당시 함께 처형된 김문기의 묘도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여섯 명의 젊은 충신들은 수양대군, 즉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을 복위키로 결의한다.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이 열리는 날, 거사를 준비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순절하고 만다. 1978 년 서울시는 이들 사육신(死六臣)을 기리는 공원을 만들어 일반에 공개했는데 성남문(成三 問)·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의 묘소와 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의 위패, 공묘를 모셨다. 위패를 모신 의절사와 사육신묘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됐 다. 당초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시가 이 곳을 성역화하면서 하위지·유 성원과 198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 墓)를 만들어 총 7개의 묘가 조성됐다.
▲달마사(達磨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931년 구성당 유심 스님이 창건하고, 만공 큰스님이 주석하여 근대불교의 장을 열었던 사찰로, 서달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방과 함께 요사채, 대웅전을 신축하였고,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등록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삼성각, 불로원, 다보탑, 영천,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일주문 등을 조성하였고, 1987년 대웅전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당시 문화부 (2008년 현재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사찰의 역사성과 불교의 근대화 업적을 인정받아 전 통사찰로 지정되었다. 1999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이사장인 종림(宗 林) 스님이 회주를 맡고 있다. 주지는 미명 스님이다. 2004년 4월 1일 달마사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10년 간 전산화한 524종의 경전, 16만 2,516매의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전산화본의 출판본을 봉안하였다. 국내 유일의 고려대장 경 출판본을 보유함으로써 장경도량이 된 달마사는 사찰 본래의 수행·기도 기능과 부처님의 말씀인 대장경의 학술·연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대장경을 연구하는 학술행사와 불자들과 함께 대장경의 가르침을 나누는 문화행사 등도 진행한다. 전체적으로 ‘ㄱ’자 형태의 사찰은 대웅전, 삼성각, 불로원(강의와 수행을 위한 공간), 영천 (용왕을 모신 샘) 등이 모여 있는 예배공간과 요사와 공양간이 자리한 생활공간으로 분리되 어 있다. 주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후기에 조 성된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약사여래의 삼세불을 주불로 봉안한다. 삼세불 주위로 금동관음보살입상과 석조지장보살좌상을 두었고, 2002년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관음탱·지 장탱과 1972년 조성한 범종·법고가 있다.
▲달마사 대웅전의 모습
▲자하루(紫霞樓) 현판이 안쪽에만 있음
▲삼성각
▲달마사 영월당(寧月堂)은 극락전 좌우에 조성되어 있으며 분양시간은 오전09시에서오후5시까지 가능하다 또한 서울에서 한강과남산을 한눈에 볼수있는 최고의조망권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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