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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⑩ - 제사장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오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열 번째 시간으로 마지막으로 제사장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도와 규례를 선포하시고 이를 이루는 과정에서 성막을 통한 제사제도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이 어떤 절차를 밟아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 사람의 속성을 알 수 있고 깊어지는 관계성을 통하여 친밀감이 생깁니다. 성막의 모든 형태와 기구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상징으로 이러한 상징성을 제사라는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나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어떻 게 정의(定義)하시렵니까? 현대인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부재(不在)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배워왔던 학문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챨스 다윈이 주장한 자연진화론에 의한 인간은 우연히 발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주 가운데 Big Bang이 있었고 이 작용으로 우연히 아베바라는 단 세포가 생기게 되어 이 세포가 무척추 생물을 척추생물에서 하등동물과 고등동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이뤄졌다는 가설(假說)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를 둔 인생관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느 날 우연하게 생겨난 존재입니다.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도덕성이 있고 윤리가 있어야 됩니까? 이 세상에 주어진 시간 동안 즐겁게 살면 됩니다. 가치의 기준을 행복에 둡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네가 불행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실패는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론이 근간에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New Age Movement라고 하는 신세대 운동입니다. 이 운동이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안에 신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존재라는 것이지요. 나 자신을 개발해서 내 안에 있는 신적요소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을 자신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재된 신적인 성향을 개발하면 우리는 영생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불교의 영성과 도교의 교리가 혼합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흐름은 기독교안에 들어와 혼탁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오래전에도 이런 것이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는 원어로 카펠류온테스'(καπηλεύοντε)라고 하는데 행상인이 과일의 좋은 것을 맨위에 놓아 전체가 좋은 것인양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행위'를 가리키거나 포도주에 물을 타 양을 많게 하여 질 낮은 포도주를 판매함으로써 '과도한 이익을 얻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짓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임의대로 하나님의 말씀해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고자하는 방법과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스스로 노력에 의하여 애씀에 의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은혜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깨달아야 됩니다. 철학으로 인간을 알 수 없고 학문으로 인간의 본질으 밝혀 낼 수 없습니다. 고대의 철학자로 유명하나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는데요.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플라톤의 대화>라는 책을 집필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대화하면서 스스로 사람들로 무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런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는커녕 반감을 사기도 했지요 그 철학의 근본이 무언지 아십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 있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의 도시 아테네에는 Agora라는 토론의 광장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을 토론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학파가 소피스트(Sophist)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소피스트는 궤변가의 집단을 나타내기도 하였구요. 궤변가의 이야기의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네가 만약 살 운명이라면 약 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살 것이고, 반대로 죽을 운명이라면 아무리 좋은 약을 쓴다 해도 결국은 죽게 된다. 그런데 너는 살 운명에 있느냐 죽을 운명에 있느냐의 그 어느 쪽에 있다. 그러므로 어차피 살려고 바둥바둥할 필요가 없고 약을 쓸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살려고 애를 써야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살든지 죽든지 체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런 궤변적인 것이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켜요. 여기에 무언가 그렇듯한 것이 있고 독특한 무엇이 있는가 하는 신선한 충격도 줍니다.
하나는 걸레스님이라 불렸던 중광스님의 시가 있습니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라는 시를 읊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여기에 무엇이 있을 것인 양 음미합니다. 그가 생을 마감하고 묘비명으로, ‘괜히 왔다 간다’로 적어 놓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그의 삶에는 어떤 의미도 사상의 깊이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린 벽지 그림 2장과 문짝 3점, 액자 3점에 온갖 욕설이 적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1500만원에 사간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살면서 하나님께 돌아가 진리 되신 주님을 믿고 그 분 안에서 나의 정체성 즉 Identity를 잃어버리면 허망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석하고 답을 주는 것은 학문도 철학도 지혜도 지식도 아닌 나를 창조하시고 내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셔야 합니다.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자기를 정의하면 혼미 속에 빠질 수밖에 엇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 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택하다는 에크레토스(ἐκλεκτό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고르고 고른, 정선한, 선택된' 가장 질이 좋은 것들을 '선택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은 Random방식의 무작위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지혜에 뛰어나시고 영원의 눈을 지니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중에 선택하신 것은 탁월한 선택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선택하셨냐하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왕 같은”이란 왕처럼 지배권을 갖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을 때에 왕 같은 권세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왕으로 자연과 모든 동식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오히려 고개를 들고 대적합니다. 불행의 원인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왕 같은 권세로 세상을 지배하여야 되는데 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왕권을 회복하는데는 반드시 제사장의 직무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오늘로 말하면 예배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으로 하나님에게 찍힘을 받아 저주에 떨어진 천사장 루시퍼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사야사 14:13~14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스스로 높고자 하고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을 교만이라 합니다.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청량리 정신병원의 원장이셨던 최신해 박사가 쓰신 수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회진을 돌고 있는데 한 전신병자가 왕관 비슷하게 종이를 오려 머리에 쓰고는 외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조선의 왕이다. 나에게 경배해라!” 그랬더니 한 사람이 썩 나서며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시다. 나에게 경배하라” 그랬더니 한 사람이 또 일어나 외치기를 “내가 임명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너희를 왕으로 임명하였느냐?”라고 소리치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신병자의 특징은 교만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만이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교만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먼저 왕처럼 섬겨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통치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이 구약시대는 제사요 오늘날에는 예배입니다. 제사와 예배가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것이란 제사의 모든 규레와 법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성막의 모든 기명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내가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에 정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자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예배의 연장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왕권을 받아 들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섭리의 배경에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욥기서 12:10에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하였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욥기 12:15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라고 하였는데 표준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물길을 막으시면 땅이 곧 마르고, 물길을 터놓으시면 땅을 송두리째 삼킬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언제 변덕스러울지를 모른다고 하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내게 행하시는 일이 때로는 내 경험과 판단에는 어긋나는 것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에는 모순된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하신 하나님의 왕권에 의하여 이런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그 뜻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왕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범적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는 무척 사랑하고 서로를 신뢰하며 존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부부의 모습을 본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곱고 순전하여 남편을 섬기던 아내가 외도를 10년 동안 해 온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 배신감에 차라리 세상을 등지고 싶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고 해석하여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수많은 문제와 모순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의 환경과 여건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신뢰와 왕권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질서를 잡습니다. 오늘의 슬픔은 질서가 잡히지 않습니다. 남편이 내 뜻대로 아내가 내 뜻대로 자식도 마찬가지이고 안도 밖도 뒤죽박죽입니다. 여기서 왕권이란 다스림의 효력 질서가 잡힙니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부부간에 자식간에 회사에서 상사간에 질서를 세우십니다. 예배는 질서를 이룹니다. 매주 똑같은 방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만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내 삶에 질서가 잡힙니다. 이 왕권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왕권은 예수님이 지니신 왕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6:2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에 세상에 오시므로 왕권을 지니고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왕적인 권세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보여주므로 예수님을 대변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구약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기름을 부어 구별하는 성별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기름부으심을 받은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선지자 또는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통렬하게 지적하므로 저들이 그 죄에서 돌이킬 것을 요구합니다. 너무나 차갑고 냉정합니다. 느헤미아 13:27에 “너희가 이방 연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 와 보니 많은 백성들이 이방여인과 짝을 지어 아이를 낳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아 선지자는 그들 이방여인을 쫓아내라고 말합니다. 가정이 산산조각 됩니다. 아이는 어찌되고 그간 쌓았던 정을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선지자에게는 양보도 타협도 없습니다. 찌르는 가시처럼 고통을 줄 뿐입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죄에 대한 무서운 진노와 형벌로 채찍질 했습니다. 이럴 때 제사장은 그들 백성을 제사의 제도를 통하여 용서합니다. 어떤 죄든지 죄를 가지고 성막에 나오면 가지고 온 제물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게 한 후에 제물을 드리고 죄의 용서를 선언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를 용서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 되려면 무한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용서를 수반합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신혼여행에 돌아와서 있을 때에 부엌에서 꾸적거리며 무엇을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수대야에다 결혼식에 신었던 고무신을 빨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소리를 쳤습니다. “아니 신발을 세수대야에 씻으면 어떻게 해!” 저의 어머니는 빨래대야. 세수대야. 발씻는 대야. 걸래 빠는 대야가 다 달랐습니다. 그런 밑에서 자란 저에게 아내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제 아내가 저를 쳐다보더니 “아니 세수대야는 다시 딱으면 되지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라고 하는 겁니다. 그 때 저는 얼른 제 판단을 접었습니다. 제 아내의 의견을 받아 들였습니다. 내 삶의 태도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자기 포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왜 그렇게 위대한지 아십니까? 당신을 십자가에서 모두 포기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의 명예도 영광도 모두 버리시고 생명마저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나의 삶을 통하여 나타날까요.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분당만나교회는 흡연실이 있답니다. 그 의도는 담배를 피우더라도 주께로 나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대로 나와 예수님을 믿다보면 예수님 안에서 변화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선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택하신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처음부터 완벽한 제사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제사장의 의복을 입혀 거룩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고의 하체를 가리기 위한 세마포 흩바지입니다. 하체를 가린다는 의미는 우리가 죄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반포 속옷'이란 겉옷안에 받쳐입는 옷으로 길이는 발등까지 내려오는 옷으로 겉옷 밖으로 옷자락이 보이는 긴 옷이며, 통으로 짠 것입니다. 에봇 받침은 겉 예복으로 에봇을 입기 위한 옷입니다. 이 옷은 무늬가 없는 순수한 청색으로 갑옷과 같이 튼튼한 옷입니다. 이 옷은 이어 만든 것이 아니라 통으로 만들고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내고 구멍 낸 안쪽 가장자리는 갑옷의 깃같이 단단하게 짜도록 된 것입니다. 이 옷의 색상은 청색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청색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에봇 받침에는 금방울과 석류방울이 교대로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금방울이란 믿음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방울이란 움직일 때만 소리가 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옷입니다. 이 에봇은 다섯 가지 금실, 청색,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실들은 각각 그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품격을 담고 있습니다.
판결 흉패란 제사장의 앞가슴에 사각형의 주머니를 말합니다. 이 흉패 또한 에봇과 같은 재료로 짜여진 것입니다. 그 크기는 한 뼘, 즉 22.5cm의 정 사각형의 주머니와 같이 담을수 있는 두 겹으로 된 구조입니다. 이 흉패는 앞면에 12개의 보석이 3개씩 4줄이 있습니다. 이 보석은 각각 독특한 빛을 띠는 보석으로 견대의 보석과 같이 금테로 단단히 물리웠습니다. 이 12개의 보석은 각각 이스라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각 보석마다 한 지파씩 이름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이 흉패의 네 귀퉁이는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위의 두 고리는 금사슬로 연결되어 에봇의 견대의 금테에 연결하고, 밑의 두 고리는 청색 끈으로 에봇띠 조금위의 고리에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이 금사슬과 청색 끈은 흉패를 가슴에 단단히 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판결 흉패는 두겹으로 되어 있어 한쪽은 보석의 무게를 지탱하고 한쪽에는 '우림과 둠빔'을 보관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에봇에는 어깨와 가슴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두 번이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전에 들어갈 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어깨에 매고, 가슴에 그들을 품고 하나님 앞에 속죄와 은혜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가는 것과는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전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 다를 뿐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판결 흉패의 안쪽에는 우림과 둠빔이 들어 있습니다. 이 우림과 둠빔은 어떤 보석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다른 보석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 우림과 둠빔은 하나님의 뜻을 가려내는데 쓰였으나 그 방법은 알 수가 없습니다.
에봇띠는 에봇이 흘러내리거나 펄렁이지 않도록 매는 것으로 베실로 짠띠에 수를 놓은 것입니다. 이 수를 레위기 8:7에는 기묘하게 짠 띠라고 말합니다.
'관'이란 가는 베실로 짠 두건으로 '싸다, 주위를 말다'라는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자기 비하와 슬픔, 수치심의 상징입니다.
금패는 대제사장의 이마에 매도록 되어있는 장식입니다. 그리고 이 금패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금패에 글씨를 새겨 관위에 매는 이유는 대제사장 역시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죄 많은 인간이기에 여호와 앞에 나갈 수 없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인을 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구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은 우리로 이 세상 사람들의 대표자로 부르셔서 막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비록 역약하나 하나님은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직분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 곧 소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주님을 뚜렷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흐트러지면 안됩니다. 그 분은 우리 믿음을 완성시키는 분이요 또한 믿음의 길을 먼저 가셔서 우리들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 분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이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잠깐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견뎌내셨습니다. ‘개의치’않으셨다는 원래의 의미는 ‘무시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만 하나님께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들에게 믿음이 그리고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나를 통하여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나타나고 그 분의 사랑이 배여 나기를 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런 다음 그 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서서히 내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나를 만들어 가시는 그 분의 손길을 인정합시다. 밤과 낮을 통하여 평안과 환난을 통하여 희망과 낙심을 통하여 나를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인정하고 잠잠히 참아 기다려 봅시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으나 언제가 이해되고 해석되는 날이 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