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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名門家)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金生海 家門)
▪ 안김(安金: 安東金氏)의 불가사의한 양수 겹장 !
상신은 정승을 말한다. 고려 시대는 정승이라 불렀고 조선 시대는 상신이라 부른다. 안김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안김(安金)은 양주조씨 영의정
문형은 대제학을 달리 부르는 관직으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문교부 장관에다가 서울대학교 총장을 합하여 놓은 정도의 명예로운 직책이다.
안김은 6명의 대제학,
▪ 안동김씨 11 현(賢)
안동김씨의 자랑은 인물이 많은 데 있다. 안김은 인물이 다양하다. 인물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인물 중에도 큰 학자가 많은 것이 제일의 자랑이다. 한 문중에 별과 같은 학자가 한 명만 나와도 문중의 자랑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한 학자가 안김에는 무리로 쏟아졌다.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석학들이 무리를 지어 은하수를 이루고 있다.
행성의 무리를 다 열거할 수 없다. 그 중에서 11명을 꼽아 보았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集),김용겸(金用謙), 김신겸(金信謙), 김식겸,김원행(金元行), 김양행(金亮行),김이안(金履安), 김매순(金邁淳) 등이다. 이 안동김씨 가문의 학자의 무리를 "안김 11현"이라 부르고자 한다. 안김 11현보다 학문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그 명성이 높았을지라도 다른 분야에서 업적이 두드러지거나 그 특성이 강하면 여기서 뺐다.
이 중에서 김창협과 김창흡은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했다. 이 두 사람은 안김의 간판급 학자이다. 김창협은 1651년 태어나 장인 정관재 이단상에게 글을 배우고 나중에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은 도학 문장으로 세상에 크게 알려졌고 조선 유학사에 한 획을 굵게 그었다.
김창업은 김창협 김창흡과 함께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북경을 다녀온 "가재연행록"은 연행록 중에서 백미로 손꼽힌다. 그림 솜씨가 훌륭하여 그 아들 김윤겸이 조선 후기 유명한 산수화가가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포음 김창집도 형들과 함께 문장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문하에서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 같은 이들이 배출되었다.
김용겸은 경술로 천거되어 공조판서에 올랐다. 경사백가는 물론 전고에 밝아 사림에 신망이 두터웠다.
김신겸은 당시 석학인 유숙기,
" 행(行)"자 돌림에는 선비가 수두룩하다. 김원행, 김양행, 김방행, 김약행, 김영행, 김순행, 김근행, 김덕행, 김제행, 김교행, 김연행, 김서행,
김매순은 당대의 문장가로 여한 10대가의 일인으로 그 명성이 높았음을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 김생해(金生海) 가문의 호학정신(好學精神)
조선조 후기 175개 가문 중에서 문집[유고,유집 포함]이 있는 선비를 가장 많이 낸 10대 가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의성김씨 관찰사
서울명문은 문과급제나 벼슬에서 지방명문들에게 10위를 한 번도 내준 적이 없었다. 여기서는 지방명문 일색이다. 서울명문은 고작 세 집이 올랐을 뿐이다. 김생해 가문, 박소 가문, 윤변 가문 세 가문의 이름만 있고 휘날리던 그 이름들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김생해 가문은 조선후기 10대 선비 가문에서 제2위를 차지했다. 이 숫자는 아주 뜻밖의 일이다. 권문세가는 문집이 별로 없다. 집권에 정신을 쏟다가 보면 문집 같은 것을 내기가 힘들기 마련이다. 문집이란 오늘의 책자와는 다른 면이 있다. 이것은 본인이 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죽은 후에 아들이나 손자가 낸다.
제자나 기타 사람이 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은 그 자손이 낸다. 자손이 못나거나 몰락하면 선대의 문집이 없어지기 십상이다. 이 문집을 냈다는 것은 선비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효자, 효손이 있다는 징표가 된다.
김생해 가문은 온통 벼슬로 뒤 덮인 집이데 언제 이 많은 문집을 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집이 벼슬을 그리워하는 집인지 글을 좋아하는 집인지 헷갈린다. 아무튼 이 가문은 벼슬을 많이 하면서도 늘 글을 못 잊어 한 집이다. 어쩌면 글 좋아하는 이 집 사람들을 조정에서 자꾸 불러 냈을지도 모른다.
김생해 가문의 대다수 고위관리는 근본적으로 글을 사랑하는 선비의 자질을 갖고 있다. 권력의 보루가 되는 왕비 출현은 이 가문의 호학정신과 상관관계가 크다고 본다. 안동김씨 첫 번째 왕비 탄생은 그 아버지 김조순의 학덕을 왕실에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김조순은 대제학으로 그 학행이 높았고 학행으로 딲은 덕이 두터워 조야에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김조순의 두 당숙 우의정 김이소, 예조판서 김이도도 모두 학행이 뛰어났었다. 그 위로 "3상(尙)" "2광(光)" "5수(壽)" "6창(昌)"이 모두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러한 학문의 힘이 밑받침되어 왕비가 탄생하고 고위관리가 쏟아졌다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권력은 흐르며 변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권력도 그 흐름이 아침 저녁으로 변한다. 변덕스런 권력이 흐르고 변하다가 4년이면 의무적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세계적으로도 4년마다 바뀌는 것이 아주 흔한 예가 되었다. 4년을 중임하면 흔히 독재가 되기 쉽다. 어느 권력이던 간에 10년이 넘으면 원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권불 10년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선조 권력도 태조
안동김씨 가문은 이 변덕스런 권력을 60년 가까이 쥐고 있었다. 권력은 10년 만 누려도 백성들의 저항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렇다 할 큰 정변 한 번 없는 60년 집권은 불가사의 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마도 안동김씨의 학문을 사랑하는 정신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보라 ! 좌차성
▪ 안동김씨 초기 "3상(尙) 2광(光) 5수(壽) 6창(昌)"
서기1561년,1570년에서부터 약100년 간은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의 초기에 해당된다. 이 100년 간은 김생해 가문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는 이 가문의 특성을 드러내는 원형이 있다. 고관대작에 이르는 재주와 능력의 탁월함,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정신, 학문을 좋아하는 기풍, 극단적인 상황에도 살아남는 끈기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100년간 영광과 치욕, 번성과 몰락이 교차했던 격동기를 숫자로 "3상(尙) 2광(光) 5수(壽) 6창(昌)"이라 형상화 할 수 있다. 이 때. 안동김씨 운세의 강약이 뚜렷했다. 크게 보아서는 "3상"에서 기운이 솟구쳐서 "2광'에서 멈췄다가, "5수"에서 다시 더 세차지고 '6창"에서 크게 용솟음 쳤다.
1561년은 선원(仙源)
"2광(光)"은
"5수(壽)"는
"6창(昌)"은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 6형제이다. 김창집은 노론 4대신의 1인으로 소론에 의해 사사되었지마는 영의정의 벼슬이 아깝기보다 그 학문과 인품이 더 아깝다. 김창협은 대제학이라는 명예로운 직을 맡아 안동김씨 가문의 이름을 아름답게 했지만 반면으로 김창협 같은 석학대덕이 조선 대제학의 위상을 한층 더 빛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창집 6형제는 시문으로 당대에 그 명성이 드높았다.
▪ 안동김씨 "6창(昌)"의 곳간
앞에서 말했듯이 "6창(昌)"은 몽와 김창집,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노가제 김창업, 포음 김창집, 택재 김창립을 말한다. "6창"은 안동김씨 금관자 서 말의 곳간이다. "6창의 제1곳간은 김창집 집이다. 몽와의 곳간에서는 왕비 3명, 영의정 4명, 좌의정 3명, 판서 13명이 나왔다.
"6창"의 제2곳간으로 가보자. 제2곳간은 김창협 집이다. 농암 김창협은 16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된 후 영평에 은거하다가 갑술옥사로 호조참의에 임명되고 대제학, 예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유학의 대가로 시문에 능했다. 아버지 김수항이 대제학을 지내고 아들이 또다시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니 부자 대제학의 영광을 안았다. 아버지 김수항이 영의정을 지내고 아들 김창집이 영의정을 지내 형 김창집이 부자 영의정의 영광을 드러내더니 그 형에 그 동생 보란 듯이 부자 대제학의 영광을 보탰다. 돌이켜 보건대 이것은 부자 만에 한한 일이 아니다. 김수항의 조부
글이 있는 곳에 벼슬이 나기 마련이다. 미호 증손
"6창"의 제3곳간으로 가보자. 제3곳간은 김창흡 집이다. 삼연 김창흡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 김창협과 함께 조선조 중기 학계를 크게 울렸다. 삼연 현손에 우의정이 났다. 그 우의정은 김달순이다. 현손에 제3곳간 수장 삼연을 위협하는 문장가가 나왔다. 대산 김매순이다. 대산은
"6창"의 제4곳간으로 가보자. 김창업 집이다. 노가제 김창업은 형 김창협, 김창흡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노가제 집도 수장 노가제를 닮아 글 읽는 소리가 높았다. 그 소리 또한 끊이지를 않았다. 노가제의 세 아들이 모두 선비이고. 막네 아들은 유명한 화가 김윤겸이다. 진재 김윤겸은 시·서·화 삼절로 명성이 컸다. 진경산수 제작에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는 평을 듣는다. 노가제 김창업의 세 아들 중에 김신겸이 학문이 뛰어나서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이 김신겸의 집에 글이 쏟아졌다. 아들 김양행, 손자 김이구, 증손 김직순 김청순, 현손
글이 있는 곳에 벼슬이 없을 리 없다. 맏집 김우겸 집에 판서가 났다. 김우겸의 손자 김이익이 문과하여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리고 둘째 김언겸 집에 농상공대신
"6창"의 제5곳간으로 가보자. 김창집 집이다. 포음 김창집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가 되었다. 성리학에 밝고 문장가로 이름이 났다. 포음의 아들 효효재 김용겸은 역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두 차례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748년 감역이 되고 1778년 우승지, 1784년 동돈녕을 거쳐 1785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학행과 덕망으로 명망이 높았다. 포음과 효효재 부자가 명성을 떨친 이후 후손들의 활동이 잠잠했다. 현대에 와서
"6창"의 제6곳간으로 가보자. 김창립 집이다. 택재 김창립은 시문에 뛰어났다. 약관에 글솜씨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아깝게도 17세에 세상을 떠나 주위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유고가 있다. 현손
▪ 안동김씨 김창집 집안 ‘금관자(金貫子) 서 말’
이 가문의 인맥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청음 김상헌계이며, 다른 하나는 선원 김상용계이다.
그러나 김수항의 대박은 곧 천길 낭떠러지 아래 핏빛으로 얼룩져 버렸다.
그 결과는 비극의 잔해만은 아니다. 100만 대군을 각각 거느린 장수 여섯을 얻었다. 바로 그 장수는 "6창(昌)"이라 불리는 그의 아들 여섯이다. 문곡 김수항의 작품 "6창"의 공연과 "6창'의 후손들이 벌리는 활동과 능력 경시대회는 너무 휘황찬란하여 눈이 부실 정도이다. "6창은 김창집(金昌集),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또 김창집(金昌緝), 김창립을 말한다. 이 "6창" 은 바로 "금관자 서 말"의 곳간이다. 이 곳에서 안동김씨 실세가 다 나오다시피 했다. 맏아들 김창집을 제외한 동생 다섯 "5창"은 학행편에서 이야기 하기로 하자.
김창집은 천하 무적함대 안동김씨 "6창"의 선봉장으로 아버지와 똑같이 영광과 비극의 양극을 넘나든 영웅호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몽와 김창집은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영평의 산중에 숨어 지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조정에 다시 나가 여러 요직을 거쳐 1712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 소론의 목호룡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하여 사사되었다. 이 가문의 수장격인 문곡 김수항에 이어서 그 아들 몽와 김창집이 사사되고 김창집의 아들 죽취 김제겸도 아버지가 사사될 때 울산에 유배되었다가 부령으로 유배지를 옮겨 사사되었다. 김제겸의 아들 김성행도 그 고변사건으로 허위자백 강요에 맞서다가 무릎 뼈가 부서져 26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이에 임금이 4대에 걸친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여 "일묘 4충"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붉은 피가 흥건하던 이 집안에 약80년이 지나 경사가 터졌다. 왕비가 났다. 4대 비극의 마지막의 주인공 김성행의 종손자이며, 김제겸의 증손자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었다. 이제 김창집 집안의 비극은 끝났으며, 고생도 졸업이다. 안동김씨 만만세다. 이 경사는 우연이 아니다. 4대가 흘린 붉은 피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김창집의 손자 "3행(行)"은 비극의 급류에 휩쓸려가는 주인공이며 유가족이었다. "3행"은 김성행, 김달행, 김탄행이다. 맏인 김성행은 비참히 죽었고 나머지 두 손자도 죽은 몸이나 다름 없었다. 두 손자는 벼슬은 생각도 못했다. 이 비극의 세 손자 집안에 각각 왕비가 한 명씩 다 났다. 보기 드문 경사다. 이미 말한 순조비는 김달행의 손자 김조순의 딸이다. 헌종의 비는 김탄행의 증손 김조근의 딸이다. 철종의 비는 김성행의 증손
김조순의 집안부터 살펴보자. 김조순은 안동김씨 제1호 왕비를 탄생시켰다. 풍고 김조순은 1765년에 태어나 17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청환직을 거쳐 순조 즉위 후에 부제학이 되고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802년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딸이 순조의 비가 되자 영돈녕부사에 오르고 영안부원군에 봉해졌다. 맏아들
이상은 김조순의 직계 가족이었다. 그 다음은 김조순의 사촌
김조근의 집안을 보기로 하자. 김조근은 안동김씨 제2호 왕비를 탄생시켰다. 자오 김조근은 헌종의 국구로 철종 때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지를 굳힌 인물이다. 김조근은 "3행"의 끝인 탄행 집이다. 이 집은 직계가족보다는 안동김씨 일족에게 덕을 더 많이 입혔다. 김조근의 집은 그 사촌
”6창" 중에서도 맏인 몽와 김창집 집이 ‘금관자 서 말’의 핵이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본령이다. 안동김씨의 노른자위 중에도 노른자위이다. 옥돌 중에 옥돌이고, 꽃 중에 꽃이다. 가문에 판서 하나가 나기만 해도 그 영광이 치솟아 1000명의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그 다른 면을 보면 100명의 입맛을 떨어뜨리는 수도 있다. "나는 뭔가?"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10명 정도는 이해 관계로 원망을 할 수도 있다. 4대 80년간 피로 물들든 집이 사라호 태풍 때 폭우처럼 80년간 판서가 쏟아졌다. 그때 백성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오늘의 국민들이 보는 눈은 어떠할까?
▪ 안동김씨 김생해(金生海) 가문의 참판(參判)급 인물
김생해 가문의 참판급 인물로
그 다음
오늘날에 와서도 인물이 팔당댐 수문 열 듯이 쏟아졌다. 검찰총장 지내고 대법관에 오른
그 다음이 김수증이다. 김생해 가문의 맏집이다. 문곡 문충공
그리고 김성적이 1643년에 태어나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홍도 관찰사의 직을 수행했다. 또
그 다음 김양행과 김매순이 있다. 김양행은 1715년 태어나 음보로 형조참판에 올랐으며, 김매순은 1776년에 태어나 179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이 두 사람은 다음 학행편에서 더 다루기로 하자.
그 다음으로 김이성 문과 병조참판,
그 다음으로 위에서 잠시 언급한
▪ 안동김씨
금관자는 정이품[판서급], 종이품[참판급] 관리가 달고 다닌 금으로 된 망건의 관자를 말한다. 정이품, 종이품은 오늘의 장관급, 차관급 정부 고위관리로서 옛날 벼슬 품계의 고위 등급이다.
김생해 가문의 문과급제자 136명은 과연 금관자를 몇 명이나 달았는가? 우리는 흔히 안동김씨 하면 세도정치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빗대어 ‘금관자가 서 말’이라고 한다. 안동김씨 가문의 금관자가 정말 서 말인가? 조정에 안동김씨의 고위급 관리가 어느 정도이었을까? 증직,수직은 물론이고 실직이라 하더라도 한직에 있다던가 역사상 남긴 족적이 아무것도 없이 관직과 이름만 달랑 족보에 오른 사람은 제외하고 참판, 판서급 이상 고위관리로서 그 행적이 뚜렷이 남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우선 참판급부터 따져보기로 하자. 안동김씨 김생해 가문의 참판급 인물은 대략 20명이 된다. 여흥민씨 좌의정 민정중 고조 민사용 가문 약26명, 남양홍씨 영의정 홍서봉 조부 관찰사
그 다음은 판서급 인물을 보자. 실권을 쥐고 있는 판서는 권력의 핵이다. 안동김씨는 판서급 인물이 약 41명이나 된다. 반남박씨 좌의정 박세채 고조 문강공 박소 가문이 약35명, 대구서씨 영의정
또 그 다음으로 상신을 보자. 상신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털어 일컫는다. 오늘의 총리, 부총리에 해당된다. 안동김씨는 상신을 15명이나 배출했다. 동래정씨 정유길 가문이 약11명, 대구서씨 서성 가문이 약9명,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 양주조씨 영의정
김생해 가문은 참판급 인물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권력의 노른자위인 판서급 인물에서는 기라성 같은 권문세가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육조 판서의 수장은 물론 기타 정2품과 종1품 등의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최고위직인 상신 부문에서도 당당히 1위를 하였다. 판서급 인물부문에서 제1위의 기록은 안동김씨 세도가문의 위력을 입증한 셈이다. 세도정치의 구심력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상신 부문 제일위라는 기록도 안동김씨 가문의 위세를 웅변으로 말하는 것이다. 조선조 최강의 가문으로 그 위상이 삼천리 8도 강산에 치솟아 올라간 우리 인공위성 1호만큼이나 높았다. 175개 가문에서 상신을 한 명도 못 낸 곳이 100여 개이며, 고작 상신 한 명 낸 곳이 32개이다. 안동김씨 상신 15명은 대단한 숫자다. 판서급 인물 부문 1위, 상신 부문 1위로 보아 안동김씨가 세도가문의 그 명성에 걸맞는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수치로 드러난 셈이다.
지금까지는 부문별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고위관리 전체를 조명해보기로 하자. 안동김씨 가문의 인물은 참판급 인물이 약20명, 판서급 인물이 약41명, 상신이 약8명, 대제학이 약6명이다. 안동김씨는 참판급 이상 고위관리의 총 숫자는 약75명이다. 문과급제자 136명 중에서 참판급 이상 고위관리가 된 사람이 약75명이다. 문과에 급제한 인물 중 반이 조금 넘은 55%가 고위관료가 되었다. 반남박씨 박소 가문은 참판급 인물이 약18명, 판서급 인물이 약35명, 상신이 약6명, 대제학이 2명으로 참판급 이상 고위 관료가 약61명이다.
반남박씨는 문과급제자 총127명 중 고위관리가 61명이니 약48%다. 대구서씨 서성 가문은 참판급 인물이 약15명, 판서급 인물이 약34명, 상신이 7명, 대제학이 5명으로 고위관료가 총 61명이다. 105명중 61명이니 58%이다. 풍양조씨 조기 가문은 참판급 인물이 약17명, 판서급 인물이 약25명 상신이 1명, 대제학이 2명으로 고위관료가 약45명이다. 68명 중 45명이니 66%이다.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은 참판급 인물이 28명, 판서급 인물이 32명, 상신 7명, 대제학 1명으로 고위관료가 약68명이다. 83명 중 68명이니 81%이다.
관리 등용문을 통과하여 고위관료가 되는 비율이 안동김씨가 55%, 반남박씨가 48%,대구서씨 58%, 풍양조씨 66%, 여흥민씨 81%이다. 이 수치로 볼 때는 안동김씨의 고위관직 독점률이 비교적 떨어지는 형편이다. 이것만으로는 안동김씨의 ‘금관자 서 말’이라는 풍자가 합당치 않다. 금관자만으로는 세도정치의 실상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권력독점은 고위관리의 숫자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핵심요직의 수로 행해지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과 성격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
세도정치의 축이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여흥민씨 쪽으로 넘어갈수록 고위관직 독점률이 높아지는 현상이다. 고위관직 독점기간이 긴 안동김씨 보다 그 기간이 짧은 풍양조씨나 여흥민씨 쪽의 고위관직 독점이 더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안동김씨의 고위관직 독점은 오랜 기간을 두고 여유있게 진행되었고 풍양조씨나 여흥민씨의 고위관직 독점은 짧은 기간에 다급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안동김씨
흔히 장동김씨라고 불리는 안동김씨
이 김씨 가문은 비슷한 시기의 한국 175개 가문 중에서 문과급제자를 약 136명을 냈다. 이 숫자는 조선조 소단위 문중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태풍 사라호와 같은 위력을 지닌 수치이며, KBS 관현악단의 웅혼한 리듬을 타고 울려퍼지는 "금관자 서 말"의 전주곡이다.
오늘날 한 해에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를 단 한 명도 못 내는 대학이 있는 반면, 100-200명을 쏟아내는 서울대학이 있다. 후자 대학에는 대한 8도의 준재들이 모여 그들의 기량을 여러 분야에서 자랑하면서 국가에 공헌한 나머지 온 국민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의 높은 합격률이 아름다운 서울대학의 꽃을 활짝 피어나게 하고 있다. 이것은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요인이 되는 반면에 고시합격의 영광이 민주시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김생해 가문의 문과급제자 수치는 조선조 사회에서 그 위상이 과연 어느 정도이었을까? 오늘날 고시합격자 한 명도 못내는 대학이 많고 시골대학이 그 정도가 심하듯이 조선조에서도 과거급제자를 한 명도 못 낸 가문이 수두룩 했고 시골가문이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호남,영남의 유명가문들도 맥을 못췄다. 호남의 3대 명문인 장흥고씨 제봉 고경명 가문이 약16명, 행주기씨 고봉 기대승 가문이 약6명, 울산김씨 하서 김인후 가문이 약5명을 냈을 정도이니 호남의 기타 가문은 오죽하겠는가? 영남의 3대 명문인 진성이씨 퇴계 이황 가문이 약34명, 풍산유씨 서애
한양의 명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반남박씨 현석 박세채 고조 문강공 박소 가문이 약 127명으로 김생해 가문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것은 다소 뜻밖의 현상이다. 오늘날에도 서울대학의 고시합격율을 이처럼 바짝 추격하는 대학이 없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동김씨 세도가문을 압박하는 가문이 있다니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안동김씨가 시골명문들에게 보여준 발군의 실력! 천하무적, 유아독존의 기상이 압박을 당하는 형세에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대구서씨 약봉 서성 가문이 약105명, 냠양홍씨 영의정 홍서봉 조부 석벽
이들 중에는 친안동김씨 가문이 많이 있다. 서로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함께 혼인하여 같은 운명체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제간으로 뜻이 통하고 친교로 동맹을 다졌다, 그러나 이 명문들끼리는 언제나 동지만은 아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곧장 등뒤에 비수가 번쩍이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굳게 결속을 외치지만 내면적으로는 항상 경쟁과 대결의 연속이었다. 치열한 접전의 화약냄새가 물씬 풍길 때가 많았다. 정국 주도권 쟁탈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세도정치의 판도 변화를 주기도 하였다.
이 수치는 조선조 유명 문중의 날카로운 칼날 속에서 안동김씨가 시퍼렇게 살아서 조선 8도를 향해 포효하는 높은 기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무소불위의 권력이 결국은 타문중으로 넘어갔으나 타문중이 그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다.
안동김씨의 이 수치는 서울대학의 그 수치 모양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우려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김씨 일족이 중요한 자리를 독점한다는 불만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 때의 안동김씨와 오늘의 서울대학이 그 성격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크게 날지 모르지만 그 수치가 당시 권력과 명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반면에 그 수치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세도정치에 대한 분노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여하간, 서울대학이 한 시대에 뛰어난 우수성으로 이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성이 있듯이, 안동김씨도 조선조 중,후기에 뛰어난 우수성으로 그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문과급제 부문에서 조선조 중, 후기 문중 1위는 결코 가벼운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안동김씨의 재주를 말하는 지표다. 유전자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안동김씨의 특성이다. 이것은 안동김씨의 영원한 자랑이다
세도정치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하여 권력집중의 폐해를 이 수치에만 몽땅 연관 지울 수 없으며, 안동 김씨가 과거시험에서 보여준 발군의 능력을 세도정치 때문에 바보스럽다고 할 수 없다. 이 수치는 안동김씨의 재주를 말하는 지표다. 유전자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안동김씨 가문의 특성이다.
세도정치 때문에 안동김씨의 뛰어난 특성조차 혐오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반성의 폭을 또 좁게 할 수도 있다. 세도정치와는 전연 무관한 많은 인물을 싸잡아 욕되게 할 수도 있다. 국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끝없는 감동을 주는 안동김씨의 큰 인물들을 한꺼번에 세도정치라는 무덤에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손실이다.
국가가 실시한 등용문에서 선양된 안동김씨의 재주와 능력은 유사이래 단연코 제일이다. 현재까지는 어떤 집단도 안동김씨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했다. 어쩌면 서울대학이 그것을 추월할지도 모른다. 서울대학이 예사롭지는 않다. 이 김생해 가문의 후손인구 대비 서울대학 출신 인원, 그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 대비 오늘의 총인구, 그 당시 총인구 대비 과거 급제자 수, 오늘의 총인구 대비 고시 합격자 수 등등을 고려한다면 서울대학이 추월할는지는 좀 지켜 봐야 할 것이다.
안동김씨가 400여 년을 두고 선두를 한번도 내준 적이 없는 기록을 서울대학이 갱신한다 할지라도 그 대학이 앞으로 400여 년을 두고 선두의 자리를 계속 지킬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안동김씨의 재주와 능력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 인물을 아끼는 국민은 번창하기 마련이다. 해동에 인물이 많기로 이웃 나라에 소문나 있다. 우리는 새 시대에 부응하여 많은 인물을 길러내야 한다. 이제 그것이 이 시대의 소명이다.
[한국 名門家 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