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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공을 1세조로 보는것에 대한 비판적(批判的) 고찰(考察)>
- 속함대군선조님을 함양박씨의 시조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견해에 대해 論함-
일부 종친중에 조상님들이 소중하게 대대손손 전해준 우리 함양박씨 족보를 경시(輕視,가벼울경,볼시)하거나 무시(無視)하려는 경향이 있는거 같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삼국사기 신라제 54대 경명왕편에 자식이 없는 무후(無後)이기에 우리 함양박씨 전래족보상의 기록상에 보이는 박혁거세-신덕왕-경명왕-팔대군(밀성대군,고양대군,속함대군....)이
전 거(典據)가 없으니 이것은 아마도 후세 즉 조선시대에 족보를 편찬하면서 우리 함양박씨 선대(先代) 조상을 현양(顯揚)하고 과대포장하려는 목적으로 전거(삼국사기상 기록과 배치)에도 없는 경명왕의 아홉아들(팔대군,교순)을 창작(創作)하였다는 식(式)입니다.
삼국사기가 그렇게 완전하고 진실만을 반영한 것일까요?
우 리가 잘아는 서기 391년 그 유명한 신묘년(辛卯年)에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범하여 매우 위급한 상태가 되자 당시 신라의 내물왕은 사신을 고구려로 급파하여, 급박한 사정을 알리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위기에서 구해주면 영원한 노객(奴客,신하)이 되겠다합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보기(步騎,보병과 기병)5만을 친히 인솔하여 신라의 경주와 가야지방까지 남정하여 백제,가야,왜연합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이기록은 광개토대왕 사후 그 아들인 장수왕이 등극하자마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무덤앞에 세운
당시(當時)의 기록입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사직을 구하고, 고구려의 영향력이 신라에 깊이 미치고 고구려 군대가 신라에 일부 주둔(駐屯)합니다.
이 런 4세기 무렵의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듯 역시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있듯이, 신라의 역사가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정벌하여 멸망시킨 나라(고구려)에 한때 속국(屬國) 의 지위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에서 아예 빼버렸습니다.
또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의 건국조인 박혁거세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卵)에서 태어난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여년전 우리의 시조이신 박혁거세님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말에서 태어난 알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이것은 시조를 존숭하고 신격화(神格化)하려는 후세 신라역사편찬자들의 의도(意圖)내지는 편찬,집필 목적(目的)을 위해 실상(實相,fact,펙트)과는 분명 차이(差異)가 있는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김씨들의 시조를 보면, 의성김씨,울산김씨,부안김씨등을 보면 많은수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김부(金傅)의 자손들임을 자신들의 족보에 기록하여 내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강릉김씨처럼 경순왕이전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하는것처럼 경순왕 이전대에 갈려온 김씨들도 있구요.
- 삼국사기는 국가위주의 기록이고 위의 혁거세님의 탄생설화기록이나, 서기4세기경 고구려가 왕성하여 신라가 약하던 시기, 백제 근초고왕이 활약하던 무렵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백제본기,신라본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신라 이외의 나라들 고구려,백제가 강상(强盛)하던 시기에게는 기록이
통째로 빠져있거나 소략(疎略)하게 기술되어진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연구)
-그리고 6세기경 신라가(김씨왕조)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킬 당시의 기록은 아주 세세하고 분량이 많습니다.
-이처럼 국가,왕조위주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영광스럽고,후대의 논리전개를 위해
크게 혹은 작게 가감(加減)되거나 아예 누락 혹은 신설(新設)하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기록 역시 자신들의 관점과 자존감에 의해 중국이외의 우리 한민족을 포함한 이민족(異民族)들과의 교섭,전쟁기록등을 축소,확대,누락,가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것이 중국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크게 패한부분을 감추거나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왜곡한것이 있습니다.
-또 백제패망시 백제의 마지막임금인 의자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간신을 가까이하고 삼천궁녀를 거느려서 국정을 돌보지 못해, 나당연합군에게 졌다는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지난번 KBS1Tv 역사스페셜에도 방영되었듯이, 중국 당나라에서 벼슬하고 죽은뒤 중국 북망산에 묻힌 백제출신 당나라관료 예식진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의 기록을 통해 추적한 결과,
-백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이 기습하자 나름 저항했고, 부여사비성을 비우고 천연의 요새이자 준비가 잘갖춰진 공주(웅진성)성으로 들어가 백제의 건재한 지방군과 더불어 항전하려다가
웅진성(충남공주)의 성주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갑자기 붙잡혀 포박된채로 당나라군에 인도(引渡)
되어진것이 밝혀졌습니다. (인터넷에서 의자왕 예식진 이라고 검색해보면 KBS역사스페셜 방영분 내용이 검색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랑하는 조선왕조실록도 그렇습니다. 대개가 진실에 입각해 기록한것이 맞지만,
-이성계가 무장으로 출발하여 혼란한 고려말시기에 고려왕조를 전복하고 새로운 조선을 세우고
왕씨 임금인 우왕,창왕,공양왕을 차례로 폐(廢)하고 그들을 죽입니다.
-이후 조선건국(1392년)이후에도 한동안 전국의 왕씨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오늘날 주변에서 개성왕씨(開城王氏) 성(姓)을 가진 사람 보기가 정말 힘이듭니다.
아시다시피 고려태조 왕건이 세운후 약 400여년간 존속했다면, 오늘날 500년의 조선왕조의 전주이씨들처럼 번성하여 지금은 흔한 성씨일텐데, 어째서 왕씨들은 우리주변에서 보이지 않는것일까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왕조가 왕건의 후예들인 고려왕씨들을 탄압하거나 죽인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고 즉위한 문종(文宗)이 등극하고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한뒤 보니
왕건의 후예들인 왕씨들을 눈을 씻고 찿아봐도 없자, 이를 가여이 여기고 전국의 명을 내려 왕씨들을 찿습니다.
-이때 문종실록 기록을 보면,
"개국할 초기에 왕씨를 참혹하게 대우한 일은 진실로 태조의 본의가 아니고, 바로 그때의 모신(謀臣)들이 한 바인데, 태조께서 항상 몹시 애도하는 생각을 가졌었다.(…)선왕께서도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추도하여 마지않으시고 항상, '왕씨의 후손을 찾아내고자 한다.'고 말씀하셨다.'-<문종실록>
-즉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는 왕씨 탄압,학살에는 책임이 없고 음모를 꾸민 신하들이 주도하였고, 지금생각해보니 유감이다..이런식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연간에 분명 많은 왕씨들이 죽임을 당한기록은 없고 아주 단편적으로 몇몇 왕씨가 죽었다 라는 식으로 기록했습니다. 오직 정사(正史)라고하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식기록이 거의 없고 위에서 언급한 고려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 완성후 문종임금이 왕씨에 대한 위와같은 유감을 표명하는것으로 오늘날 왕씨들이 희성(稀姓,드물희,씨성)된 연유를 유추할수있습니다.
- 그러면 우리도 한번은 들어봤을법한 왕씨들의 탄압,학살이야기들, 즉 숨어든 왕씨들을 속여서 왕씨들끼리 모여살게 해주겠다 하여 왕씨들이 나타나자 큰배에 태우고 강화도,거제도로 가다가 배에 구멍을 내어 죽였다는것. 이 기록은 조선 세조때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다 죽은 사육신이외에 소극적이나마 세조의 단족 죽임과 왕위찬탈에 항거한 생육신(生六臣)중 한사람인 남효온(의령남씨,南孝溫)의 추강냉화 라는 기록을 통해 왕씨들이 조선건국초 어마어마한 탄압과 학살을 받아 죽고 성을 감추고 살게된 사실을 오늘에 알수있습니다.
- 박씨에 이어 신라의 정권을 잡압던 석탈해의 석씨(昔氏)의 경우도 삼국사기에는 그 어디에도 김씨왕조에 의한 학살,추방내용이 없고 박,석,김 세성씨가 사이좋게 정권을 이양한걸로 묘사하고 잇으나, 연구자들(대표적 박병식 재일 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석씨왕조는 김씨왕조에 의해 학살,축출되었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석씨정권의 비극을 암시하는것이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기록에 본피궁을 김유신에게 상으로 내리고 이런표현이 있는데, 이 궁과 재산이 본래 석씨왕조의 궁이고 재산이었다고 합니다.
(자세한것은 박병식씨의 저서 참조)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정사(正史)에는 문종의 언급이외에는 전혀 안나오지만, 조선건국초였던 그무렵의 식자층인 선비가 기록한 개인문집에는 나옵니다.
-즉 승자인 조선왕조는 자신들이 벌인 왕씨학살,고려왕조 말살정책의 기록은 공식적으로 안했습니다.
이 것말고도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와 독대(獨對)하는것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효종이 죽기얼마전 송시열과 독대한것,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폐하고 숙빈최씨 소생인 연잉군(후의 영조)을 세자로 책보하려 노론 대신과 독대한것등이 잇는데, 사관(史官)을 반드시 대동하고 임금과 신하가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종종 사관을 들지못하게하고 집권당파의 수장(노론,소론)과 임금이 후사문제등으로 공개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고 그것은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지 못하였습니다.
-1920 년생으로 동경대와 영국 맨체스터대학원을 수료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원로소설가 김성한(金聲漢)씨는 1985년부터 약 7년간 동아일보에 임진왜란 소설을 연재하기 위해 사전에 많은 역사자료를 구하여 사실에 근거한 역사소설을 썼습니다.
-김성한씨는 임진왜란 기간중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전투에 관한 역사기록을 구하고 검토하면서 새삼 우리 전래의 족보(族譜)의 가치를 알수있었다고 합니다.
- 대표적으로 정유재란당시 바다에서 순국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장군, 전주이씨 덕천군파)이 이순신 투옥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산의 일본군 본진을 치러가다가 경상도 거제 칠천도해전에서 전사할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몰라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여러 자료를 구해보던중 이억기장군의 집안족보(전주이씨 덕천군파 족보)에 보니 정확하게 생(生) 몰(歿,死)연도가 기록되어 있어서 전사당시 37세의 젊은 나이임을 알고 새삼 놀랐다고 합니다.
다음은 김성한씨의 저작 (임진왜란 7권 330페이지 1992 행림출판사 서울) 저자의 우리족보의 가치에 대해 새삼 가치를 인식했다는 부분을 옮겨 봅니다.
"(우리)족보에 대해 별로 평가하지 않는 이들도 있으나, 필자는 이런 경험이 있다.
이 순신은 전라좌수사, 이억기는 전라우수사로 함께 싸웠고, 만나는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 아무리 찿아도 이억기가 이순신보다 연상인지 연하인지 알 수 없었다. 헛수 삼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종친회)에 부탁하였더니 족보에서 이억기 장군에 해당하는 부분을 복사하여 보내주었다. 비로소 그(이억기)가 가정신유(嘉靖辛酉) 즉, 1561년 7월24일생이라는것, 따라서 1545년생인 이순신보다 16년이나 연하라는것, 임진년이 일어나던 1592년에 불과 32세에 전라우수사였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전 주이씨 덕천군파)족보에는 그(이억기)의 자세한 경력과 아울러 호(號)도 적혀있었는데 그의 호는 송봉(松峰)이었다. 지금도 일부에는 이 시대(16세기) 무장(무관)들은 호를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고, 이순신의 호가 덕곡(德谷)이라는 기록이 나와도 그 진위(眞僞)를 의심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같은시대의 중국의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도 앙성(仰城)이라는 호를 썼으니 적어도 이시대(16세기 조선) 일부에는 호를 쓰는 무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들어갔으나 이로부터 필자는 여러 문중의 족보를 상고(詳考,자세할상,살펴볼고)하기 시작했다. 경력뿐만 아니고 가족관계를 알기 위해서도 족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주었다.
이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국방장관) 석성(石星)은 죄를 쓰고 옥사하였기 때문에 중국 사서에도 그의 전기,기록은 나오지 않고, 일본서적을 찿아도 알 길이 없었다. 단념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족보학회장 김환덕(金煥德)씨가 그의 후손이 한국에 살고 있다면서 족보를 찿아 석성의 생몰연대를 가르쳐주었다. (해주석씨 족보 ---병부상서 석성은 심유경을 일본에 보내 강화하려다 명조정을 속인죄로 투옥되어 옥사했는데, 그의 두아들 맏이가 석담(石潭) 둘째 석천(石 洊 )인데 이중 둘째인 석천이 먼저 조선으로 건너오는데 그가 성주석씨(星州石氏)의 시조가 되고, 맏이인 석담은 부친 석성의 명예가 회복된뒤 계모 원(袁)씨를 모시고 조선으로 건너오니 그는 오늘날 해주석씨(海州石氏)의 시조가된다.
- 전쟁중 조선을 군사적으로 돕기위해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의 후손 이종윤(李鍾胤)씨로부터 비로소 자세한 경력을 알게되었다. 그후 족보의 기록을 보다가 <선조실록>을 보다가 족보의 기록과 일치하는것을 발견하고 우리 족보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집안의 내력을 적은 가승(家乘)도 중요한 자료였다.진주전투에서 용명을 떨친 황진장군의 자세한 내력과 경력도 장수황씨(長水黃氏)족보에서 찿아냈다. "
위의 김성한씨의 글에서도 알수있듯이 국가의 공식적인 사료는 정치적사유(광해군때의 북인정권이 선조실록을 편찬했다가, 인조반정후 서인정권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한 경우)로 역사의 기록이 달라지기도 하고,
-개개인의 세세한 기록은 국가기록이 일일이 다 기록 할수도 없고, 또 집권정파의 기호,입맛에 따라 간신(奸臣)도 되고 충신도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조선건국후 조선건국의 정당성(正當性)을 내세우기 위해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節要)...모두 국가기록인 정사(正史)이지만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진실과는 차이(差異)가 분명 있다는것입니다.
- 지금 일부 종친중에 삼국사기에 신라하대(下代) 박씨 3왕인 신덕왕-경명왕-경애왕중 오늘날 우리 함양박씨, 밀양박씨 고령박씨,순천박씨,죽산박씨등이 경명왕의 아홉아드님중 분봉(分封)되어 오늘의 각 박씨가 되었다는 기록이 우리 박씨들 족보에는 나오고,
삼국사기 경명왕조에는 안나오니,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기록만을 맹신(盲信)하고, 우리 조상님들의 숨결과 혼이 깃들어 우리 조상대대로 내려온 기록인 기존(旣存) 함양박씨족보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것입니다.
또 어떤 종친은 상서공이 함양박씨의 시조이고 그 윗대 기록 (경명왕----상서공 이전)은 믿을 수 없으므로 기존 함양박씨 족보는 무시하고, 상서공 선(善)할아버지를 시조로 삼아야하고, 표기(表記)조차 상서공을 중시조로하고 속함대군과 8대군의 존재를 기록하는것이 잘못되었으니 시정하지 않으면 임의로 삭제할수있다는 말도 하고 있는점에 깊은 탄식(嘆息)을 금할수 없습니다.
아직 함양박씨대종회 차원의 합의된 속함대군부터 ---상서공이전 기록은 믿을수없다는 공식적인 총의결(總議決)이나 全함양박씨의 합의(合意)도 없는 상태에서,
조상대대로 내려온 우리 함양박씨 족보에 근거(根據)하여 경명왕의 셋째아드님인 속함대군을 우리 함양박씨의 시조로 모시고 이후 기록이 명확한 상서공을 중간시조로 보는 기존 방식을 기록하는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요?
조 선효종-현종-숙종조때 조선집권층인 서인(西人),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은 송나라때 유학의 한파인 주희(주자)의 학설만을 절대시 신봉하여 기존 유교경전의 해석에서 주자와 다른 해석,견해를 갖는 학자,선비는 사문난적으로 간주하고 백호 윤휴의 예에서 보듯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윤휴는 생전에 이러한 주자학의 교조화에 빠져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심지어는 죽이려하는 송시열의 행태를 보고,
-"만약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중용中庸)에 대해 주자와 다른 견해,해석을 한 자신(윤휴)을 틀렸다고 하겠지만, (중용의 저자인)자사가 살아온다면 내가 옳다고 할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기존 우리 전래(傳來)의 함양박씨 족보중 신라하대 박씨3왕이신 신덕왕의 아드님인 경명왕의 아홉아들중 셋째가 우리함양박씨의 시조인신 속함대군이시고 이후 상서공으로 이어온다는점에 대해,
-삼국사기에 경 명왕은 무후(후사後嗣)이고 팔대군(八大君)은 기록이 없으니, 우리 조상대대로 내려온 함양박씨족보는 믿을수 없으니 세계(世系)가 명확히 기록된 상서공(善)부터를 함양박씨의 시조로 하자는것은 성급하고 경솔하며, 조선후기 송시열류(宋時烈類)의 교조적 사고방식,태도라 생각합니다.
-그 부분(속함대군-상서공 이전)에 대해 개인,종원(宗員)마다 생각이 다를수 있다는점을 착안(着眼)하고, 계속 논의하고 연구하여 언젠가 함양박씨 대종회차원의 합의된 총의(總意)가 나오면 그 안(案)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여 기록하고 표기(기록,표기의 통일)하면 될것이라고 봅니다.
- 정사(正史)혹은 국가편찬사료가 개인,사가(私家)에서 작성된 문서,기록보다 공신력이 있을수 있지만, 정치적논리(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등의 예)에 의해 또 국가기록이 각 가문별,개인별로 기록되어지는 것을 모두 포섭하고 그 이상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는 성질의 것(기록의 한계성)임을 착안해서 삼국사기에 안나왔으니 기존 함양박씨족보는 전거(典據)가 없어 못믿겠다...이런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첨부사진은 우리가 잘아는 고려말 최영(崔瑩)장군 집안 족보입니다.
동주(철원)최씨 족보인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후 조선건국세력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동주최씨 가문은 최영장군이후 후손을 잘 소중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집안 기록은 그 집안 사람들이 제일 소중히, 잘(well) 기록하고 보존해 온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정을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는 한 집안, 한문중, 한씨족의 기록인 족보가 국가록물 보다 더 정확(正確)하고 진실에 부합(府合)할 수 있다는점을 늘 유념(留念)해야 할것입니다.
위에서 나오는 석성(石星)의 사후 두아들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와서 해주석씨 성주석씨의 시조가되었고 이후 세계(世系)는 삼국사기에도,중국 명사(明史)에도, 조선왕조실록에도 안나오고
오 직 당사자(當事者)인 해주석씨,성주석씨들만이 소중히 자신들의 조상들,자신들의 성함을 기록하여 오늘까지 전해오는것입니다. 이들보고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에는 석성 사후 기록이 안보이니 당신들 가짜이고 기록도 못믿겟다고 하면, 이들 후손들은 뭐라 할까요?
"비록 국가기록에는 더이상 안나오지만, 우리는 조상님들의 함자와 세거지 변천을 소중히 기록하고 대대로 보존 ,관리해왔으므로 그 어떤 국가적 기록물보다 공신력(公信力)이 부여되어 있다"라고 할것입니다.
함 양박씨 역사는 다른성씨나 국가보다 함양박씨 자신들이, 육지파들은 자신의 파조(派祖)와 이후 선조들의 행적(行跡),세거지 변천(世居地 變遷)의 역사는 그 파,그집안,그 문중사람들이 제일 잘알고, 기록해 왔을테니 그 해당 본관사람들,문중,파사람들의 기록을 믿는것 합리적(合理的)이지 않을까요.
저는 함양박씨중 1파(군기소감공파)로서 다른 2파(지빈공) 3파(지량공)4파(지수공)5파(지온공) 6파(지영공)의 역사는 잘 모릅니다.
조상님들이 전해주신 우리 함양박씨족보(1파 소감공파)에 상서공---이후 응천군의 장남이신 군기소감(지문)공 조(條)에
"시이거 나주거평 (始移居 羅州居平)"이라는 기록이 있어. "문자그대로 처음(始)으로 나주 거평으로 거주지를 옮기다(移居)" 영남의 함양에서 호남의 나주로 거주지를 이전하셨기에 오늘날 1파자손들이 호남에 주로 세거하게된 연원(淵源)을 알게되었고,
그 소감공의 부인이 배(配,짝배,배우자 배) 나주정씨(羅州鄭氏)로 기록되어 있기에 " 본래 함양에 세거(世居:대대로 거주,삶)하여 오신 조상님께서 처가(妻家)가 있는 호남의 나주로 들어오셨구나... 그래서 수백년간 우리 조상들이 세거하게된 까닭이 여기에 있구나.. 알게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속한 1파의 역사는 관심이 많고 더 알아보려하고, 기회가 닿는다면 더 잘 기록하려고 할것입니다. 이렇듯 그 집안,문중,본관(本貫)성씨의 역사는 해당 사람들이 제일 잘알고 소중히 생각할 겁니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소중한 원칙(原則)에 착안하셔서
제발 삼국사기 경명왕조에 팔대군,속함대군 기록 안보이니 못믿겠다. 상서공이 진짜 함양씨 시조고 그 윗대를 기록해 놓은 조상 전래의 함양박씨족보는 못믿겠고 믿지말자 라는 주장,생각을 다른 종원에게 강요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마지막 예시(例示)로 조선건국후 중국 명(明)나라의 국가공식기록물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말 전횡을 일삼다 죽은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기재되어 조선은 이후 198년동안 게속해서 종계변무(宗系辨巫)라하여 잘못된 이태조의 가계(家系)를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참 답답합니다. 이성계의 부친은 이자춘(李子春)인데 엉뚱하게 기재되어있고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이성계가 속한 전주이씨들이 제일 잘알것입니다. 중국 명나라의 정부가 직접편찬한 공기록이니 그것이 전주이씨 이성계 집안의 호적(족보,가승)보다 더 정확할까요?
만 일 이것이 시정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내려왔는데 전주이씨 후손중 일부가 자신들의 전래 족보에는 이성계 윗대가 이자춘인데 중국측 공식기록인 대명회전(大明會典)등에 이인임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우리집 족보(전주이씨 족보)는 믿을수없다 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내 물왕 이후 계속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다가 신덕왕(휘:昇英)부터 3분이 박씨로서 왕위를 하셨고 경명왕-경애왕후 김씨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마지막 임금이었는데, 어떠한 사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경명왕의 사자(嗣子,자손)가 없다고 기록한 신라사초(史抄),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는 박씨의 역사와 행적에 관한 부분 만큼은 우리 함양박씨 조상님들이 소중히 기록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물려주셔서 오늘까진 내려온 우리의 함양박씨 족보가 더 우선(優先)하고 추정력(推定力)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것이 합리적이고 후손된 도리(道理)라고 생각합니다.
2012. 9. 9.
상서공 29대손 성채 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