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한국전 참전 용사들께
바칩니다...
많은 인파가 운동장에 모였다. 김정수는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유족들과 일일히
악수를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학도병들과 유족, 순천지역 기관장 및 유지들이 모였다. 김정수는 한국전쟁
참전 학도병 유족들 중 한명이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운 인파는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김정수는 연상의 여자친구와 손을 잡고서 하얀
천으로 싸인 거대한 기념탑이 바로 앞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단상에 마련된 사회자 자리에 TV에서 많이 본 사회자가 서고, △△ 고등학교
관현악부의 경쾌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한국전쟁 참전 학도병 기념탑 제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자리의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하였다. 국민의례가 있고, 순천지역 기관장들과 한국전 참전용사, 한국전 참전동지회 회장,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하얀 천으로
싸인 기념탑 앞에 섰다. 그리고는 하얀 천과 연결된 줄을 당겼다. 하얀 천이 흘러 내려가면서 거대한 기념탑이 드러났다.
보훈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10여분 만에 보훈회장의 축사가 끝나고 김정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한국전쟁 참전 유족 대표 김정수씨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단상에 올라선 김정수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남녀노소 기념탑 제막식에 참여한 사람은 다양하였다.
김정수는 준비한 원고를 들고 원고를 읽기 시작하였다.
"지금으로 부터 57년 전.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이 나라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57년 전 비디오 테이프는 57년 전 과거로 되돌려졌다.
끔찍한 꿈을 꾸었다. 로코코
양식의 거대한 저택이 붉은색 별이 그려진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을 맞고 무너지는 꿈이었다. 건물이 무너질 때 많은 사람들이 잔해에 깔려 죽었다.
피를 흘리고 팔이 잘려나가고 몸 속의 내용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끔찍한 꿈이었다.
그 끔찍한 꿈처럼 지금 김청은은 생지옥을 보고 있었다.
한바탕 반란군이 쓸고간 순천 시내는 꿈 속에서 무너진 거대한 저택 같았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붉은 피가 가는 곳마다 흘러
넘치고...
1948년 10월 19일. 제주지역의 공비들을 토벌해야 할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14연대 내의 좌익 장교들이
주동이 된 14연대는 공산당에 반대하는 연대장과 장교, 하사관들을 총살하고, 여수로 가는 통근열차를 탈취해서는 여수지역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여
순식간에 여수 시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순천 시내를 점령하고는 그 지역의 좌익세력을 규합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여수와 순천이 국군 14연대에 의해 빨갱이 세상이 되면서 14연대와 좌익세력은 여수, 순천지역의 우익세력에 대한 테러 및
체포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때 지주였거나 경찰 또는 기관장들은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아래 죽창에 찔려 죽고, 교회 목사, 승려 같은 종교인들이나
우익과는 관련없는 죄없는 시민들도 인민의 적으로 몰려 좌익의 제거대상이 되었다.
길목마다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이 널렸다. 햇빛에 말려지는
고추처럼 시체들은 아무렇게나 싸늘하게 햇빛에 말려졌다. 이를 갈아도 시원치 않을 광경이었다.
"와따, 저기
반동분자네!"
"싸게 죽여버리씨요!"
김청은은 고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에 붉은색 완장을 찬 자들이 M1
소총을 들고 도로를 달리는 지프를 막고 있었다. 지프는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을 보자 방향을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은 일제히
지프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 시끄러운 총소리가 시내를 가득 매웠다. 지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붉은 완장을 찬 자들
앞에서 멈추었다. 붉은 완장을 찬 자들은 지프 안에 있는 시체를 살펴보았다. 시체가 재수 없는지, 침을 뱉고는 유유히 M1 소총을 들고
순천경찰서 쪽으로 걸어갔다.
김청은은 조심스레 총격을 받은 지프차로 다가갔다. 뒤숭숭 구멍이 난 지프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군복을 입은 군인
둘이 처참하게 쓰러지고, 벌집이 된 군인들의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늘 정도로 찌그러졌다. 김청은은 시체를 보고는 지프 옆에 내용물을
토해버렸다.
"이런 개새끼들... 우웩..."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빨간색을 좋아하는 좌익이 대한민국 땅에서 판치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군에서 부터 김청은이 다니는 순천 사범학교 까지. 널린게 빨갱이들이었다. 이들이 1970년대 국민학교 학생들이 그린
반공 포스터에 나오는 빨간 뿔달린 괴물은 아니지만, 좌익의 악랄함은 좌익이 아닌 자라면 잘 아는 사실이었다.
김청은이 다니는 순천
사범학교의 좌익 학생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경애하는 김XX 장군 만세!"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 제국주의 괴뢰 이승만은
자폭하라!"를 구호로 외치면서 우익 교사나 우익과 관련한 학생을 공격하는데 열을 올렸다. 하교 후에 우익 학생과 좌익 학생이 패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이제 자주 볼수있는 광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건지..."
집에 돌아온 김청은은 가방을 내려놓고 냉수를
한사발 들이키고는 찬물로 간단하게 세수를 하였다. 어린 동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채 놀고, 하얀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가
걸어왔다.
"청은아. 학교 잘 다녀왔니?"
"네..."
"근데 표정이 심각하다?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
하얀 손수건으로 김청은의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김청은의 표정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아니기는... 길거리에서 못볼 것을 보았구나."
"네..."
좌익들에게 총격을 받아 죽은 군인들이 떠올랐다.
어머니도 시장에서 장을 보시면서 좌익들의 악랄한 행동을 보신 것 같았다. 김청은은 마루에 앉았다.
"청은아. 조심해라. 정부에서
반란을 진압한다고 하지만 반란군이 물러갈 때 까지는 함부러 집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 알겠니?"
"네..."
무덤덤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았다. 반란이 있는 동안 어머니 말대로 바깥 출입을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휴교령이 내려졌겠다,
좌익들이 시내에서 판치고 있겠다. 자신이 거리의 시체들 처럼 좌익에게 죽을순 없었다.
대충 옷을 입은 김청은은 몰래
집을 나섰다. 전날에 집 밖으로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바깥 사정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주들이 굴비처럼 엮여 좌익들에게 끌려가고, 총을 든 좌익들이 길 곳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어떤 미친새끼가 싸돌아
다니는거야?"
고바야시 빵집 앞을 지날때 누군가가 김청은의 멱살을 잡았다. 그 누군가의 얼굴을 본 김청은은 순간 놀랐다. 멱살을
잡은 자는 순천사범 2년 선배였다. 선배는 김청은을 개 끌고가듯 어디론가 끌고갔다. 순천 소방서 앞에 와서는 김청은을 발로 차 꿇어 앉혀버렸다.
김청은의 주변으로 죽장을 든 좌익들이 몰려왔다.
소방서 앞에는 수십명의 우익 학생들이 줄에 묶인채 꿇어 앉혀져 있었다. 늙어 보이는 자는
좌익 학생들에게 욕설을 들으며 몽둥이 찜질을 하고 있었다. 선배는 거만한 태도로 김청은 앞에 섰다.
"이 새끼
묶어버려!"
"줄이 없습니다!"
"?"
이제 죽었구나 생각할때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청은을 묶을 줄이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난 선배는 줄이 없다고 말한 좌익학생을 무자비하게 발길질 하고는 다른 좌익학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새끼 끌고
가!"
"옛!"
김청은은 좌익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끌려갔다. 어디로 끌고 갈지는 지금 알 수 없었다. 김청은을 둘러싼 좌익학생
무리는 조흥은행 쪽으로 향하였다. 길가로 군복을 입은 군인이 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다가 좌익학생 무리를 향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뭐 하노? 귀찮게 끌고가나? 반동 쌔끼들 확 죽여삐리지..."
"!"
거대한 쇳덩어리가 김청은의 머리를
강타하였다. 군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죄책감은 커녕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김청은은 멍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충격적이면서 잔악하기 짝이 없었다.
무리는 순천 경찰서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많은 우익인사들이 좌익들에게 취조를 받고, 죽창에 찔려
죽어나고 있었다. 김청은은 의자에 앉혀져 줄로 꽁꽁 묶여졌다. 최홍만 같은 몸집의 좌익학생이 걸어와서는 의자에 묶인 김청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잡혀왔어 새끼야! 너 반동분자지?"
"..."
좌익학생의 표정은 험악하였다. 묵직한 두 손으로
목을 당장 졸라버릴 기세였다.
"당장 불어 새끼야!"
충격이 가해졌다. 김청은은 좌익학생의 주먹에 앞으로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뼈 몇개가 나가버린 것 같았다.
"저... 저는... 반동이... 아닙니다..."
"반동이 아니라고? 왜
끌려왔냐니까! 너, 우리 학생들 잡는데 앞장선 끄나풀이지?"
"아닙니다... 뭔가 잘못됐습니다... 끄나풀이라뇨...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
"네..."
"그럼 네가 끄나풀이 아니라는거 증명할 수 있어?"
빛이 번쩍였다. 살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좌익학생들 중 국민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보였다. 김청은의 친구가
걸어나왔다.
"이봐. 이새끼 좌익학생 잡는 끄나풀이야?"
"아닙니다."
"그래? 괜히 생사람 잡았군.
풀어!"
김청은은 의자에서 풀려 병신처럼 걸었다. 머리 위로 별들이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친구 얼굴을 보다가 힘없이 쓰러졌다.
좌익학생들은 김청은을 붙잡고 찬물을 끼얹었다.
거대한 폭풍이 다가왔다. 폭풍은 거침이 없었다. 붉은색 폭풍은 거침없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김청은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분을 삭혔다. 붉은 폭풍. 바로 북한 괴뢰군이 불법적으로 남침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한 것이었다. 북괴군은 지금 이시간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공기가 꽂히는 도시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자유우방인 미국이 대한민국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폭풍 앞의 등불이었다. 북괴가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킨다면
여순반란사건 때처럼 공산당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일지 몰랐다. 그걸 막아야 했다. 하지만 총 한번 쏴본적 없는 학생이 나가서 뭘 한단 말인가.
답답하였다. 김청은은 밖으로 나갔다. 소방서 앞에는 김청은의 친구 몇이 모여 있었다.
"청은아. 무슨 일로 나왔냐?"
"미칠
것 같아서 나왔어. 북괴놈들 때문에. 개새끼들... 불법으로 남침을 하다니..."
"그래? 젠장할. 나도 사실 북괴놈들 때문에 밖으로
나왔어. 우리가 지금 할 일이 없을까 하고."
"그러냐? 생각 같으면 총들고 북괴놈들을..."
모두들 분노하였다. 이미
여순반란사건 때 공산당의 만행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김청은과 친구들은 크게 통탄할 뿐이었다. 무리들 중 김청은이 소리쳤다.
"그래!
맞아. 우리 모두 이판사판 싸우자.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수만은 없잖아. 안그래? 그리고 총을 쏘지 못하더라도 군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을거야. 안그래?"
"그래 좋아! 군에 가서 자원입대 하자!"
"좋아!"
"좋아!"
친구들은 만장일치로
군대에 자원입대 하기로 하였다.
군대로 가기 전. 김청은과 친구들은 한자리에 모여 펼쳐진 태극기 주위에 둘러앉아 칼로 손가락을 베어서는
태극기에 "血書參戰"(혈서참전)이라는 글자를 썼다. 죽음으로서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하겠다는 각오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각자의 이름을
적었다. 김청은, 선병기, 박태환, 신봉식, 황의국, 김두학, 김봉수, 장환표, 강정국...
다음날 아침. 김청은과 친구들은 순천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광주에 있는 20연대로 향하였다. 순천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기차나 차를 타고 가는게 아닌 걸어서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겨우겨우 먼 길을 걸어간 끝에 광주에 소재한 20연대에 도착하였다. 20연대 연병장 정문으로 軍令如山(군령여산)이라는 글자가
씌워진 현수판이 눈에 띄었다. 부대의 분위기는 왠지 엄한 군기로 잡혀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 뭐야?"
위병 초소에서
군인 한명이 걸어왔다. M1 소총을 등에 멘 험악한 면상의 군인은 김청은과 친구들을 보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원입대 하러 왔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받아주십시오!"
"받아주십시오!"
김청은과 친구들은
일제히 사범학교에서 배운 부동자세를 취하였다. 험악한 면상의 군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웠다.
"야! 여기는 너희 같은
학생들이 올 곳이 아니야. 전쟁터에서 뒈지고 싶어?"
"조용히 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역정을 내던 군인은 지프 앞에 선
소령 계급의 장교를 보고는 부동자세를 취해 거수경례를 하였다. 소령 계급의 장교는 군인의 경례를 뒤로 하고 김청은의 앞으로
걸어왔다.
"자원입대 하겠다고?"
"옙. 그렇습니다. 혈서로서 위험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싸우려
합니다."
김청은은 품속에서 혈서가 써져있는 태극기를 꺼내 펼쳤다. 소령은 태극기를 보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남들은 군대 가기 싫다고 난린데 자네들은 군대에 가려고 오히려 발버둥을 치는군. 죽을걸 뻔히 알면서도."
"순천사범 김청은
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어떠한 훈련이라도 받겠습니다!"
"어떠한 훈련이라도 받겠다고? 흐음... 알겠네. 야, 그리고 나는 2대대 소령
조시형이네. 연대장님께 말씀 드려서 자네들을 받아줄 수 있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김청은과 친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조시형 소령은 그런 김청은과 친구들을 보며 뒷짐을 지기만 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김청은과 친구들은 결사분대로
편성되어 대전차 훈련을 받게 되었다. 대전차 훈련은 말만 대전차 훈련일 뿐 실상은 포탄을 들고 북괴군 진지에 자폭하는 훈련이었다. 그렇지만
김청은과 친구들은 불평하나 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을 받기만 하였다.
훈련을 받을 때마다 하루하루가 지났다. 그럴수록 처음에 미숙했던
김청은과 친구들은 차츰 전차를 잡는 방법을 완전히 습득하게 되었다. 총이 주어지지 않은게 조금 이상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훈련을 대충대충 할 수는
없었다. 평소와 같이 훈련을 받는 어느날. 조시형 소령이 상기된 표정으로 연병장에 찾아왔다. 무슨 일인지 알수는 없지만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분대 집합!"
소위 계급장이 달린 장교의 구령에 맞춰 녹색 작업복 차림의 김청은과 친구들은 한줄로
집합하였다. 조시형 소령은 분대 앞에 뒷짐을 진채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연대가 북쪽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우리 연대에 여분의
소총이 없어 분대는 집으로 귀가해야 될 것 같다."
"네?"
분대원들은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조시형 소령의 말은 계속
되었다.
"자네들의 충정은 잘 이해하겠지만 총 없이 전투에 나가면 자네들은 총알받이일 뿐이다. 우리는 자네들을 총알받이로 쓸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집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라."
분대원들 중 김청은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대장님! 저희들은 조국을 불법으로 침략한 공산군을 무찌르기 위해 혈서로서 결사의 결의를 다지고 군문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귀가조치라니 어불성설이라 생각합니다. 조국의 현실이 눌나의 위기에 처해있는 마당에 단 한사람이라도 소중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저희들을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대장님!"
답답하였다. 받아주고서
결국엔 귀가조치라니. 김청은은 지금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말을 안듣는군! 자네들의 충정을 이해하지만 총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기회를 찾으라. 언젠가 자네들의 충정을 받아줄 기회가 올 것이다.
미안하다..."
조시형 소령은 사라져 버렸다. 분대원들은 힘이 빠진채 옷을 갈아입고는 쓸쓸히 부대 정문을
나섰다.
부대를 나선 김청은은 친구들과 헤어져 남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순천 시민들에게 자원입대 한다고 환송을 받은
이상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버리고 경상도 땅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광주에서 경상도 까지의 길은 멀었다. 가는 길마다 산이 있어 넘고 또넘고
고개를 넘어야 했다.
길을 가면서 가족들이 생각났다. 지금 쯤이면 가족들은 피난짐을 싸놓고 남쪽으로 피난을 갈지 몰랐다. 피난을 갈 동안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친누님과 동생들은 잘 있을까. 가족들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사범학교에 들어가 선생이 되어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하는데 이건...
경상도 김해에 이르렀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주변 환경이나 생활양식이 비슷할 뿐 말투는 너무나도
달랐다. 보는 사람들 마다 낯설었다. 낯선 사람이 뭐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김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독립중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응시해 당당히 독립중대원이 되어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혹독하였다. 기본적인 훈련부터 시작해 야산에 먼저
오르기, 사격술, 유격, 총검술 등. 대구로 가서는 어느 여자 중학교에서 바주카포 사격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으면서 김청은은 이런저런 것을
깨달았다. 그중 중요한건 대충대충 적당히 일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개인이나 단체에 이익이 되는건 하나도 없었다.
긴 훈련
끝에 부대가 배정되었다. 국군 제3 보병사단 26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였다. 그리고 부대가 배정되면서 김청은은 부분대장이 된 동시에 M1
소총과 군번을 받았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런 개새끼들..."
김청은은 행군하면서 저 멀리 북괴군
고사포 진지를 공격하는 미 공군 전투기 편대를 보았다. 파란색 동그라미 바탕에 하얀색 별이 그려진 공군마크를 단 미 공군 P-47 선더볼트
전투기 편대는 위험스럽게 북괴군 고사포 포대가 만든 탄막을 뚫고는 로켓탄을 떨구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전투기가 포탄에 맞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길 가운데로 후퇴하는 병사들이 풀이 죽은채 길 양측의 병사들과는 다른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고된 싸움
때문인지 병사들의 표정은 싸움에서 지고 온 패잔병 같았다. 그리고 뒤따라 들것에 실린 부상병들의 모습은 끔직하다 못해 보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행군을 하는 병사들은 걸레가 된 부상병을 보고서 내용물을 토하였다.
"중대 멈춰! 진지에 다 왔다!"
지루한 행군 끝에
진지에 도착하였다. 북괴군의 공격으로 부터 학도병들이 방어해야 할 진지였다. 중대의 학도병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김청은은 M1
소총에 장전해야 할 클립들을 살펴보았다.
봉우리가 높게 솟은 고지로 거대한 불기둥이 생기고 지축을 울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한바탕 국군과
인민군이 고지에 있는 관측소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것 같았다. 미군 전투기들은 편대를 지어 고지를 향해 날아서는 고지 위에 급강하로
폭탄을 퍼부었다. 고지로 불기둥이 생겼다.
고지 아래 국군 병사들은 고지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 삼삼오오 소대별로 대열을 맞추어서는
하사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전진하였다. 진지에서 중대장이 벌떡 일어나 중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중대 준비해! 당장
총 챙겨서 전위대를 뒷받침 해야한다!"
김청은은 M1 소총을 들고서 대열을 맞추었다.
국군 병력이 오르는 고지로 포탄과
기관총탄이 작렬하였다. 국군이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인민군의 포탄에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가고, 기관총 사격에 병사들이 줄줄히 쓰러져 아래로
굴렀다. 대열을 맞추는 병사들은 쓰러지는 국군 병사들을 보면서 자신도 포탄에 맞아 죽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였다.
"모두 건투를
빈다. 앞으로!"
중대는 고지로 전진을 시작하였다. 이미 고지를 오르는 국군 병사들처럼 기관총 세례를 받을게 뻔하엿다. 김청은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M1 소총을 꽉 잡았다. 이제 북한 공산당에게 복수할 기회였다.
폭음과 호루라기 소리가 뒤섞여 귓전을 때려댔다.
김청은은 분대원들을 앞에 서 고지를 짚어 올랐다. 고지는 험난하였다. 미 공군기들의 집요한 폭격으로 지형이 많이 바뀌어 버렸다. 고지를 오를때
엄폐물이 있어 크게 나쁠건 없지만 재수없는 병사는 예상치도 못한 인민군 기관총진지의 기관총 사격에 걸레가 되었다.
고지 반대쪽에서 포성이
울려왔다. 포탄은 인민군 진지로 떨어져 커다란 흙먼지를 만들어냈다. 국군 병사들은 포격에 흙을 뒤집어 썼다. 영락없는 거지가 되었다. 포탄이
떨어진지 얼마 안되어 미 공군 전투기들이 날아와 폭탄과 로켓탄을 퍼부었다. 기관총으로 저항하던 인민군 진지는 곧바로 침묵하였다.
김청은은
포복자세로 앞을 향해 기었다. 인민군 참호가 보이자 수류탄을 꺼내 참호를 향해 던졌다. 인민군 병사들은 중대를 보자 소총과 기관단총,
경기관총으로 일제사격을 하였다. 그러나 김청은이 던진 수류탄에 인민군 병사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겨졌다.
"돌~겨억
앞으로~!"
"와아!"
의기소침하던 중대원들은 소위의 외침에 일어나 인민군 진지로 돌격하였다. 수류탄 공격에 겨우 살아남은
인민군 병사들은 중대가 돌격하자 기관총 사격을 하였다. 돌격하던 중대원들은 기관총 사격에 우수수 쓰러져 버렸다. 아까 돌격하라고 소리치던 소위도
기관총 사격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포격지원 바란다! 포격지원 바란다! 좌표는..."
인민군 진지를 앞두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청은은 분대원들과 함꼐 포격으로 인해 만들어진 엄폐진지에서 기회를 엿볼 뿐이었다. 인민군 진지 위로 포탄이 작렬하였다.
거대한 화염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인민군 진지 주변이 포탄 구덩이밭이 되었다. 포격이 끝나자 다시 돌격이 시작되었다.
화력 지원이
확실했는지. 진지에서 버티던 인민군 병사들은 중대원들이 돌격하자 허둥지둥 참호 밖으로 나갔다. 김청은은 재빨리 참호로 뛰어들어 도망치는
북괴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빈 클립이 튀어나오고, 탄약이 장전된 새 클립을 꺼내 M1 소총에 집어 넣었다. 도망치던 인민군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뒷총을 맞고 쓰러졌다.
다시 전진하였다. 대충 전열을 재정비해 고지의 관측소로 향하였다. 꼭대기가 가까워질 수록 인민군들은
악랄하게 저항하였다. 욕설을 퍼붓고 수류탄을 던지고. 고지를 차지 해야하는 중대도 인민군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인민군 진지가 보이면 무조건
수류탄을 까넣고 보았다. 끝까지 저항하는 인민군 병사는 집단사격으로 피걸레를 만들어 버렸다.
"조금만 있으면 꼭대기다! 가...
커헉!"
학도병 한명이 쓰러졌다. 김청은은 북괴군 진지를 향해 몇발 쏴갈기다가 엎드려 쓰러진 학도병을 살펴보았다. 학도병은 같은
소대 소속 소대원이었다.
"야! 괜찮아? 뭐... 뭐야? 우~ 씨발 김일성 개새끼!"
학도병은 이미 죽은 뒤였다.
머리에 총자국이 선명하였다. 김청은은 바닥에서 일어나 서서 쏴 자세로 진지의 인민군 병사들을 향해 소총탄을 쏴갈겼다. 진지의 인민군 병사들은
김청은의 소총사격에 제대로 대응사격 하나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이어서 인민군 진지로 중대의 기관총 사격이 시작돼 기관총탄이
작렬하였다.
하나하나 인민군 진지가 점령되었다. 인민군 병사들은 쇄도하는 국군 병사들 물결에 더 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중대원들은 고지 꼭대기에 올라 인민군 시체를 치우고 진지를 재정비 하였다. 김청은은 진지 한켠에 앉아 수통에 담긴 물을 벌컥대며
마셨다.
고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바탕 전투가 끝난 고지 주변은 하얀 연기와 까만 연기로 가득하였다. 김청은은 지금 북괴의 김일성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볼 수 없다는게 고통스러웠다. 아까 죽었던 학도병이 떠올랐다. 그 학도병은 용감하게 돌격하다가 장렬하게 죽어버렸다. 고지가
보인다고 좋아하던 모습은...
그 학도병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이 한심하였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 학도병과 달리 자기 자신은
뒷꽁무니를 따라가 대충 싸우기만 하였다. 첫 전투라지만 부분대장으로서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는게 과연 옳은 일인지 자문해 보았다. 분명 그건 좋지
않은 짓이었다. 북괴와 공산당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언제까지 대충 싸우기만 할 수는 없었다.
북괴에게 통렬한 충격과 공포를
안겨야 했다.
전투는 갈수록 치열해져갔다. 얼마나 치열한지, B-29 폭격기가 폭탄비를 내리는건 다반사고 전차들이
고지 탈환전투에 투입돼 인민군들을 깔아 뭉갰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처음에 의기소침했던 중대원들은 전투에서 베테랑이 되어갔다. 김청은 자신도
309 고지 탈환전때 큰 공을 세워 중대장으로 부터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어김없이 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투기들이 폭탄과 로켓탄을 뿌리고 야포들이 북괴군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버렁지고 나서는 중대가 고지 정상을 향해
돌격하였다. 평소와 같이 인민군의 저항은 강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민군은 중대의 끈질긴 공격에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중대에
부상자가 무더기로 속출하였다.
이 알수없는 상황에 고지 공격은 중지되고, 중대는 공격 태세를 방어 태세로 전환하였다. 공격을 계속 하면
중대는 생각치도 못할 심각한 타격을 입을지 몰랐다. 중대장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직해 북괴군 고지를 공격해 보기로 하였다.
중대원 몇과 김청은이 특공대를 자원해 병사 여섯명으로 이루어진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특공대 집합!"
특공대원들은
선임하사의 호령에 부동자세를 취해 한줄로 섰다. 선임하사의 표정은 비장하였다.
"모두들 특공대에 지원해줘서 고맙다. 지금 우리
중대는 북괴놈들의 고지를 탈환해야 하는 중대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북괴놈들의 화력은 너무 강력하다. 게다가 아까 북괴놈들의 기습적인
포격으로 우리 중대의 대원 몇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특공대가 모집되기 전. 고지 공격을 잠시 멈추고 중대원들이
휴식을 취할때 포탄 한발이 중대 내 막사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천막에 있던 순천사범 선배 이동렬 중사가 포탄을 맞고
몸이 갈갈이 낒겨진채 죽었다. 차마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분노한 선임하사는 특공대 조직을 명령했고, 이동렬 중사의 죽음에
분노한 김청은은 맨 먼저 특공대에 자원하였다.
"북괴군 진지 기습을 위해 각자 M2 소총과 실탄 200발, 수류탄 다섯발을
지급하겠다. 본부 최상길 하사는 기관총을 휴대하고, 노병일 일병은 최상길 하사를 돕는다. 특공대는 고지에 위치한 북괴군 박격포와 기관총을
남김없이 파괴해야 한다. 이 임무는 우리 중대에게 있어 막중한 임무다. 알겠나?"
"옛, 알겠습니다!"
특공대원들은 각자
개인화기와 실탄, 수류탄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다시 집합하였다.
"모두들 잘 들어라. 이번 기습공격은 일사불란해야 한다.
일사불란하지 않고 엉망으로 하게 되면 그날로 우리 특공대는 끝장이다. 작전 시간은 밤 12시. 작전은 10분 동안 진행될 것이다. 내가 먼저
총을 쏘면 작전 시작이고 10분 후에 신호탄이 발사되면 작전 끝, 진지로 귀대한다. 귀대할때 낙오자가 생겨서는 안된다. 알겠나?"
"옛,
알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졌다. 짐승들이 시끄럽게 울때 선임하사를 비롯한 여섯명의 특공대원들은 낮은 자세로 인민군 진지에
접근하였다. 인민군 진지의 경계상태는 상당히 허술하였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보다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아예 잠을 자고있는 병사들이 더
많았다.
선임하사는 시계를 살펴보았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 초침은 모두 12시를 향하고 있었다. 초침이 12를 지날때 선임하사는 M2
소총을 들고서 인민군 병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졸던 인민군 병사 하나가 앞으로 꼬구라져 피를 흘렸다.
특공대원들은 일제히 인민군
진지를 향해 사격을 시작하였다. 잠을 자던 인민군 병사들은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몽사몽 시끄럽게 영원히 잠이 들었다. 김청은은 M2
소총을 들고 연발로 갈겼다. 졸던 인민군들은 허무하게 김청은에게 사살되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특공대원들이 인민군
공용화기에 수류탄을 까넣는 소리였다. 인민군 진지는 난장판이 되었다. 김청은도 수류탄을 꺼내 박격포 포신에 까넣었다. 박격포는 산산히 조각나
버렸다.
펑펑!
신호탄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10분이 지난 것 같았다. 김청은은 북괴군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고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발을 헛디뎌 미끄러져 아래로 굴렀다. 순간 정신을 잃어버렸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까? 무의식 속엥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소리에 벌떡 깨버린 김청은은 자신의 앞에 있는 작업모를 쓴 군인을 보자 화들짝 놀랐다.
김청은의 바로 앞에는 각자 페페샤 기관단총과 나강-모신 소총을 든 인민군 병사 둘어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개 썅간나
쌔끼!"
인민군 병사는 거칠게 김청은의 멱살을 잡았다. 인민군 병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네가 우리 진지
기습때렸네? 아주 미친 국방군 아새끼구만 기래. 썅!"
인민군 병사들은 김청은의 두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로 끌고갔다. 총위 계급의
인민군 장교는 김청은을 보자 우악스럽게 자리에 앉혔다.
"내래 니가 우리 인민군 진지 공격했네?"
"..."
"썅간나
쌔끼! 말 안할끼야?"
정신이 없었다. 뭘 원하는건지, 인민군 총위는 처음부터 발악하였다.
"말 하라우!
당장!"
"누가 공격했냐고? 내가 수류탄 깠다. 어쩔래!"
김청은은 인민군 총위의 물음에 죽을 각오하고 물음에 답하였다.
김청은의 대답에 인민군 총위는 눈이 돌아버렸다. 그리고 벽에 기대져 있는 나무 몽둥이를 들었다.
"이런 미친 아새끼를 봤나? 니
뒈지고 있네? 뒈지기 싫으믄 당장 국방군의 위치를 불라우. 알갔네?"
"뭐라고? 불라고? 시끄러 이 김일성의 졸개새꺄! 날 팰려면 얼마든지
패라!"
"이... 이게..."
무자비한 매질이 가해졌다. 인민군 총위와 병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김청은을 속된 말로 뒈지게
때렸다. 고문 수준이었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찬물을 끼얹고는 다시 매질을 하였다. 김청은은 무자비한 매질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뭐하는기야?"
방으로 인민군 장교가 들이닥쳤다. 소좌 계급의 장교는 피투성이가 된 김청은을 보고는 인민군
총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런 썅간나 새끼! 국방군 아새끼를 왜 뒈지게 패고 있네? 정보를 얻어내려면 회유를 해야지, 뭐
하는기야?"
"이 영악한 국방군 아새끼가 글쎄..."
"입 닥치라우! 변명은 필요없다. 정보를 얻으라우.
알갔어?"
"알갔습네다!"
인민군 소좌는 문을 꽝 닫고는 나가버렸다. 인민군 총위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인민군 총위는 미쳤는지, 군의관을 불러 지극정성(?)으로 김청은을 치료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힘들게 주먹밥과 물을 가져와서는 김청은에게
먹였다.
"내래 괜찮네?"
인민군 총위의 태도는 어제와 달리 많이 온화하였다. 뭘 잘못먹은 것
같았다.
"국방군 동무. 동무가 말이니 국방군 위치하고 지휘관 이름 같은거 말해주면 동무를 자랑스런 인민군대의 전사로 편입시켜
주갔서. 기리고 동무의 공을 생각해서 동무에게 이쁜 애미나이 동무와 집, 생필품 일체를 주갔어. 좋지
않갔네?"
"닥쳐라!"
침이 튀었다. 인민군 총위는 침이 얼굴에 묻은 가운데도 애원조로 김청은에게
달라붙었다.
"국방군 동무. 진정하라우. 기렇게 화를 내면 좋을거 없어야~ 평양 랭면 먹고싶네? 그럼 우리 인민군에 들어오라우.
기러면 우리 영명하신 장군님이 고조..."
"시끄럽다! 내가 어찌 너네들 같은 무리들과는 절대 상종하지 않을거다. 대한민국 만세! 자유
민주주의 만셋!"
"이 썅간나 새끼가!"
인민군 총위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남반부 국방군 아새끼가 성스러운(?) 존재를 건드린
것이었다. 인민군 총위와 병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김청은을 팼다. 김청은은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맞으면서 자신이 한 말에 대한 후회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하루가 또 지났다. 김청은이 있는 방으로 인민군 소좌가 험상궃은 얼굴로 들어왔다. 그리고 인민군 소좌는 병사들을 같이
데리고 왔다.
"이 국방군 아새끼가 우리 장군님을 모욕했단 말이네?"
"기렇습네다. 대대장 동무."
인민군 소좌와
총위의 이야기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인민군 병사들은 김청은을 묶은 줄을 풀었다.
"무슨 일입니까?"
"총살이다 이 썅간나
새꺄. 기분 좋네?"
김청은의 물음에 인민군 총좌는 투덜거리는 투로 대답하였다. 총살! 그 한마디는 강렬하였다. 이제 최후가
다가온단 말인가? 인민군 병사들은 김청은의 두 팔을 잡았다. 김청은은 지긋이 두 눈을 감고 처형장으로 끌려가길 기다렸다. 겨우 성스러운(?)
존재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하는게 걸리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하고싶은 말 다 해서 좋았다.
김청은은 인민군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인민군 진지 주변은 엉망이었다. 지나가는 곳마다 박살난 공용화기와 진지들이
보였다. 김청은을 보는 인민군 병사들의 눈빛은 살벌하였다. 처형장이 가까워질수록 그 눈빛은 더욱
가늘어졌다.
"포탄이다!"
"엎드리라우!"
갑자기 뭔가가 인민군 진지 한 가운데를 강타하였다. 인민군들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김청은을 호위하던 인민군 소좌와 병사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다른곳으로 뛰어갔다. 포탄은 계속 떨어졌다. 김청은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김청은에게 신경쓰는 인민군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탈출 기회가 왔다.
김청은은 앞을 향해 뛰었다. 재빨리 인민군
진지를 빠져나가야 했다.
결국 인민군 진지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탈출 할때 인민군 정찰병과 조우해 죽을뻔 했지만
이미 죽은 인민군 병사로부터 얻은 페페샤 기관단총으로 정찰병들을 사살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중대본부에 도착한 김청은은 선임하사에게 특공대의
전과를 보고하였다. 기습작전으로 인민군은 박격포 3문과 기관총 한정을 잃어버리고, 병사 수십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엄청난
전과였다.
시간이 지나 8월 12일이 되었다. 주변이 어두운데도 어김없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력을 증강한 인민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를 공격하였다. 미 공군 전투기들이 인민군을 막기 위해 막대한 화력을 퍼부었지만 인민군의 맹공은
그칠줄 몰랐다.
"정확하게 쏴서 정확하게 사살해라!"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가 불을 뿜었다. 황토색 물결의 인민군들은
군복을 피로 적시면서 시체를 넘고 넘어 진지로 전진하였다. 김청은은 M1 소총을 정신없이 쐈다. 돌격하던 인민군 몇이 김청이 쏜 총에
쓰러졌다.
"더럽게도 많군."
인민군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중사 계급의 하사관은 무거운 BAR 자동소총을 든 채
일어서서 인민군들을 향해 연발로 갈겼다. 발사되는 족족 인민군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이제 어두워지려 할때 조명탄이 인민군들 머리 위로 터졌다.
주변이 환해지면서 잠시 사격을 멈추던 기관총들은 총열이 시뻘개지도록 불을 뿜었다.
인민군들은 기관총 세례를 받으면서 하늘로 붕 떴다. 진지
근처에 배치된 국군 포병대와 미군 포병대가 인민군들을 향해 대 보병사격을 시작하였다. 국군 병사들은 진지에 머리를 처박았다. 땅이 흔들리면서
무지막지한 흙들이 머리에 뒤집어 씌워졌다. 포병의 화력지원이 끝나고 국군 병사들은 일제히 소총사격을 하였다. 포병의 사격에 혼을 빼앗긴
인민군들은 정신없이 쓰러졌다.
"젠장할 미치겠군. 모두 착검!"
인민군들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격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숫자가 몰려들었다. 김청은은 대검을 꺼내 M1 소총에 착검하였다.
"모두들 들어라! 지금부터 백병전을
시작할거다! 신호탄 세발이 발사되면 곧바로 진지로 대피한다!"
중대장의 고함이 들려왔다. 인민군들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개미떼 수준이었다. 기어 오르는 인민군들을 보면서 죽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느 옛사람의 말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사는게 최선일지 몰랐다.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김청은은 올라오는 인민군을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다. 인민군은 머리가 박살나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진지 밖으로 나가 막 올라온 인민군을 힘껏 찔렀다. 인민군은 고통스러워 하며 진지 밖에서 뒹굴었다. 대검은 괴로워 하는
인민군의 배를 관통하였다. 인민군은 부르르 떨다가 숨이 끊어졌다.
백병전이 벌어진지 몇분 안되어 신호탄이 터졌다. 진지로 대피하라는
중대장의 신호였다. 김청은은 돌격하는 인민군에게 소총탄을 몇발 갈기고는 진지로 뛰어갔다. 하늘로 섬광이 번쩍이며 폭음이 울렸다. 무서운 섬광과
폭음은 계속 되었다. 김청은의 머리 위에서 뭔가가 터졌다. 김청은은 마지막으로 섬광을 보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봐.
괜찮나?"
무의식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김청은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 보았다. 눈이 떠지면서 김청은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중위
계급의 장교가 서 있었다. 중위가 입은 군복 명찰에는 '이재전'이라는 한글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
"전투가 끝나고
보니까 자네가 큰 부상을 입었더군."
"네...?"
"좌측하퇴부 및 안면찰과상, 등 및 손발의 열화상, 기타 정신적 쇼크
등..."
"제가 부상이 그렇게 심합니까?"
"그래. 그래도 자네는 잘 싸웠네. 포탄이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끝까지
싸우다니."
"네..."
"푹 쉬게. 빨리 회복해서 김일성이를 몰아내야지."
중위는 밖으로 나갔다. 김청은은 중위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엄하던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동생들은 김청은을 보자 기뻐하면서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미래의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가 와서 김청은을 안았다. 김청은은 어머니를 안으면서 한없이 울었다.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에. 그리고 간호장교로 종군하던
친누님이 죽었다는 슬픔에.
노인들이 김정수에게 다가왔다. 노인들 중 한명이 김정수를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김청은 이등상사님의 손자인가?"
"그렇습니다."
노인들은 김정수를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57년 전
함께 동락했던 전우가 없다는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전우를 빼닮은 그 손자를 봤다는 기쁨 때문일까? 노인들은 김정수의 손을 꽉
잡았다.
"자네 할아버지는 전투에서 용감한 분이었네. 그러면서 함께 하는 전우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지. 6, 7년 전만 해도 그
사람을 볼때 너무 좋았는데...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라니..."
노인들은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57년 전 피로
혈서참전을 썼던 그날처럼 하늘은 옅은 파란색 수채화처럼 맑았다. 하늘로 김청은의 얼굴이 보였다. 김청은은 하늘의 김청은을 향해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 정수에요!"
사람들을 떠올렸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들을.<끝>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팩션입니다.
※여기 나오는
김청은(가명)과 김청은의 아버지 어머니 친누나 동생들, 선병기, 박태찬, 신봉식, 황의국, 김두학, 김봉수, 장환표, 조시형 소령, 이재전
중위, 그 외 사람들은 모두 실존인물들 입니다.
※처음에는 원고에 인민군을 북괴군으로 표기했으나, 북괴군이라는 표현이 지금시대에 적절한
표현이 아닌것 같아 연재분에서는 북괴군을 인민군으로 표기합니다.
※다시한번 이 소설을 한국전 참전 국군, 유엔군 용사들과 지금은 고인이 된
할아버지께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