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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장소
: 경복궁역 3번출구, 3-1번이 아닌 3번출구에서
소요시간 : 약 2~3시간
코스
: 경복궁역 3번출구 - 통의동 백송 터 - 대림미술관 - 창의궁터 - 메밀꽃 필 무렵(영추문, 경복궁 등) - 통의동 한옥마을 - 통의동 보안여관(한국의 근현대문학가) - 통인동 (세종대왕 탄생지, 세종과 스승의 날) - 통인시장 - 군인아파트 앞 (자수궁, 송석원, 벽수산장, 이완용, 윤덕영) - 옥인동 47번지일대(옥인동윤씨가옥) - 수성동(기린교, 안평대군, 겸재 정선) - 누상동(윤동주 하숙집터, 종로 구립미술관(박노수), 이중섭 집터) - 누하동(대오서점)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경복궁 1번출구(종료)
경복궁역 3번출구 주변
백운동천 도로가 되다
경복궁역 3번출구를 나와서 걷는 길은 예전 백운동천이었다.
체부동 금천교(금청교) : 고려시대부터 있던 다리로 추정
1928년 도로 확장으로 매몰되었다고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건물 자리
1935년 일본 미쿠니 석탄회사의 사원아파트 건설(4층)
1945년 해방이후 내자호텔 - 주한미군의 숙소, 주한 미군에 무상 공여
박정희 정권당시 궁정동 안가에 불려가는 여성들이 대기하던 곳이 이 호텔 1층 커피숍이었다고
1990년 사직터널 확장공사와 함께 내자호텔 철거
도로확장을 위한 호텔 반환 협상에서 주한미군의 강한 압박이 있었다고..
1991년 이곳을 시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비용 전액(48억원)을 대한민국이 부담하기로 합의 했다고
당시 합의 주체중 한명이 당시 미주국장이었던 반기문
오피스텔 용비어천가 건물
주시경 선생 집터 + 내수사터
한글 재정비
훈민정음은 집현전과 관계없는 세종의 창작품이다?
上親制諺文二十八字
띄어쓰기 확립,
주시경이 참여한 독립신문
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띄어쓰기 반영
띄어쓰기의 중요성
남편이 아내에게 쓴 편지에 " 서울가서방을구하시오"
누나가자꾸만져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서울시장애인복지회
종교교회
종침교(琮琛橋)에 있는 교회의 의미로 종교교회
허종 허침 형제이야기에서 종침이라는 이름 유래했다고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의 폐비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구사일생한 이야기에서
생사의 갈림길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라고.
백운동천과 사직천이 만나는 곳의 다리
종교교회 홈페이지에서는 : 창조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늘과 땅, 너와 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를 기원'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1900년 설립한 교회
캠밸 선교사가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을 설립한 것이 시초
배화학당 부속
현 건물은 1910년 건설(도렴동)
적선동 - 지명에 담긴 의미
적선동 : 조선의 정치철학이 보이는 지명 중 하나
적선지가 필유여경 : 착한일을 많이하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따른다.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면 자신에게도 좋다는 의미
적선방에 상응하는 지명으로 여경방도 있었다.
내자동 : 내자시가 있던 곳
내자시 : 궐내의 쌀 술 면 등을 공급하던 곳
내수동 : 궐내의 잡물과 노비 등을 공급하던 내수사가 있던 곳
도렴동 : 궁중 직조물의 염색을 담당하던 도렴서가 있던 곳
당주동 : 당피동과 야주현을 합한 지명,
현 세종문화회관 뒷편
당피동 : 중국 의원 피씨가 살던 곳
야주현 : 경희궁으로 가는 낮은 고개
그 고갯길에 서면 홍화문 현판 글씨가 워낙 명칠이어서 밤에도 밝게 비춘다고 해서 밤에도 낮같이 환한 고개라는 의미로 야주현이라고
도성 동쪽으로는 교육과 관계된 지명들이 보인다.
명륜동, 충신동, 효제동, 인의동 예지동 ...
통의동 백송
경복궁역 3번출구를 나와 직진, 버스정류장을 지나 첫번째 골목으로 우회전.
삼계탕집 황후명가를 지나서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통의동 백송터.
통의동
조선시대 의통방
갑오개혁때 통의방으로 지명 변경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터 - 통의동 35번지 일대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자리
작은 주택들이 이 이후 들어선 것으로 추정
발굴가치가 높을 것을 추정.
천연기념물 제 4호. 통의동 백송
2013년 10월 15일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천연기념물 흰소나무, 몸 성한 곳이 없구나. 김종성
소나무는 우리 땅에서 가장 흔한 나무이면서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기도 하다. 애국가는 물론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에도 등장하고, 한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데다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자란다. 그중 천연기념물(명목) 소나무는 이 땅의 대표적 자연유산으로 씩씩한 기개와 지조·충절을 상징한다. 명목 소나무의 장구한 수명, 크고 늠름한 자태, 아름다운 조형미는 그에 어울리는 여러 이야기들과 함께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소나무는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광화문·숭례문의 복원에 쓰인 금강송(혹은 황장목·춘양목)에서 해풍으로부터 바닷가 마을을 지켜주는 곰솔(해송), 내륙지방에서 자라는 육송(陸松), 한시에 흔히 나오는 낙락장송(落落長松), 조선시대 세조에게 벼슬을 받은 정이품송, 단종의 한과 슬픔을 간직한 관음송… 그중 백송(白松)이라는 소나무 이름이 눈길을 끈다. 한자처럼 하얀 소나무라는 의미 때문인지 호기심과 상상력을 일으키는 이름이다.
백송은 어릴 때는 거의 푸른 빛깔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흰 빛깔이 차츰차츰 섞이기 시작한다. 점점 흰 얼룩무늬가 많아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하얗게 된다. 사람이 하얀 머리가 나면서 늙어가듯, 백송의 일생은 이렇게 하얀 껍질로 나이를 표시한다. 노거수(老巨樹)란 말이 잘 어울리는 나무다. 백송이란 이름 외에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불리며, 한글전용을 하는 북한 사람들은 흰 소나무라 부른다. 토종 생물의 생태계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여느 귀화식물과 달리 백송은 생장력이 약해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희귀식물이다.
백송은 북경을 비롯한 중국 중서 북부에만 자라는 특별한 나무다. 예부터 궁궐이나 사원 및 묘지의 둘레나무로 흔히 심었다고 한다. 현재 북경 계태사(戒台寺) 앞에는 당나라 초에 심었다는 나이 1300여년, 높이 18m, 둘레 6.4m에 이르는 거대한 백송이 자란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중국에 간 사신이 갔다 올 때 가져와 심은 게 수백 년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수령이 오래될수록 줄기가 하얗게 되는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밖에 자라지 않을 정도로 생장도 느리고 번식도 어려운 희귀한 나무지만 초록 껍질을 하나씩 벗어가며 결국엔 흰 얼룩무늬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나무다. 이렇게 자람이 늦고 흰 껍질이 독특해 웬만한 굵기의 백송은 특별 보호목이 될 정도다.
천연기념물은 순서와 중요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1호부터 10호 중에 여섯 점이 백송이란 사실은 그런 백송만의 특별한 속성을 나타내준다. 현재 남한에 다섯 그루, 북한은 개성에 한 그루의 백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들 중 충남 예산의 한 그루를 제외하면, 자라는 곳은 모두 서울 경기 지방이다. 중국 왕래를 할 수 있는 고위관리가 주로 서울 경기에 살았던 탓이다.
천연기념물 백송은 태풍에 쓰러지기도 하고 뿌리 주변의 복토작업 후 갑자기 고사하기도 했다. 서울에는 현재 두 그루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8호는 종로구 재동에, 제9호는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백송나무였던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은 1990년 돌풍에 쓰러진 후 고사돼 그루터기만 남았다. 이밖에도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 백송은 제6호였던 원효로 백송, 제7호였던 회현동의 백송이 고사돼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
추사 김정희는 백송과의 인연이 특별하다. 김정희의 증조 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사위가 되면서 지금의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이란 대저택을 하사받았고 김정희는 여기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열 살 전후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졸지에 대종가의 종손이 된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곳으로, 정원 한 구석에는 숙종 때 심어진 백송 한 그루가 이미 자라고 있었다. 김정희는 어린 나이에 받은 엄청난 충격을 백송을 어루만지며 달랬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으로, 1990년 7월 돌풍에 넘어져 버릴 때까지 살아있었다.
순조 9년(1809) 늦가을, 24살이 된 청년 김정희는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북경에 가게 되자 수행원이 돼 따라나선다. 2개월 남짓한 북경 생활 동안 어릴 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백송이 시내 여기저기서 흔히 만날 수 있음을 기뻐했을 터. 귀국길에 그는 솔방울 몇 개를 골라 짐짝 속에 넣는다. 1810년 3월 중순 어느 날 충남 예산의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영의정을 지낸 고조 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가져온 백송을 정성껏 심는다. 그 백송은 오늘날 천연기념물 106호가 돼 묘지를 지키고 있다.
서울 종로구 재동의 백송은 헌법 재판소 뒤뜰에 살고 있다. 정문에서 수위 아저씨에게 백송을 보러 왔다고 하니 별 다른 질문 없이 출입증을 내준다. 아마도 백송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건물을 돌아서자 600년 동안 만고풍상을 겪은, 두 갈래로 갈라진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노거수 백송을 처음 봐서 그런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느낌 있다'. 나무줄기 여러 군데 수술 자욱이 있지만 흰 살결이 무척 곱고 기품이 느껴진다. 밝고 깨끗하면서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함이 들어있다. 멀리 떨어진 큰길에서도 나무줄기가 희게 빛나 보인다. 높이 17m, 밑동부분의 둘레는 3.8m인 이 소나무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백송이다.
백송이 있는 자리는 조선 영조 때의 재상이자 뒷날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주춧돌을 놓은 조상경의 집이었다. 고종의 등극을 결정적으로 도운 조대비와 대원군이 안동 김씨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정복고를 시도할 때 백송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이 무렵 백송 밑동이 별나게 희어지자 대원군은 개혁정치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 뒤 이 자리에는 경기여고와 창덕여고가 차례로 들어왔다가 나갔고, 지금은 심심찮게 뉴스의 근원지가 되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서울의 또 하나의 명물 천연기념물 제9호 백송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옆에 있다. 조계종 본찰(本刹)답게 거대한 처마를 가진 대웅전과 어우러져 더없이 운치있는 모습이다. 치렁치렁한 가지를 하늘로 펼쳐놓고 있는 장대한 회화나무가 이웃 친구처럼 우뚝 서있어 덜 외로워 보인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백송은 높이가 14m 정도며, 밑동부분의 둘레는 1.85m 정도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원줄기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한편으로 길게 위로 올라가면서 나 있다.
백송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송동의 백송은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 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 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가 나무 주변이 주차장으로 사용돼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매연으로 인해 나무의 생육이 지장을 받을 것으로 보였다. 좋지 않은 환경 때문인지 이미 말라죽은 가지들과 이런저런 수술 자국들로 나무의 모양은 기형이 됐다. 일부분은 받침대에 의존해 서 있다. 과연 500년을 살아온 이 백송은 얼마나 더 살까 하는 걱정이 먼저 떠오른다.
이에 문화재청은 1977년부터 백송의 종자를 채종,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에서 발아시켜 관리를 해온 백송의 종자를 후계목으로 증식시키는 등 생물학적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 백송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1990년 7월 17일 백송, 쓰러지다
1990년 7월 18일 경향신문기사에서
쓰러진 천연기념물 백송
밤새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 종로구 통의동 주택가 공터에 있던 천연기념물 제4호 백송(높이 16m, 둘레 3m)이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우종원 기자
1990년 7월 18일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돌풍에 뿌리뽑힌 6백살 백송
17일 오후 6시 30분께 서울 종로구 통의동 35-5 주택가 빈터에 자리잡은 천연기념물 제4호 백송이 이날 서울지방에 내린 돌풍을 동반한 집중호우로 뿌리가 뽑혀 쓰러졌다.
줄기가 땅위로부터 두갈래로 뻗은 이 백송은 높이 16m, 둘레 3m 가량의 6백년 된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서울과 경기 충남북 일부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이다.
변재성 기자
백송을 살리기 위한 노력 - 백송회생추진위원회
1990년 7월 24일 연합뉴스 기사에서
통의동 백송 회생시키기로
뿌리 피해없게 쓰러진 상태에서
(서울=聯合) 서울시는 24일 지난17일 집중호우로 쓰러진 종로구통의동 白松(천연기념물4호)을 후계수를 심어 대를 이으려던 당초 방침을 바꿔 현재 넘어진 상태에서 회생시키는 방안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시는 이날 하오 자신들이 아껴오던 6백년생 백송을 되살려달라는 통의동주민들의 진정에 따라 高建시장주재로 긴급관계전문가회의를 열고 '수목회생추진위원회'를 구성,백송회생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이날 회의는 백송을 살리는 방법으로 현재의 넘어진 상태에서 회생시키는 방안과 원래대로 세우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되살리는 방안이 회생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시는 이에따라 일단 백송의 원뿌리에 피해가 없도록 북쪽 방향으로 넘어진 나무는 1m정도,남쪽방향의 것은 20cm정도 위로 올려 X자형의 받침목을 대는 한편 수피보호를 위해 가마니,새끼등을 감아주기로 했다.
또한 부러진 부분과 굴절되거나 고사된 부분은 제거후 방부 보존처리할 계획이다. 시는 백송회생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후계수 육성을 위해 삽목(꺽꽂이)등을 임업연구원이 주관해 실시토록 하고 시민들로부터 제보된 통의동 백송씨앗을 발아시켜 현재 키우고 있는 어린나무에 대해서도 전문기관에 의뢰 감정키로 했다.
시에 접수된 제보에 따르면 金동신씨(강남구대치동97의24)가 10년전 통의동 백송에서 떨어진 씨앗 11개를 주어 발아에 성공, 50cm 크기로 자란 10년생과 조대일씨(종로구신교동69)가 2년전 씨앗을 주어 직접 발아시켜 5cm크기로 키운 2년생 백송이 있다는 것이다.
1990년 7월 28일 연합뉴스 기사에서
6백년생 백송에 영양주사등 응급조치
(서울=연합) 서울시는 최근 폭우로 쓰러진 종로구통의동 6백년생 백송(천연기념물4호)을 되살리기 위해 일단 영양공급등의 응급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서울시의 백송회생대책추진위원회는 28일 나무가 쓰러진지 10여일이 지나 영양흡수등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보고 우선 樹幹부분에 영양주사를 놓는 한편 뿌리의 발근촉진을 위해 생명정을 뿌려주기로 했다.
대책추진위는 이와함께 영양분을 많이 흡수하는 毬果(솔방울등)를 필요부분만 남기고 모두 제거키로 했다.
추진위는 또 임업연구원에서 회생대책으로 내놓은 10개항의 방안은 추후 검토해 단계별로 적용하고 후계수육성은 꺾꽂이,씨앗발아등을 통해 계속 추진키로 했다.
1990년 8월 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예산 전문인력 턱없이 부족
천연기념물 老巨樹 보호 문화재관리국 전담직원 3명뿐
都市郡 등에 위탁 형식적인 관리
"병충해 막는다" 밑둥 비닐싸매는 無知도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는 희귀식물이 많다. 철따라 珍客 철새들도 날아온다. 정부에서는 학술 및 관상적 가치가 높은 희귀 동식물과 광물 등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현재 식물분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老巨樹 126점, 희귀종 3종, 자생지 12곳, 자생 北限地 11곳, 수림지 24곳 등 185건.
그러나 사람의 손에 의한 파괴뿐 아니라 공해피해 등이 확산되고 있는데도 사전 관찰이나 보호조치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자주 나오고 있다. 광물이나 동물분야 천연기념물은 보호관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식물분야는 특히 소홀하다는 것.
이제까지 관리가 소홀해지게 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천연기념물 관라감독의 최고 책임은 문화재관리국에서 맡고 있고, 실제 관리업무는 각 도와 시군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관리국의 천연기념물 보호관리담당 직원은 고작 3명뿐이다.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기념물을 체계있게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한다는 것은 무리다.
또 각 시군에는 전문인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형식적인 겉치레 관리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문화재관리국의 천연기념물 관련 올해 예산은 2억 8천여만원으로 이것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지난달 쓰러진 천연기념물 4호 통의동 백송은 사전보호조치를 했더라면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문화재위원인 김준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거대한 백송이 늙어 나무의 기운이 떨어졌는데도 지주조차 세우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지주를 세우고 양쪽으로 벌어진 가지를 동아줄로 묶었더라면 이번과 같은 사고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또 중병을 앓고 있는 국립공원 속리산의 정2품송(천연기념물 103호)도 보다 전문적으로 관리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김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솔잎혹파리를 막는다면서 정2품송 밑둥 주위를 비닐로 싸매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 이것이 뿌리의 원활한 호흡을 막아 오히려 나무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김교수는 지적했다.
안봉원 교수(경희대)도 기구확충과 예산 증액을 통한 사전 정밀관찰과 적절한 예방조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老巨樹는 특히 일단 나무가 기력을 잃거나 재난을 당하고 나면 회생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들에 의한 철저한 관리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중앙 부서뿐 아니라 지방에도 전문인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안교수는 제안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老巨樹들이 주민들에게 상징적이고 정신적 지주구실을 하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후계수를 키우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경빈 교수(원광대)도 사전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
분 아니라 효과적인 보호 보존방법이라는 점을 들어 인원증원과 예산 증액을 역설했다.
김차수 기자
백송은 누군가 죽인 것이다? 힘들지만 살아 있었던 백송
누군가 제초제를 뿌려서 죽였다고-홍기옥 할머니 손의 상처
1993년 3월 24일 문화재 지정 해제
1993년 3월 20일 연합뉴스 기사에서
서울 통의동 백송 문화재 지정 해제
서울=聯合) 문화체육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5-5에 소재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4호 서울 통의동 백송의 문화재 지정을 23일자로 해제했다. 일제하인 지난 1933년부터 천연기념물로 보호받아온 이 백송은 3년전 돌풍에 쓰러진 이후 각종 회생조치에도 불구하고 소생불능 상태에 빠져 완전히 고사된 것으로 판정됨에 따라 지난 2일 문화재위원회 심의하에 이를 문화재에서 해제하게 된 것이 다.
고사목에 대한 처리는 학문적인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무박물관에 영구보존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며, 고사목이 있던 자리(39평)는 그동안 백송이 '신목'으로 주민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점을 고려, 주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구체적인 활용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라고 문화체육부는 밝혔다.
1993년 5월 13일 벌목
1993년 4월 6일 연합뉴스 기사에서
枯死 판정 통의동 백송 다음달 철거
고사판정을 받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소재 백송이 다음 달 중에 철거되고 이 자리에 동일한 품종의 백송이 들어서 명맥을 잇게된다.
서울시는 6일, 지난 90년 여름 서울지역에 쏟아진 집중폭우로 두갈래로 갈라진 뒤 그동안의 회생작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7월 고사판정을 받아 천연기념물 제4호에서 해제된 수령 6백년의 백송을 5월중 절단, 광릉 수목원내 임업연구원 산림박물관에 전시키로 했다.
시는 그러나 주민들이 백송의 그루터기 부분만이라도 남겨 통의동 백송의 존재사실을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해옴에 따라 지상에서 50-1백㎝ 정도에서 절단, 뿌리 부분을 방부처리해 제자리에 보존할 계획이다.
시는 또 백송의 명맥을 잇도록 하기위해 문화재관리국이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사능묘포장에 희귀묘목 보존차원에서 기르고 있는 수령 18년, 높이 2m의 백송 80여 그루 중에서 생육상태가 좋은 수목을 골라 절단되는 백송 옆자리에 식재할 방침이다.
이와함께 백송이 있던 자리에 표석을 세워 문화재 지정 및 해제 일자, 본체의 산림박물관 보관사실 등을 음각, 통의동 백송을 기념키로 했다.
이에따라 그동안 임업연구원 직원이 백송의 정통혈통을 이은 것으로 주장, 관심을 끈 바 있는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서울시 묘포장의 34년생 백송의 후계목 지정은 어려워질 전망이다.
시 관계자는 이에대해 "묘포장 백송의 혈통 진위여부를 검증하기 곤란하고 이식후의 정상 생장여부가 불투명해 후계목 식재가 어려워 유사목으로 대체키로 했다"면서 "그러나 표석에 후계목으로 주장되고 있는 백송의 생육지와 수령 등을 기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남북방향 두갈래로 가지가 뻗은 통의동 백송은 62년 12월 천연기념물로 지정, 높이 16m, 둘레 3m의 웅장한 모습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홍기옥 할머니 이야기
2005년 4월 4일 세계일보 기사에서
"나무 몾잊어 이사갔다 돌아왔죠" 백소용 장인수 기자
“백송할머니! 백송할머니! 누가 나무 죽이러 왔어요.”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사는 홍기옥(74·여)씨는 동네에서 ‘백송할머니’로 통한다. 이곳에 있는 천연기념물 4호였던 630여년 된 백송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서 붙은 별명이다. 이제 나무 근처에 낯선 사람만 나타나도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할머니를 찾는다.
홍씨가 처음 백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 전. 통의동으로 이사 온 후 백송의 우람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명절 때마다 마을 사람들과 나무 밑에서 음식을 해 먹고 여름에는 그늘 밑에서 쉬고 가을에는 솔방울에서 씨를 까먹으며 깊은 정이 차곡차곡 쌓였다.
하지만 1990년 폭우가 쏟아지던 날 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져 쓰러졌다. 나무 바로 옆에서 건축공사를 하다가 뿌리를 자른 것이 원인이었다. 홍씨는 당국의 감시 소홀로 천연기념물 근처에 공사 허가가 나 어이없게 국가의 보물을 잃어버리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때부터 홍씨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들락거리면서 일본 조경과 산림, 나무 관리하는 방법을 직접 배웠다. 홍씨의 노력과 함께 스위스의 한 제약회사 회장이 비료를 무상지원하겠다고 나섰고,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최상급 마사토를 공수해오는 등 정성이 모이면서 기적처럼 새순이 올라왔다. 하지만 1991년 어느날 한밤중에 누군가 나무와 흙에 제초제를 뿌려 백송은 최종 사망선고를 받았다.
결국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고 나무가 잘린 뒤 홍씨는 ‘백송 2세’를 심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나무에서 자른 가지를 홍씨, 문화재청, 서울시청, 종로구청이 각각 하나씩 ‘어머니 백송’ 옆자리에 심었다. 이때 심은 2세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청년나무가 됐다. 홍씨는 또 나무를 잘라 수목원·청와대·헌법재판소 등으로 보내 전국 곳곳에서 백송 2세가 자라고 있는 중이다.
홍씨는 1994년 서울 강남구 포이동으로 이사했지만 백송이 자꾸 눈에 밟혀서 2년도 못 넘기고 다시 통의동으로 이사왔다. 그간 백송 관리에 6000만원을 넘게 썼다. 홍씨에겐 백송이 자식이나 다름없다.
현재 홍씨가 가장 힘쓰고 있는 일은 백송 2세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도록 하는 것. 백송이 심어져 있는 땅 50평은 시가 5억원에 달한다. 소유권이 매매돼 공사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홍씨는 “동네 사람들과 아들이 나 보고 나무에 미친 할머니라고 한다”며 “식목일이 되면 다들 열심히 나무를 심지만 정작 심어놓고는 관리를 안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백송이 제초제에 쓰러졌을 당시 맨손으로 땅을 파헤치다가 독극물 후유증에 걸리기도 했던 홍씨는 “백송에게서 받은 훈장이라고 생각한다”며 갈라진 손을 매만졌다.
후계목 4그루
백송이 죽기전 씨앗을 받아가 묘목을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기증으로 벌목된 백송 주변에 심어져 있다.
각각 관리 주체가 다르다. - 문화재청, 서울시, 종로구, 홍기옥 할머니
이 주변에 김정희 집터-월성위궁
창의궁-영조(1694~1724~1776, 54년간 재위)가 연잉군 시절 살던 집
월성위궁-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그 사위 김한신이 살던 집
창의궁 주변에 있었던 집
김한신(1720~1758.1.2)과 화순옹주(1720~1758.1.17)의 사랑이야기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한 화순옹주
딸을 걱정하던 영조
15일만에 남편의 뒤를 따르다
관련 자료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91권, 영조 34년(1758) 음력 1월 8일 을미 6번째기사 /
화순 옹주방에 거둥하다임금이 화순 옹주방(和順翁主房)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화순 옹주는 월성위(月城尉)가 죽은 뒤로부터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음식을 권하지 않고 좌시하면, 어찌 아비된 도리라 하겠는가?" 하고, 곧 거둥하였다.
영조실록 91권, 영조 34년 1월 14일 신축 2번째기사 1758년 청 건륭(乾隆) 23년
임금이 시사복(視事服)을 갖추고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친히 향(香)을 전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방금 들으니,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병이 가망이 없다고 한다. 먹지 아니한 지가 지금 10여 일에 이르렀는데, 그의 절개는 곧다[貞]고 이를 만하나, 나로 하여금 장차 비참한 지경을 보게 할 것이니, 어떻게 마음을 잡겠는가? 오늘 저녁은 보름 제사[望奠]이니, 비록 좋지 못한 소식이 있을지라도,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통기하지 마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둘 사이에 자녀가 없어,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열녀 화순옹주 홍문 - 충청남도 예산군에 소재
이들의 4대손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
2003년 7월 2일 경향신문 연재 글에서
글 : 박상진 경복대 교수 sjpark@knu.ac.kr
[나무이야기] 천연기념물 106호 김정희 백송
조선 순조 9년(1809년) 늦가을, 24살 청년 김정희는 해외유학(베이징)의 기회를 얻는다. 아버지 김노경이 동짓달에 인사차 파견하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가는 길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 때 외교사절의 자제들은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이렇게 아버지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따라가서 적당히 놀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여 훗날 그의 글씨가 원숙해지는 바탕을 마련했다.
베이징서 솔방울 가져와 심어
베이징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나다니는 길목에는 중국의 북부와 서부가 원산지인 백송이 눈에 흔히 띄었다. 흰 얼룩무늬 껍질을 가진 특별한 소나무, 백송을 보고 남달리 깊은 애정을 가졌으리라 짐작한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 백송을 가까이서 어루만지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 연유부터 잠깐 알아보자.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사위가 되면서 지금의 통의동 정부종합청사 뒤편에 있던 ‘월성위궁’이란 대저택을 하사받는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곳으로, 정원 한 구석에는 숙종 때 심어진 백송 한 그루가 이미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으로, 1990년 7월 돌풍에 맥없이 넘어져 버릴 때까지 살아 있었다. 죽고 난 다음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조사해본 결과 1690년쯤에 심은 나무였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추사의 어린시절인 18세기 말쯤에는 100살 가까운 한창 나이로 싱싱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때다.
그는 월성위궁에 있는 동안, 열 살 전후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졸지에 대종가의 종손이 된다. 어린 나이에 받은 엄청난 충격은 백송을 어루만지면서 달랬을 것이다. 이렇게 백송과 깊은 인연을 맺은 추사가 이국 땅 베이징에서 다시 백송과 만났을 때는, 남다른 예술가적 감상으로 어린 시절과 고향생각을 일깨웠을 듯하다.
내면의 대화 나누기 안성맞춤베이징에서의 두 달 남짓한 생활을 접고 1810년 2월초 귀국길에 오른다. 수집한 수많은 서화와 함께 그가 빠뜨릴 수 없는 것중 하나는 백송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튼실하게 생긴 나무 하나를 통째 가져오고 싶었겠지만 옮겨심기가 안 되는 나무에다 한달 넘게 걸리는 귀국길이니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다. 솔방울 몇 개를 골라 귀국 짐짝 속에 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월 중순 어느 날 예산의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영의정을 지낸 고조할아버지 김흥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가져온 백송을 여기에 심는다. 땅속에서도 백송은 까다롭다. 금세 싹을 틔우지 않고 한해 쉬면서 땅기운이 어떤지 알아본다. 다음해인 1811년, 조선 땅의 속사정을 파악한 ‘추사의 수입백송’은 비로소 땅을 비집고 올라온다. 그러나 묘소 주변이 황토로 된 메마른 땅이라 크게 자란 것은 몇 그루 되지 않았다. 그나마 세월이 지나면서 묘소 앞 오른쪽으로 약간 비켜선 자리에, 달랑 한 그루만이 살아남아 천연기념물이라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추사 백송의 나이는 올해로 192살. 나무 높이 15m, 지름 25㎝로 키만 크고 비쩍 말라있다. 모양새는 손이 귀한 추사 집안이 번성하여 삼정승이 나오기를 기원하는 듯, 1980년대까지도 밑동치부터 셋으로 갈려져 있었으나 그 뒤 나머지 둘은 죽어버렸다. 아쉬움이라면 죽은 줄기를 잘라낸 부분에다 백송 색깔을 흉내낸답시고, 흰 횟반을 뒤집어씌워 놓아 본래 나무가 가진 단아한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찾아가는 길은 간단하다. 당진, 예산으로 이어지는 32번 국도를 달리다 합덕에서 예산 쪽으로 9㎞쯤 내려가면 ‘추사고택 입구’라는 커다란 간판을 볼 수 있다. 우회전하여 잠시면 고택에 다다를 수 있고, 백송은 주차장을 그냥 지나쳐 약 600m쯤에서 만날 수 있다. 고택은 붐벼도 추사와 애환을 살아서 함께해온 이 백송을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아 언제나 조용하다. 추사와 마음속으로부터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오히려 여기가 제격이다. /경북대 교수 sjpark@knu.ac.kr
▲문화재이름:예산의 백송
▲천연기념물 106호 1962년 12월 3일 지정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73의 28
1908년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짓기 위해 월성위궁을 폐궁할 떼 베어질 뻔 했다는 이야기.. 확인필요..
대림미술관
1997년 대전에서 개관
2002년 서울에서 개관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 한국에서는 최초의 사진전문미술관
아름지기 사옥
재단 이사장 : 신연균 -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부인
운영위원회 임원 : 홍라히 리움 미술관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장녀 정유경
이 건물이 이 자리에 들어서기까지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가 삼청동 145-20의 삼청장을 매입하면서
대체부지로 청운동 89-149와 통의동 35-32, 통의동 35-33을 주며 맞교환
이 과정에서 홍석현 회장은 시세차익으로 50억 이상 이익을 본 것으로 보여
과연 어떤 뒷거래가 있었을까?
아름지기 건물을 지으면서 지하층까지 세웠는데, 역사유적 발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어. 창의궁터 인데..
삼청장과 친일파
조선시대 최고부자 민영휘의 막내아들 민규식이 원래 삼청장의 소유자
해방이후 민규식은 김규식에게 이 건물 삼청장을 사용하게 함
김규식은 한국전쟁중 사망ㅡ 다시 민규식의 소유로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 민영휘 후손 명의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면서 삼청장도 국가 소유로ㅗ
2009년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이를 공매하였고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낙찰받음
홍석현의 집안
홍진기 : 일제강점기 친일 판사,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홍석현 사장의 부친
해방이후 법무부 장관
조봉암 사형 명령에 서명
1960년 4.19 시위자에 대한 발포명령자
사형선고 받았다가 석방
이병철과 사동관계이후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의 장인 김신석 : 총독부 충추원 참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조선의 부형들은 어린 딸을 여자 정신대로 안심하고 보내라"고 기고했다고..
메밀꽃 필 무렵(식당)
영추문(경복궁)
동쪽은 봄, 서쪽은 여름이어라
이 문을 통해 주로 궐내각사 근무자들이 출입했다.
승정원, 내반원, 약방, 홍문관, 규장각 근무자 등
옛 전철이 지나던 길이기도 하여라.
1923년 경복궁 내에서, 조선부업품공진회 개최
영추문 앞까지 전차 개통 계획
선로 공사위해 서십자각 철거
1926년 4월 25일 순종 대조전에서 승하
1926년 4월 27일 영추문 문루와 담당 붕괴
조선물산 공진회 등을 개최하기 위해 자재들을 운반하면서
누적된 진동과 피로로 무너진 것으로 추정
무너진채로 있다가 1975년에야 복원,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
본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50미터아래에 복원했다고.... 확인 필요
1975년 국회의사당 준공시 해태제과에서 기증한 해치상 아래에는 해태주조에서 생산한 노블와인 36병씩 72병이 묻었다고 한다.
해태 눈깔이라는 표현의 유래
정의를 세우기 위해 궁궐 앞에 세웠으나 탐관오리가 들끓는 현실을 비꼰 말.
현재 우리 사법부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평..
통의동 한옥마을
일부 소개글을 보면, 서촌한옥마을을 그 일부에 해당하는
통의동 한옥마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구분이 필요하다. 통의동 한옥마을에서 한옥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말하는 서촌 한옥 마을에는 약 700채정도의 한옥이 있다고 한다.
전통한옥과는 다른 개량된 한옥
창성동 자교교회
배화학당 종교교회와 같은 뿌리
1912년 창성동에 교회 건립
통의동 보안여관
1930년대 문을 열다.
해방이후 시인 소설가 등이 장기투숙하다.
김동리(1913~1995) - 1934년 조선일보 통해 등단
서정주(1915~2000) - 1936년 동아일보 통해 등단
재개발 등으로 철거될 위기를 맞이하다
2004년 여관 영업 종료
13개의 객실
.
예술가들이 건물을 지켜내다.
2007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로운 시작
2010년부터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정주
관악구 남현동 1071-11. 봉산산방. 서정주의 집
1969년 직접 지은 집.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머문 곳
2003년 관악구에서 매입
2011년부터 서정주기념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
2015년 서울시미래유산으로 지정
... 건축학적 가치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서정주의 친일행적
'마츠이 오장 송가' : 카미카제 자살특공대로 사망한 조선청년의 죽음을 찬양한 시
강제징용당하지 않기 위해, 즉 살기 위해 썼다고 자술....
1987년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평화의댐 건설을 찬야하는 시
22살 작가 서정주가 이곳에 짐을 풀고 투숙,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을 만나 문학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2호로 종간.
생명파의 미적 이미지를 남긴 동인지로 평가
부락은 일본어
: 불가촉천민 마을을 뜻하는 단어
왜 이름이 보안 여관일까?
반대편 경복궁 동쪽에는 보안사가 있었는데.. 관계는 아직도 불명
군사독재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요 고객
특히 경호원 가족들이 머물며 면회하던 곳
일명 청와대 기숙사
2014년 7월 22일 오마이뉴스 에서
80년도 더 된 여관, 이름 한번 묘하네
서촌여행2 백운동천길에서 만난 서촌의 거장들
옥류동천과 청풍계천이 서촌(서울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지류(支流)라면 백운동천과 대은암천은 주류(主流)다. 전자는 남북을 나누고 후자는 동서를 가른다. 백운동천과 대은암천 모두 복개되어 자하문길과 창의문길이 되었다. 그나마 겸재가 남긴 그림 <창의문>으로 물길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그림속 물줄기를 상상하면서 좇아야 하는 '상상의 길'이 돼 버렸다.
이 물길에 기대어 이룬 동이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통인동, 통의동, 적선동이다. 서촌의 주류답게 걸출한 대가들이 이곳에서 나거나 성장했다. 겸재, 송강이 청운동에서 태어났고 안동 김씨 중에 장동 김씨로 따로 불릴 만큼 명문대가를 이룬 김상헌 집터가 궁정동에 있다.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터가 통의동에, 추사가 성장한 월성위궁터가 적선동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서정주와 이중섭 등 여러 문인과 화가들이 활동했던 보안여관이 통의동에 있다.
특히 겸재, 송강, 추사는 과거의 형식과 관념,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양식,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문예의 경지를 구축한 우리나라 문예사(文藝史)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복지(福地)와는 다른 차원의 기운, 문기(文氣)와 예기(藝氣)가 왕성하게 흐르는 곳이다.
운이 과하면 넘치는 법, 서정주는 친일행위로 후대에 욕을 먹었고 송강은 기축옥사 책임자로 역사에 오점을 남겼으며 장동 김씨는 19세기 세도정치로 명성에 먹칠을 하였다.
백악산 봉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내려앉고
'상상의 길'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시작한다. 백운동천과 대은암천이 시작되는 곳이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청운동 언덕배기에 있는 윤동주문학관. 윤동주가 인왕산 아랫동네, 누상동에서 하숙한 인연으로 여기에 문학관을 세운 것이다.
하얀색 문학관은 시인의 맑은 영혼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선하면서 옹골진 눈매, 어디 한 군데 악의라고는 없는 시인의 얼굴을 나타낸 것인가? 맞은편 뽀대나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시인의 언덕은 문학관 옆 계단 길로 올라간다. 언덕은 등기부등본에는 등재돼지 않은 시인의 영혼이 소유한 땅이다.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다.
문패 같은 표지석은 백악산을 옮겨다 놓은 듯 빼닮았다. 누구의 작품인지 일반조경업자의 안목은 아닌 것 같은데 언덕 앞에 서 있는 시비(詩碑)는 지나치게 커서 눈에 거슬린다. 언덕아래에서 태어나 뒷동산처럼 드나들었던 겸재가 지금 이 시비를 보았다면 틀림없이 시비(是非)를 걸었을 것이다.
송강 정철, 서촌에서 호사를 누리고
청운초등학교 주변 어딘가가 정철이 태어난 곳이라 하는데 그를 알리는 표짓돌, 기념비와 가사비 등이 학교의 담을 이루고 있다. 우리말로 우리정서를 찾으려 했던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은 문인으로서 대접 받을 만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문 앞에 세워진 '송강정철작품비 안내' 마지막에 "송강께서 태어나신 유서 깊은 이곳에 그 분의 투철한 충효사상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공복정신을 기리고 시가문학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그 대표작품을 수록한 시비를 세워 만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고 적혀있다.
적어도 정치가로서 정철은 충효사상, 선공후사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조선 최대의 정치 참극으로 기록되는 기축옥사의 최고 책임자로, 천 명의 생명을 죽게 한 것이 충효사상과 선공후사로 여겨진다면 충효사상과 선공후사는 몇 번이고 버려져야 할 사상이다.
한 학생이라도 읽지 않을 거라 생각되어 다행이지만, 교육목적이라면 차라리 곁에 있는 서울농학교학생의 절실한 소망을 담은 담장벽화를 한 번이라도 구경시키는 것이 나을 듯싶다.
추사 집터의 안내 표지석은 잘못
통인시장 길 건너편에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터와 김정희 집터를 알리는 표짓돌이 나란히 있다. 두 돌이 나란히 서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영조와 추사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바, 추사 증조부(김한신)가 영조의 사위이며, 추사는 영조 외고손자다. 이런 인연으로 표지석에 "창의궁 터는 곧 추사 선생이 사시던 곳"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딸과 사위에게 월성위궁을 지어주었는데 추사는 어려서 이 집의 주인이 되었고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월성위궁은 창의궁 남쪽 어딘가로 알려지고 있다. 적선동에 월궁동, 월성위골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경복궁3번 출구 혹은 정부청사 뒤편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창의궁터가 김정희 집터라는 것은 잘못이다.
창의궁터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이 들어선 후 쪼개져 그 흔적은 알 길이 없다. 아랫동아리만 남은 백송(白松)이 쪼그라들고 옹색한 이 터를 지키며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예산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한 추사는 당대 서촌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의 자취는 그리 많지 않다. 당대의 문인들이 교류한 송석원의 바위에 '松石園(송석원)'이란 글씨를 남겼으나 친일파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과 함께 사라졌다.
옥계동천 한켠 박노수미술관 앞에 추사의 글씨를 전각한 '如意輪(여의륜)' 현판이 있고 수성동계곡에 대한 감회를 읊은 추사의 시 '수성동우중관폭(水聲洞雨中觀瀑)'이 전하여 그나마 우리를 위로해 준다.
보안여관, 이름 참 묘하네
백송의 미로 길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영추문. 경복궁 서문으로 청와대가 가까이 있어 검문이 심하다. 이런 분위기에 맞게 영추문 맞은편에 이름도 묘한 '보안여관' 건물이 있다.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하나 뼈대는 그대로다.
1930년대에 서정주가 이중섭과 교류했고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시인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낸 곳이다. 1960~70년대에는 청와대 공무원들과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보안여관의 이름은 어디서 온 걸까?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청와대 가까이에 있어 이름에서 제법 수상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보안여관'은 이 건물이 세워진 1930년대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명을 이어오다 근래에 공연, 전시, 퍼포먼스를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문기(文氣)와 예기(藝氣)가 왕성한 서촌의 일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촌의 상징적 건물이다. 건물 좌우에 달린 '보안여관'과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라는 간판이 '여관에서 예술까지'라는 이 건물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돈이 안 되면 파괴하고 정신마저 그 속에 묻어 버리는 세태에 반기라도 들 듯 타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자신의 존재, 더 나아가 서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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