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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아생전의 큰 악업(홍만표 검사)은 죽은후 영혼이 축복받지 못한다.
참다운 인생을 살아야 후손에게 좋은 이름을 남긴다.
2020.12.5일 이경용 올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삶인가? 복을 받을 삶인가?
자기 스스로 확고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실천해나가며 살아가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큰 악행은 절대 안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에게
가슴 아프게 해선 안 되며 베푸는 마음으로 선행하며 살아야 한다.
악업(악한 행위)을 많이 쌓으면 죽을 때, 시신에서 유체이탈된 영혼이 갖고 가는 것이다.
그게 생전의 악업으로 죽은후에 영혼에게 붙을 인생성적표이다.
홍만표 변호사가 검사때 극악무도하게 범죄조작한 고문범죄(강제자백의 변기통 물고문)가
인생 최악의 살아생전의 큰 악업인 것이다.
홍만표씨! 종교는 왜 믿는가? 죽어서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이다.
극악한 악행을 저질렀으면 이경용에게 용서를 구하고 피해배상해야 한다.
영혼은 없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혼을 믿는다면 다른 영혼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원한을 살, 살아생전에 큰 악업을 저지르면 안된다.
살아생전에 큰 악업에 대해 사죄해야 죽은 후에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큰 악행(반인륜 범죄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 처자식들이 창피(자자손손)해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다.
아버지의 이름을 떳떳이 밝힐 수 없고 숨겨야 한다.
가정에서는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인생철학을 가진 65세의 나에게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굴곡이 많은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세상에는 1. 선행을 하는 사람, 2. 선행을 안하는 사람, 3. 선행을 못하게 하거나, 악행을 하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정에선 1. 효도를 행하는 사람, 2. 효도를 안하는 사람, 3. 효도를 못하게 하거나 불효를 저지르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사회적 유명인사, 고위공직자 등의 사회 상류층들은 선행, 덕행, 효도를 실천하면 한층 더 존경을 받게 된다. 역으로 그 높은 위치에서 악행, 탐욕, 불효가 드러나면 지탄을 더 받게 된다.
학교를 못 다닌 어린 14살부터 7년간을 식당, 공장, 자전거 배달로 중고등 시절을 전부 보냈지만, 어떤 누구에게나 마음 아프게 나쁜 일을 절대로 하지 말며 살자하였다.
뼈저린 가난을 겪었기에 가난한 형제, 친구, 이웃들에게 베풀며 살자는 인생관도 갖게 되었다.
21살때인 1976.10월에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다. 31살 때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공무원하면서 식당도 겸업하였다.
32살 때, 식당 매매 계약의 불이행 위약금 400만원을 법적으로는 돌려줄 필요도 없지만 그냥 전부 주었다. 매수자가 150만원을 준다 해도 안 받았다. 없는 사람에게 이익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20년의 공직 생활 중에, 어떤 누구에게도 가슴 아프게 해본 적이 없었고, 인기 부서와 진급하려고 한번도 인사청탁을 하지 않았고, 국세청 전국 전화 세무상담 등의 비인기 부서에 근무하였다.
이런 인생철학을 가진 나에게 41살때인, 1996.11.5일날 홍만표 검사같은 희대의 악인을 만나 인생불행(세금환급 5억과 관련된 부당한 청탁의 뇌물 수수 혐의의 긴급구속장으로 서울지검 특수2부의 수사실로 끌고가서 악랄한 변기통 물고문과 허위자백의 베껴쓰기를 시켜 누명을 씌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수사관 2명(유봉수. 김말관)이 가정집에 쳐들어와서, 노모의 방까지 수색하여, 겁에 질린 노모께 어머님 저 죄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자,
30대의 나이어린 검찰 수사관 8급 유봉수가 “죄 지은 새끼가 거짓말” 하고 있어. 라고 폭언을 하였다. 압수 수색영장도 없이 한보따리 쌌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가장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양팔을 잡아 끌고 갔다. 천륜을 짓밟았다.
홍만표 검사가 빨리 불지(자백) 않는다고, 3살 더 먹은 이경용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서, 수사관한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팬티까지 벗은 고문 현장에 와서 옷을 입으라 했고, 다시 홍검사 방에 불려가서 빨리 자백을 안한다고, 사정없이 뺨을 때리고서 수사관한테 조사를 지시한 홍만표 검사였다.
불지 않자 변기통 물고문과 그래도 자백하지 않자 미리 써놓은대로 그대로 베껴쓰지 않으면 그냥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후일 법정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고 일단 그대로 베껴 써주자 했다.
이경용이가 변호사한테 고문을 고자질했다고, 홍만표 검사는 모든 내용에 대한 경위서를 쓰라고 지시한 뒤에,
교도관이 수갑과 포승줄을 풀어주어서 경위서를 쓸 때와 경위서를 읽으면서 온갖 쌍욕(이새끼, 저새끼, 야비한 놈, 파렴치한 놈, 비열한 놈 등)을퍼부었다.
경위서를 쓴 다음날, 홍검사는 100%태도가 돌변하여 경위서를 잘썼다고 칭찬해주었고,경위서를 법정에 제출하면 무죄로 직장에 복귀할 수 있다고 해놓고서는 “그 경위서 증거를 몰래 없애버렸고, 대신에 허위 법정 증언자”를 내세웠다.
무죄 증거를 없애버리고, 허위증언자를 내세운 홍만표 검사같은 이런 희대의 사기꾼은 없었을 것이다. 정말, 사람이 아닌 악마였다.
[이런 모든 내용이 청와대, 검찰에 이미 제출되었음]
대통령을 지내셨던 분(김대중)과 그 아들 고 김홍일(고문으로 불구가 됨)씨...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고 김근태씨 등...고문을 당한 사람이 창피한게 아니라, 고문한 사람(이근안 홍만표 등)의 이름이 창피하고 더러운 것이다.
세금 3억을 더 추징(부과 8억 및 환급5억 업무를 동시에 수행함)한 증거 등을 제시한 수없는 민원과 진정(청와대, 검찰, 국민권익위 등)을 제출해도썩은 검찰 권력 앞에서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서울지방국세청에서 세무조사하여 통보한 과세공문에 의한 지시내용대로 하급기관(종로세무서 직원 7급 이경용/실제 업무처리할 지역 담당자는 8급 김현수로 상급자의 간곡한 부탁으로 함께 처리해준 업무임//일을 잘한 것도 죄가 되어서, 남의 일을 도와주다가 범죄 날벼락을 맞아버림)에서
과세처분(세금부과 및 환급)하는, “부당한 청탁과 이권”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업무였다.
세금환급에만 “청탁 뇌물죄”를 만들어 범죄조작(고문 허위 자백)한 서울지검 특수2부 홍만표 검사였다.
개인소득을 법인소득으로 잘못 신고한 것을 세무조사하여 개인소득으로 바꿔 과세하라는 상급기관의 지시하달 공문이었다.
이런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도 대한민국의 썩은 검사들은 동문서답의 엉터리로 답변(공람종결)처리 해버렸다. 10년 가까이 수많은 민원, 진정을 접수처리하는 동안에 그 많은 검사들이 극악무도한 범죄조작(변기통 물고문)한 홍만표 검사의 사건내용을 직접 보고도, 양심있는 검사 1명을 볼 수가 없었다.
검사장(대검 기획조정부장)으로 초특급 출세를 한 홍만표검사는 전관예우 변호사로 1년에 약 100억씩 몇 년간 거액을 벌었는데, 전관 비리 범죄를 저질러 구속되어 2년의 감방살이를 하였다.
하위직 공무원 이경용한테는 환급관련 1천만원의 뇌물죄를 만들기 위해 변기통의 물고문까지 자행하였다. 정말 악인(홍만표는 변호사가 되어서, 전관예우로 수백억을 벌어들이면서, 과거에 1천만원 뇌물죄를 만들어 수사실적을 올린 일)답다.
최근(2020.11월)에 법무부장관(추미애)이 검찰총장(윤석열)을 판사 사찰 등의 직권 남용죄로 직무배제하자, 검사들이 공무원신분이건만 전국 각지에서 벌때처럼 반기를 들고 항명(직무배제 철회 주장)하고 있다.
국무총리(한명숙)를 지낸 분도 범죄조작하여 유죄를 만드는데, 이경용같은 하위직 7급 공무원쯤이야 수사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별 죄의식도 없이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저질렀다.
홍만표같은 악질 검사들 때문에 “죄없는 국민들”이 수십년을 고통받았건만 검사범죄를 수사할 공수처를 반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지켜볼 수 밖에...진보, 보수와 상관없이 공수처 설치를 찬성해야 한다.
조합 아파트에서 무주택 조합원인 서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악덕기업주를 고발해도 썩은 검찰, 썩은 검사 때문에 피해구제를 할 수가 없었다.
경기도 하남시에 지어진 무주택 서민조합원들의 피해구제를 위해서 청와대, 검찰에 수많은 진정, 민원을 제출했고 인터넷에 수많은 글을 올렸다. 하남경찰서, 강남경찰서,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여 조사도 받았다.
악덕기업주 편에 선, 제일 “썩어빠진 검찰” 때문에 단돈 한푼도 피해구제를 받을 수 없었다. 악덕기업주를 향해, 이경용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 해도 무대응이었다. 검찰이 봐주더라도 이경용이를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세우면, 악덕기업주의 위법 탈법이 드러나 법정 구속될 수도 있기때문이었다.
이경용이 아닌, 힘이 없는 조합원들에게는 가차없이 고소 고발해서 처벌(형사처벌과 재산 가압류 등)하니 무서워서이경용처럼 나서지를 않았다.
“하남시 대명 조합아파트 이야기”란 책 2권까지 만들 정도로 피해구제에 나섰지만 썩은 검찰은 약자 편이 아닌, 돈 많은 악덕기업주 편(전관예우 검사출신 변호사를 선임함)이었다.
검찰총장(윤석열)은 2020.12.1.일날, 전국 검찰공무원들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형사법 집행”을 통해 “국민의 검찰”이 되도록 다함께 노력하자고 해서, 개와 소도 웃을 거짓말을 하였다.
공정하고 평등한 형사법 집행을 부르짖으면서, 처음 들어보는 시골 영주(경북)의 촌 대학인 동양대 표창장(조국 법무부 장관의 딸)에 대하여
위조(이경용 같은 사람은 위조가 아님을 금방 알아버림) 등을 했다고 가정집, 대학교 등의 수십 군데를 수십 명의 검사, 수사관을 동원하여 샅샅이 압수수색하면서
크게 가치도 없고 사람들이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시골 영주의 동양대 대학의 표창장(서울대, 연고대생들에게 시골 영주에 가서, 봉사하고 표창장을 받으라하면 거의 안갈것임. 서울 근처의 2~3류 대학에 갈 것임)과 다르게
수십억, 수백억(홍만표 등)등의 수입을 챙긴 전관예우 검사출신 변호사들과 울산 고래고기 30억(경찰이 압수함)의 범죄를 저지른 업자들에게 돌려주어서 팔아쳐먹게 만들어준 검사와 관련 검사출신 변호사한테는
수십군데, 수십명의 검사와 수사관을 동원하기는커녕, 겉핥기 수사(경찰이 압수 수색도 못하게 함)로끝내버리거나, 검사범죄(고래고기 30억 건)를 내팽개치는 완전히 썩은 불공정한 검찰이었다.
무슨 놈의 국민만을 바라보는 국민의 검찰이다. 공정하고 평등한 형사법 집행을 한다고 강아지가 웃을 거짓말을 하는데도 그런 검사(윤석열 등)들을 지지하고, 공수처를 반대하는 국민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두분 대통령(노무현, 이명박)한테 투표했던 이경용은 중도주의자이며, 특히 검사범죄를 수사할 공수처를 찬성 설치하는 검찰개혁은 진보, 보수를 떠나야 한다.
검사가 되면 조직에 충성(전관예우로 돈 벌기 위함)하고, 힘이 없는 국민을 먹잇거리 수사대상이 되기 싶다. 95% 이상의 검사가 공수처를 반대하는 이유이다.
검사들이 검찰개혁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100% 거짓말이다. 법으로 개혁해야 한다. 완전히 100% 검찰 개혁할 최고의 방안을 제시한다.
이런 썩은 검찰은 외국처럼 검사의 수사권을 100% 아예 없애버리고, 경찰 수사를 철저히 수사지휘하는 감독권과 기소권만을 부여하면 된다. 간단한 방법이다.
이런 최고의 검찰 개혁 입법을 정치권의 국회의원들이 썩어서, 특히 검사출신 변호사들과 현직의 검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할 것이다. 경제 사기 피해를 크게 당해봐야 뼈저리게 알게 된다.
이런 법률이 시행되면, 전관예우의 수십억, 수백억(홍만표 이인규 등)의 검사출신 변호사의 범죄비리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
현재까지의 검찰은 “선택적 정의, 선택적 수사”를 해와서, 조국 사건처럼 미운 인간에게는 나중에 무죄판결(조국딸 표창장 위조)이 나올지언정, 압수수색영장과 구속영장(후에 무죄판결 나와도 일단 구속되면, 나쁜 놈으로 매도됨: 검찰이 노리는 수법임)이 나오게끔 무지하게 많은 수사자료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쁜 인간에게는 공소시효(검사출신 김학의 성범죄 사건)가 지나도록 수사방치해버리거나, 대충 수사해서 압수수색 영장도 안나오게끔 수사해버린다.
별장 동영상에 나온 김학의를 보고도 수사검사만 김학의가 아니란다. 검찰총장 윤석열의 장모와 처의 비리는 내팽개치듯 하다가, 지금 흉내만 내고 있다. 유튜뷰에 나온 것을 보니, 그 죄질이 너무 나쁘다.
공수처가 있었으면 “홍만표 검사가 누명을 씌웠던 고문범죄”를 수사해서 처벌했을 것이다. 공수처가 없었고, 범죄 조직처럼, 검사범죄를 봐주니, 썩은 비리의 검사들이 활개치고, 초고속 승진하고, 변호사 되어서는 전관예우로 수백억을 번다.
검사로 재직 때에 선택적 수사로 재량껏 칼날을 휘두르고, 옷 벗고 변호사가 되어서는 전관예우로 돈을 왕창 벌고 싶어서 공수처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공수처가 없으면, 경제 범죄의 사기꾼을 검사출신의 변호사들과 검사들이 봐주면피해를 당한 국민들은 구제받을 수가 없게 된다.
검사들은 옛날, 중앙정보부. 군 기무사 등의 권력기관에는 벌벌 떨면서도 청와대 권력에는 아부하고 시녀노릇을 해왔다. 이제는 검찰이 대통령보다 더 권력기관이어서 청와대도 마구 압수수색한다. 압수수색할 것 있으면 해야 한다.
검찰!! 제발!! 미운 놈, 이쁜 놈(특히 검사관련 범죄), 가리지 말고 똑같이 압수수색하고 공평하게 수사하라는 것이다.
20년 근무한 공직에서 나와서, 1997년도에 공인중개사 시험을 2달 공부해서 합격하여 부동산 중개업, 상가와 주택 건축 등을 하면서 자서전 3권, 부동산 책 2권 등도 만들었다.
65세(2020.11월)의 지금, 파란만장한 인생역경을 벗어나 96세의 노모님,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 사위, 아들, 손자, 손녀와 행복하게 살고 있다.
공직자 중에는 출세와 탐욕을 저지르는 인간쓰레기 이하의 홍만표 검사같은 악인들이 있지만, 사회에서는 경제적 기반을 잡아 잘 살라고 크게 도와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2500만원의 중개수수료 사기, 험담 등의 배신”도 당하였다.
친구 장사장의 딸이 말하길 “밤에 자다가 깼는데, 아저씨(이경용)가 잘 살게 많이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 하시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딸로서 아저씨께 옷이라도 사주고 싶다고 하였다.
말이라도 고맙다고 사양하였으나, 친구 딸이 너무나 간곡하게 나와서 좋은 옷(상의) 1개를 받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뒤에, 공동투자자에게 중개수수료 4,000만원을 사기(이경용이가 돌려주라고 해도 안줌)를 치더니,
잘살게 해준 이경용에게도 중개수수료 2,500만원의 사기를 쳐먹었다. 고소장을 써놓고도 딸을 봐서 고소하지 않았다. 정말 악인은 어쩔 수 없었다.
2003년 경에, 도농동 토지 1,000평을 매수해서 투자한 금액이 6억(땅값 5억4천만원+창고 건축비)이 넘는데, 친구 장사장한테는 10%도 안되는 5천만원의 투자금을 받고서는 이익금의 50%를 주었다.
장현 땅(건축비도 잘 안냄, 소액 투자로 2008년도에 3억 이상의 이익을 가져감)에서 3억이 넘는 큰 이익을 주었고, 투자 자문 등으로 무지하게 도와주었으나 그런 악인인줄을 몰랐을 뿐이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큰 악업(악한 행위)을 많이 쌓으면 죽을 때, 갖고 가는 것이다. 그게 생전의 악업으로 죽은 뒤에 영혼에게 붙을 인생 성적표이다.
홍만표 같은 극악한 악인도 마찬가지이다.
10년 넘게 이경용 부부와 정말 친하게 지내었던, 식당 정여사가 이경용에게 소송 당한 글을 보여주며, 너무나 크게 걱정하여서 눈에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잠도 못자고 소송글(2012년)을 써주어, 2017.3월에 승소금액 5천만원을 찾게되자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다. 돈에 환장한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그 돈 때문에 배신한 정여사 앞으로 다시는 이경용부부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훗날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문자만 보냈다.
나의 검정고시 친구 중엔 동국대 나와서 지방경찰청장의 고위직까지 지냈다. 내 바로 윗형도 고위공직자로 퇴직하였다. 나는 대학입학 시험 한번을 본 적이 없지만, 고위 공직에 오른 친구와 형을 마음 속으로 진정하게 축하하였다.
93세의 할머니가 요양원에 보내진 뒤, 2달 뒤에 사망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할머니는 같이 살던 다섯째 아들이 암으로 사망하자, 큰아들은 대학 교수였고, 셋째와 넷째 아들은 의사임에도 함께 모시고 살 자식과 며느리가 없어서,
그 잘난 자식(교수. 의사)들이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는데, 정신이 말짱한 할머니는 자식들한테 버려진 기분을 안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2달만에 돌아가셨다한다. 자식들은 창피해서 장례식을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남몰래 치뤘다 한다.
서울의 명문대학과 외국유학까지 보낸 자식들을 잘 키운 대단한 집안이었는데, 그 집의 둘째아들이 친구라고 한 부동산 최사장께서 나에게 알려준 이야기였다.
자식 낳아서 판검사, 의사, 국회의원, 고위공직자가 되었다고 무조건 좋아하면 안된다. 훗날 늙은 부모에게 불효, 악행을 저지르면 말짱 도루묵이다.
요양원은 80~90%가 치매환자이거나, 전혀 걷지 못하는 누워지내는 와상환자이다. 요양원과 주간보호 시설에 보내더라도 환경, 시설 등의 등급(보건복지부 제공)을 자세히 알아보고서, 현장 시설을 직접 여러군데 찾아봐서 대조 및 상담해보고, 자식의 집과 가까운 곳에 모셔야 한다. 멀리 유배보내듯 하면 안된다.
요양원에는 의사, 간호사가 없어서 치료를 받을 수 없다. 되도록이면, 의사진찰이라도 받게끔 요양병원에 모셔야 한다.
자식 중에서 제일 못 배운 자식이, 부모와 함께 농사와 식당 등의 고생을 많이 한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말이 있다.
시골 읍내에서 정미소 공장이 부도가 나서 망하게 되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7남1녀의 다섯 번째인 넷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1969년부터 학교를 못다니고, 서울변두리의 상계동에서 4년 동안 어머님과 둘이서 식당을 하며 대가족을 먹여살려야 하였다.
스레트 지붕인 브럭크 구조의 초라한 월세 식당에는 수돗물이 없어, 밖에서 지하수 펌프물을 바께쓰로 길어날라 식당 부엌에 있는 대형 항아리에 매일 채워야 했고, 연탄(부엌+홀)을 매일 갈아주고서 연탄재를 버려야 했다.
설거지, 청소, 음식 배달을 하면서 주변에 학교 다니는 애들을 보면, 처량하고 슬픈 마음에 괴롭기도 하였다.
1970.11월 경, 식당 집을 나와 3일을 굶으며 3일 밤을 지붕 처마 밑에서, 이웃 쌀가게 창고의 가마니 속에서, 상계동 허허 들판의 볏집 속에서 떨며 잠을 잤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학교도 안보내주고 식당에서 밤늦게까지 죽어라 일만 하는 아들이 공동 화장실을 갔다 오니, 이놈이 어디를 쏘다니고 오냐는 아버님의 화난 꾸지람에 저녁밥도 안 먹고 집을 뛰쳐 나왔다.
3일을 배고픔과 밤 추위에 떨면서 자살까지 생각하며 눈물을 쏟던 어린 나를 생각하며 글을 쓰면 눈물이 흘러내린다.
너무 착해서 아무리 배고파도 훔쳐먹을지도 몰라, 배가 뒤 허리에 붙을 정도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님이 우시면서 반가이 맞아주셨고 아버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픈 과거이다.
아무리 밑바닥의 천한 일을 해도 배워야 했기에 당고개의 헌책방에 가서 5천 한자의 헌책을 50원을 주고 사서, 하루에 200자씩 25일 동안에 5천 한자를 전부 외워서 모르는 한자가 거의 없었다.
1972년도에 고입검정고시 시험을 앞두고, 식당일이 끝난 늦은 밤 10시가 넘어서 식당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공부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당장에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검정고시 공부를 못하게 하셨다. 더 심한 말씀도 하시면서 공부를 전혀 못하게 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도에 식당에서 일할 때, 바로 위의 형은 광주서중 2학년이었다. 광주 서중과 일고를 다니던 형의 학비. 하숙비와 초등학생 3명의 학교도 보내기 힘든데 너는 공부하지 말라 하였고,
형제 중에 공부를 제일 잘하는 자식 하나, 잘 되면 다른 형제들도 모두 잘 된다는 생각을 가지신 아버님이셨다. 차별하듯 공부 못하게 한 내용을 내 자식들이 보면 마음이 아플 내용이다.
검정고시 공부를 전혀 못하고, 시험을 보니 60점에서 1점 모자란 59점으로 낙방하였다. 제일 쉽다는 미술 필기시험이 점수가 제일 낮았고 창피해서 숨기고 살아야 하였다. 명문 중고를 다니던 형의 편지(부모님 은혜, 효도 언급)를 부모님 앞에서 읽어드리면 너무나 좋아하셨다.
아버님이 넷째아들에게 검정고시 공부를 못하게 하셨어도, 셋째형만 명문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잘되면 좋다고, 그런 마음으로 살았었다.
식당 장사가 너무 안되어, 1973년 봄부터 3년 동안, 매일 새벽에 일어나 막걸리 자전거 배달(식당, 술집, 구멍가게 등)을 하며 야간 전수학교를 다녔다.
1974.5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실때까지 매일 일당과 월급을 아버님께 갖다드렸다.
하루에 약 100통을 배달하면 1달에 약69,000원(1통 배달료 23원), 1년에 82만원의 큰돈으로 그당시에 상계3동의 이화주택 분양가격이 65만원이었다.
좋은 집은 약 80만원이었다. 그런 자전거 배달한 돈으로 형의 학교 뒷바라지와 동생들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야간 전수학교를 졸업한 검정고시 출신은 학교간판이 안좋아서 취직도 안되었다.
1976.5~6월 경에 대학도 못가고 미래도 없는 암담한 현실 앞에 술을 마구 마셔 친구 평원이 앞에서 난생 처음으로 오바이트하였고 만취상태에서 신세한탄하며 울었다. 친구가 방바닥의 오물을 치우고 많이 위로해주었다.
몇 달 뒤인 1976.10월에 치룰 국세청 5급을류(현 9급)시험 공고문을 보고서, 1달 동안 죽기살기로 공부하여 합격하였다. 몸무게가 10킬로(70→60) 빠져서 어지럽기까지 하였다.
해법수학 2권(공통수학+수학Ⅰ)을 7일 만에, 국사와 일반사회 2권을 5일 만에 마쳤다. 3과목 전부 100점이었다.
수학은 75년,76년도 예비고사 문제를 풀어보니 1문제를 실수하고 전부 맞을 실력을 가졌다. 나머지 시간은 전부 영어공부만 했다.
단어. 숙어. 문법 등을 공부 하는데 제일 많은 시간이 걸렸다. 5천 한자만 알고 있는 국어는 아예 공부를 안했다.
75,000명이 응시하여 1,500명을 뽑는 50대의 1의 시험에서 1차발령(약 100등 안에 듦/750대의 1안에 듦)까지 받았다. 돈 벌지 않고 1년만 공부에 매진하면 고연대에 합격할 자신감도 생겼으나, 대가족의 부양(외할머님. 어머님, 동생들 3명)때문에 꿈도 꾸지 말아야 하였다.
국세청 시험 응시원서 75,000명 중에서 1차 발령(200명 중에 약 100등 안에 듦)으로 100등 이내 실력이면, 동대. 건대. 시립대 등은 그냥 붙을 실력이다.
국세청 동료들 중에는 야간대학을 많이 다녔다.
건대 야간대학을 다니던 형은 나한테 돈이나 벌지 힘들게 야간대학을 가지 말라하여도 전혀 기분나쁘게 듣지 않았다.
검정고시 출신의 친한 내 친구들 중에는, 동대. 건대. 시립대 등을 나왔다. 초등학교 졸업장과 고졸 검정고시 합격증만 있어서, 내 윗형처럼 명문 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보다는 더욱더 야간대학이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내일신의 출세보다는 외할머님, 어머님, 동생들 3명의 가족 부양이 먼저였기에, 야간대학을 포기했다.
6년 전인 2014년 경에, 대학교에서 딸에게 외국유명대학으로 국비유학을 권유하였으나, 외국대학 박사학위 받는 것보다 아빠 입장에서는 결혼이 먼저이다고 하였다. 아빠 말대로 안가겠다 하여서 고맙다 하였다.
벌써 손자. 손녀를 낳았고 대학교 강사하면서 박사학위를 머지않아 받을 것이다. 높이 높이 출세보다는 인생살이 시기에 맞게 부모되어, 자식 낳고, 할아버지 할머니 되는 평범한 인생길이 좋다 하였다. 아빠 말을 들어준 딸이 고마울 뿐이다.
2019.1.1.일날 노모께서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져 엉덩이 고관절 뼈가 부러져 70일간 수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수술병원을 퇴원하자마자 요양원에 보내려해서 안된다고 했다. 일산 현대요양 병원에서 간병인을 고용하여 7개월간 다리 걷는 재활치료를 하였고 다섯째 동생이 매일 어머님 재활운동을 시켜주어 너무 고마웠다.
4년간 모셨던(2014.12월~2019.1.1.일) 형님 집을 떠나, 고관절 수술병원에서 퇴원하여 곧바로 요양원 보내는 것에 대하여 남편이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 하며, 남편이 남몰래 혼자 우는 것을 봐버린 아내였다.
시집와서 28년간 모셨던 아내가 다시 모시겠다 하여 다시 모신지 벌써 1년이 넘어간다. 토탈 30년을 모셔준 아내이다.
96세의 어머님의 팬티를 매일 갈아주고, 목욕. 머리염색을 해주고, 반찬(과일.고기 등)을 챙기고 이불과 팬티에 변이 있어도 말없이 치우고 빨래해준다.
이러니 옆에 무지 이쁜 천하 미인 양귀비가 있어도 돌로 본다.
모시고 살았던 외할머님은 90세일 때, 한 두세달 몸져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이제 96세의 어머님은 100세 넘게 살으실 것 같다. 행복케어주야간보호센타의 차량이 오전. 오후에 오면 내가 항시 배웅 나가야 한다.
혼자 못 다니신다. 아침 저녁으로 약(아침: 고혈압. 당뇨. 혈관. 치매예방약 저녁: 녹내장 안약. 이뇨 등)을 챙겨야 한다.
2달 마다 일반병원과 8년 넘게 녹내장 치료차 서울아산병원에 모시고 다닌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내처와 결혼하고 나서 28년을 모셨을 때도,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려고, 아침 저녁으로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님 갔다 왔습니다”.고 인사를 드렸다. 자식의 인사를 받으면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해서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늙은 부모를 당연한 마음으로 모셔야 한다. 모시기 싫으면 불만이 쌓이고, 자신과 가족의 삶이 피폐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요즘은 절대 안모시려 하고, 요양병원이나 돈이 없으면 요양원에 보내려 한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을 불효라 생각하면 안된다.
요양원에 안보내고, 집에 모실려는 것을 극구 반대하면 큰 불효이다. 96세 노인이 정신이 항상 좋을 수 없다. 누구나 나이 많으면 치매기는 조금 있다.
96세의 어머님과 아내 셋이서 자주로 고스톱(1점 300원)을 쳐드린다. 따로 공금을 만들어서 11,000원(5천원:1장, 1천원:5장, 동전500원: 1개, 동전 100원: 5개)씩 나누어주고 다 친뒤에 15,000원 넘는 돈은 따먹게 해주어야 재미가 더해진다.
나는 원래 고스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치매 예방 차원과 어머님을 즐겁게 해드려고 하는 것이다. 어머님이 너무 좋아하시고, 쓰리고도 하시고 쇼당도 안받고 따먹기도 하실 정도로 총기가 좋으시다. 그러나 스스로 팬티 등을 못 입으시고 약도 혼자 챙겨 못드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무조건 명문대학, 외국유학 보내려하고, 부자로 잘살게 만들어주려는 목표를 가진 부모들이 있다. 인성이 결여되면 앞장에서 보듯이 자식들이 교수. 의사가 되어도 늙은 힘없는 93세의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버린다.
노모가 무지하게 반대하고 싫어해도 보내버리면 정신이 말짱한 할머니는 버려진 기분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2달만에 돌아가셨다.
자식을 잘못 키운, 인성이 안되게 기른 죄이다. 후천적으로 부모의 의지로도 안되는 불효자도 있다. 그저 자식에게 무조건 잘되라고 키우면 훗날 늙어서 설움을 당하게 되어있다. 인성이 안된 사람 즉 베풀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여유가 있어도 늙은 부모에게 가난한 형제에게도 무지하게 인색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식들에게는 집도 사주고 아낌없이 준다. 어떤 사람들은 형편이 아주 좋으면서 얻어먹기만 하고, 누가 음식 값을 낸다고 하면 다른 메뉴음식을 주문 시켜먹으면서 돈도 안낸다.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없는 사람은 돈은 안낼 수 있고, 축부조금을 적게 낼 수 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형편이 좋으면서 축부조금도 적게 낸다. 없는 사람이 자기보다 적게 내거나 안내면 불만을 나타낸다. 50~60이 넘으면 그런 품성은 절대 안 고쳐진다.
자식을 키우면 먹여주고 학비주고 병원치료비를 아낌없이 대준다. 함께 사는 노모께서 직접 주지 않은 이상, 병원비, 약값, 옷값, 미용실 등의 일체 비용을 그냥 대주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다. 노모의 통장과 지갑을 항상 풍족하게 채워 드려야 한다.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
내가 살아가는데 너무 많은 돈을 바라지 않기에, 너무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기에 3년 전인 2017년도에 친구에게 과거에 빌려준 2억대의 큰돈과 기타 친구에게 빌려준 돈도 탕감시켜주었다.
없이 사는 친구에게 안 받아도 살 수 있기에 아내와 상의해서 탕감시켰다. 과거 수없는 거짓말 등...나쁜 처신만을 생각하면 탕감해 줄 수 없지만 용서와 아예 단념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어린 10대 시절에, 식당에서 일하고, 자전거 배달할 때 시골에서 돈 받으러 오면, 정말 싫었다. 안산 땅을 팔아 돈이 생기자 1992년경에 시골 빚을 이자 쳐서 전부 갚아드렸다. 어머님께서 발 뻗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맙다며 우셨다. 형제들과 상의없이 처리 했다. 내 인생에서 정말 잘한 일이다.
아내가 자식 1명을 더 낳자고 했으나 절대로 안된다고 하였다. 너무 많은 형제들 때문에 부양의 고통과 힘든 일이 너무 많아서였다.
어린 14살부터 받아온 고통, 슬픔 때문에 조금이라도 눈물을 흘리는 연속극은 아주 싫어한다. 7형제가 있건만 누구하나 노모를 제대로 모셔줄 사람이 없어서 착한 아내가 지극 정성으로 30년을 모셔줘 그저 죄인스럽고 고맙다.
어머님 나이 67세부터 89세까지 22년간을 수영장을 다니게 해준 아내이다. 과거 12년간(45세~57세)을 식당하셨던 노모의 발톱은 어떤 무좀약도 듣지 않을 정도로 악성인 만성 무좀균이 있어서
검게 변하고 퉁퉁해진 발톱 10개에 하루에 50번(발톱 1개당 5번씩)을 쑥뜸 치료를 1년1개월 동안, 매일 했더니, 검은 발톱이 없어지고 하얀 발톱이 나와 거의 나으셨다.
무좀 발톱의 뜸자리는 발톱의 모근이 생겨서 올라오는 자리 즉 발톱과 살 사이가 뜸자리이다. 이경용이 노모의 발톱을 나아드리기 위해서 깊이 연구해 찾아낸 뜸자리이다.
너무 부어있던 양 무릎도 수술해야 했으나, 4군데(뜸자리: 내슬안. 외슬안)에 하루에 5번씩 해주었더니 거의 완쾌하셨다.
부어 있는 무릎은 며칠동안 뜸치료하면 부은 것이 쏙 들어간다. 쑥뜸은 항염 작용과 새살이 나오는 효능이 있다. (가정의학 상식 차원에서 씀)
치매 예방 차원에서 노모의 머리 백회 혈자리에 매일 밤에 5번 쑥뜸을 해준다.
2008년도에 남양주시 장현 상가 4층 건물을 완공한 뒤에 건축업자에게 2천만원을 더 주었다. 공사계약금 외에 돈을 더 주는 건축주는 평생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며, 절대로 안 받겠다고 했으나 강권하여 드렸다. 건축업자가 정성들여 튼튼하게 잘 지어준 답례로, 내처와 상의해서 2천만원을 더 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길거리 등에서 누가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해도 죽든지 말든지 모른척 해버린다.
1. 내 나이 21살 때, 친한 친구의 눈이 밤탱이 되도록 폭행했던 동네 건달을 잡아서 태능 경찰서에 집어넣었다.
2. 내 나이 21살 때, 어머님이 운영하시던 식당 안에서 어떤 사람이 도마 위에 손을 올려놓고서 손등에 식칼을 그어 피를 질질 흘리게 하는 망나니짓을 하여,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님이 부들부들 떨며 무서워하셨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사람의 안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쳐버려서 그냥 그 자리에 쭉 뻗게 만들어 버렸고, 한 참 뒤에 깨어 나길래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무리 칼을 들고 행패를 부려도 조용히 비겁하게 참을 수 없었던 20대 초반의 일로, 65세의 지금은 절대 못할 것 같다.
3. 24살 군대 상병일때는 폭력을 휘두른 고참 병장을 사정없이 패버려서, 2일간 영창 대기도 하였다.
4. 공무원이던 31살때는 중앙극장 앞 도로변에서 아가씨 배위에 올라타고서 폭행하던 청년의 윗옷을 잡고서 내던져 버렸다.
사람들이 구경만 할뿐, 누구하나 용기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어린날부터 잡초같이 밑바닥의 험한 인생을 살았던 이경용이가 나섰던 것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기쁨. 슬픔. 행복. 불행이 있게 마련이지만, 지난날 죄가 될 수 없는, 세금 3억을 더 추징(부과 8억 및 환급 5억을 동시에 집행)한 업무에 누명을 쓰고서 구속되어 94일간(96.11.5~97.2.6) 형벌의 고통을 당하였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하며 통곡하였던 일도 어언 23년이 지났다.어린 날에 겪었던 역경과 형벌의 불행을 딛고 지금(65세)은 노모. 처자식, 손주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겪은 억울한 누명(악인 홍만표 검사 건)관련의 글(청와대. 검찰. 국민권익위 제출)을 쓰지 않았다면, 나쁜 놈으로 매도되었을 것이다.
나의 인생 발자취를 보더라도 어떤 누구에게도 피해를 줄, 죄를 지을 성품이 아님을 글(상기의 수많은 삶의 내용들//다 수록할 수 없음)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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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위원회에 2008.12.6.일에 민원(제목: 검찰이 저지른 “고문수사. 범죄조작”에 대한 피해구제방안은 없는지?)을 접수하였더니,
2005년 12월 01일부터 2006년 11월 30일 사이에 신청접수된 사항에 한하여조사를 진행하여 안타깝게도 민원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문서 답변을 받았다.
정말, 무죄 및 명예회복과 손해배상을 받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검찰공화국을 원망해야지 누굴 원망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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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pd 수첩에서 방송녹화 촬영해 간 홍만표 검사가 저지른 고문사건
→ 2010.6.29일 이경용의 하남 아파트에 방송 탑차가 와서 약 50분간 녹화촬영
→ 10년이 넘은 사건으로 방송하게 되면 연락주겠다고 하였으나 연락없었음.
이런 범죄는 취재해야 하고, 꼭 처벌받아야 하는데....공소시효가 지나서...안타까움을 표시하였다. 국회의원님들의 이메일로 글을 수없이 보내고, 인터넷 블러그 카페 등에 실리다 보니, mbc 피디 수첩에서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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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2분, 누님, 외사촌누님(외삼촌 돌아가신 뒤, 함께 살음), 동생 3명을 잘살게 또는 집마련하게끔 수없이 도움을 줄때마다 한번도 반대해 본적이 없는 아내였다. 아파트 중도금을 못내는 형제사정을 듣고서는 남편에게 먼저 도와주자고 말해주는 착한 아내이다.
부모님께 지울 수 없는 큰 불효를 저지른 큰형의 과거를 용서했기에, 내자신은 노모와 동생3명을 데리고 상계동 보람아파트에서 전세를 살면서도 안산땅 팔아서 큰 돈이 들어오자 큰 형님 앞으로 청약통장 가입 돈까지 주었고, 평촌아파트를 분양당첨해서, 아파트 일부 잔금대출 2200만원을 제외한 계약금과 중도금 전체 금액을 아내가 대가없이 건설회사 앞으로 송금해주었다.
취등록세와 베란다 샷시비도 추가로 내주었다. 세상에 어떤 아내가 불평없이 노모도 모시지 않는 큰형님의 집을 사주는 큰돈을 그냥 주겠는가? 싶다.
집 없는 친구한테 청약통장 가입하라 권유하고, 아파트를 분양당첨된 뒤에는 분양대금(계약금+중도금 전액)의 큰돈을 이자없이 차용증도 안쓰고 그냥 빌려주기도 하였다. 아내가 직접 계약금과 중도금을 전부 송금해주었다. 친구 잘 살게 도와주는 것이 기쁘고 좋아서 했을 뿐이다.
친구들을 잘 살게 도와주었음에도 중개수수료 사기 2500만원을 당하였고, 또는 뒤로 험담하는 것을 당해보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도와준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임을 몰랐을 뿐이다.
서평원 친구는 도와준게 별로 없어도, 레미콘 업체를 소개해 준 것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큰도움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안산에 상가건물을 지은 뒤에, 건축주인 나는 공사대금을 더 주려하고, 건축업자인 서평원 친구는 안받으려고 하였다. 서평원이는 나의 최고의 진정한 친구이다.
내 아내가 시집 온지 34년(1986.6월~2020.12월)이 넘었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은행빚을 많이 지고 살아서 이제는 제발 은행 빚 없이 너무 많은 은행이자 좀 안내고 편안하게 살아봤으면 한다고 하소연한다. 앞으로 빨리 은행 빚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다.
모시고 살았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에, 외가 형님집에서 지내주는 제사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32년을 시어머님과 함께 참석해준 아내이다.
내 학력, 이력은 초등학교졸업장, 고졸검정고시 합격증, 공인중개사, 건축도장기능사가 전부이다. 내 자신의 영달을 포기하다보니, 누가 알아줄 간판(학력, 경력, 사회적 지위 등)하나 없이 살아왔는데,
내 처가 노모를 28년간 모셨고, 요양원에 안보내고 또다시 모시고 살겠다는데도 1년간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형제도 있다. 모셔주면 고마워 해야하고 지원을 해주어야 하건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형제 분란 와중에, 장현 상가 건물 4층이 거의 전부가 비어서, 2년간 세무신고한 적자금액이 2억이었고, 적자를 없앨 리모델링 내부 공사가 지연 및 중단(부도덕한 공사업자 때문임)되는 사고 처리와 겹쳐서, 형제 때문에 고통이 가중되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서 형제복이 없는 것도 내운명인가? 싶었다.
형제 때문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머리 정신 상태가 안 좋아 간단한 치매검사를 받아본 결과, 치매 전단계라 하여 정말, 충격이었다. 그 형제는 노모가 계신 내집에 추석, 설 명절에도 안왔다. 형이 안와도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런 형에게 앞으로 절대로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긁어 부스럼 생긴다고, 제발 96세 노모 모시고 평화롭게 조용히 살도록, 안 부딪히고 살게 해주었으면 하는 형제소원이다. 노모를 모시고, 스트레스 안받게 신경 안쓰게끔 편히 살게 도와주는 것도 힘든가?
형제 때문에 생긴, 치매 전 단계 증상을 받은 후유증으로 머리상태(금방 잊어버리고, 방금 일도 생각이 잘 안남)가 너무 안좋아졌다.
스트레스로 간수치가 너무 안좋아졌고, 위와 장까지 나빠져 재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제발! 안부딪히고 살았으면 한다. 내 건강을 위해서이다.
서정주 시인은 나의 애비는 종이었다고 천한 신분을 스스로 고백하였다.형제 많은 다른 집안들도 형제불화, 속썩이는 경우가 많은 세상이다.
노모께선 신부님이 강론하실 때,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좋으신 말씀이다. 조선 팔도에 우리 넷째 아들처럼 형제 도와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신다.
노모께서 “수술병원, 요양병원”에 있을 때, 요양원 문제로 형제불화를 겪어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내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사는 현실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노모를집에 모셔주니, 형제들도 요양원 등에 문병을 안가고 마음 편하게 지낼 것이다.
깊은 상처를 받아버린 노모와 동생부부에게 진정하게 용서를 구하는 길은 동생부부처럼 노모를 진짜 모실 수 있는, 진짜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실천도 못하거든 조용히 자숙(또 다시 상처 안받게)하고, 조용히 선행하며 사는 것이다. 어떤 무엇도 바라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살게 해주었으면 한다.
너무나 큰 정신적 고통을 당하다보니 공수래 공수거 인생이며, 삶이란 허망하고 인생회의가 들기도 한다. 특히 아내한테 실망주지 말고, 앞만 바라보고 즐거이 살아야 한다.
힘든 택배일을 하는 다섯째 동생은 노모를 모시는 넷째 형님과 형수님이 고맙다면서 맛있는 것을 사드시라고 작지 않은 돈(1달 택배 월급의 반 넘는 금액)을 주었고,
식당을 하는 막내동생은 어려울텐데도 몇 년 전에 소나타 하이브리드(3천만원)를 그냥 사주었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고 사양하니, 형한테 많이 받기만 하였는데, 왜 안받으시냐?고 크게 화를 내어 고맙게 받아야 하였다.
동생들의 성의가 그저 고마웠다.
친 누나가 길가에 앉아 노점 좌판을 하였을 때,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명절날에 누나를 만나면 몇번이나, 동생이 도와주어 애들을 학교보내며 살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한다. 형제들 중에, 제일 적게 도와주었고, 어린 날에 한집에 함께 살았던 외사촌 누나보다 덜 도와주어서 항상 미안하다.
이런 불쌍한 누나(어려서 풍을 맞아 머리가 안좋아 똑똑치 못한 누나임)에게 노모께서 돈(용돈으로 모으신 돈임)을 주는 것을 싫어하는 형제도 있다.
형편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누나를 한번도 도와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안 도와 주는 것...효도를 안하는 것은 죄가 아니란다. 심성인걸...
군대를 제대한 1980년경에 친누나가 살던 시골 영암 집을 찾아가보니, 어린애들이 살아가는데 최악의 비참한 환경이었다. 딸만 많이 낳았다고 기저귀를 찬 막내 여자애를 미워하는 애비의 고의적인 잘못으로 아이가 죽은 비극을 알게 되었다.
비참한 환경에서 1명이라도 구제해 주기 위하여, 누나의 딸아이 1명을 해외입양시키려고 홀트아동 복지회를 혼자 찾아다니면서 남몰래 울고 다닌 적이 있었다. 벌써 40년이 흘러간 아픈 과거이다.
나는 동생의 자식들 이름도 전부 작명해줄 정도로 조카들을 이뻐하고 사랑한다. 조카와 손자(돐을 앞둔)를 2번 보고도 전혀 이뻐하지 않는 형제를 보면, 정말로 이해가 안간다. 형제 사랑, 인간 사랑(남의 애도 이쁜데)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의 어머님과 형제들을 위해 엄청난 헌신을 해온 이경용의 아내이다.
남편이 누명을 쓰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이경용의 아내를 불러다 놓고서 몹쓸 말을 해서, 피눈물을 쏟게 한 사람(먼 친척)도 있다.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없으며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다 본인이 안고 갈 살아생전의 인생성적표이다.
고졸 검정고시 학력이 전부이지만 엑셀 기능도 필요한 것만 혼자 공부해서 터득했고 숫자를 입력하면 합계처리 되어서 부가세 신고, 소득세 신고할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도 쉽게 완성되게끔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건물을 새로 지으면 건축사가 만든 도면 보다 더 좋은 도면을 연구해서 만든다. 건축사와 시청에서 대지 분할이 안된다는 것도 국토부 유권해석을 받아서 대지 분할하였다. 좋은 대학간판만 믿고 연구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다가구 원룸 세입자들이 퇴실하면, 화장실 바닥의 더러운 하수구와 변기통 속에 손을 넣고 깨끗이 닦는다. 식당. 기와공장. 배달 등의 밑바닥의 힘든 일도 해봤기에 변기통에 달라붙은 변도 닦아내는 것이다.
건물 임대인이 아니라, 청소부같이 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막걸리 배달을 하던 3년 동안, 눈비가 와도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쉬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낮 12시까지 일해야, 하루 막걸리 100통을 술집 등에 배달할 수 있었다. 추석, 설 명절 전날에는 명절 휴일(3~4일)에 쓸, 평일의 3배 이상 즉 300통 이상을 배달하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컴컴한 밤까지 배달하다 보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3~4일 동안, 몸져누워 명절을 아프게 괴롭게 보냈고 야간 전수학교도 결석해야 했다.
밤이면 짐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갔는데, 대학도 가지 못할 미래도 희망도 없어서 달빛에 비친 자전거와 나의 그림자를 보면서 처량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상계동 당고개를 무거운 짐자전거를 3년간 끌고 오르다 보니 발가락이 전부 휘어져 있고 나이 50이 넘으니 척추수술해서 장애인이 되어아침마다 일어나면 다리가 저려서 금방 걷지를 못한다.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 노동을 하면 그 후유증이 늙어서 나타나 노년의 삶이 힘들어진다. 내 자신만 서러울 뿐이다.
대형 막걸리 통(20리터)을 10대의 키클 나이에 3년 동안, 손에 들고 배달하다보니 16살때의 키가 하나도 크지 않아서 형제 7명 중에 제일 작다.
배가 아파 설사를 하는 날에는 힘이 없어 탈진을 했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끝까지 배달해야 하였다. 1년에 2번 있는 추석과 설 명절의 새벽부터 컴컴한 밤까지의 배달은 정말 악몽처럼 힘들었다.
14살의 어린 나이부터 식당, 공장, 자전거 배달의 7년을 일했어도 정상적인 중고등학교를 못 보내준 부모님과 속썩이는 형제들한테 불평 불만하지 않았고 그저 가족이 잘 살기만을 바랐었다.
명문 중고를 다니는 형이 크게 성공하길 바랐고 동생들 3명을 뒷바라지 하는데 최선을 다해 왔었다. 홍만표 검사한테 1996년도에 불행을 당하기 전에는 고아원(나의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을 겪었기에)에, 아내와 함께 꽤 다니기도 하였다.
불쌍한 애를 입양해서 키우자고도 하였다. 노모를 모시고 사는 아내의 고생을 증폭시킬 철없는 생각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누명을 쓰고 불행을 겪고 나서는 고아원에 아예 발을 끊어버렸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심하고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노모,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두자식과 처를 생각하며 마음을 잡고 살아야 하였다. 지나간 역경과 불행의 날들은 과거의 일로 내 기억에서도 농도가 약해져 가며 잊혀져 갈 것이다.
앞으로 그저 행복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최상인 것이다.
아내 몰래 이글을 썼다. 제발 과거를 전부 잊고 앞만 바라보고 살아요 하는 아내에게 수없이 약속해놓고 또 마지막 같은 이 글을 또 쓴다.
잊고 조용히 살자는데 아내를 속상하게 하는 못난 남편이다. 아프게 당한 것, 지 잘났다고 쓰는 것, 전부 필요 없다. 그저 인간다운 삶을 살면 되는데 말이다.
승용차 캐피탈(5년 경과), 소나타Ⅲ(3년 경과)를 타다가 친구 2명에게 돈도 안받고 기쁜 마음으로 승용차 2대를 그냥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제한테도 그냥 안주고 돈 받고 팔아버린다. 미아동 소방서 부근 횡단보도 앞에 정지하는데 뒷 차가 들이받아서 티코의 전면이 푹 들어가 박살이 났다.
깜빡 졸아서 정말, 죄송하다 하였고, 내차 후면은 기스만 있었다. 뒷자석의 어린 아들이 앞으로 튕겨져 나와 크게 울어댈 정도로 큰 사고였지만 그냥 보내주었다.
송파구청 앞 횡단보도에서 정지하고 있던 내 소렌토를 뒤에서 들이받아 엄청 큰소리가 났는데 졸음 운전을 한 외제차였다. 내차 후면에는 기스만 있고 승용차가 많이 부서졌다. 그냥 보내주었다.
이런 사고가 발생하면 목이 아프다고 별 쇼를 하며 돈을 받는 사람,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다. 강남 논현동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 대표(명함 받음)였다.
너무 차량 통행이 많은 지역이라 일단 보내놓고 나서, 명함에 있는 핸드폰으로 통화해서 비슷한 사고를 당하면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라는 말만 해주었다.
상기와 같이 법 없이도 살아갈,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경용부부를 뼈저리게 아프게 할 슬픔, 고통, 눈물을 준 악인들이 있었다. 그런 악인된 심성으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저 할 말이 없다.
사람이 목숨이 붙어 살아가는 동안, 욕을 안먹고 베푸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죽을 때, 지나온 삶이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저 늙은 나이까지 탐욕한 마음(검사장으로 퇴직한 뒤에 전관예우 비리 범죄를 저질러서 구속된 홍만표, 친구 장사장 등)으로 이익만 챙기는,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거짓과 위선. 권위. 헛된 자존감 등으로 삶을 살아가는지 이해가 안된다.
상대방이 괴로워하고 힘들어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살아간다. 부딪히지 않고 안보고 사는 게 상책이다. 가까이 해봐야 기쁘고 행복해질 수가 없다.
절대로 개과천선이 안된다. 애들은 교육이 되도, 노인은 교육이 거의 힘들다.
베푸는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까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 인생이 더 즐거워진다. 행복해진다.
부모 형제. 처. 자식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면 인생을 잘 살은 것이 아니다. 죽은 후에 좋은 덕담이 오고갈 수가 없으며 오명을 남기게 된다.
부디, 참다운 인생을 살아야 죽은 후에, 영혼이 축복받고 후손에게 좋은 이름을 남긴다.
인간은 죽는게 필연이다. 죽으면 부모 형제, 처자식하고 모든 인연은 끝난다.
공수래 공수거 인생인데 살아서 재물에 미치듯이 인색하게 탐욕해봐야 묘똥에도 가져갈 수 없다. 욕심을 많이 부려서 재물을 모아 자식한테 퍼주어봐야 무지 고맙게 큰 은혜인줄 아는 자식들이 별로 없다.
부모 형제한테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의 자식들은 형제우애도 일반적으로 없다. 많은 재물을 남기면 우애가 없는 형제들 간에 상속 또는 재산 싸움이 일어나 형제지간에 원수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선행 기부하는게 더 낫다. 살아생전에 인간다운 삶으로 선업을 많이 쌓아야지 악업을 쌓으면 안된다. 육신이 없어진 사후에,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덕담할 수 있는 이름이라도 남겨야 할 것이다.
부모가 있어 자식이 태어나듯이 먼 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첫 조상은 신께서 창조했을 것이다. 하느님, 알라신, 예수, 석가모니, 공자 등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종교는 효도(공경), 선행을 강조한다.
어떤 신을 믿든 간에 십계명 등의 모든 종교 교리에 맞게 효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 절 등에 열심히 다니는 외형적 사실보다 더 가치가 있고 죽은 후에, 영혼이 신으로부터 진정하게 축복받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 극악한 악인들은 인과응보의 천벌을 언젠가는 받게 되어있다.
1. 죽어서 천국에 간다. 또는 2. 더 나은 삶으로 환생해서 즉, 윤회한다는 것을 신 앞에서 미약한 인간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떤 게 맞는지를 자신의 종교에 맞추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선 안된다.
살아 생전에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게, 사후에는 육신이 썩어 흙이 되고 유체 이탈된 영혼이 축복(구원)을 받을 수 있게끔, 베푸는 마음으로 효도(공경: 늙으신 부모에게 말을 공손하게 해야 함)와 선행을 실천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인생 철학으로 최고의 진리이다.
2020.12.5일 이경용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