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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093-9140 |
2011.05.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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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울연극
Today's Theater In Seoul 제8 호 2011.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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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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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양기찬, 조만수, 최은옥 기자: 이정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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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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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 조만수 -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2 | 김민승 -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 김선욱 - 샘플 054씨 외 3인 | 서은영 - 노인과 바다 | 정대용 - 사무라이 혹은 감각의 드라마 | 강양은 - 여기 사람이 있다 | 이주영 - 책 읽어주는 죠바니의 카르멘 | 양기찬 - 햄릿 | 오세곤 - 햄릿 | 서나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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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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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g의 아킬레스 건 | 박연숙 - <내가 까마귀였을 때> <주인이 오셨다> | 백승무 - 야끼니꾸드래곤 | 오세곤 - 봄날 | 박정기 - <전쟁을 로비하라> <보스, 오 마이 보스> | 박정기 - 햄릿기계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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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록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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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 포럼 2010~2011 연속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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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어느덧 또 한 달이 지나 ‘오늘의 서울연극’ 제8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지난 호와 비슷한 정도의 원고를 싣게 되었습니다. 언제고 크게 기여할 날을 기다리면서 꾸준히 노력할 따름입니다. 다들 바쁘고 힘들게 삽니다. 공연이 있어도 서로 보러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뭔가 일이 많습니다. 물론 못 보는 첫 번째 이유는 시간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음의 여유가 생기거나 아니면 정말 중요한 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서로 남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남의 걸 보고 글을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거기에는 마음의 여유와 중요하다는 인식 외에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용기야말로 진정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애정이 우리 연극을 살리는 밑거름인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말입니다. 눈부시게 화창한 5월입니다. 연극에 대한 애정이, 연극에 대한 용기가 활짝 피어날 그 날을 기다립니다.
2011년 5월 18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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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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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수(연극평론가, 충북대불문과 교수)
‘미래야 솟아라’는 젊은 연극인들에게 서울연극제의 참여의 기회는 물론 대극장이라는 공간을 활용할 흔치않은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다. 본선에 오른 6편의 작품들이 30분간의 쇼 케이스 경연의 형식으로 관객을 만났으며, 이들 중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을 수여하도록 되어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 상을 부여할 때에는 현재 상태의 완성도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주목하게 된다. 그 가능성은 미래라는 시간을 위해 열린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대극장이라는 공간으로 열려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2011년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부문의 심사위원으로서, 참가작에 대한 심사 평의 성격으로 작성된 것이다. 다만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의 소견일 뿐, 심사위원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극단 대학로극장의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는 이미 공연된 작품을 재공연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다고 재공연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의 핸디캡은 전혀 아니다. 다만 ‘미래야 솟아라’가 요구하는 형식이 이 작품이 최초에 착안되고 공연된 방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활용에 어려움을 보여준다. 지하실 공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추론하는 것이 기본적인 골격이다. 죽은 두 사람은 이 공간 속에서 연극을 행하였다. 살인사건을 추론하는 두 명의 형사와 죽은 두 사람의 극중극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내면의 고뇌와 수직적 상승을 향한 열망의 공간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폐쇄적이며 닫힌 공간을 글쓰기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물의 수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가 요구하는 공간의 형식 자체가 소극장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대극장의 공간 속에서, 배우들의 절규는 공허하게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극중 현실과 극중 극이 미세하게 교차해야 할 시점이 이 덩그러한 공간 속에서 인지되지 않기에 어느 정도 관념성을 드러내는 언어가 구체화될 계기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프로젝트 락교의 <빈집>은 고양이를 매개로 인간사회를 관찰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극의 중심 모티브가 <캐츠>의 모티브와 일부 겹쳐, 아무리 극의 서술이 다른 방향을 향하려 하여도 고양이 설정 자체가 핸디캡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작품이 작은 단편의 병렬적 연속으로 구성되어, 대극장에서 장막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처음부터 제한되어 있다.
극단 이상한앨리스의 <공무도하가>는 ‘운명’이라는 매우 큰, 그리고 추상적인 주제를 움켜쥐고, 이를 ‘공무도하가’의 모티브와 연결짓는다. 강을 건너는, 그리하여 죽음을 향하는 이를 바라보는 이 노래의 핵심은 ‘건넘’에 있다. 허구적 신화의 이야기를 건너서 운명이라는 필연성에 이르는 것을 아직 쇼 케이스 상태의 작품에게 요구할 지점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현재 상태에서 이 작품은 운명 그 자체보다는 허구의 틀을 짜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 허구의 틀은 ‘공무도하가’ 모티브가 제공하는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에 봉사하고 있다. ‘슬픈’, ‘만화적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터이지만, 그 사이를 ‘건너는’ 운명의 담론을 만나게 하지는 못한다. 공간적으로는 건너야 할 강과 극의 대부분의 동선이 수평을 이루면서 횡적인 공간만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도 대극장 공간 활용에 대한 고민을 더 요구하는 부분이다. 무대의 깊이를 사용한다면, 이 ‘건넘’이 감정의 발화점이 아니라, 극행위 자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운명과 서사와 공간을 건너는 방식이 더욱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제2스튜디오의 <깡통시장 블루스>는 흥미로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연출이 제시한 연출의 미학과 실현된 결과의 거리가 컸다. 하지만 그 거리를 열정적이며, 잠재력은 크지만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배우들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성과 코미디 장르로서의 소극을 함께 엮어 보고자 했으나, 소극적 경향이 강하게 표출되면서 사실성이 떨어졌으며, 이러한 약점이 소극장에 적용된 상상력을 확장된 공간에 담으려하다가 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장르에서 보다 경험이 풍부한 배우들과 함께 한다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때로 관객의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며 연출은 충분히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만 ‘미래야 솟아라’는 연출과 배우가 하나의 집단으로 그 잠재력을 보여주며 함께 성장하기를 희망하는 장이다.
극단 씨어터 201의 <가방을 던져라>는 국립극장 별오름에서, 그리고 밀양의 젊은연출가전을 통해 선보인 작품이다. 이미 발표된 작품들이 소극장의 공간 상황에 맞게 고안된 작품인 것은 당연한 것인데, 이명일 연출은 ‘미래야 솟아라’의 아르코 대극장의 무대를 있는 그대로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공간적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무대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공간적 적응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독립적인 에피소드가 ‘가방’의 모티브를 통해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에피소드들이 다시 병치되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려있다. 주제의 단순함이 큰 단점으로 부각되지 않는 것은 빠른 속도감 때문이다. 직설적인 발화가 빠른 극 흐름 속에서 덜 폭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상태에서 조명에 의한 공간분할은 쇼케이스의 물질적 제약으로 인한 임시적 선택일 것일 터이지만, 공간창출의 방식은 더욱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공간은 지시되는 것이거나 가상되는 것이 아니라 창출되는 것이라면, 각 에피소드가 위치하는 공간이 무대적으로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영상 사용의 필연성에 대해서도 극의 미학차원이 아니라, 단지 극적 효용의 차원에서도 다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극단 이음의 <캠벨스프>는 아직 미완성의 작품이다. 그리고 현재로서의 이 작품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연출이 확정된 방향 속에서 그 일부만을 보여준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볼 수 있는 부분까지만이 이제껏 사유된 부분이며, 그 나머지 부분은 앞으로사유해야 할 부분으로, 미완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때문에 서사적 차원에서 이 이야기가 어떤 흐름을 보여줄지 아직 가늠할 수 없다. 연출 겸 작가 자신이 아직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 키워드 주변의 이미지를 산출하는 것 이상으로 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단지 시각적 이미지의 현혹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근본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결과화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두께를 지닌 시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종류의 극을 대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우려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으로부터 이 작품을 시작해나가고 있다는 것이 된다. 연출은 이미지속에 숨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연출은 구축해나갈 자신의 극 속에서, 서사적 상황-전시회 개막 전날 전시공간의 설치작업-과 현재 진행형의 무대 세팅을 동시적으로 구축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음악은 한 장면의 감정과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동원되기 보다는 하나의 장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시간성을 지닌다. 결국 연출가 이은정은 아직 미완성의 자신의 연극을 더디게 만들어가면서 자신의 주제적인 개념이 무대의 언어가 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젊은 연출가들에게 소극장의 공간은 매우 소중한 공간이며 동시에 스스로의 물질적 조건 자체이다. 그들에게 대극장 공간을 가정한 쇼케이스를 요구하는 것이 모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점차 중대극장 공간이 증가하는 현재의 상황은 젊은 연출들에게 새로운 공간적 상상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연극제의 ‘미래여 솟아라’가 이를 위한 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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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극제 Open Space Show Case 미래야 솟아라 Part.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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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시장블루스, 가방을 던져라, 캠벨스프>
김민승
공연기간 : 2011. 5. 7 ~ 5. 8 공연장소 :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관람일시 : 2011. 5. 8
1. 깡통시장블루스 (1막)
극단 : 제2스튜디오 원작 : 에드아르도 데 필립포 번안 / 연출 : 김노운
로베르토 베르나르디의 극사실주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나친 생생함에 질식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스테인레스, 햇빛을 머금은 채 촉촉한 질감을 드러내는 포도알, 겉에 발린 설탕 입자가 만져질 것만 같은 형형색색의 사탕들. 지나치게 현실 같은 그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바로 그 ‘지나침’ 때문에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깡통시장블루스>는 1차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빈민가를 무대로 한 에드아르도 데 필립포의 <나폴리의 백만장자>를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깡통시장으로 배경을 옮겨 각색, 번안한 작품이다. 이번 쇼케이스에서는 “극사실주의를 표방한 작품”답게 전체 3막 중 1막을 수정없이 무대에 올렸으며, 꿀꿀이죽 식당을 운영하는 부부와 두 아이, 할머니, 미군트럭운전수와 지게꾼, 등의 인물들에 얽힌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병렬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극사실주의 작품이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먼저, 극사실주의 기법이 무대 위에서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부터가 문제이다. 무대 위에서 사투리를 구현(제대로 구현되었는가는 차치하더라도)하고 생활 속의 자질구레한 대화들을 등장시키거나 무대 위에서 직접 머리를 감는다고 해서 모두 극사실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의 인물들 간의 대화나 행동은 이 공연처럼 지나치게 수선스럽거나 쉴틈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실제 대화는 맥락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 채 최소한의 정보를 주고받는 식으로 이루어지며 일관성도 상당히 떨어진다(싸우는 때조차도 말이다). 물론 극사실주의라고 해서 실제 대화를 그대로 옮겨놓을 필요는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연극에서의 대화는 실제 대화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극사실주의를 추구한다면 기존의 연극 대화 방식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텐데 불행히도 <깡통시장블루스>에서는 그런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극사실주의 기법은 그림이건, 연극이건, 영화건 간에 상당히 섬세한 디테일 작업을 요한다. 그리고 핵심은 디테일을 모두 살리는 데 있다기보다는 디테일의 어떤 점을 드러나게 해야 효과적인지를 찾아내는 데 있다. 나홍진 감독의 최근 영화 「황해」를 보면, 극사실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쏟아냈는지,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이 어떤 효과들을 이루어냈는지를 알 수 있다. 기법 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극사실주의를 추구함으로써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가’가 불분명하다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현실을 지나치게 실재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감각적으로 낯설게 느끼게 만들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극사실주의의 의미라 한다면, 이 작품이 재현하고자 하는 실재가 무엇인지, 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무엇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지금까지 이 작품이 극사실주의를 ‘표방’한 데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작품에 대해 극사실주의를 버리고 충실한 재현주의 혹은 상징주의 등의 방향으로 나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긍정적 전망 역시 바로 이 극사실주의의 추구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튜드를 통해 완성된 장면들을 무대 위에서 실현시키고자 한 시도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비록 배우들 대사가 과장되고 여유없이 쏟아붓는 형태이긴 했지만, 꿀꿀이죽을 파는 식당을 둘러싸고 파편화된 스토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삶의 단편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형태가 2막과 3막에서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즉흥극을 통한 재해석 과정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보인다. 그러나 극사실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함께, 각 에튜드 별로 훨씬 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며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더욱 많이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거대 서사는 좀처럼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자질구레한 삶의 단편들, 삶의 디테일들이 우리가 매일 같이 살아내는 삶에서는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심지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디테일들, 현실의 차가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그 디테일들을 면밀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 소소함의 틈 사이로 언뜻 비치는 삶과 사회의 허위, 은폐되어 있는 지점 등을 만날 수도 있다. 그것이 극사실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2. 가방을 던져라
극단 : Theatre201 작, 연출 : 이명일
“인생에 변화를 줄 때마다 가방을 바꿨어요. 인생을 갈아타는 느낌이랄까. 날 만족시키는 가방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가방을 바꿀 거예요.” 유치원 가방부터 초등학교 가방, 가장 최근에 들고 다니는 반짝거리는 서류 가방까지. 남자는 주욱 늘어놓은 가방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생이 가방 바꿔매기의 연속이라고 할 때 그 끝에 놓여있는 가방은 무엇일까? <가방을 던져라>는 ‘가방’이라는 소재에 이렇듯 명쾌한 방식의 은유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짊어지는 것들, 반드시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들이 모두 한낱 가방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껍데기를 지고 다니느라 낑낑대는 동안 정작 그 안에 넣고 다니던 알맹이를 잃어버린 것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우리에게 가방이 주는 의미를 우리 삶의 기대와 욕망, 집착 등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작품의 주된 테마는 카레이서가 되길 원하는 은호가 자동차 세일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자신의 선배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선배의 만물상 가방 속에서 나온 각종 고지서들과 선배의 푸념에 질린 나머지 자동차 세일을 포기하고 만다. 그러고 나서 은호의 욕망 혹은 희망의 상징이기도 한 카레이서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유실물 센터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여인을 통해 자신이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쇼케이스에 등장한 내용은 여기까지이며, 공연은 스토리 내부에 침잠되지 않은 채 꽤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세트보다는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공간을 더욱 활기차면서도 흐름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예컨대, 조명만을 이용하여 직선으로 질주하는 길을 만들고, 교차로나 꺾인 길을 만들며, 러시아워 시간의 지하철 공간도 만들어냈다. 조명을 활용한 공간 배치는 동적이고도 신속한 전개를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이라는 강렬한 대비 효과 때문에 닫혀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전달해줄 수 있었다. 이러한 느낌은 배우의 신체 자체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는 물론 <가방을 던져라>의 주제, 즉 가방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가둬둔다는 느낌을 전달하기에도 적합해 보였다. 이야기 전개의 완급을 배우들의 움직임 자체를 통해서 표현하기도 했는데, 도입 부분에서 배우들이 빠르고 거친 호흡을 표현함으로써 현대인의 급박하고 강박적인 삶을 드러내려 했다면, 유실물 센터의 여인이 등장한 후반부에서는 여인의 뒤쪽에 그림자처럼 등장하여 느리고 흐느적거리는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느낌을 주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이야기 전개와 연출이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안정되어 보인다는 점은 한편으로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가방’의 은유가 윤리적으로 명쾌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관극하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부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방을 던져라>라는 제목에서도 이미 시사하듯이, ‘쓸 데 없이 짊어진 것들을 훌훌 던져버려라’는 결론에 이르리라는 사실이 자명해 보이기에 이후에 전개될 내용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정말 가방을 내던지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우리가 짊어진 것들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깔끔하게 분리될 수 있는 것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어느 경계부터 내던질 수 있고 내던지는 것이 좋으며 내던져야 하는 걸까?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제로 가방을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가방을 던져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작품의 결론으로서 가방을 던져버리는, 일종의 해결 혹은 해소로서의 결말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가를 묻는 데 있다. 물론 연출 방식에 따라 해소의 결말을 보여주더라도 예측을 빗나가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깔끔한 연출력을 살리되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궁금한 자세를 잃지 않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3. 캠벨스프
극단 : 異音[이ː음] 작, 연출 : 김은정
우리의 욕망들은 복제된 미래를 향해 수렴적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캠벨스프>에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복제된 욕망들, 일명 “슈퍼맨의 비애”라고도 일컬어지는 전지구적 현상을 문제삼고 있다. 이 공연에서 “무엇을 원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가 잘 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또 한 마디를 의미심장하게 덧붙인다.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캠벨스프>에는 미술관 큐레이터인 남편과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의 바람기를 인정할 수 없었던 아내는 바람둥이 변이유전자 치료제를 통해 그녀가 원하는 결과로 점핑하고자 한다. 이 작품에서 앤디 워홀의 그림 ‘캠벨스프’를 모티브로 삼은 것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원래 앤디 워홀의 ‘캠벨스프’가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시도였다면, 공연 <캠벨스프>에서는 이것을 욕망의 복제를 꿈꾸는 사람들, 즉 “끊임없이 사실을 부정해가며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로 점핑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고 있다. Before & After로 대변되는 성형과 다이어트에의 욕망은 바로 이러한 복제된 욕망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Before에서 After로 넘어가는 과정의 이야기는 이러한 욕망 구조 속에서 교묘하게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마치 피라미드처럼 복제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욕망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으리라는 신화와 맞물려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욕망의 복제를 비난해야만 할까? 복제된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욕망의 복제라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욕망을 좇아가는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캠벨스프>에서 말하는 욕망은 우리 삶을 조건짓고 압도하며 결국 하나의 규율로서 구성되어가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내가 잘 되기”를 욕망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복제를 의미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삶의 규율을 과정보다는 결과에 맞추어 조직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복제, 혹은 결과주의적 욕망이 우리 삶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지점이다. 공연의 전체 구성은 내러티브와 무용을 조합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특별한 건 없지만 이 두 요소가 상호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주제를 더욱 탄탄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한마디로, 내러티브 사이의 막간 공연 같은 느낌의 무용이거나, 반대로 무용 공연의 양념 역할로서의 내러티브와 같은 느낌이 아니라, 양자의 결합이 필연적으로 주제를 뒷받침하게 구성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공연 중 장면 전환은 무대를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결과로의 점핑이 결국 같은 자리를 돌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어 보였다. 결과로의 점핑 혹은 욕망의 복제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같은 곳을 맴돌 뿐이다. 그러나 다소 염려되는 지점은 <캠벨스프>에서 규정하는 ‘반복’의 의미에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공연에서는 Before와 After, 즉 사실에 대한 부정과 복제된 욕망으로서의 결과를 이어주는 것을 ‘반복으로서의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들뢰즈 식대로 말하자면, 어떠한 경우에도 차이가 없는 반복이란 없으므로 이때의 반복은 사건들을 연결지어주는 개념이 되며 그런 관점에서 ‘반복으로서의 과정’을 주목하는 일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캠벨스프>에서는 앤디 워홀의 그림 ‘캠벨스프’의 통조림 통의 ‘반복’에 대해서는 욕망의 복제, 과정의 점핑 등 사뭇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각장마다 Before와 After를 끊임없이 반복시킬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반복 역시 부정적인 성격과 획일성을 강조하는 차원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작품의 결론은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반복’의 화두는 ‘욕망’의 화두와 함께 더욱 세밀한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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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에 대한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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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손기호 연출이 자신이 자란 경주를 배경으로 한 “경주시리즈” 3부작의 가장 최근작으로, 2009년 창작팩토리 대본 공모 선정 작인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는 ‘부부’를 모티브로, 이혼을 결심한 아들이 부모님의 굴곡 많은 삶을 지켜보면서 자신과 인연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고 했다.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과의 만남, 인연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인 듯 보였다.
작품은 경주 외곽을 배경으로 50년을 해로한 노부부, 이웃에 사는 서면 댁 부부의 일상을 통해서, 이혼을 앞둔 노부부의 아들이 바라보는 ‘인연’의 의미를 연극적으로 그려낸다. 연출은 노부부와 서면 댁 부부의 모습을 아들의 시선으로 그리려는 듯, 두 부부의 일상을 자신의 방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처리한 장면이 비쳐진다. 그만큼 노부부의 인생과 서면 댁 부부의 인생을 이혼을 앞둔 아들의 시선으로 어떻게 얽어내느냐가 이 작품의 관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은 아들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자신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갇혔던 아들은 결혼을 하지만 아내와의 소통에 실패한다. 결국 임신한 아내와 이혼을 결심하고 부모님의 집을 찾는다. 그곳에는 그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되었던 50년을 해로한 부모님과 매일 조용한 날이 없는 이웃집 서면 댁 부부를 본다. 자식의 이혼결심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전개되는 한편, 어머니는 자식을 이해하고 감싸려 한다. 아들이 오면서 벌어지는 일상은 노부부의 결혼 50년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무대에서 보이는 노부부의 가정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가정이다. 결혼생활 전부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전체적으로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으면 가정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바깥으로만 나돌며 가장으로서 역할은 하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가 그 자리를 맡아야만 했다. 아버지 잘못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을 억누르며 살아야 했다. 그렇게 속은 썩어가고 결국 암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된다. 다행히 목숨도 건지고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기는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시어머니 병 수발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해주지 못했다. 모친을 떠나보내고 드디어 아내에게 어렵사리 꺼낸 말을 꺼낸다. “우리 규야는 여기에 묻었다”, “내 이제야 미안하다 말해서 미안하다”. 아버지도 아들의 죽음에 커다란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 특히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주 컸지만, 그 마음을 숨기고 오히려 더 큰 소리치고 살아오면서, 그만큼 아버지의 속도 사실은 많이 문드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어렵사리 화해의 말을 건넨다. “네가 많이 의지 되더라”,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해할란다”. 아랫집에 사는 서면 댁은 자신을 돌대가리라고 무시하고 갖은 폭력을 휘두르며 학대하던 남편을 우발적으로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러나 유치장에 면회 간 어머니에게 “아무리 맞았어도 남편 없이는 못 산다”며 울부짖는 서면 댁의 모습이 보인다. 아들은 서로 다른 이들 부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다. 또한 고모로부터 남편이 죽은 후 집안 머슴과 살면서 주위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겪었던 친할머니의 삶에 대해서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의지했으며, 그래서 행복했다고 한다. 아들은 각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극중 두 부부의 삶과 친할머니의 삶을 조용히 관조하며 부부와 사람들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결국 알 듯, 모를 듯한 결심을 하게 된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의 이러한 전개는 각기 다른 세 부부의 삶이 비록 독립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아들의 시선에 의해서 서로 조합되고 풀어져야 한다. 아들의 시선을 통해 그려지는 부부의 인연이 작품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시선이 새롭지 못하면 작품은 자칫 진부한 스토리를 말하는 것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들의 의미론적 기능은 중요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5월 6일 공연에서 아들의 의미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아들은 실제로 부모님과 서면 댁 부부의 일상을 관조하고 있지만, 그 관조의 의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아들 역을 맡은 정인겸의 연기에서 찾아질 수 있겠다. 우선 처음 등장부터 그의 대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대사량에도 불구하고, 내적 감정에 지나치게 치중해서 그랬는지 중요 대사들이 들리지 않았다. 또한 아들은 극중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층위의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부인과의 전화 통화가 실제 통화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든지 또는 무대 주위를 뛰어다니며 꿈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그렇다. 이 부분에서 발화되는 대사의 의미는 아들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작품의 흐름에서 세 부부의 삶을 관조하면서 뭔가를 느껴야 하는 아들의 역할이 상당부분 축소되고 말았다. 소리의 울림이 많은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의 특성(단점)을 감안했어야만 했다. 상대적으로 아버지(박용수 분)와 어머니(우미화 분)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작품의 중심축을 아들로부터 어머니에게로 이동시켜, 결국 이 작품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이해하는 우리들의 어머니를 그린, 자칫 진부한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오랜 만에 인생을 관조하는 잔잔한 연극을 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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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시선에 일침을 가하다 - <샘플 054씨 외 3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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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영(고려대학교 박사수료)
극 단 : 극단 동 작/연출 : 강량원 공연기간 : 4월25-5월2일 공연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관람일시 : 4월30일
1. 다시, 화두를 던지다 이야기는 진부했다. <샘플 054씨 외 3인>은 가석방 된 재소자 4명의 뒤를 쫓아감으로써 그들을 거부하는 우리 사회의 배타성에 대해 보여주었다. 장애인, 재소자, 혼혈, 동성애자 등 우리 사회에서 경계인과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고 있다. 이야기들이 재생산된다는 것은 불행히도 우리 사회가 아직도 그들을괴물,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그 반증을 회자시키기 위한 무대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수천가지의 방식 중에서도, 극단 <동>만의 소통 방법이 이 무대 위에 현현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진부한 이야기를 다시 들으러 오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생산자의 능력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이야기꾼의 말하기 방식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원소스의 이야기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매개 되고 있지만, 동일한 소재와 주제의 작품일지라도 성공하기도 하고, 혹은 실패하기도 한다. 이것은 매체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생산자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소비자와 소통하는 방식이 각 매체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구현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소재와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야기꾼의 입담으로 새롭게 재창작되고, 때로는 새로운 형식으로 구성될 때, 더불어 생산품에 그 매체만이 발산할 수 있는 매력을 더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샘플 054씨 외 3인>이 그런 연극이다. 연극이 다른 매체와 다른 지점들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2. 연극을 고민하다! <샘플 054씨 외 3인>의 무대는 관음증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구현된다. 샘플을 관찰 카메라로 찍었다며 그들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대는 카메라의 프레임처럼 폐쇄적이면서 폭력적이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른 채 어느새 카메라의 시선-실제로 무대 위에서는 영상 스크린이 아닌, 배우들의 연기로 실현되지만-을 쫓고 있다. <샘플 054씨 외 3인>에서는 학회 발제를 하는 연구원들을 무대와 객석 가운데 배치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뚜렷하게 한다. 조명을 통해 관객들은 어느새 학회 발표장에 앉아 있는 참석자들이 되어 동참하고 있다. 객석의 관객들은 무대 위 재소자 4인과는 철저하게 분리된다. ‘엿보기’라는 행위의 쾌감 속에서 관객은 어느새 연구자들의 왜곡된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프레임과 다른 것은 역시나 <샘플 054씨 외 3인>이 연극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극장의 불이 켜지는 순간, 영화 속에서 구현했던 현실이 한순간의 환상으로 변질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샘플 054씨 외 3인>에서의 서사극적인 장치들은 연극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고, 긴장시키기도 한다. 또한 서사의 구성도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샘플 054씨 외 3인>은 고전적인 구성을 선택하는 대신, 흩어진 조각들을 퍼즐을 맞추듯 완성시켜 나간다. 이런 기법들이 이 연극을 더욱 연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낸다.
<샘플 054씨 외 3인>의 배우의 연기는 느리고, 샘플 4명을 비롯하여 샘플199의 부인-실제로는 동거이지만-, 여관 주인 등의 연기는 온 힘을 들여 행동하고 발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운 몸짓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 몸짓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무겁고 처절해서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고, 무거운 것은 더욱 압력을 줘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는 과중한 힘의 무게가 느껴진다. 어두운 무대 위에 유일하게 밝혀진 가로등 불빛과 오브제인 우산이 주는 축축함, 배우들의 몸부림에 가까운 몸짓이 어우러져 극 전체적으로 축축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극의 진행 속도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빨라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느리게 진행된다. 막과 막 사이,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면서 테라스에서 울려나오는 불세출의 비가(悲歌)는 어둡고 무거운 이 극의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이런 압도적인 무거움 속에서 무대 위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씁쓸하고 잔인하다. <샘플 054씨 외 3인>에서 샘플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교도소를 나오자마자 그들이 처음 향했던 곳이 다름 아닌 이발소였다는 점이 이것을 말해준다. 샘플들은 이발소에서 용모를 단정히 하여 수감 생활의 때를 벗고 사회 안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고자 한다. 그러나 샘플들의 평범한 일상은 처음부터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택시기사의 과잉된 행동과 그것과 연계해 촉발된 이발소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이들의 과민반응은 색채의 대비로 더욱 확연하게 부각된다. 좀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샘플 2명이 잠시 머문 공원. 샘플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칙칙한 의상과 어두운 분위기와 달리, 싱그러운 초록빛 잔디와 붉은 그넷줄, 따뜻한 나무 느낌을 주는 그네는 동화의 한 장면처럼 ‘예쁘다’. 샘플들을 괴롭히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행동마저 장난스럽고 유쾌 발랄하다. 샘플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원색의 무대 장치와 행동들은 흑백 tv속에서 몇 군데에만 칼라를 덧입힌 것처럼 부각된다. 그러나 극단적인 색감의 대비 속에서 정작 부각되는 것은 샘플들이 가지고 있는 생래적인 이질감이다. 무대 위의 색채 대비는, 군중의 무리에 섞여 일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샘플들의 노력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잔인하리만큼 잘 보여주는 상징적 무대이다.
3. 우리 사회의 노래꾼, 극단 <동> <샘플 054씨 외 3인>의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는 노래꾼이 있다. 노래꾼은 샘플들-우리 사회의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관객들에게 샘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심정적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남은 샘플 199와 307이 노래꾼과 함께 차에 오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희망적이기도 하다. 예술의 정치적 역할은 끝났다고 자인하는 이들에게, 극단 <동>의 따뜻한 시선은 연극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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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은 듯한... 연극 <노인과 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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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대 용 (순천향대학교 강사)
극단 : 앙상블 작 : 어니스트 헤밍웨이 각색, 연출 : 김진만 공연기간 : 2011. 2. 11 ~ 5. 31 공연장소 : 대학로극장 관람일시 : 2011. 4. 22. 8시
헤밍웨이의 명작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은 건 15년 정도 전 중학교 시절로 기억된다. 그땐 너무 어려서 작품을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건 내 머릿속에 그려진 노인의 강렬한 이미지이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2인극으로 새롭게 탄생한 연극 <노인과 바다>를 관람하러 가는 내내 어린 시절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상상했던 것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공연 한 시간 전 쯤 도착했을까?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작은 돛단배와 배위에 있는 청새치 한 마리였다. 기다리는 관객을 위해 설치해 놓은 제작진의 배려가 엿보였다. 일찍 온 관객들도 제작진의 작은 배려 덕에 사진을 찍으며, 기다리는 것을 지루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연극 <노인과 바다>의 무대는 간결했다. 무대 중앙엔 누르스름한 천으로 덮은 배가 놓여있었고 주위에는 어망과 그물, 밧줄, 막대기 등 고기 잡을 때 쓰는 물건들이 있을 뿐이었다. 청년이 등장하고 자신의 소년시절을 회상하는 나래이션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84일이나 물고기를 못 잡은 노인은 85일째 되던 날 바다로 출항을 나간다. 파도와 싸우며 드디어 청새치를 잡아 배에 묶고 돌아가다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청새치를 다 물어 뜯기고 아무런 소득 없이 육지로 돌아온다. 허무함으로 축 쳐진 어깨에 돛대를 짊어지고 언덕을 넘어 집으로 가는 노인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자(者)의 모습이었다. 집에 도착한 노인은 무거운 돛대를 내려놓고 깊은 잠에 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요람에 누워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은, 세상에서 가장 평안하게 잠든 사람처럼..
함께 만들고 함께 상상하는 연극
연극 <노인과 바다>는 청년의 과거 회상과 상황묘사, 재연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절제된 대사로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고, 청년이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객을 극 진행에 끌어들임으로써 공연을 완성시켜 나간다. 관객과 야구를 한다든지 노인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 그 상황에 대한 주변 묘사를 청년 자신과 관객에게 역할을 정해줌으로써 어떤 관객은 돌고래 한 쌍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관객은 노인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거대한 청새치가 되어 낚시 줄을 힘차게 잡아당긴다. 이 모든 것은 청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의 상상력이 무대화 되는 것이다. 공연 진행의 형식은 같을지 몰라도 관객은 매일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반응과 역할 수행을 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연은 매일 달라지고 무대 위의 배우들도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 읽어 주는 남자 : 청년
이 연극에서 청년의 역할은 중요하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관객과 대화하며 상황을 설명하는 마치 손톤 와일더<우리읍내>의 무대감독과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극 중 노인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청년은 그 주위를 돌며 노인의 심리상태와 주변상황을 하나하나 묘사하며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노인의 대사와 청년의 설명의 조화는 마치 해설이 있는 연극 혹은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청년은 공연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관객의 눈을 바라보며 연기하는데 극 중 대사라기보다는 관객과 대화를 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더 극에 몰입할 수 있고 청년의 역할 부여에 의해 극에 직접 참여를 할 때에도 무대를 만들어가는 일원으로써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명작을 각색하여 만든 연극<노인과 바다>.
연출의 의도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공연을 관람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은 정말 편안하게 책을 한 권 읽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이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지만-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관객들의 반응들. 이것들은 분명 필자(筆者)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들이 느끼는 연극 <노인과 바다>의 재미 포인트 일 것이다. 마치 편안하게 책을 읽은 것 같은 연극,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며 관객이 뿌듯해지는 연극이 앞으로도 계속 공연되길 바라며, 또한 <노인과 바다> 뿐만 아닌 수많은 명작 소설들을 무대에서 많이 관람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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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과 공포감이 있는 전위연극, 앙토냉 아르또의 <사무라이 혹은 감각의 드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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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 숲 작 : 사무라이 혹은 감각의 드라마 연출 : 오승수 공연기간 : 2011.3.29-2011.4.3 공연장소 : 청운예술극장 관람일시 : 2011.4.2
강 양은 (연기전공 교수)
극단 숲은 ‘새 얼굴 시리즈 I’로 헤롤드 핀터(Herold Pinter, 1930-2008)의 <침묵>과 앙또냉 아르또 (Antonin Artaud, 1896-1948)의 <사무라이 혹은 감각의 드라마> 국내 초연작을 3월 22일에서 4월 3일까지 청운예술극장에서 올렸다. 예술감독은 ‘새 얼굴 시리즈’는 젊은 연출가들에게 작품을 만들어가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위한 것으로 그들만의 개성과 특색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프랑스 극작가이자 배우인 앙토냉 아르또는 초현실주의 연극 운동에 깊이 참여하며 <피의 분출 Spurt of Blood, 1924>이라는 작품을 썼고, <연극과 그 분신 Le Theatre et son double, 1938>에서 ‘잔혹극(Cruelty of Theatre)’을 이론화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창조해갔다. 그는 ‘알프레드 자리 극단(Theatre Alfred Jerry, 1926)’을 창립해 공연들을 올렸는데, 스트린드베리의 <꿈의 연극 A Dream Play>도 그중 하나였다. 아르또에게 연극은 감각적 경험으로 감각(senses)을 강조하여 관객을 자극하는 것이 잔혹극의 특징이었다. 그는 대본을 그의 해석대로 재작업하고, 창고나 비행기 격납고 같은 곳을 공연장으로 여겼다. 그는 신체적이고 비언어적인 형식의 발리 무용단의 공연에 영향을 받아 몸짓, 조명, 음향 등의 효과로 흥분과 신비감을 자아내게 했다. 그는 연극적인 제의행위로 인류가 자유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인류에 잠재해 있는 모든 폭력성과 잔혹성을 무대 위에서 밖으로 끌어내어 외부에서 파괴시키고 스스로 정화되는 것을 꾀했다. 아르또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서로 투쟁하는 힘이라고 하여, 그의 이론은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 피터 브룩(Peter Brook), 리빙 시어터(Living Theatre) 등 훗날 전위연극, 실험주의 연극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무라이 혹은 감각의 드라마>는 4막으로 구성된 6페이지의 난해하고 시적인 희곡으로 아르또의 잔혹극에서 강조하는 관객의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1막은 사무라이는 시녀를 때린다. 그 노예에게서 감각을 불러일으키려는 그의 행위는 점점 애무하는 동작과 기도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꿈속의 꿈같은 사무라이의 꿈. 그는 사랑을 갈구한다. 꼭두각시 왕의 제자로 사무라이는 꿈에서 깨어난다. 2막은 해설자인 사부의 안내로 혼란스러운 이야기 속으로 안내되고, 사무라이는 시녀를 원하지만 대신 자신의 어머니인 여왕과 누이인 공주를 범한다. 누이와 꿈속에서 딸을 낳는다. 그는 욕망의 최고점에 다다른다. 해설자인 스승은 이 꿈은 어떻게 전개될까를 질문한다. 3막은 신들에게 추방당한 사무라이는 신들을 저주한다. 사무라이는 전쟁의 나발을 분다. 그는 전쟁을 통해 모든 것을 실현시킨다. 해설자 스승은 이 꿈이 어떻게 될지 또 다시 질문을 한다. 4막은 여왕은 자신의 아들인 사무라이가 미쳤다고 말한다. 공주는 사무라이와 피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를 사랑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무라이는 여전히 시녀의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가장 은밀한 욕망에서 그를 떼어놓는 인간 장애물, 꼭두각시 왕이 등장하고, 사무라이는 왕을 처단한다.
공연 시작과 함께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조명의 시각적 미였다. 무대의 빛은 깔끔하면서도 주제와 하나가 되어 극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배우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한, 무대의 입체성을 위한, 그리고 연극의 내면적인 면과 환영적인 면을 살려내기 위한 조명의 효과는 연출가 아피아(Appia, 1862-1928)를 연상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고보의 처리들이 인상적이었다. 숲 속을 나타내기 위한 나무 그림자,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 어둠 속에서 흐르는 달빛, 자욱한 안개의 스모그, 순간적이고 순차적인 길의 형성, 무대 중앙에 링/콘림 고보로 형상화된 빨간 빛의 원 등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특히 링 고보는 일본 국기의 상징으로 사무라이 정신을 담은 것인데, 죽음의 행보를 걷는 국기 안의 마스코트로 극의 시작과 끝을 윤회설처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무대기호에서 잘 훈련된 배우들의 절제되고 힘 있는 신체 동작들은 동양의 신체술로 심리와 몸짓과의 감각적인 교류를 표현하려는 움직임이었고, 그 외적인 표현이 육체적 감각들을 이루었다. 그러나 배우의 내적 연기술의 부족과 외적으로 드러내려는 수행성은 아쉬움을 남겼다. 인물의 밀도 있는 깊은 탐구가 진실한 소리들과 동작들을 이끌며 관객을 사로잡는 강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반사실주의적인 실험연극처럼, 꿈의 신비적인 요소들을 몸짓의 언어로 무대를 지배하는 배우의 물리성을 보이며, 연출은 "꿈속의 꿈같은 작품이다. 모든 것이 꿈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속에서 인물들은 유영한다."라고 언급했다. 시작부터 모든 것이 끝, 현실이 아닌 꿈, 꿈꿀 때 안개 속에서 헤매는 몽환, 동양 정서 등의 배경 속에서 인물 모두에게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두 여인 속에 갈등하는 남자에게 결국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아르또의 연극적 특징인 공포감이나 잔혹성은 공연동안 잠재해 있었는데,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의 갑작스런 배우의 등장, 스승의 그로테스크한 외모와 목소리, 하얀 마스크를 쓴 악령들의 형상과 신체를 갉아먹는 음향 효과, 신생아의 죽음의 상징으로서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 가하는 왕비의 살인적 행위, 그 인형의 목이 기대치 않게 뚝 떨어지는 장면, 그 목은 끈으로 연결되어 비참하게 달랑거리는 형상, 그 아이를 바닥에 무차별하게 내동댕이치는 모습, 사무라이와 시녀의 성적 욕망의 표출, 거친 숲을 헤매는 긴장 등은 관객들의 감각적 자극을 일깨웠다.
일본식 소품과 가면, 기모노 의상 등은 연극 <살로메>를 연상케 하며 세심하게 배려된 요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성기로 여겨지는 커다란 소품이 갑자기 무대 뒤에서 튀어나와 움직여질 때는 만화적인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며 전반적인 극의 무드를 깨뜨리는 어색함을 남겼다.
무대 위에서 잘 접할 수 없는 앙토냉 아르또의 연극 세계가, 한국인의 시선으로 형상화되어 공연되는 것은, 연극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이들에게 좋은 도전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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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타인의 고통, <여기, 사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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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고려대 박사과정)
극 단: 드림플레이 작, 연출 : 김재엽 공연기간: 2011.4.28~5.1 관람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관람일시: 2011년 5월 1일 7시
<여기, 사람이 있다>는 타인의 고통에 주목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타인은 사회적 약자이며, 침묵(하는/당한) 자를 말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2010년 5월 <타인의 고통>이란 제목으로 혜화동일번지에서 초연되었으며, 같은 해 8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 바 있다. <타인의 고통>은 2011년 5월,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여기, 사람이 있다>로 다시 한 번 관객들에게 타인에 대해 주목하기를, 그리고 그들에게 말 걸기를 요청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의 무대는 전반적으로 깔끔하다. 무대 양쪽 끝은 취조하는 공간으로, 중앙은 강성현의 집 거실, 무대 앞쪽은 스카이팰리스 옥상으로 연출된다. 이들 공간에 배치된 가구들은 모노톤의 미니멀한 디자인이다. 술병, 핸드폰, 초코바까지 최소한의 디자인만을 허용한다(상표까지 삭제되어 있다). 배우들의 의상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배역을 맡았던 모든 배우들은 무채색 의상을 입고 있으며, 특히 배우들이 신은 신발들은 디자인과 상관없이 회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명 또한 직선과 각진 선으로 연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무대, 의상, 조명, 소품 등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들은 무채색으로-주로 검정과 회색- 통일을 이룬다. 이들은 장식과 색, 그리고 디자인을 최소화시켜 자신의 모습을 적절히 숨김으로써 관객이 좀 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매끄럽게 전달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인지가 궁금해진다. 극의 현재 시간은 2029년이다. 극은 강성현 아들인 강소원이 뇌사상태에 빠진 데서부터 시작된다. 김 형사는 무대 오른쪽, 이 형사는 무대 왼쪽 끝 취조 공간에 있다. 양쪽 끝에서 두 형사는 번갈아가며 강성현을 취조한다. 취조 중에 의문점이 생긴다.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 극은 과거로 돌아간다. 부분 조명으로 취조 공간은 어두워지고 과거의 사실은 무대 중앙에서 실연된다. 두 형사는 과거 사실을 보면서 의문점이 생길 때마다 장면을 정지시키고 대화를 주고받는다. 소극장이지만 무대가 생각보다 넓기 때문에 시야를 무대 양쪽 끝으로 옮겨 가며 봐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런 수고스러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잦은 암전 없이 조명으로 공간과 시간이 이동되고, 이에 따라 사건이 빠르게 전개됨으로써 극을 몰입하며 즐길 수 있게 된다. 공간과 시간이 이동 될 때, 타인과 타인을 호명하는 자는 이동하는 공간과 시간을 연결해준다. 인류학과 강사 강성현은 과거, 인디언 친구인 론울프가 백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할 때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저 겁에 질린 채 침묵했다. 세월이 흐른 2029년에도 강성현은 용기 없었던 자신의 과거에 힘들어한다. 그는 인디언 친구에게 용서를 바라며 기도를 한다. 론울프는 친구의 기도에 답한다. 자신과 같은 타인의 고통을 사람들에게 말해달라고. “지금 네 발 밑에서 아직도 분노의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목소리들을 찾아내고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달라고 론울프는 친구에게 말한다. 여기서 타인은 누구이며, 이들의 고통은 무엇인가. 앞서 얘기했듯 타인은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한 자들이다. 이들을 추방한 자는 소위 사회에서 주체, 혹은 기득권으로 분류되는 자들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보호구역에 내몰려 위험한 타자로 관리된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보호구역에 분류관리하는 순간, 보호라는 단어는 아이러니로 읽힌다. 보호는 약자를 위한 단어이다. 하지만 이 보호구역을 통해 강자인 백인은 인디언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다. 극에서의 북한주민들도 인디언들과 같은 처지이다. 극에서 2029년의 대한민국은 통일국가이다. 극은 북한을 타인으로 분류-이런 극에서의 전제가 주체로서의 감각이 작동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도 해보지만-한다. 남한의 기득권층은 호화주택을 짓기 위해 북한 주민들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부터 강제 추방시킨다. 추방당한 인디언과 북한 주민들, 사회의 타자들은 “폐암에 걸린 채로 점심때마다 무료급식을 찾아 줄을” 서고,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 명령을 받고 자살을 시도”하며, “아들 병 치료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자신들의 억울함,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도 결국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회적 강자의 폭력뿐이다. 론울프는 이 같은 사회적 부조리로 인한 타인들의 고통에 대해 강성현이 침묵하지 않길 요구한다. 하지만 강성현은 아직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그가 발 딛고 있는 공간은 타인들의 고통으로 지어진 초호화아파트 스카이팰리스이다. 이 작품 안에는 인디언의 멸망사라는 과거와 통일된 미래, 그리고 미국과 한국 등 시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이 중첩된 시공간의 사건 배면에는 대한민국의 현재 사건, 용산 참사 사건이 깔려있다. 고통으로 아우성치는 타인의 공간에 사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타인의 고통을 봉합한다. 그 봉합의 자리는 스카이팰리스로 번쩍거린다. 극 초반부, 최후의 인디언 수우족 추장인 ‘성난 말Crazy Horse’는 “당신들은 나에게 백인의 권리를 거부한다. 내 피부는 붉지만 심장은 백인과 똑같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난 말이 백인의 권리, 백인과 똑같음을 주장하는 순간 그의 주장에 한계가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백인의 권리 너머로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생각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극은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리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타인이 있다는 것을, 즉 ‘저기, 폭력에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우리들에게 ‘여기 사람이 있다’는 타인의 말(고통)에 귀 기울이기를 바라며, 침묵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아닌 타인에게 말 건네는 실천적 주체되기를 요구한다. 뇌사상태의 소원이가 살아났고 강성현도 스카이팰리스에서 나왔다. 이는 과정은 힘들겠지만 미래가 긍정적으로 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암시가 실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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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죠바니의 카르멘〉: 새로운 재미의 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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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찬
각색, 연출: 이용주 작곡,음악: 심연주 관람장소: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공연기간: 2011년 03월15일~4월16일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단편소설 『카르멘』을 새롭게 무대화 시킨 이용주 각색, 연출, 심연주 작곡, 음악〈책 읽어주는 죠바니의 카르멘〉은 연극을 구성하는 움직임, 노래, 춤 등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의 공연에 담아내고자 하는 작품이었다. 원본 『카르멘』의 원색적이며 원시적 그리고 타오르는 정열을 무대화하기 위하여 본 작품은 노래와 춤을 가미한 소극장 뮤지컬에서 벗어나 관객들이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의 소극장을 만들고자 하였다. 주인공인 죠바니(박준석 분)가 자신의 일기를 읽어주는 형식으로 전달되는 본 공연은 연극적 형식의 틀을 벗어나 관객들과 호흡을 시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체극에 바탕을 둔 움직임과 현란한 춤, 전 극장에 퍼지는 오페라타적인 화음 등은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총체적 공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존 공연들의 사실적 또는 비사실적 연기 틀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한 노력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인 돈호세(박두수 분)와 카르멘(유리나 분)에서 끝나지 않고 전 배우들의 활발한 무대화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즉 기존의 연극적 체계가 관객과 연극의 거리두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본 공연은 관객과 배우들 간의 거리를 좁히고, 없애는 것에 그 목적을 가진다. 그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활발한 움직임과 노래가 극장을 압도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 움직임들이 극장 공간 활용에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배우들의 움직임이 보다 무대에 적합하게 크고, 열정적이고, 각이지는 움직임이었더라면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던 움직임의 파장이 좀 더 다가갔을 것이다. 배우들의 움직임을 위해 비워두었던 무대의 중앙부분과 이에 맞추어 좌우 대칭적으로 만들어진 두 연기 공간, 즉 피아노의 위치와 죠바니의 공간이 객석과 떨어져있는 현상이 만들어져 관객과 무대 간의 거리감을 줄이지 못했으며 이는 공연이 의도한 관객과의 호흡에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다. 무대와 객석간의 거리를 두지 않고 무대를 객석에 밀착시키는 또는 객석 안으로 가져왔더라면 좋은 호흡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책 읽어주는 죠바니의 카르멘〉은 새로운 극형식은 물론, 익숙한 소재를 어떻게 새롭게 재창조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무대였다. 또한 연극계가 겪고 있는 연극적 형식의 틀에서 연기자가 주가 되는 공연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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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극단 창립 15주년 기념공연 <햄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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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곤
극단 : 서울시극단 작 : 세익스피어 원작/ 정진수 번역 연출 : 박근형 공연기간 : 2011년 4월 8일~24일 공연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관람일시: 2011년 4월 12일 오후 8시
2011년 4월 12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들이 2층을 이루며 줄지어 있다. 서울시극단의 <햄릿>의 무대이다. 그간 많은 연출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햄릿>을 형상화했지만 박근형 연출의 이번 작품은 우선 시작 전 눈에 들어오는 무대부터 상당히 인상적이다. <햄릿>과 컨테이너 박스라니! 이게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내 현대사회의 음울함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선택이라는 동의를 하기로 한다. 그것이 관극에 유리하다는 본능적 적응력의 발휘였을 것이다. 물론 그 본능적 동의는 틀리지 않았다. 전반적인 스탭 사항들이 극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적절히 기여하고 있었다. 특히 무대는 박근형식 해석과 잘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왕의 생존은 대단히 현대적인 해석이다. <햄릿>에서 왕은 ‘악의 핵’이다. 그 핵이 아무 손상 없이 살아남는다. 순간적으로 햄릿은 악의 퇴치를 위해 무용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인물, 즉 비록 죽는다는 점에서 계속성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까뮈가 ‘부조리의 영웅’이라 칭한 시지푸스가 되고 말았다. 박근형이 보는 21세기 대한민국은 결코 악이 퇴치될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이니, 현대적 비극에 대한, 또한 현실에 대한 연출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관객들은 상당 부분 재미와 감동을 선사받는다. 그러나 각 부분의 완성도에 비하여 그 사이 사이의 이음새는 그리 정교하지 못 하여서 전체적인 흐름에 최고의 평점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공연의 요소들 역시 각각이 보여주는 분명한 의도에 비하여 그 종합의 앙상블은 상대적으로 약하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결투 장면의 경우 상당한 긴박감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많은 배우들을 안무적으로 구성하여 활용한 결과일 뿐, 고난도의 결투 동작을 시도하지는 못 하였다. 그런 안무적 발상은 보조적 역할을 하도록 하고 중심이 결투를 하는 두 배우에게 있었더라면, 또한 더 정밀한 연결과 난도가 높은 동작들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훨씬 오래, 또한 한층 깊이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이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각 부분의 이음새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은 물론, 볼거리의 완성도도 훨씬 높여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앙상블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이미 정평이 난 수준 높은 예술가들을 모아 놓은 이 작품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기대한 대로 박근형은 분명한 해석과 힘찬 형상화로 상당 정도 충격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배우들 역시 공립극단의 무기력함이라는 선입견을 깰 만큼 열정적으로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물론 세계적인 작품에 대해 주눅 들지 않는 태도도 눈에 띈다. 그러나 우리 연극이 세계적 명작에 대한 강박관념을 벗어버린 지도 이제 꽤 세월이 지났다. 따라서 박근형 정도의 연출이라면 그를 선택하는 순간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번 공연이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완성도를 위한 장인정신이 지금보다 한층 치열했더라면 하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훌륭한 작품은 혼자 하는 작업뿐 아니라 함께 하는 작업까지 완벽해야만 가능하다. 즉 혼자 하는 번역, 각색, 해석(연출, 배우, 스태프 등 무대형상화 참여자들 각각의)도 좋아야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을 모아 결합하는 과정도 좋아야 한다. 우리 연극계 환경은 상대적으로 이 결합 과정에 취약함을 보인다. 늘 쫓기고 여유가 없다. 연출이나 배우나 조금만 이름이 있을 경우 여기 저기 너무 많은 작품을 소화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극단도 연습 기간의 길이는 곧 예산과 관계되므로 상당히 인색하다. 이번 공연이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어딘지 아쉬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질적 환경에 기인할 것이다. 물론 이는 참여자들만의 문제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우리 연극 환경의 문제일 것이다. 즉 한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참여자들에게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과 어떤 수준의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깊이 고민할 시점이라 하겠는데, 이에 있어 무엇보다도 의도로부터 출발하여 완성품까지 가는 데 있어 마지막 결합에 들여야 할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때의 시간과 에너지는 완성도나 예술성 제고에 있어 결코 정비례하지 않는다. 즉 거의 무한대의 노력을 쏟아도 고작 1% 정도의 완성도 제고가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비효율성을 무릅쓰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예술의 본성임을 명심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작 중 명작을 ‘지금 여기 우리’라는 상황과 대상에 맞게 제공하는 것은 서울시극단으로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햄릿>은 관객들로 하여금 명작 감상을 즐기면서 동시에 스스로 뭔가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중의 역할을 상당 정도 충족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와 같은 연극의 대가가 관객들에게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와 함께 과연 어떤 즐길 거리를 만들어 놓았을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서울시극단의 <햄릿>이, 박근형의 <햄릿>이 단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 보완하여 완벽한 작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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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도전 <햄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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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 서울시극단 작 : 세익스피어 원작/ 정진수 번역 연출 : 박근형 공연기간 : 2011년 4월 8일~24일 공연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관람일시 : 2011년 4월 23일 3시
서나영(평택대학교 방송연예학과)
박근형이 햄릿을 연출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연출가로 자리매김한 그가 세익스피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세간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골목길 햄릿>으로 신고식을 치뤘지만 이번에는 정진수의 번역으로 서울시극단과 함께 중극장 크기의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관객을 만난다.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청춘예찬>을 시작으로 <대대손손>,<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너무 놀라지 마라>등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에 대한 그만의 색깔 있는 해석이 과연 <햄릿>과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행히 기대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16세기의 이야기를 21세기로 가져와 배우들에게 현대적 의상을 입히고 완전히 재구성된 무대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곱추가 된 리차드 3세도 봤고 한복 입은 로미오와 줄리엣도 있었는데 양복 입은 햄릿이 컨테이너박스 위에 서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연출가가 해석해 낸 <햄릿>의 시의성이 박근형표로 대표되는 날카로우면서도 해학적인 언어에 실려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작에 기죽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햄릿의 대사에 실어 보낸다. ‘광장’이니 ‘불꽃’이니 ‘방사능’이니 하는 우리 사회의 의미 있는 화두를 현 정부를 상징하는 컨테이너 성벽 위에서 거침없이 쏟아낸다. 더 나아가 광대들의 극중극을 통해 권력을 우롱하고 예술의 기능을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지금, 왜, 이 이야기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관객들과 가감 없이 소통한다. 또한 원작과 다른 결말을 만들어 내는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햄릿>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그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만든다. 복수에 성공해야 할 햄릿은 어머니도 연인도 모두 잃은 채 허망하게 클로디어스 앞에서 죽음을 맞고 햄릿의 칼에 쓰러져야 할 클로디어스는 건장하게 살아남아 햄릿의 실패를 평가하고 거투르드의 죽음도 무시한 채 축포를 이어간다. 무대 뒤 단단하게 자리잡은 컨테이너 성벽과 같이 현실의 권력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패기 넘치는 젊음, 광기어린 열정, 그리고 고뇌하는 지식에 단칼에 쓰러져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연출의 분명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연출의 통일성과 각 인물에 대한 타당성 있는 해석은 부족했다. 시의성 있는 대사와 더불어 무대의 빠른 이동, 코러스의 투입, 양식적 무대 연출 등을 통해 극의 시작에서부터 관객의 감성보다는 이성을 자극하다가 극의 후반부 오필리어의 죽음과 관련된 장면은 감상주의적 해석에 머물러 있다. 왜 모두 오필리어의 죽음을 그리 슬퍼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는데 무겁고 슬픈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도 그 슬픔을 강요하기까지 한다. 오필리어로 대변되는 순수, 혹은 아름다움의 죽음이라고 이해하자고 들어도 갑자기 흘러나오는 구슬픈 멜로디는 몹시 당황스럽다. 이는 어쩌면 오필리어 인물 자체에 대한 해석의 부족에서 나온 결과일 수 있다. 거투르드를 비롯한 두 여성 인물은 적극적 해석이 결여 된 채 순수와 욕망의 대명사로 진부하게 무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또한 클로디어스와 햄릿을 맡은 배우들의 실제 나이가 많이 차이 나지 않는 모습에서 오는 햄릿의 지나친 무게감은 두 인물로 대변되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명쾌하게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동안 극단 <골목길>에서 보여주던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와 전체적 앙상블을 이번 서울시극단과의 작업에서는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사실적이지도 않고 섬세하지도 않은, 중극장 크기의 무대에서 세익스피어의 대사를 읊고 있는 그 어디 즈음의 연기, 소위 말하는 ‘연극적 연기’로 가득 찬 무대는 ‘지금, 여기’ 있는 관객들과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죽어 있는 폴로니우스가 벌떡 일어나 퇴장하고, 죽은 오필리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천을 덮고 눕는, 현실의 리얼리티와는 다른 리얼리티를 무대에서 용인한다 하더라도 배우들 자신의 호르몬도 자극 못하는 키스 장면을 보는 것, 뛰지도 않았는데 뛰어 온 것 같이 헐떡이며 들어오는 등장 장면을 보는 것, 당하는 사람조차 하나도 당황스럽지 않은 성적인 폭력 장면을 보는 것, 그리고 뭉툭하게 만들어져 찔리지도 않을 칼을 들고 왼쪽, 오른쪽 합을 맞추는 칼싸움 장면을 보는 것은 정말 못 견딜 일이다.
박근형의 <햄릿>은 텍스트의 문학적 깊이를 현실의 거울로 읽어내 성공적으로 관객과 소통 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연출의 감상주의적 한계와 진부한 무대 연기로 공연예술의 미학적 완성도와 현재성에 대한 문제들을 숙제로 남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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