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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셀 -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사라진 이름
성소 뜰에 두 마리의 숫염소가 있습니다. 제 2성전 시대의 기억을 전하는 문헌에 따르면, 두 염소는 값과 크기와 생김새가 되도록 비슷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제비를 뽑는 순간, 서로 닮았던 두 생명의 길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한 제비에는 라야훼(לַיהוָה, La-YHWH, “여호와를 위하여”), 다른 제비에는 라아사셀(לַעֲזָאזֵל, La-Azazel, “아사셀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 염소는 죽임을 당하여 그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염소는 살아 있는 채로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떠납니다.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반역과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고백된 죄를 등에 지고 “끊어진 땅”, 곧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보내집니다. 제단 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도 장엄하지만, 죄를 싣고 지평선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염소의 뒷모습에는 또 다른 장엄함이 있습니다. 속죄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죄의 제거는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 죄가 실제로 떠나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일에 가장 비밀스럽고, 난해한 문제의 하나는 이 날에 드리는 속죄 제사에 쓰이는 제물인 염소에 대한 것입니다. 이날 제사에 드려지는 염소는 두 마리입니다. 잘 아는 바대로, 한 마리 염소는 죽임을 당하고, 그 제물의 피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언약궤에 뿌려집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산채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사람이 없는 광야로 보내어집니다. 이처럼 한 마리는 죄의 값과 생명의 대가를 증언하고, 다른 한 마리는 고백된 죄가 공동체 안에 계속 머물 수 없음을 눈앞에 보여 줍니다.
여기서 광야로 내어보내진 염소를 말하는 아사셀(עֲזָאזֵל, Azazel, "아사셀 또는 광야로의 완전한 제거로 해석되는 논쟁적 명칭")은 레위기 16장 8절과 10절과 26절에 나타납니다. 본문이 두 염소를 한 쌍으로 제시하되, 하나만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잡고 다른 하나는 살아서 광야로 보낸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염소가 향한 아사셀은 무엇인가요? 장소입니까? 상징입니까? 아니면 악한 존재입니까? 이 짧은 히브리어 한 단어가 수천 년의 논쟁을 품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 아사셀이라는 이름의 수수께끼
성경 마저도 아사셀의 정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치 광야의 문을 반쯤만 열어 둔 것처럼, 이름은 들려주지만 그 얼굴은 보여 주지 않습니다. 바로 그 침묵 때문에 수많은 랍비와 주석가와 성서학자가 그 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이제 그들이 남긴 해석의 여러 갈래의 발자국을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살펴 볼 여러 견해들은 동일한 권위를 갖는 모범 답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문헌들이 남긴 여러 해석의 지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아사셀은 험한 산이나 절벽이라는 해석
가장 눈에 보이는 해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사셀을 염소가 보내지는 험준한 장소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랍비 사아디아 벤 요세프 가온(רב סעדיה בן יוסף גאון, Rav Saadia ben Yosef Gaon, “사아디아 가온”; ‘가온’은 당시 바빌로니아 유대 학원의 수장을 가리키는 칭호, 882 또는 892–942)은 아사셀을 험한 산의 이름으로 해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이 견해는 사아디아의 현존 저술에서 직접 확인되는 독립된 문장이라기보다, 랍비 아브라함 벤 메이르 이븐 에즈라(רבי אברהם בן מאיר אבן עזרא, Rabbi Abraham ben Meir Ibn Ezra, “이븐 에즈라”, 약 1089/1092–약 1164/1167)가 자신의 주석 속에 보존해 준 견해입니다. ‘이븐 에즈라의 레위기 주석’(פירוש אבן עזרא על ויקרא, Perush Ibn Ezra al Vayikra, 12세기)은 사아디아가 아사셀을 강하고 험한 산과 연결했다고 전합니다. 또 한 사람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רבי שלמה יצחקי, Rabbi Shlomo Yitzchaki, “라시—Rabbi Shlomo Yitzchaki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 1040–1105)도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그는 ‘라시의 토라 주석’(פירוש רש״י על התורה, Perush Rashi al ha-Torah, 11세기 말–12세기 초)에서 아사셀을 “거칠고 단단한 절벽”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장소설은 ‘바빌로니아 탈무드 요마편’(תלמוד בבלי, מסכת יומא, Talmud Bavli, Masekhet Yoma, 최종 편집 약 5–6세기)의 해석과도 이어집니다. ‘요마’(יוֹמָא, Yoma)는 아람어로 “그날”이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특별히 속죄일을 가리킵니다. 탈무드는 아사셀을 “산들 가운데 가장 험한 곳”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랍비 유다 하나시(רבי יהודה הנשיא, Rabbi Yehudah HaNasi, “유다 왕자”, 약 135–217)가 약 200년경 편집한 ‘미쉬나 요마’(משנה יומא, Mishnah Yoma, 약 200년)는 제2성전 시대 의식에 관한 기억을 전합니다. 염소를 맡은 사람이 광야의 절벽에 도착하면 붉은 털실을 나누어 묶고, 염소를 뒤로 밀어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염소는 산 중턱에 이르기 전에 몸이 부서졌다(미쉬나 요마 6: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레위기 16장 자체는 염소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명령은 염소를 광야의 “끊어진 땅”(אֶרֶץ גְּזֵרָה, Eretz Gezerah)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의식은 살아 있는 염소가 다시 진영으로 돌아오는 일을 확실하게 막기 위해 발전한 제2성전기의 시행 방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아사셀은 죄가 도달하는 지리적 종착지입니다. 성소가 생명과 임재의 중심이라면, 아사셀은 그 반대편에 놓인 황폐와 단절의 변방입니다. 죄는 단순히 덮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까지 옮겨져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2. 아사셀은 ‘떠나보냄’과 ‘완전한 제거’를 뜻한다는 해석
두 번째 견해는 아사셀을 특정한 인물이나 장소보다 염소가 수행하는 기능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아사셀은 “멀리 떠나보냄”, “완전한 제거” 또는 “악을 물리침”을 뜻한다는 해석입니다. 이 견해의 오래된 뿌리는 ‘칠십인역 레위기’(Λευιτικόν, Leuitikon, 오경의 그리스어 번역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에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레위기 16장에서 아사셀을 고유명사로 그대로 옮기지 않고, 처음 세 곳에서는 그리스어 ‘아포폼프’(ἀποπομπ-, apopomp-) 계열의 말로 번역합니다. 이는 대체로 “멀리 보내는 존재”, “악을 제거하는 것” 또는 “악을 물리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놓아줌”이나 “보내 버림”을 뜻하는 ‘아페시스’(ἄφεσις, aphesis)를 사용합니다. 이 번역은 아사셀의 얼굴을 묻기보다 염소의 움직임을 바라봅니다. “그가 누구인가?”보다 “죄가 어떻게 사라지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이 랍비 모셰 벤 마이몬(רבי משה בן מימון, Rabbi Moshe ben Maimon, “람밤—Rabbi Moshe ben Maimon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 1138–1204)입니다. 서구 학계에서는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람밤은 ‘당혹한 자들을 위한 안내서’(دلالة الحائرين, Dalālat al-Ḥāʾirīn, 약 1191년 완성; 히브리어 번역명 מורה הנבוכים, Moreh HaNevukhim) 제3부 46장에서 아사셀 염소를 설명합니다. 그는 죄가 돌이나 짐처럼 염소의 등에 물리적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의식은 백성의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 주는 상징적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염소가 사람이 살지 않는 먼 땅으로 보내지는 까닭은 죄가 백성에게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음을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있던 자리와 죄가 사라진 자리 사이에 실제 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희생양’이라는 말은 흔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억울하게 뒤집어쓴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레위기의 염소는 백성의 책임을 감추기 위해 대신 비난받는 억울한 범인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먼저 백성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염소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희생자가 아니라, 이미 고백된 죄를 공동체 밖으로 운반하는 의례적 운반자입니다. 이 견해가 들려주는 속죄의 언어는 따뜻하면서도 단호합니다. 용서받은 죄는 진영 한가운데 계속 눌러앉아 사람을 정죄하는 유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황무지로 보내진 과거입니다.
3. 아사셀은 광야의 영적 존재라는 해석
세 번째 해석은 본문의 문법적 구조에서 출발합니다. 한 제비가 “여호와를 위하여”이고 다른 제비가 “아사셀을 위하여”라면, 두 표현이 서로 대칭을 이루므로 아사셀 역시 여호와와 구별되는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대칭된다고 해서 두 존재의 지위가 동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레위기 16장은 두 염소 모두 먼저 여호와 앞에 세워진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븐 에즈라는 이 대목에서 유명한 수수께끼를 남겼습니다. 그는 “아사셀 뒤에 있는 비밀”을 이해하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서른셋에 이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숫자는 레위기 16장 8절에서 서른세 구절 뒤에 위치한 레위기 17장 7절, 곧 이스라엘이 더 이상 “숫염소 귀신들”에게 제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석됩니다.
랍비 모셰 벤 나흐만(רבי משה בן נחמן, Rabbi Moshe ben Nachman, “람반—Rabbi Moshe ben Nachman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 1194–1270)은 이븐 에즈라의 암시를 더욱 분명하게 풀어냅니다. 그는 ‘람반의 토라 주석’(פירוש הרמב״ן על התורה, Perush HaRamban al ha-Torah, 13세기; 말년에 이스라엘 땅에서 일부 개정)에서 아사셀을 광야와 황폐를 관장하는 영적 세력, 곧 사마엘(Samael)과 연관시킵니다.
그러나 람반은 이 의식이 악한 존재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염소를 보내라고 명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제비를 결정하시고 의식 전체를 통치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아사셀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입니다. 람반은 이를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에 비유합니다. 왕이 한 신하에게 다른 신하의 몫을 전달하라고 명령했다고 해서, 전달자가 그 신하를 자기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직 왕의 명령을 수행할 뿐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사셀은 하나님과 대등한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심판 아래 놓인 황무지의 세력입니다.
4. 아사셀이 타락한 천사의 얼굴을 얻었다고 보는 해석
아사셀은 제 2성전기 문헌에 이르러 비로소 뚜렷한 얼굴과 전기를 얻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문헌이 ‘에녹1서’(መጽሐፈ ሄኖክ, Mäṣḥafä Henok, 여러 시대의 문헌을 모은 복합 작품, 대략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입니다. 현재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본문은 에티오피아의 게으즈어 문헌이며, 쿰란에서는 더 오래된 아람어 단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사셀이 등장하는 6–36장은 흔히 ‘감시자들의 책’(Book of the Watchers, 대체로 기원전 3세기)이라고 불립니다. ‘에녹1서—감시자들의 책’ 8–10장에서 아사셀은 인간에게 칼과 방패와 갑옷을 만드는 기술, 장신구와 화장법, 귀금속을 다루는 기술을 가르친 타락한 감시자로 나타납니다. 기술 자체보다 그것이 폭력과 탐욕과 음욕의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땅이 피와 불의로 가득 차자 하나님께서는 천사 라파엘에게 아사셀의 손과 발을 묶어 두다엘(Dudael)의 거친 광야에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그는 날카로운 돌 아래 갇혀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에녹서의 광야는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닙니다. 죄를 가르친 자가 죄와 함께 추방되어 심판을 기다리는 감옥입니다. 장면은 레위기의 살아 있는 염소와 놀라울 만큼 겹칩니다. 죄를 짊어진 염소가 광야의 아사셀에게 보내지고, 에녹서에서는 죄의 교사인 아사셀이 광야에 결박됩니다. 죄가 그것을 일으킨 근원에게 되돌아가는 그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역사적 순서를 놓치면 안 됩니다. 에녹1서는 레위기보다 후대의 문헌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서의 아사셀을 근거로 레위기 원문의 아사셀이 처음부터 동일한 타락천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녹서는 레위기의 침묵을 그대로 보존한 책이라기보다, 그 침묵 속에 하나의 얼굴과 이야기를 그려 넣은 해석 문헌입니다.
현대 고대종교 연구자인 안나 안젤리니(Anna Angelini, 현대 이탈리아 학자)는 ‘아사셀은 염소인가, 장소인가, 악령인가, 신적 존재인가?’(Is Azazel a Goat, Place, Demon, or Deity?, 2021)에서 한층 더 과감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녀는 “여호와를 위한 제비”와 “아사셀을 위한 제비”의 대칭을 고려할 때, 레위기 의식의 오래된 층위에서 아사셀이 광야의 신적 존재였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레위기 본문에서는 그 존재가 이미 철저하게 격하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사셀은 성전도 제단도 피도 받지 못합니다. 염소는 먼저 여호와 앞에 세워지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사셀이 있는 황무지로 추방됩니다. 따라서 아사셀이 어떤 오래된 광야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레위기 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혼돈의 세력으로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5. 아사셀 염소는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운반체’라는 해석
현대 제의 연구자들은 “아사셀이 누구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이 의식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유대계 미국인 성서학자 야곱 밀그롬(Jacob Milgrom, 1923–2010)은 ‘레위기 1–16장—새 번역과 서론과 주석’(Leviticus 1–16: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1991)에서 아사셀 염소 의식을 고대 근동의 ‘제거 의례’(elimination rite)와 비교합니다. 밀그롬에 따르면, 살아 있는 염소는 제단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소와 공동체에 축적된 죄와 부정을 광야로 운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는 아사셀이 고대에는 광야의 악한 존재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레위기 본문에서는 그 존재가 거의 비신화화되어 죄와 부정이 보내지는 황무지의 이름처럼 남았다고 봅니다.
고대 근동의 어떤 의식에서는 악령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선물을 바쳐 달래려 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의 염소는 아사셀을 달래기 위한 음식도, 악령에게 바치는 뇌물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와 부정이라는 불쾌한 짐을 광야로 내보내는 운반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선물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 안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것을 경계 밖으로 추방하십니다.
데이비드 피어슨 라이트(David Pearson Wright, David P. Wright, 1953– )는 ‘부정의 처리—성경과 히타이트·메소포타미아 문헌의 제거 의례’(The Disposal of Impurity: Elimination Rites in the Bible and in Hittite and Mesopotamian Literature, 1987)에서 이러한 현상을 더 넓은 고대 근동 세계 속에서 분석합니다.
히타이트와 메소포타미아 의식에서도 질병이나 저주, 재앙과 부정을 동물이나 물체에 옮긴 다음, 그것을 사람이 사는 영역 밖으로 내보내는 사례가 발견됩니다. 라이트의 연구는 아사셀 염소를 일반적인 희생제사와 구별되는 ‘오염 제거 의례’로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탈리아의 히브리어·성서문헌학자 이다 자텔리(Ida Zatelli, 20–21세기 활동; 피렌체대학교 명예교수)는 ‘성경의 희생양 의식의 기원—두 에블라 문서의 증거’(The Origin of the Biblical Scapegoat Ritual: The Evidence of Two Eblaite Texts, 1998)에서 기원전 제3천년기 에블라의 정결 의식을 소개합니다.
그 문서에는 목에 은팔찌를 건 암염소를 황무지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텔리는 이것이 레위기 의식과 비교할 수 있는 고대 시리아의 배경을 보여 준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두 의식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습니다. 에블라 의식에는 레위기처럼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여 염소의 머리에 얹는 장면이 없습니다. 따라서 두 의식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직접적인 차용을 확정하는 증거라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해로운 것을 운반체에 실어 경계 밖으로 보낸다’는 공통의 상징 언어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보는 편이 설득력있는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두 염소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정결을 완성합니다. 죽임당한 염소의 피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 오염된 거룩한 공간을 정결하게 합니다. 살아 있는 염소는 죄를 짊어지고 성소 밖으로 나가 정결하게 된 공동체에서 죄를 제거합니다. 하나는 피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죄를 가지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나가 더러워진 성소를 씻는다면, 다른 하나는 씻긴 세계에서 더러움을 몰아냅니다.
6. 아사셀을 반드시 ‘악마’로 볼 필요는 없다는 해석
모든 현대 학자가 아사셀을 실제 악령이나 타락천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유디트 M. 블레어(Judit M. Blair, 1966– )는 ‘구약성경의 탈악마화—히브리성경의 아사셀, 릴리트, 데베르, 케테브와 레셰프 연구’(De-Demonising the Old Testament: An Investigation of Azazel, Lilith, Deber, Qeteb and Reshef in the Hebrew Bible, 2009)에서 기존의 ‘구약 악마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합니다. 블레어는 후대의 유대 문헌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악령으로 발전한 이름을 다시 구약성경에 가져와, 원래 본문에도 똑같은 악마 개념이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문맥과 문법, 평행법과 의인화 같은 문학적 장치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사셀은 반드시 뿔과 날개를 가진 독립된 악마의 이름일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과 거룩한 질서가 끝나는 곳, 곧 황폐와 혼돈과 죽음의 영역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죽음이 문 앞에 서 있다”, “전쟁이 사람들을 삼켰다”, “어둠이 도시를 덮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죽음이나 전쟁이나 어둠을 언제나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사셀도 혼돈의 영역에 얼굴을 부여한 문학적·제의적 의인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7. 아사셀 염소는 예수아를 가리킨다는 기독교적 해석
기독교 전통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살아 있는 염소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확정되지 않은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 ‘바르나바의 편지’(Ἐπιστολὴ Βαρνάβα, Epistolē Barnaba, 약 70–135년)는 7장에서 속죄일의 염소와 붉은 털실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표하는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이 문헌은 살아 있는 염소가 수치와 고통을 당하고 진영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예수님의 고난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레위기에서 ‘아사셀’이라는 단어가 곧바로 ‘메시야’를 뜻한다는 어원적 주장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후, 레위기의 의식 전체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비추는 예표로 다시 읽은 정경적·신학적 해석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 성서학자 찰스 리 파인버그(Charles Lee Feinberg, 1909–1995)는 ‘레위기 16장의 희생양’(The Scapegoat of Leviticus Sixteen, 1958)에서 두 염소 가운데 어느 한 마리만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보다, 두 염소가 함께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 사역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죽임당한 염소는 죄를 위한 피 흘림을 보여 주고, 살아서 떠나는 염소는 속죄된 죄가 완전히 제거되는 결과를 보여 줍니다. 두 염소는 서로 경쟁하는 상징이 아니라, 십자가의 한 사건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비추는 두 개의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레위기 16장 5절이 두 염소를 함께 하나의 속죄제물로 소개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한 마리는 죽음과 피를, 다른 한 마리는 죄의 운반과 제거를 보여 줍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예수아께서는 자기 피로 속죄를 이루셨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옮기신 분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히브리서는 살아 있는 아사셀 염소를 예수님과 직접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은 대제사장과 희생의 피를 중심으로 설명하며, 히브리서 13장 11–13절의 “진영 밖”은 살아서 광야로 보내진 염소가 아니라 진영 밖에서 불태워진 속죄제물의 시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아사셀 염소와 예수아의 관계는 직접적인 본문 인용이라기보다, 속죄 의식 전체를 통한 신학적 예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8. 아사셀은 사탄이며, 죄가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해석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구약학자 로이 E. 게인(Roy E. Gane, 20–21세기 활동)은 ‘희생양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What Was the Role of the Scapegoat?, 2010)에서 아사셀을 사탄적 존재로 해석합니다. 게인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대칭을 이루므로 아사셀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는 염소가 아사셀에게 바쳐지는 희생 제물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오히려 이 염소는 이스라엘의 죄를 광야에 있는 그 근원에게 되돌려 보내는 비희생적 운반체로 보았습니다. 게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살아 있는 염소는 제물이 아니라, 죄와 부정이라는 유독성 폐기물을 운반하는 수레와 같습니다. 죄를 아사셀의 영역에 쏟아 놓는 것은 그를 공경하는 선물이 아니라, 죄의 책임을 그 선동자에게 되돌려 주는 심판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게인은 사탄이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고 구원자가 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속적으로 인간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사탄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존재가 아니라, 죄의 유혹자와 선동자로서 자기 자신의 책임을 지고 심판받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사셀 염소가 사탄을 상징한다”는 견해를 소개할 때에는 “사탄도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죄를 담당한다”는 식으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게인의 주장 자체를 잘못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의 견해에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대속자이며, 사탄은 자신의 죄책을 피할 수 없는 최종적인 피고인인 것입니다.
◈ 요약
이렇듯 아사셀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간단히 요역하자면, 먼저 사아디아 가온, 라시와 탈무드 전통은 아사셀을 염소가 보내지는 험한 산이나 절벽으로 봅니다. 칠십인역과 람밤의 해석은 아사셀의 정체보다 죄를 멀리 보내고 완전히 제거하는 의식의 기능을 강조합니다. 이븐 에즈라의 암시와 람반의 주석은 아사셀을 광야의 영적 세력과 연결하지만, 염소가 그 존재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에녹1서’는 아사셀을 인간에게 죄와 폭력을 가르친 타락한 감시자로 발전시킵니다. 안나 안젤리니는 아사셀이 오래된 광야의 신적 존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되, 현재의 레위기 본문에서는 이미 여호와의 통치 아래 격하된 존재로 묘사된다고 봅니다. 야곱 밀그롬, 데이비드 P. 라이트와 이다 자텔리는 아사셀 염소를 고대 근동의 오염 제거 의례와 비교하면서, 살아 있는 염소를 죄와 부정을 경계 밖으로 운반하는 비희생적 운반체로 이해합니다. 유디트 M. 블레어는 아사셀을 실제 악마로 단정하기보다, 황폐와 혼돈의 영역을 의인화한 표현일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바르나바의 편지’와 찰스 파인버그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해석은 두 염소의 의식을 예수아의 속죄와 죄 제거 사역을 보여 주는 예표로 읽습니다. 끝으로, 로이 E. 게인은 아사셀을 사탄과 연결하지만, 사탄은 결코 대속자가 아니며, 자신의 죄와 선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 균형잡힌 올바른 관점을 지향하며...,
이처럼 아사셀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할 균형잡힌 관점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의 본문에 충실해야 합니다. 레위기 16장은 아사셀을 단순히 “떠나가는 염소”라는 뜻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본문의 문법적 대칭이 너무 분명해 보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와 “아사셀을 위하여”가 나란히 놓이고, 염소가 반복하여 “아사셀에게” 보내진다는 표현은 아사셀이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영역을 가리킨다는 견해에 힘을 실어 줍니다. 그렇지만, 아사셀의 혈통이나 계급, 반역의 역사에 관해서는 철저히 침묵합니다. 이러한 침묵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의 관심은 아사셀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존재 또는 그 영역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사셀은 광야의 적대적 영적 존재일 가능성을 열어 두되, 더 근본적으로는 생명과 거룩한 질서에 맞서는 황폐와 혼돈의 영역이 인격화된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균형 잡힌 해석이라고 봅니다. 살아 있는 염소는 아사셀에게 경배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사셀은 피도, 향도, 제단도 받지 못합니다. 두 염소 모두 먼저 여호와 앞에 세워지며, 오직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하나는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하나는 광야로 보내집니다. 따라서 이 의식의 주권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특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두 염소가 보여 주는 속죄의 두 방향은 예수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예표론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에서 희생의 죽음을, 내보내는 염소에서 죄의 제거를 보며 두 표징이 예수아의 한 속죄 사역 안에서 충만해졌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아께서는 피를 흘리셨고, 동시에 우리 죄를 멀리 옮기셨으며,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히 13:11–13). 이처럼 예수아께서는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셨으며, 자기 백성의 죄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옮기셨습니다. 반면에 사탄이나 아사셀은 구원의 협력자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악은 속죄하지 못합니다. 악은 반드시 마지막에 폭로되고, 심판받고, 추방될 뿐입니다.
결국 아사셀 이야기의 중심은 광야에 숨어 있는 존재의 이름이 무엇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중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얼마나 멀리 옮기시는가에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 염소의 피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 속죄의 길을 열고, 다른 한 마리의 염소-아사셀을 위한-의 발자국은 성소 밖으로 이어져 죄가 떠나간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발자국마저 광야의 모래바람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남는 것은 한 가지 선포입니다. 모든 죄는 고백되었고, 사함을 받았습니다. 더럽혀진 성소는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진영 밖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백성들은 다시 정결함을 얻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선민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샬롬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