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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3대 파보(慶州金氏 三大 派譜)
1. 경주김씨 영분공 파보(慶州金氏永芬公派譜)
♣ 자(子) 29세손(二十九世孫) 명종(鳴鍾) 경주군(慶州君)
비(妃) 부인박씨(夫人朴氏) 릉(陵) 경주시 도지동 산20~1
이름은 명종이요, 벼슬은 신라와 고려에서 가간(角干)을 지내고,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封)하였다, 시호는 영분공(永芬공)이다, 부(父) 신라56대왕 경순왕의 아들 서열로는 8째이고, 실존 세째 왕자이다, 어머니는 죽방왕후 박씨이고, 비(妃)는 부인박씨(夫人朴氏)이다,
일부 종성에서는 죽방왕 후손은 김일과 김굉의 두형제이고 낙랑공주 왕씨 소생인 삼자가 은열이며, 김건이 네째아들이므로 다섯째가 명종이라고 의성김씨 족보서에 전해내려 옴으로 명종을 다섯째아들이라고 주장하고, 경주김씨에서 오자를 삼자로 만들어 경주김씨 파조로 한 것이라 한다, 이는 잘못된 족보 의식이다, 경순왕의 자손은 따님이 3형제이고, 아드님이 14형제인데, 9명만 실존하여 내려오므로,
♥죽방왕후 박씨 소생이 김일, 김굉, 김명종이고,
♥낙랑공주 왕씨의 소생이 김은열, 김석, 김건, 김선, 김추,이며
♥빈순안씨 소생이 김덕지로 9자이다,
영분공(명종)의 기록은 서기1585년 만력13년 선조18년에 인출된, 경주김씨 가보 (대보공 29세손, 봉 경주군, 시 영분공, 자손 임관 경주인, 묘재 경주부 제형산 북 금동방동 임좌, 배 부인박씨) 라는 기록이 있어 이 기록으로 실전된 실묘 찾기를 주력하여 영분공의 묘를 찾게 되었다,
또 영분공은 경순왕 비문에 죽방부인 세째 아드님으로 경주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영분공이며 경주김씨의 시조요 묘는 경주부 형제산 북 임좌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찾은 위치와 좌향이 똑같다,
왕자명종(王子鳴鍾)은, 경순왕이 친히 양국하시고자 하니, 명종이 부왕을 모시고 고려로 가니. 향차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치도록 길거리는 울음바다로 막히었고, 구경꾼들은 담을 두른 듯하였다고 삼국사기에서 밝히고 있다. 명종은 부왕의 높은 뜻이 값지게 이루어지는 평화적 국권 이양의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의연하게 왕자로서 체면을 지켜 처신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려의 초기에 경순왕의 덕을 이을 인품이기에, 고려의 태조 왕건이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하사 하였던 경주를, 왕자 명종(鳴鍾)에게 경주군에 봉하고 맡기니, 후손들에 의해 은밀히 신라를 상징한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경주김씨(慶州金氏)세계를 열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명문거족으로 일컬어지는 왕손의 성씨가 경순왕의 후손.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그 동안, 경주시 형제산 우봉산록 중심부에 소재하고 있는 명종(영분공)의 묘지는 오랜 세월동안 직계 손들이 수호하지를 않아 실전되어오다가 서기 2003년 5월31일 13시 30분경에 경주시내 남쪽 동방동 형제산에 있는 영분공의 묘를 오랜 탐사 끝에 발견하였다,
♣ 영분공파조(永芬公派祖) 명종(鳴鍾)은 시호가 영분(永芬)이다,
경순왕이 손국한후 고려조에서 각간을 지내고 경주군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에 의해 경주김씨 시조로 하였다가 영분공파조가 되었다, 그의 자손이 경순왕에서 나와 고려에 이르기까지 중신과 현관이 여럿이 빛났는데, 임홍공은 선부요, 우잠공은 오(澳)이요, 삼한벽상공신 예겸(禮兼)은 내사령이요, 주정(周鼎)은 태자소부요, 성(晟)이 하음백이며, 고려사학 12공도의 하나인 양산공도를 육성하여 나라의 인재등용에 공헌을 한 의진(義珍)은 평장사이다, 의진의 증손 영고(永固)는 문신난을 일으킨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영고의 아들 인경(仁鏡)은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 조총과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벽상공신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시문과 서예로 높아 명성을 떨쳤다, 인경의 아들 상서좌복야 궤(軌)공이 유명하고, 궤공의 대에이르러 아들들이 번성하니 문평공 영(螢)이요, 충선공 요(瑤)이며, 시어사 승무(承戊)공과 성무공, 평무공, 충무공, 기공의 형제들과 아들들과 손자들이 대거출사를 하니 서인(瑞仁)이 정랑이요, 서건(瑞建)이 판서요, 정윤(正閏)이 병부시랑이며, 남길(南吉)이 평장사요, 영장(永長)이 한성서윤이며, 황(璜)이 참교리고, 충유(沖裕)는 두계공, 충한(沖漢)은 예의판서, 충보(沖保)가 시어사, 충익(沖益)이 밀직공이다,
이 뒤로 자손이 더 번창 하였는데, 벼슬과 문장과 덕행이 높아 세인이 중히 받드는 종파의 자손이 많았고, 고려의 충신 수은공 충환은 육은공에 한분이며, 고려 예의판서로 군소란정으로 이르자, 혼탁함에 섞이지 않으려고 오직 청백정직을 지키었다, 그의 자(子) 손들이 자공은 현령이요, 승공은 부사요, 작공은 직제학이며, 여공은 좌찬성으로 고려산씨 포시다,
그 중 조선조의 구국의 일념으로, 순국한 분들도 한성부판윤 경로공은 임진왜란에 순국하였고, 익수공은 주부요, 공은 동지시며 임란에 권율장군 휘하에서 의와 용을 떨쳤고, 광옥공은 통덕랑이요, 홍공은 진사이니 병자호란에 의거를 하였다,
만익공은 무신란에 창의를 하였고, 주부인 정공과 판관인 성공은 임진에 의거하였고, 복공은 경술과 학문이 높았고, 참봉인 성건공은 임진왜란에 의거를 하였다,
현감인 사종공은 선전관인 언종공과 함께 임란에 진주성에서 순국을 하니, 그의 아들 귀현공과 선전관인 효남공도 강화에서 순국하였다, 이렇게 문음으로 승습한분들이 혜아릴 수 없이 많으니, 가문을 빛낸 영분공의 후예이다,
후손들은 분파와 분관으로 가문을 빛내고 일컬었으니 대략 파벌문중만 해도, 영분공 명종파, 밀직공 충원파, 평장사 남길파, 두계공 충유파, 월성부원군 천서파, 수은공 충한파, 강릉공 충하파, 시어사 추보파, 참의공 생수파, 참찬공 충익파, 평양상한공파, 추공공 자파, 쌍향당공 구파 ,정제공 륜파, 교리공 유윤파, 창의공 침파, 완서정공 복파, 종사랑공 응로파, 통덕랑공 요파, 함평현감공 식파, 지암공 호파, 오봉공 훈파, 교위공 부파, 월호공 집파, 생원공 숙파, 은곡공 열파, 봉사공 한파, 부윤공 건파, 한천공 광철파 ,녹우정공 광옥파, 남평현령공 유직파, 첨전공 광준파, 통덕랑공 현파, 죽헌공 위만파, 판윤공 경로파, 장흥부사 유율파, 사직공 광원파, 직장공 형로파, 부사공 승파, 남천공 작파, 통덕랑공 수로파, 금구현령공 의종파, 참봉공 의겸파, 청제공 미파, 백졸공 선파, 수성제공 선파, 이루공 수파, 남호공 급경파, 두개공 입경파, 송헌공 직경파, 죽원공 신경파 등등의 문중이요,
영분공파 명종계 분관후예들은 관향을 본관으로 하여 가문을 연 김씨들이 우잠군(김오)의 우봉김씨, 하음백(김성)의 강화김씨, 낙안군(김수징)의 낙안김씨, 한성부서윤(김영장)의 영천김씨, 부총관(김인)의 해남김씨. 당악김씨. 충원군(김남길)의 충주김씨, 시어사(김승무)의 평산김씨, 조선조 벼슬한(김이진)의 월성김씨, 김제군(김정걸)의 김제김씨, 희원군(김을진)의 창원김씨, 부호군(김환)의 부평김씨, 교하군(맹성)의 교하김씨, 정언(운민)의 평양김씨, 전라좌수사(선)의 배천김씨, (종직)의 영김김씨, 부사(주)의 옥성김씨, 생원(점)의 임하김씨, 정랑(구량)의 잡계김씨, 한양군(순)의 한양김씨, 오위장(수)의 현풍김씨, 현감(익구)의 화순김씨, (운민)의 풍양김씨, 계림부원군(구사)의 계림김씨 등이 가문을 열어 경주김씨 영분공파에서 뿌리를 내려 분관된 김씨의 세계를 펼쳐오는 명문가들이다,
2. 경주김씨 대안군 파보(慶州金氏大安君派譜)
♥ 이십구세손 은열 (대안군) 대안군 파조 일세 계보
♥ 二十九世孫 殷說 (大安君) 大安君 派祖 一世 系譜
(妃) 부인이씨(夫人李氏) 릉(陵) 개성 용남면 용흥리
휘가 은열(殷說)이다,
벼슬이 고려조에서 태자소전을 역임하고 공부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고려에서 대안군(大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부(父)는 신라56대 경순왕(敬順王)의 서열 9번째 아들이며 실존 4번째 왕자이다, 모(母)친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이고, 비(妃)는 전주이씨 공부시랑의홍군 첨의 딸, 부인이씨(夫人李氏)다,
대안군은 937년에 태어나 1028년에 향수 92세에 돌아가셨는데, 고려의 예법에 따라 장사 하였다, 묘지는 나라에서 하사하여 개성군 용남면 용흥리 화곡 오용산 남측 임좌에 썼다, 공의 릉묘 또한 직계 후손들이 수호하지 못하여 오랜 세월 실전되었다가 서기 1784년 정조 8년에 대안군의 지석이 발견되어 공의 묘지가 화인되었다,
대안군의 지석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김부(金賻)(경순왕)의 네째 아들이며 고려때 평장사인 휘 은열(殷說)로서 무진년 3월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밖깥 종암아래 오흥산 남쪽기슭 쌍용합곡 임좌 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鎰)과 굉(굉)과 명종(鳴鐘)이요, 아우는 석(錫)과 건(鍵)과 선(鐥)과 추(錘)이며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라고 하였다,
대안군 영단은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량포리 의 경순왕릉 가는 입구 우측에 대안군 은열공의 영단이 마련되어있다,
공의 후손들은 고려에서 대안군에 봉군 되었으므로,경주김씨 시조 일세(慶州金氏始祖一世)로 삼았다가 후에 경주김씨 대안군파조 일세(慶州金氏大安君派祖一世)로 하였다,공의 후손들이 가문을 빛내니 공의 아드님 숙승(叔承)은 공부시랑과 평장사를 역임한 문무를 겸비한 장수로 거란군을 무찔렀다, 8세손 봉모(鳳毛)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며는 과반사로 천거되었으며, 나라의 큰일에 항상 전례를 맡아보았다, 봉모의 아들 태서(台瑞)는 고종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삼형제가 유명한데 약선(若先)은 원종비 경순왕후의 아버지로 추밀원부사를 지냈으며, 경손(慶孫)은 고종 18년에 분도장군이 되어 병마사 박서의 휘하에 들어가 몽고군과 맞아 20여일간 분투끝에 격퇴를 하고, 고종 20년 대장군지어사를 지내으며, 기손(起孫)은 고종38년에 우복야를 지냈으며 이어 지문하성사, 중서시랑평사를 지냈다,
공의 6세손 인관(仁琯)은 예종때 조산대부를 거쳐 검교태자태사를 역임하였다, 인관의 9세손 자수(自粹)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안동에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가지를 않고, 아들에게 이르기를 (두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이곳에서 내가 죽는다, 너는 이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하라.)하였다,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홍목의 후손들이 8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경주김씨 문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영의정 홍경을 비롯하여 육조판서를 두루두루 역임한 노경과 그의 아들 정희는 특히 금석, 도서, 시문, 전예지학, 묵화에 뛰어났으며, 추사체를 이룩한 글씨로 유명하며, 그외 판서 노응과 좌의정 도희와 영조의 장인으로 어영대장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존된 한구요, 우의정을 역임한 관주 등이 인물이다,
판도판서공 장유(將有)는 고려말 판도판서를 지내다가 정국이 혼미해지자 충북 보은땅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장유의 후손 정(淨)이 유명한데, 중종2년에 중정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벼슬을거쳐 동부승지, 도승를 지내고 이조참판, 형조판서로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해 미신의타파, 향촌(鄕村)의 상호부조를 위한 향약(鄕約)의 전국적 시행등 많은 업적을 남기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 설흔여섯살에 세상을 떳다,
공의 12세손 병조판서 덕재(德載)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조선개국보좌공신이며,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이성계를 따라 함흥에 갔다가 중산(中山)에 은거(隱居)하였다, 또한 은열공의 11세손 현(峴)의 자손들이 벼슬길에 출사를 하니,아들 광저(光儲)가 좌찬성이요, 현손 순(順)이 호조판서이며, 증손 관(觀)이 이조판서이고 고손 충의공(忠毅公) 문기(文奇)이다, 문기는 세종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언,함길도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까지 이르렀다. 1456년 세조 1년에 단종복위모임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이개(李塏)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영조 9년 정구(鼎九)의 송원으로 복관 되었다,
한말에 와서도 가통을 빛낸 명신들이 많이 있었으니, 김용원(金庸源)은 1914년 희문의숙을 졸업하고 이중각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가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원이 되었고, 1909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나철(羅喆)의 교통(敎統)을 계승하여 제2대 교주가 되었고, 이듬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화룡현으로 총본산을 옮기고, 다시 영안현으로 옮긴 뒤 시베리아, 몽고, 중국의 각지에 교당을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례했다, 김광제(金光濟)는 일본에서 차관한 국채보상회를 조직하여 자주성을 찾자는 운동을 전개 하였고, 김관제(金觀濟)는 강년진 독립군 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내에서 항일 독립운동 지하공작을 폈다, 방우(邦佑)도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등 김준(金準)이 제율(第律) 등과 함께 나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기삼연(奇參衍)이 소집한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이 되어 고창, 광주, 동복 등에서 싸웠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됐다, 이렇게 조국의 자유 수호와 광복을 위하여 몸 바쳐 가문을 빛을 낸 인물들이 많다,
3. 경주김씨 대장군파(慶州金氏大將軍派)
♥ 30세손(參十世孫) 순웅(順雄) 대장군파조(大將軍派祖) 일세(一世)
배(配) 묘(墓) 황해도 안주(재령) 평창동
공은 신라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태자 2남으로 신라가 손국하면서 마의태자는 개골산으로 들어가고, 외활아버지 김억렴에게 맡겨져 형 선웅(善雄)과 함께 자랐다, 마의태자가 929년 태자의 나이 17세에 신라의 상국 김유렴의 딸 김영란과 혼인을 하였으며 930년에 장남 선웅을 낳았고, 932년에 차남 순웅을 낳았다, 935년 10월엔 경순왕이 고려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양국하는 군신회의를 열었는데 태자 나이 25세였다, 공은 일찌기 음양군 낭장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음양군용호위이군을 거치고, 육위대장군이 되어 안주홀성주(황해도 절도사)로 있으면서 북방의 축성을 선도 하였고 고려 광종왕의 북방방위에 큰몫을 하여 왕권신장에 공을 세웠다, 공이 황해도에서 졸하니 묘를 황해도 재령 평창동에 안장하였다,
공의 자손들이 고려조에서 김인위가 평장사로 현종왕의 장인이요, 김원종이 문화시중을 지냈으며, 김원충이 사도문화시중으로 문종왕의 장인이고 김원황이 중추원사 등을 역임하니 고려조에서 유명하였다,
위영의 손자 김근은 김부식의 아버지로 좌간의대부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사형제가 또한 유명하니, 장자 김부필이 병마판관이요, 차남 김부일은 비서성사주국에 이르렀고 김부의는 김부식의 아우로 추밀원사가 되어 묘청반란을 평정하여 돌아와 금대를 하사 받았으며 벼슬이 지제고에 이르렀고, 주국에 추증되었다,
김부식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서 대호부의사록으로 시작하여 직한림, 우사간, 중서사인이 되었고, 예종실록을 찬수하였으며, 예부시랑, 시어사대부 호부상서,한림학사, 승지, 평장사를 거쳐 수사공에 이르렀다,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좌군장으로 우군장 이주연과 함께 난을 평정하니 수충정란정국 공신이 되었다,
1138년에는 집현전 대학사 태자태사 등을 다시 겸했고, 1142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니 동덕찬화 공신이 되었다, 1145년(인종23)에 현존하는 최초의 정치사인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여 바치니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 개국 후에 봉해졌고, 인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하였다, 시문과 글씨에도 능하여 중국까지 그의 명성을 떨쳤으나 그의 수찬문집을 20여펀을 지었으나 전하지는 않는다,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김균(金균)은 고려때 밀직부사를 지냈고, 조선개국 때 이성계를 도와 좌명개국공신으로서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했으며, 계림군에 봉해져 후손들에 의해 계림군파조가 되었다, 공의 후손들이 정승판서가 대거하니 김만균이 월성부원군이요, 김명원이 좌의정 경림부원군이며, 김수렴이 첨중추부사 오은군이고, 김남중이 예조판서 경천군이며, 김주신이 영돈령부사 경은부원군 숙종국부(인현왕후)요, 김효대가 공조판서이고, 김사목이 좌의정이며, 김창희가 대제학이고, 구한말에서도 김홍집이 영의정 총리대신이다, 김홍집은 홍법14조를 발표하는 등 새로운 국가체제를 세우고 갑오경쟁의 대업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이 나라 정치사에 아니있는 곳이 없이 경주김문에 충심이 없는 곳이 없으며 빛이 아닌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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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굿샷 파 버디 이글 삶~~
주말에는 반가운 비 소식이 있네요 오늘도 건강한 하루 되세요~~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밤늦게 부터 비가 온다고 하여 바람이 부는 금요일 밤 입니다.
장마비가 온다하니 대비를 잘하시고 행복한 저녁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비가 오락 가락 하는 날씨지만 즐겁고 좋은 주말 오후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