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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유학의 지평에서 본 다산의 예론 - ‘위인후爲人後’ 문제를 둘러싼 청유淸儒와 다산茶山의 해
1. 서론
다산은 조선의 예송禮訟(예禮논쟁)이 발생한 후 약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예송의 쟁점이 되었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예학적 검토를 시도한다. 그의 논의는 예송禮訟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갈등을 객관적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학문적 관심인 동시에, 정치적 대립의 실상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양면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다.1)
다산은 예송을 다시 문제 삼음으로써 남인南人의 후예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해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송의 문제를 재론하는 그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산은 분명히 봉건 사회의 위기에 직면하여 유교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유교 사회를 재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예禮 문제는 봉건 사회의 질서의 핵심과 맞닿아 있는 관건적인 중요성을 가진 논제였다. 그 점에서는 나는, 예 문제를 통해 시대의 위기를 해쳐보고자 했던 다산의 학문적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근대성의 여명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에 찬성하지 않는다. 근대성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전통사상의 모든 긍정적 요소를 근대성의 일부로 평가하고 그 속에서 근대의 맹아나 여명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는, 전통을 정당하게 재평가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의 역사적 생명력을 박탈하고 그것의 참된 역사적 의의를 모호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본고는 예송 논쟁의 쟁점 문제였던 ‘위인후爲人後’(자식 없이 죽은 이의 후사가 됨으로써 그의 사회적 지위를 계승하는 예제) 문제를 통해, 다산의 학문적 관심을 동아시아 사상사의 지평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한국(조선) 일국사적 지평을 벗어나2) 당시의 유교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청대淸代 유학자들의 유교 논의의 지평, 특히 그 논의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고증학적考證學的 예학禮學과의 연관을 통해, 다산의 입장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다산의 주제를 당시 동아시아의 유교 세계의 전체 지평 속에 되돌려 놓는 일은, 유교 세계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던 문제사問題史의 지평에 발을 딛고서 조선이라는 개별 왕조의 국가 운영의 현실을 유교의 이념에 근거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다산의 학문적 목표를 이해하는 의미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청대 고증학의 성격과 다산학
다산이 예송의 중요 쟁점 사항을 재조명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유교경전의 해석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고 나아가 유교국가의 근간과 연결되는 중요한 논제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적 신념체계는 충(=국가질서)과 효(=가족질서)라고 하는 두 이념을 축으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그 두 이념은 일체화된 구조로 파악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두 이념은 적지 않은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대의 경학가經學家들은 그 두 이념 사이의 모순을 봉합하고, 그것이 일체화되어 있는 것으로 유지되도록 노력해왔다. 조선시대 정치사를 뜨겁게 달군 예 논쟁(禮訟)은 유교의 두 근간적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한 모순이 완전히 봉합되지 않고 대립적으로 발전함으로서, 유교 사회 조선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 두 이념의 모순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는 것은 유교 사회의 파국을 의미한다. 본론에서 다루는 위인후 문제가 청말의 시점에서, 근대입헌주의와 민주주의를 수용하던 시점에서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근대 수용과 변용이라는 과제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요긴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동아시아의 근대를 이야기할 때, 서구 사상의 수용이라는 면 혹은 그 근대 사상의 수용에 직면한 보수적 철학적 입장, 예를 들어 현대신유가의 입장만을 언급한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임을 면치 못한다.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
중국의 경우에도, 그 두 이념의 모순으로 인한 파국적 양상은 시대마다 되풀이되고 있었다. 특히, 제왕가帝王家 내부에서 발생하는 그 두 이념의 모순은 조선의 경우에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커다란 여파와 후유증을 남기곤 했다. 조선시대 예송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 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조선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의 경우에도 제실帝室 내부에서 발생하는 그 두 이념의 모순은 언제나 상당한 후유증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 모순들은 어떤 식으로든 봉합되었지만, 언제나 산뜻하게 정리된 형태로 결론 지워졌다고는 할 수 없다.3)
다산이 예송 문제를 재검토하던 그 시기(1800년에서 1814년 사이, 즉 19세기 초엽)의 중국(淸)에서도 예 이념의 모순을 둘러싼 토론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위인후爲人後’ 즉 후계자를 세워(그것을 입후立後라고 한다. 그 후계자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이 위인후 논쟁의 초점이었다.) 군위를 계승하는 장면에서 생기는 계통繼統(정치적 지위의 승계)과 계사繼嗣(혈연적 지위의 승계) 사이의 갈등을 해명하는 것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조선후기와 시기적으로 같이하는 청대 중기의 예학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현안 문제였다.
하지만,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는 그 문제는 인성론이나 이기론 혹은 수양론에 관한 철학적 토론처럼 추상적 담론의 차원에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위인후’의 논제는 사상사적으로 청대 중기를 이야기할 때 수면에 떠오르지 않는 잠복한 현안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청대 3백 년은 예학의 부흥기, 예학의 시대였다. 예학의 부흥은 유학의 경전 전체를 다시 검토하고 그것의 참된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경학 일반의 발전과 함께 한다. 그 시기의 유학자들은 유교의 이념과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경세적經世的 관심(socio-political concern)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청대는 사상이 없는 시대, 훈고학적 고증 만능의 시대로서 중국 학술이 쇄말화瑣末化되고 활력을 잃은 시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선입견은 아마도, 이기-심성의 토론이 유교의 핵심문제이며, 송명시대의 사상적 활력은 결국 그 문제를 둘러싼 토론의 힘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들의 편견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청대에 이기론적 사상 논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아가 유교적 인간의 완성을 지향하는 심성론적 수양론의 논의가 도외시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청대 중기, 특히 건륭乾隆 가경嘉慶 이후의 유학자들은 유교의 사상 체계 전체를 뿌리에서부터 문제 삼는 학술적 관점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유교적 지식(=知)은 경전과 분리되어 논의될 수 없다. 유교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모든 지적知的 구상은 경학적 지식을 무시할 수 없다.
경전을 전체로서 살피지 않고 경전의 어떤 한 문제를 과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추상적 철학 담론(=송명 이학의 방식)은, 유교 질서의 회복이 문제되는 시대 상황에서는 오히려 문제의 초점에서 벗어난 비현실적인 지식의 생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서 청대의 경학은 쇄말화瑣末化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적 통로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청대에 있어 실천된 유교 경학의 특징이었고, 청대 유학자들이 지향한 ‘실학’의 의미였다.
청대의 학술은 언뜻 보아 사상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청대의 학술은 경학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그 경학의 해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해석학적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사상적 토론이 활발한 시대였다.4) 청대 중기 이후의 유학자들은 경전의 학문을 통해 유교 사회의 쇠퇴를 구제하는 방안을 강구했고, 예 질서의 회복이 그 방안의 핵심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예학에 학문적 정력을 쏟았다. 그 사실은 사고전서四庫全書와 속사고전서續四庫全書, 황청경해皇淸經解, 속황청경해續皇淸經解 등에 수록된, 청대의 학술성과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물론, 그러한 성과들 역시 청 왕조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일정정도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내포하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5)
유학의 지식이나 이념은 경전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경전의 연구를 벗어난 추상적 담론은 유교 체계 안에서는 공허한 학문, 즉 허학虛學으로 자리 매김 될 가능성이 높다. 유교 경전은 그 내용이 방대하며 엄청난 해석의 역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이 온전히 마스터 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청대의 시점에서 경학은 이미 한 두 사람의 사상적 천재가 등장하여 한 시대를 석권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 시대는 소수의 사상적 영웅이 지배하는 중세적 분위기를 벗어 던진 시대, 지식의 양이나 질에서 엄청난 분화와 다원화가 실현되어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6) 다산은 조선 땅에 살면서, 학술문화의 선진지역이었던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유교 재해석의 활기찬 움직임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다산은 아마도 우리가 오늘날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선진 중국의 학문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위인후’를 둘러싼 이학理學의 입장
예 질서의 회복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 중의 하나가, 제왕적 지위의 계승을 둘러싼 문제, 소위 ‘위인후爲人後’라고 표현되는 계통繼統과 계사繼嗣의 모순, 충忠과 효孝의 모순에 관한 예학적 반성이었다. 그들의 예학적禮學的 반성은 예가 유교적 질서의 근간이며, 유교적 세계의 위기는 예 질서의 재정립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의 연장선에서 제기된다. 경학의 여러 문제들 중에서도 예 질서의 근간에 놓인 두 이념7)의 이중적 관련성(조화와 모순)을 시대적 상황과 연결시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가 하는 것은, 고증학이 진정한 실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송대의 이학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굳어버린 예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교정하는 계기가 되는 관건적 지점이었던 것이다.8) ‘위인후’ 문제는 명明 세종世宗(=嘉靖帝) 때의 ‘대례의大禮議’로 알려진 예 논쟁을 해명하는 학술 현안이었다. 연원적으로 그것은 송宋 인종仁宗 때에 발생한 ‘복의濮議’와 직결된다. 나아가 그것은 이학理學과 비이학非理學, 송학宋學과 청학淸學의 차이를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문제이기도 했다.
1) 대례의大禮議의 경과와 논점
가정嘉靖 대례의大禮議는 세종世宗이 무종武宗의 뒤를 이어 황위를 계승하면서 발생한다. 1520년 무종이 자식이 없이 죽자, 내각대신 양정화楊廷和는 「황명조훈皇明祖訓」의 ‘형종제급兄終弟及’이라는 황위계승 원리에 근거하여, 효종孝宗(무종의 아버지)의 동모제同母弟이며 무종의 숙부였던 흥헌왕興獻王의 독자獨子 후총厚熜으로 하여금 제위를 잇게 하였다. 후총厚熜(世宗)은 무종의 종제從弟(사촌 동생)이었다. 세종世宗(厚熜)은 즉위 후에, 친아버지인 흥헌왕의 주사主祀(누가 祭主인가) 및 봉호封號(稱謂) 문제에 대해 예부禮部의 자문을 구한다. 양정화와 모징毛澄은 송대 복왕濮王의 경우와 한대 도정왕陶正王의 경우를 들어, 세종은 ‘입사대통入嗣大統’(혈통과 제위를 계승)하여 효종의 ‘후後’(후사)가 된 것이므로 효종孝宗을 황고皇考(돌아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며, 친아버지 흥헌왕興獻王을 ‘황숙부’라고 부르고, 흥헌왕의 부인(후총의 親母)을 ‘황숙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편 익왕益王의 아들 숭인崇仁을 ‘흥헌왕’의 후사로 들이고(흥헌왕의 주사는 숭인崇仁이 된다. 후총은 자기의 친아버지를 제사지낼 수 없다.) ‘흥국’을 계승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세종(후총)은 ‘부모를 바꿀 수는 없다’는 입장에서 재의再議를 명령하였다. 그러자 양정화 등은 다시 송대의 복의濮議에서 제시된 정이천程伊川의 입장을 근거로, 흥헌왕을 ‘황백고’라고 불러야 한다고 건의했다.9) 세종은 그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양정화 등은 계속해서, 흥헌왕을 ‘황고’(효종이 황고가 되는 것이므로)라고 불러서도 안 되며, 그를 태묘에 안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천자만 태묘에 들어간다.). 세종이 친생 부모를 높이는(“尊崇本生”) 것을 반대하고, 세종이 효종의 후사로 들어와 그의 아들(子)이 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세종은 끝내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정국이 경색되었다.
같은 해 7월, 세종의 의도를 헤아린 장총張璁은 「대례소大禮疏」를 올려 ‘계통’과 ‘계사’는 분리될 수 있다[嗣統二分]는 관점을 제시한다. 세종은 무종의 뒤를 이어 제위를 계승(繼統)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효종의 후사後嗣가 될 필요가 없다. ‘계사’와 ‘계통’은 별개이기 때문에, 세종은 친생 부모를 존숭尊崇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경사京師(태묘에 들이지는 못하지만)에 흥헌황을 제사지내는 별묘別廟를 세울 수 있고, 세종과 흥헌왕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를 단절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즉, 흥헌왕을 그냥 황고皇考라고 부를 수 있다.). 이렇게 장총과 양정화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예 논쟁이 불붙었다.
그 후 근 20년을 끈 대례의大禮議는 1538년, 세종이 친아버지인 흥헌왕을 위해 “명당明堂을 건립하고, 황제皇帝 칭호를 부여하고, 종宗을 칭하여 상제上帝에게 배사配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당시의 대학사 하언夏言과 예부상서 엄숭嚴嵩은, 명당明堂 건립, 칭종稱宗, 부묘祔廟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천자天子의 신분을 가져야 하는데, 흥헌왕은 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예제적 조치들을 취할 수 없다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장총 역시 반대했다. 그는 경사에 흥헌왕을 위한 별묘를 세울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태묘에 흥헌왕을 들이는 것과 칭종稱宗은 지나치다고 보았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황고를 버리게 한다면, 이는 나에게 아비가 없게 만드는 일이며, 그것은 인간 된 도리로서 참을 수 없는 것”[去我皇考, 是無父, 人情不堪]이라는 세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황제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흥헌왕은 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호를 얻어 ‘예종황제睿宗皇帝’로 추존되고, 태묘太廟에 부입祔入되었으며, 가을에 황극전皇極殿에서 상제上帝에게 대향제大饗祭를 올릴 때 배향配享되는 신분으로 격상된다. 이로서, 명대 초기의 정계를 달구었던 격렬한 예 논쟁은 일단락된다.10)
양정화로 대표되는 내각대신들은 그것이 유교적 종법질서(家國의 一體構造)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후총이 ‘위인후’로서 제왕의 대통大統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먼저 혈연적으로 제왕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계사先繼嗣, 재계통才繼統”(먼저 혈연적 계승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대통의 계승이 있다.)라는 입장이다.
그에 비해, 장총張熜 등은 “사통이분嗣統二分”(계사와 계통은 분리 가능하다)의 입장에서 세종이 제왕의 대통만을 계승하고 혈연적 지위는 계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세종을 옹호했다. “지계통只繼統, 불계사不繼嗣”(대통만을 계승할 뿐, 혈연은 계승하지 않는다)의 논거이다. 그러한 논거에 따라 세종은 생부를 태묘에 입사立祀하고 제통帝統의 계승을 어지럽히며, 왕위계승의 계보를 날조하기에 이르렀다.
양정화楊廷和의 “계통필선계사繼統必先繼嗣”의 입장은 두 가지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명태조의 유훈으로 남겨진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송대 복의에서 전개된 사마광司馬光과 정이천程伊川의 이론이었다. ‘형종제급’의 원리는 자식이 없는 군주는 ‘적모소생의 친제’로 하여금 왕권을 계승(繼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무종은 자식은커녕 친동생조차 없었다. 양정화는 고심 끝에 후총의 부친 흥헌왕興獻王이 효종孝宗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였다. 효종孝宗의 일맥은 무종武宗에서 단절되었으므로, 먼저 효종孝宗을 위해 후사를 세울(立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효종孝宗은 헌종憲宗의 제3자이며 제4자인 흥헌왕興獻王은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리에 따라 효종孝宗의 뒤를 이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흥헌왕 역시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적자인 후총厚熜이 효종孝宗의 친제親弟의 적자嫡子의 신분으로 효종의 뒤를 잇게 만든 것이다(‘入繼爲孝宗後’).
이렇게 되면 후총厚熜과 무종武宗의 관계는 부모를 같이 하는 형제의 신분으로 변한다. 무종이 자식이 없이 죽었으므로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리에 따라 무종의 아우뻘(친아우는 아니다)인 후총이 천자의 지위를 계승하는 입계대통入繼大統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 것이다. 예학적으로, 후총厚熜이 입계入繼한 것은 무종武宗이 아니라 효종孝宗이며, 후총은 과계過繼를 통해 효종의 후後(=子)가 되었다는 것이 양정화의 주장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양정화는 후총(세종)이 본생本生 부모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를 반대했다. 여기서 우리는 양정화의 관념 속에서, 정치적 지위를 계승(繼統)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혈연관계(嗣)를 단절시켜서라도 새로운 신분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읽어낼 수 있다. 제통帝統의 계승(繼統)이 근본원리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통帝統을 계승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므로, 친생 부자의 혈연적 관계를 단절시켜서라도 제통帝統을 이어야 한다. 혈연신분보다 정치신분이 더 중요하다는 이념이 작동한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사의 연속성을 통의 연속성 못지않게 중시하는 다산은, 세종이 효종의 후가 아니라 무종의 후가 된 것이며, 친생부자의 관계도 단절되지 않는다고 본다. 청대 초기의 모기령도 마찬가지다.).
2) 송대 복의濮議와 이학理學의 입장
양정화楊廷和의 예 이념을 지배한 또 하나의 역사적 선례가 있었다. 송宋 인종仁宗 가우8년嘉祐8年(1063년)에 발생했던 ‘복의濮議’로서, 역시 존친의 갈등에서 비롯된 예송이었다. 인종仁宗이 자식 없이 병으로 죽자, 인종仁宗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복안의왕濮安懿王의 제13자인 조서趙曙(宗實)를 입사入嗣시켜 제위帝位를 계승하게 하였다. 그가 영종英宗이다. 즉위한 영종은 재상宰相 한기韓琦(1008-75)의 “청존소생請尊所生”이라는 건의에 따라 친부 복왕濮王을 존숭尊崇하는 예禮를 토론하도록 지시하였다.
한기와 구양수(參知政事, 1007-72)를 비롯한 정부 고관들은 영종英宗의 존친尊親에 찬성하고, 복왕濮王을 황고皇考라고 불러야 하며, 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 것[立廟崇祀]을 주장했다. 그러나, 왕규王珪(1019-85)와 사마광司馬光(1019-86) 등 대간관臺諫官들은 영종英宗은 복왕이 아니라 인종仁宗을 황고皇考라고 불러야 하며, 친부인 복왕에 대해서는 고考(돌아간 아버지)이라고 부를 수 없고 황백皇伯이라 불러야 하며, 묘를 세워 제사하는 것은 불가하며 스스로를 질姪(조카)이라고 호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학적 지식인들로서는 그 문제가 사회의 근본기강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한바탕 예 논쟁이 펼쳐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광 등의 논점은, “위인후자위지자爲人後者爲之子, 불득고사친不得考私親”11)(위인후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친생의 정을 고려할 수 없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입장은 이학의 대가 정이천(1033-1107)의 예론에 의해 강화된다.12) 정이천은 위인후자爲人後者와 친부모(本生-이 개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모기령은 비판한다. 정이천의 개념으로서 일단 사용한다.)의 관계는 단절(‘絶斷’)되는데, 그것은 “천지대의天地大義, 생인대리生人大理”(하늘의 대의이며, 인간의 큰 이치)라고 주장한다.13) 이학적 논점에 근거해 볼 때, 영종英宗이 복왕에 대해 칭친稱親(아버지라고 부른 것)하는 것은 제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심私心’(사사로운 감정)의 발로이며, 천하의 ‘공론公論’(제왕이 지녀야 할 공정한 태도)에 위배되는 것이다. 정이천은 영종英宗에게 “거칭친지문去稱親之文, 이정인륜以正人倫”(친부모를 섬기는 허식을 버리고, 인간의 도리를 바로 잡으라)는 충고와 함께, 그것은 “단지 오늘날의 일을 바로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만세의 법을 세우는 일”[不獨正今日之事, 可以爲萬世之法]임을 강조한다. 천리天理의 관점에서 명칭을 바로잡고[正名稱], 인륜을 바로 세울 것[端人倫]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이학가적 훈계였다.
이학 사상가들은 예禮=이理라는 기본 입장에 서서, 예禮를 우주적 원리로 고양시키고, 그 예禮=이理의 원리를 가국家國(가-국 일체화의 종법 질서로서의 국가)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학적 이념을 가진 유학자들은 제왕의 지위를 인간사에서 가장 고귀한 근본으로 보면서도, 제왕 역시 수명受命의 왕자王子(Prince endowed with Heavenly Decree)로서 이=예의 이념에 굴복해야 하는 존재로 파악한다(그 점에서 이학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제왕은 최고의 권위이지만, 한편으로 이理에 복종해야 한다. 그 이理를 이해하는 이학가理學家는 제왕을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한다. 왕권을 높임과 동시에 견제하는 이념이다. 과거 중국 정치사에서 재이론災異論, 천견론天譴論이 수행했던 역할을 천리天理=이理 이념이 떠맡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천견天譴의 이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학적 입장에서는 위인후爲人後로서 입사대통(혈연과 지위를 계승)한 자식이 친생부親生父를 아버지로 섬기는 것은 ‘인자불이친人子不二親’이라는 대론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며, 영종英宗은 이미 인종仁宗의 자식이 되었으므로(사인종嗣仁宗) 인종仁宗에게 칭부稱父-칭친稱親-칭고稱考 해야 하며, 복왕濮王에게 칭친-칭고-칭부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친二親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고, “진실로 인륜의 해체고 천리를 파괴할 것”[苟亂大倫, 天理滅矣]이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구양수, 한기 등은 이학의 입장과 달리 “예는 본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친생부모의 키운 은혜를 잊지 않는다”[禮不忘本, 親必主恩]는 예의 기본 의미에 근거하여, 상복에서도 친생 부모에 대해서는 “단계를 하나 낮추긴 하지만, 완전히 끊는 것은 아니다”[降而不絶]이라는 관점에서 위인후자爲人後者와 친생부親生父의 관계는 여전히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마광의 “사사로운 친생관계를 끊는다”[絶私親]는 주장과 달리, “위인후가 된 사람은 그를 낳아 준 부모와 단절되지 않는다”[爲人後者, 不絶其所生之親]는 점을 강조한다. 부모를 ‘황백’이라 고쳐 부르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無稽之論]으로서, 친생을 존숭하는 태도는 유교의 근본 가치인 인의仁義를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한다.14)
하지만, 영종英宗의 즉위 기간은 4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신종神宗기에 들어서는 정이천程伊川과 같은 입장을 견지했던 팽사영彭思永의 탄핵과 이학파理學派의 입장 때문에 구양수의 입장은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3)‘위인후’에 관한 이학적 관점의 정리
송대 복의의 경우이든, 명대 대례의의 경우이든, 친생 부모를 높이는 친친親親(尊親生)에 반대하는 논자들은 정주이학의 ‘명분강기’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이 황위계승皇位繼承의 장면에 적용될 때에는, 사마광, 정이천(濮議), 그리고 양정화(大禮議)가 견지하는 바대로, 먼저 혈통을 이어야 비로소 왕통을 이을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繼嗣才能繼統”)으로 귀결된다. 그 주장은 제통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제통帝統과 사통嗣統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위인후자爲人後者, 즉 입계자入繼者는 본래의 혈연적 맥락에서 완전히 단절된 다음에, 새로운 신분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제위를 계승(繼統)할 수 있다. 그러한 논리는 전통 중국의 가천하家天下 혹은 일성一姓, 더 정확하게는 일성一姓 중의 특정 지파支派의 천하라는 이념을 고수하기 위한 의례적 장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칭위稱謂의 문제가 예 논쟁에서 중심 논제로 존재했던 이유는, 제위를 계승할 수 있는 지파支派를 확정하는 것이 제위 계승의 선결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정치신분(尊尊)과 혈연신분(親親)은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리관념 하에서는, 정치신분이 혈연신분을 압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입장은 송명 이후의 군권 독존의 경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君權=尊이 夫權=親에 비해 우월적이다.).
송명 예송에서 드러난 정치신분 우위론, 즉 친친에 대한 존존의 우위는 일견 신권臣權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북송 중엽 이후는 이학이 예학을 압도하는 시대였고, 예학의 이학화 경향이 심화되어 가는 시대였다.15) 그러한 천리론天理論의 입장에서 예禮는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綱紀=三綱)으로서, 존비尊卑=군신君臣의 분分으로 규정된다.16) 이러한 천리론의 관점에서 제왕의 독존적 지위에 대한 승인과 절대왕권 확보의 정치적 논리가 확립된다.17) 여기서, 본래 종법제의 원리에서라면 균형을 유지해야 할 친친18)과 존존의 조화적 균형이 개어지고, 존존 우위의 입장이 득세한다. 존존의 기초가 되어야 할 친친은 오히려 존존에 예속되면서 두 원리의 긴장적 조화가 깨어지는 불균형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19) 명대의 대례의大禮議의 존존 일변도에서 보는 것처럼, 이학적 예론에서는 친친이라는 혈연관계가 존존이라는 정치사회관계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학의 존군론의 영향 하에 있던 명대에는, 대례의大禮議 논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친과 존존은 친부에 대한 효를 우위에 두는가 아니면 왕통의 권위에 대한 충성을 우위에 두는가 하는 문제로 변질된다.20) 송 이후에 군신 사이의 지배복종의 도덕(綱紀)이 부자 관계의 도덕(孝悌)을 훨씬 초월하는 예제의 대변화가 일어났던 사정과 맥을 같이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명대에 들어오면서, 군신 관계의 상하복종 관계는 더욱 엄격해지고, 그 관계는 의례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확대된다.21)
4. 청대 유학의 ‘위인후’ 인식
만주족이 건립한 청이 중국을 지배하는 정통성을 확보함에 따라, 한족 지식인들은 대단한 실의감에 빠졌다. 그 결과 청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1세기 동안은 사상적 문화적 공백기를 맞이한다. 여기서 그 시기 동안의 유교학술의 성격과 발전을 논할 여유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만주족 정서를 가진 지식인들 역시 이민족 정권의 지배를 현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민족 정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가치가 지배이념으로 존립하기 위한 학문적 탐색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그들의 학문적 탐색은 송명시대를 풍미한 사변적인 형이상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송명이학에 대한 반동적 경향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시대적 요청과 결부되어 있었다.22) 그 시대의 요청 중의 하나가, 유교 전통의 총체적 재해석이었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유교이념의 근거인 경전에 대한 전반적 탐색으로 귀결된다. 그 중에서도, 유교질서=예 질서 전체에 대한 총체적 탐색의 요구로 인해 청대는 예학의 전성기였다.23) 예학 부흥의 움직임 속에서 존존과 친친의 문제 및 그것과 연관된 ‘위인후’ 문제가 예학가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하다.24) 본론에서는 청초 고증학적 학풍의 흥기를 대표하는 모기령毛奇齡과 청 중기 이후의 고증학의 본격적 발전을 대표하는 단옥재段玉裁에 한정해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모기령毛奇齡의‘위인후’인식
모기령25)은 양정화, 정이천의 예학적 주장은 “부독서不讀書, 오인국사誤人國事”(독서의 부족으로 인해 사람과 나라의 일을 그르친 것)26) 논거 부족이라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명 대례의大禮議에서 양정화楊廷和가 내세운 ‘형종제급兄終弟及’론은 전혀 그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제급弟及은 먼저 동모제同母弟(嫡弟)에 미치고, 동모제同母弟가 없을 경우에 동부제同父弟(庶弟)에 미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백부伯父나 숙부叔父의 자식인 종형제從兄弟를 제급弟及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明 세종世宗이 된 후총厚熜은 무종武宗과 종형제 사이로서(=異父異母弟) 전혀 제통帝統을 이을 명분이 없다. 여기서 유교 예 질서의 근본이 무너진 것이다. 만일 무종武宗의 후後를 들이고자 했으면 ‘장적지자배長嫡之子輩’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했어야 한다. 헌종憲宗의 열 명의 적자嫡子의 손자배孫子輩에서 ‘장적長嫡’의 신분에 있는 자를 선택하여 무종武宗의 자子로서 입사立嗣시키고, 그로 하여금 무종武宗의 후後를 잇도록 했어야 한다. 제계帝系는, <헌종-효종-무종-입계주>로 이어지는 방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정화楊廷和는 효종孝宗의 서제庶弟의 자子인 후총厚熜을 입계入繼시켰기 때문에, 후총(세종)은 효종孝宗을 잇는 것 같기도 하고 무종武宗을 잇기도 하는 이상한 모양새를 취한다. 그 결과 세종世宗이 무종武宗을 아버지로 보아야 할지, 효종孝宗을 아버지로 보아야 할지 모르는 난맥상이 초래된다. 여기서 부자형제, 백부숙부의 倫序가 혼란, 유교적 윤리의 근본이 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 다음으로 계통․계사 문제에 대해, 양정화는 “계통필선계사繼統必先繼嗣”, “위인후자위지자爲人後者爲之子”에 근거하여 세종은 효종孝宗의 후後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총張熜은 “사통이분嗣統二分”, 세종世宗은 “계통불계사繼統不繼嗣”의 관점에서 효종의 후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모기령은 “지위를 잇는 것이지 사람을 잇는 것이 아니다.”[繼爵不繼人] “세종은 무종의 후사이며 효종의 후사가 아니다.”[世宗當後武宗, 不後孝宗]라는 관점으로 비판한다. (세종이 무종의 후라고 본다. 다산의 입장도 비슷하다.)
모기령이 보기에 세종이 효종의 후라고 하는 양정화의 논리는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장총의 이론이 예의 원리에 적합하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명 세종이 궁중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황사로서 미리 지정되지(預立) 않았기 때문에 효종의 후가 될 이유가 없다고 하는 장총의 주장은 예립預立의 여부에 따라 위후爲後 여부를 판단하는 엉터리 이론이라고 한다.
모기령은 “계작불계인繼爵不繼人”의 관점에서 계통繼統과 존친尊親(=친친)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다. 작위爵位를 계승하는 것과 본생本生을 보존하는 것은 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상 발생했던 입계주入繼主의 존친尊親(=친친)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송명 이학가들은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입만 열면 엉터리를 말한다”[不讀書, 開口便錯]라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모기령의 입장은 묘통廟統(廟次=昭穆)과 세통世統(世次)의 병존 가능성을 주장하는 데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묘통廟統은 곧 제통帝統이다. 즉 살아있을 때의 제통帝統이 죽은 다음에는 묘통廟統으로 전환된다. 제왕이 제위에 있었던 선후 차례에 따라 사후에 태묘에 안치되는 순서가 묘통=묘차이다. 그 묘차는 소목昭穆27)의 원리에 의해 정해진다. 모기령은 제위의 계승 즉 계통繼統과 친생부의 혈연적 계승(世統)은 구별되어야 하는 두 개의 별개의 원리로서, 위인후자 한 사람이 모순 없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이러한 모기령의 입장은 다산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묘차에 있어서 소목의 관계에 있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반드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묘차廟次에서는 부자父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소목昭穆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모기령은 그 점에서 묘차를 이야기할 때 흔히 말하는 부자父子는, 정확하게 말하면 부배父輩(아버지뻘)와 자배子輩(자식뻘)라고 말할 수 있을 다름이라고 확인한다. 그런 용어의 차이는 고대의 예법에서 생명혈연의 윤서倫序(계승)와 정치신분의 윤서倫序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불천위不遷位가 아닌 예묘禰廟, 조묘祖廟, 증조묘曾祖廟, 고조묘高祖廟 중에서 예禰(아버지), 조祖(할아버지) 등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부배父輩, 조배祖輩라고 불러야 옳다. 위인후爲人後로 제통帝統을 이은 후군後君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군前君은 예제적으로는 ‘예묘禰廟’에 안치되고 부父라고 불리지만, 실제로 묘제廟制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 부父는 단지 ‘예제상의 정치적 신분’일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인후爲人後가 된 사람은 친생부에 대해 어떤 예제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명대 대례의大禮議에서 가장 심한 논란의 대상이었던 이 문제에 대해 모기령은 “서족庶族으로서 입계자入繼子가 된 제왕帝王은 본래의 아버지(所自出)를 위한 묘廟를 따로 세워 그를 존숭尊崇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적족嫡族이 아닌 지파(庶族)에서 위인후爲人後로 제왕이 된 사람은 위에서 말한 사친묘四親廟(禰, 祖, 曾祖, 高祖廟) 이외에 별도로 자기의 출생 근거인(所自出) 아버지의 친묘親廟(=別廟)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친생부를 소목昭穆의 위차位次에 배열시키고 천제天帝에 대한 제사에 배향하는 것은 시조始祖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 세종世宗이 본친생부本親生父를 태묘太廟에 입사立祀한 것과 천제天帝에 배향配享한 것은 예법에서 어긋나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생부와 단절할 것을 주장하는 양정화, 사마광, 정이천의 입장 역시 그에 못지않게 예법에 어긋난다.
이러한 묘차廟次 문제에서 송명 예 논쟁에서 큰 논란이 되었던 칭위稱謂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도출된다. 모기령毛奇齡은 칭위법의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아버지가 돌아가면 고考라고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면 비妣라고 한다.”[父死稱考, 母死稱妣.] 즉 살아있으면 부父이고 돌아가면 고考인 셈이다. 그것은 자식이 효친孝親, 존친尊親하는 칭위稱謂로서 바꿀 수 없는 예법이다. 하지만, 명대 대례의大禮議에서 양정화楊廷和, 송대 복의濮議에서 정이천程伊川은 부모라는 호칭 위에 ‘본생本生’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 아무런 경학적 근거도 없이 ‘본생부本生父’, ‘본생모本生母’라는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다. 마치 부모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고, 다양한 칭위가 존재하는 듯이 본 것이다. 더구나, 본생부모(친부모)를 백숙부伯叔父라든지 황백皇伯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엉터리 중의 엉터리 이론이다. 결론적으로, 모기령은, 세종이 제왕의 지위를 이은 것을 기정사실로 본다면, 명대 대례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법을 제시한다. “세종은 효종을 조부로 받아들이고, 무종을 아비로 받아들이며, 흥헌왕을 추존하여 황제의 죽은 아비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를 위한 별묘를 경사에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公과 사私가 모두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祖孝宗, 禰武宗, 追尊興獻王爲皇考, 入廟京師, 卽公私具安.]
2) 단옥재의‘위인후’ 인식
청대 중엽 건륭․가경기에 본격적인 고증학풍이 일어나고, 적지 않은 학자들이 위인후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필자는 지폭의 한계와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 논의들을 언급할 수 없다.28) 여기서는 청초의 모기령을 이어 중기의 대표적 고증학자인 단옥재(1735-1818)의 ‘위인후’ 논의를 살펴본다.
설문해자주로 유명한 단옥재는 위대한 문헌학자이자, 언어학자였다. 하지만, 문자음운학자인 단옥재가 예학에 관한 수준 높은 논의를 전개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모기령 이후, 청 중기를 대표하는 명대 대례의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설 「명세종비례론明世宗非禮論」을 남긴 이가 단옥재였으며, 그의 학문은 경학의 현실적 적용에 관한 실천적 경세적 관심과 결부되어 있는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첫째 단옥재는 위인후의 성질에 대해, “위인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 항렬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며”[爲人後者不必皆子行], “다른 사람의 후사가 된다는 것은 마치 진짜 아들처럼 되는 것이다.”[爲人後者, 如眞子]라는 논점에서 접근 한다29)(이 두 관점은 다산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단옥재는 위인후예爲人後禮 그 자체는 형식상은 물론이고 감정적으로도 진짜 자식처럼(如眞子) 되는 예라고 본다. 그 점에서 위인후예爲人後禮는 위자예爲子禮와 완전히 동일하다. 따라서 후사를 들이는 사람(所後者)에 대해서는 고考라고 칭하고, 참쇠斬衰 삼년복을 하며, 소목의 순서를 따른다(모기령과 다르고, 오히려 이학의 입장에 접근한다.). 그리고 내면적 정서에 있어서도 그의 아들처럼 되는 것이기에, “기정其情, 칙여부자지정則如父子之情”이라고 한다.30) 이러한 “위인후자爲人後者, 여진자如眞子”의 기본 전제 위에서 단옥재는 계통과 계사의 일체화를 강조하는 예론을 전개한다.
먼저 계통과 계사의 일체화에 대해 살펴보자. 위인후爲人後는 여진자如眞子라는 그의 입장은 통統이 사嗣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31) 단옥재段玉裁는 전위례傳位禮는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데, 먼저 후사後嗣가 되고 그 통統을 이어받는 것, 즉 계사임통繼嗣任統이라고 한다. 만일 사嗣를 무시하고 그 바깥에서 통統의 계승을 찾는다면, 통統과 사嗣가 모두 단절된다는 것이 단옥재의 확고한 입장이었다.(이학의 관점에 접근한다.)
명 세종의 예 실행에 대한 단옥재의 입장은 위의 진자설眞子說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단옥재는 세종이 무종을 부父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친생부 흥헌왕을 태묘에 들였던 것을 비판한다. 위인후는 진자眞子와 마찬가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에 선다면, 세종은 반드시 무종을 부로 보아야 하고, 먼저 부자父子의 신분을 얻었기 때문에, 비로소 군통君統을 계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계통과 계사, 통과 사의 일체화를 강조한다.). 여기서 단옥재가 세종은 무종의 후라고 본 것은 이학의 입장과 차이가 난다. 단옥재의 입장은 일면 이학적 예학의 전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내는 점은 독특하다. 그리고 흥헌왕興獻王과 세종世宗은 세종이 제위에 들어서기 전에는 부자父子 관계였지만, 세종이 일단 제위에 오른 다음에는 흥헌왕이 신臣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이 점에서 그 관계가 전환한다. 그런 신분의 전환을 이해하지 못한 세종의 존친尊親 태도가 지나쳐서 마침내 흥헌왕을 천자天子만 들어갈 수 있는 태묘太廟에 입사立祀함으로써, 제통帝統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단옥재는 세종의 행위를 “삼강의 질서를 거꾸로 매달고, 국통의 단절을 초래하는”[倒懸三綱, 國統中絶]32)의 국기문란 행위라고 평가한다. 세종世宗의 삼강문란의 행위는 이중적이다. 즉, 부-자(세종-무종), 군-신(세종-흥헌왕) 두 강기綱紀의 문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단옥재의 예론은 ‘사친私親’과 ‘공통公統’을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그 두 계통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서 예 질서의 확보를 꾀하는 논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단옥재의 논리는 자세히 보면 이학에서 공통(존존) 아래에 사친(친친)을 복속시킨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친과 공통을 병렬적 불간섭적 이념으로 본 것은 다산과 대단히 비슷하다.). 그리고 승중承重(왕통의 계승)을 중시하는 대전제 아래에서, 입계자(後君)는 소계자(前君)에 대해 신하와 자식의 이중적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미계시未繼時에는 신하이지만, 이계후已繼後에는 자식이 된 것이므로, 여기서 사통嗣統의 합일이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친친과 존존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화된 구조를 가진다는 종법적 예학의 이념이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친친과 존존은 별개의 원리이면서 일체화되어 있다는 고전 유학의 가국일체家國一體의 종법제적 이상을 유지하기 위한 이론적 구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세종世宗의 경우에는 숭사崇私가 지나쳐서 “사사로운 자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공적인 통서의 계승이 중요한 줄을 알지 못한”[知有私己, 不知有公統] 결론을 내렸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마침내 “신불신臣不臣, 자불자子不子, 제자폐帝者廢, 신자제臣者帝”의 “이사멸공以私滅公”의 지경까지 나아갔다고 평가한다. 단옥재는 세종에게서 균형을 잃어버린 친친 우위의 예학적 태도를 비판하여 그것을 균형 관계로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 논설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 점에서 단옥재가 이론 구성에서 이학적 예론의 입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구성을 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단옥재의 궁극적 목표는 이학적 예학을 옹호하는 데 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존과 친친의 균형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균형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일면을 더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논설의 제목에서부터 단옥재의 관심은 유교질서의 혼란은 제왕의 공통을 상실한 데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옥재의 진자설은 이학의 이념적 태도와 유사한 강상론적 색체가 짙다. 그 점에서 모기령의 확고한 반이학적 입장에서 오히려 후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그렇지만 그의 논의를 잘 검토해보면, 그것은 계사와 계통, 친친과 존존의 일체화와 분리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단옥재의 논의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점은, 사친私親(=친친)과 공통公統(=존존)의 두 근본이념이, 이학적인 존군 우위로 귀착하지 않고,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모기령과 단옥재의 논의는 입론 방식이 상당히 다르지만, 송명 이학의 존군 우위의 예론을 극복하고 유교 예학이 처음부터 지향했던 존존과 친친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존존과 친친의 균형은 하나의 국가 사회가 정치관계 일원주의로 흐르거나 가족관계 일원주의로 흐르는 것을 저지하는, 다시 말해 정치질서(정치신분)와 가족질서(혈연신분)가 일방을 압도하지 않고 상호 조화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인 유교적 질서임을 다시금 일깨우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산의 경우에도 존존과 친친의 어느 일면이 우월적으로 존재하여 다른 일방을 위축시키는 것을 피하고, 그 두 원리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기령이나 단옥재 등 청대에 등장한 반이학적 예학과 동일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다산의 ‘위인후’ 이해
다산은 예 논쟁(예송)을 정리하는 과정의 필연적 절차로서 상례에 관한 전반적인 경전 해석학을 진행한다. 특히 중요한 논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설을 통해 각론적인 차원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 중에 ‘위인후’에 관한 논의가 들어 있다.33) 필자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가지고 있다. 즉, 다산은 조선 중기의 예송을 재정리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와는 별도로, 그 당시에 전개되고 있던 유교 선진국 청의 경학 성과를 검토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학이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공감적 인식과 함께, 조선의 예송과 무관하지 않은 명대 대례의 문제가 청대 학계의 중요한 학술 현안으로 존재하는 사실에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가설에 따라 청대 유학자들의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다산의 입장을 살펴보자.34)
다산은 국조전례고에서 ‘위인후’ 문제를 정리하고 있는데, 사대부가에서 발생하는 위인후와 제왕가에서 발생하는 위인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사대부가에서 발생하는 위인후는 제왕가에서의 입승대통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위인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본다(그 점에서 모기령, 단옥재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다산은, 위인후자爲人後者는 소후자所後者를 위해 참최복(3년복)을 입고, 자기의 친부모를 위해 상복의 등급을 낮춘다는 기본 원칙을 제시한다.
그 점에서 다산은 위인후爲人後로 제위帝位를 계승했던 세종世宗이 친생부 흥헌왕興獻王에 대한 존숭尊崇을 정당한 것이라고 했던 장총張熜의 입장을 비판한다(다산과 모기령의 입장은 동일하다.). 장총 및 세종의 논리는 계통 계사 이분과 계통은 하지만, 계사는 하지 않는다(계통이불계사)의 입장이었지만, 다산은 “세상에 종통만 계승하고 후사는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天下有繼統而不爲後者乎.]라고 반문한다. 계통繼統과 계사繼嗣를 분리하거나, 계사繼嗣없는 계통繼統만을 인정하는 이론의 난점을 지적한 것이다(근본적으로는 계사라는 개념을 부정하지만 굳이 사용한다면, 계사가 곧 계통이라고 말하는 모기령의 입장, 단옥재의 계사임통설繼嗣任統說과 다산의 논리는 너무 비슷하다.).
그 다음으로, 다산은 위후爲後와 위자爲子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산은 모기령과 마찬가지로, 장총이 예립預立 여부(즉 양자養子로 궁중에 미리 들어와 있었는가 아닌가의 여부)로 위후爲後의 위자爲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리고 구양수나 양정화 등이 공양전公羊傳을 근거로 내세운 “위인후자위지자爲人後者爲之子”라는 입장에 대해서, 위후爲後와 위자爲子는 다르다는 반대 입장을 내세운다.35) 「상복 전」이나 「상복기」의 “위인후자爲人後者 … 약자若子”와 “위인후자위지자爲人後者爲之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큰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위인후爲人後가 되는 것이 소후자所後者의 아들(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례적인 아들이 되는 것일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다산의 관점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단옥재의 여진자설如眞子說이나, 호배휘胡輩翬의 약자설若子說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위인후爲人後는 작위爵位를 계승하는 것이지 혈통血統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거나, 묘차廟次에 있어서 소목昭穆의 순서를 수용하는 것과 실제로 부자가 되는 것(世次의 계승)은 다른 일이라고 보는 모기령의 관점과 같은 맥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제왕가에서 위후자가 될 때에는 항렬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다산의 설명도 모기령의 입장과 일치한다.
이러한 논점을 종합하면서 다산은 통統(사회관계의 계승)과 속屬(혈연관계의 계승), 존존과 친친의 병렬 관계를 전례 논쟁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의 하나로 제시한다. 정치적 지위의 계승을 의미하는 통統과 혈연적 지위의 계승을 의미하는 속屬이 서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교 예의 근본적 두 이념이 지닌 병렬적 이원구조를 유지하려는 다산의 논점은, 친친(=속)을 근거로 하는 혈연적 家의 존립과 존존(=통)을 근거로 삼는 정치적 질서의 존립, 또 그것의 바탕이 되는 인仁과 의義의 병렬적 조화를 강조하는 고전 유학의 이념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학문적 태도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모기령이나 단옥재 역시 제왕의 지위를 잇는 것과 혈연적 지위를 잇는 것을 분리해서 봄으로서, 그 두 이념이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병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리고 위인후爲人後로 들어 온 제왕이 친생부를 추숭하는 문제에 대해서, 다산은 기본적으로 추숭을 반대한다. 명 세종의 경우에 흥헌왕을 태묘太廟에 부입祔入하는 것을 비판하고 별묘別廟를 세워 다른 주사자主祀者를 세워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36) 다만, 다산은 부자父子의 명칭은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이천의 본생本生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흥헌왕을 황고皇考37)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왕적 지위의 피계승자인 무종武宗을 소목昭穆의 관점에서 아버지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그 때 명칭은 부父가 아니라 예禰(의례적 아버지)이다.38) 이러한 다산의 결론은 모기령의 결론과 완전히 동일하다(참고로 모기령이 명대 대례의에 대해 제시한 해결법은 다음과 같다. “조효종祖孝宗, 예무종禰武宗, 추존흥헌왕위황고追尊興獻王爲皇考, 입묘경사入廟京師, 즉공사구안卽公私具安.”).
마지막으로, 위인후로서 제위에 오른 명 세종世宗이 누구의 후後가 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산은, 후총厚熜(世宗)이 입계入繼한 것은 무종武宗이 아니라 효종孝宗이며 후총은 과계過繼를 통해 효종의 후後(=子)가 되었다는 보는 양정화의 이학적 입장, 세종은 무종의 뒤를 이어 제위를 계승(계통)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효종의 후사가 될 필요가 없고 ‘계사’와 ‘계통’은 엄연히 별개의 일이라고 주장한 장총張熜의 입장, 모두를 비판한다.
다산은 명 태조가 유훈으로 남긴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리에 따라 세종世宗은 무종武宗(從兄弟 관계)의 후사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였으므로, 무종武宗을 위해 참쇠복斬衰服을 입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종이 무종武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고 보는 다산의 결론은 모기령과 같지만, 그 논리의 전개 방식은 약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모기령은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리를 무종武宗과 세종世宗에 적용시킨 양정화楊廷和의 예론 자체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비판했다. 따라서 그 관점에 의하면 세종은 무종의 후사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일단 무종을 이어 제위를 이은 것이므로 그 현실을 인정한다면, 소목의 순서 즉 묘차의 관점에서 무종을 잇는 것이 옳다고 보았던 것이다.
6. 마무리
본고의 관심은 청대의 중국학자들의 학술토론이 다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한다거나, 다산이 그들 중 누구의 학설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검토하는데 있지 않다. 위에서 본 것처럼, 다산의 위인후爲人後 논의에서 우리는 청대의 모기령, 단옥재의 입론과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살핀 모기령과 단옥재를 제외하고도, 다산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거나 약간 뒤진 전대흔錢大昕(1726-1804), 능정감凌廷堪, 정요전程瑤田 같은 건가乾嘉를 대표하는 중요한 예학자들의 논설을 다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론적 관점에서 분명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또 논의의 과정과 결론이 동일하거나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다산 본인이 자신의 학설 형성에 영향을 준 청대 예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상황에서 단순한 영향론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점도 없지 않다. 필자의 관심은 다산학 성립에서의 청대 학술의 영향을 살피는 것이 아니다. 다산의 지적 세계를 살피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시해왔거나 망각하고 있었던 사실, 즉 다산의 학술은 조선이라는 고립적 지적 세계에서 솟아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유교 세계의 전체 지평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자극 받고 자극을 주면서, 그리고 그 이론들을 자기현실의 과제와 연결시키며 독자적 결론을 내려가는 열린 지적 관심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문제제기에 불과하다.
위에서 살핀 대례의 혹은 복의, 예 논쟁은 단순히 왕권파와 신권파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넘어서서 유교 예제의 근본이념의 하나인 친친과 존존의 문제를 둘러싼 논의였다. 사실 이학적 예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존존과 친친의 갈등을, 신권과 군권 사이의 권력 투쟁이라고 단순히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친생 부자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학적 입장(사마광, 정이천, 양정화 등)이 신권을 군권보다 더 우위에 두고자 하는 정치적 시도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예의 천리론적 해석을 통해, 존존=존군의 우위를 확보하고 왕권의 절대적 권위를 회복함으로써 예교적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던 철저한 왕권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구양수나 한기韓琦 등이 반드시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왕권파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왕권의 계승과 혈연의 계승을 단절시킴으로서, 가부장적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과 일정 정도 독립된 분권적 가부장적 종법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존/친친의 우열에 관한 예학적 입장을 정치적 입장과 단순히 연결시키는 것은 유교 사회의 정치 이념을 그 체계 안에서 이해하지 않고 현재적 제왕의 입장을 옹호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단순히 정치 파별을 나누는 단견적 견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다산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다산은 친친과 존존의 문제에 대해 예학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유교 세계의 보편적 이념에 관해 자기의 입장을 정리하는 작업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을 것이다. 바로 그 문제가 유교의 보편적 이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일진광풍으로 몰아닥쳤던 예송에 대해, 진지한 학문적 정리를 시도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관점은 반드시 그의 정치적 입장, 더구나 현실정치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던 시절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위한 해명이거나 또는 신원伸寃을 위한 것이라고만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다산은 현실의 정치적 장에서 한발 물러나, 당시 조선이 처한 유교 세계의 위기 상황에서 자기의 정치적 입장을 포함한 예 질서 문제에 대한 학술적 반성을 의도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산 본인은 (1) 유교적 세계의 해체 위기 앞에서 유교의 근본적 진리를 천명한 경학 전체를 재검토하여, 올바른 유교적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하는 거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2) 그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송명이학의 입장은 물론, 그 당시에 활용 가능한 모든 신진 지식을 검토하고자 하는 지적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3) 그러한 활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 당시로는 조선 유학의 일반적인 지식의 연원을 벗어나 있던 신진 지식 서학은 물론, 일본 유학의 성과, 그리고 조선에는 그다지 활발하게 수용되어 있지 않던 청淸의 신진 학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백과전서적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4) 그 결과, 그 당시 조선에서 금과옥조로 숭배되던 주자학의 세계를 탈피하여 경전에 담긴 고전 유학의 본래적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그것을 경전의 체계적 재해석을 통해 실행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다산의 방대한 학술 전체에서 예학, 특히, 명대 대례의에 대한 다산의 해석은 분량적으로 대단히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달리 본다면, 다산의 체계적 경전 해석학의 중심 과제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유교적 세계의 해체에 대응해야 한다면, 그 작업의 중심은 궁극적으로는 예 질서의 회복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다산은 예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제(정치질서와 가족질서, 충과 효, 공公과 사私의 대립 문제)가 예송 논쟁으로 불거지고, 마침내 그 모순과 균형 파괴의 극한이 유교 사회의 궁극적 궤멸潰滅로 이어지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예 문제가 중심적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다산의 예학, 유교 경전 해석학의 탐색은 동아시아 전근대의 유교 사회가 직면한 해체적 위기의 시대에 발생한 공통적 문제 지평 위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사상사를 한국 일국사적인 관심에서 고립적으로 해석하는 관행을 벗어나, 동아시아 세계의 전체 지평에서 동아시아 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1)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다산의 정치적 의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2) 상식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지만, 고립된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3) 예의 실천을 둘러싼 예 논쟁(예송)은 조선 왕조에서만 존재했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예 논쟁(예송)과 그로 인한 정치 투쟁, 권력 투쟁은 유교가 왕조의 근간 질서로 자리 잡은 이후에 거의 모든 시대에 발생하였으며, 청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유교 사회에서 정치적 갈등이 예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근대국가에서 정치적 투쟁이 헌법이나 법질서의 갈등을 통해 제기되고 유지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예 질서는 유교국가의 헌법적 질서(고유한 의미의 헌법)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정치사에서도 권력 투쟁이 예의 해석을 둘러싼 학술적 토론을 통해 심화되고 유지되었다. 예 논쟁은 유교 국가의 근본 성격과 연관된 이념 투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송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당쟁을 특히 조선의 정치적 특성으로 한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 유교사의 발전 과정을 거시적으로 살펴보지 못한 短見의 결과이다. 다만, 중국의 경우에 예송과 결부된 당쟁이 왕조의 존폐를 위협하는 심각한 정치 투쟁으로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된 극단적인 경우는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위기의 가능성으로는 언제든지 존재했다.
4) 소위 유교 사상의 총아라고 알려진 송명 신유학의 다양한 철학적 논제들이 근본적으로는 경전의 해석 문제에서 출발한 것처럼, 경학은 단순한 경전의 자구 찾기의 놀이가 아니라 경전이 담고 있는 근본적 의미를 발견하여, 그 의미를 오늘의 삶 속에서 되살리고자 하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경학은 경전에 담겨진 언어를 당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언어의 번역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넘나들기를 요구한다. 그 번역에서는 언어를 구성하는 글자, 소리, 단어, 자구, 문장, 표현, 의미, 그 의미의 수용 전부를 문제 삼는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여러 가지 이해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경학의 임무이며, 그것은 곧바로 사상적 토론으로 이어졌으며 그 사상적 논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날카로운 사상-학술적 토론을 통해 사상적 깊이를 더해 간 시대가 청대였다.
5)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의 중국학계에서 일찍부터 문제를 제기하였다. Peter Guy, Emperor's Four Treasuries 등 참조. 최근에는 청대문화사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중국학계의 활발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청대의 집체적 학술저작에 대한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민대학의 戴逸이 이끄는 청사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성과물들이 그것이다. 본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국 학계는 주자-양명 등 성리학이 중국 사상의 절대 강자라고 믿는 편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관계로 청대학술에 대해 거의 무관심(특히 철학, 사상 분야에서)하고, 따라서, 청대학술에 대한 단편적 연구는 존재한다 하더라도, 일부 이학적 주제에 관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고증학이 등장한 사회-문화적-정치적 배경에 대한 비판적 메타적 연구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6) 청대의 사상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학문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는 관점이 요구된다. 청대는 추상적 철학 담론의 권위를 경서의 구체적 탐색을 통해 검증하고, 그것의 참됨을 시대의 문제와 연결시켜 탐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학술의 시대였다. 방대한 경학의 모든 영역을 한 두 사람의 천재가 마스터하여 움직일 수 없는 방향을 제공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여러 지역에 걸쳐 학술 서클을 형성하고 그들의 집체적 작업이 축적되어 하나의 경학의 체계를 형성하는 시스템, 그러한 체계들이 대립하거나 어느 측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며 청대 사상사의 커다란 세계를 형성하는 그런 시스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그룹이 대진을 정점으로 하여 전개되는 휘주(완파)-양주의 학술 그룹이었고, 그들의 최대의 관심사의 하나가 예학 문제였다.
7) 孝와 忠, 仁과 義, 恩과 宜, 家와 國 등, 유교를 지탱하는 다양한 쌍 개념이 그 두 이념과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경우는 다르지만, 마치 기독교에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과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 모순과 조화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두 이념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은 상당히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바람직했던 것은 아니다. 유교의 이상은 그 두 이념의 병렬적 조화를 강조한다. 그래서 문제가 어려워진다. 중국의 경우에, 전체적으로 보아서 유교는 그 두 이념의 조화를 지향하지만, 학파에 따라서 어느 일방에 우위를 부여하며, 법가는 그 일방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가는 어떤가? 그리고 그 우열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산학은 주자학에 비해서는 그 조화의 회복에 관심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8) 청대 고증학은 宋明理學의 중심 주제들이었던 천리론에 근거한 심성론의 관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학적 질서의 회복과 맞물려 있는 禮라는 실천적 주제를 통해, 송명이학을 비판하고 유교의 정신과 실천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점에서 고증학은 실천적 지향을 가진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었고, 실사구시를 목표로 삼는 고증학은 유교적 실천의 원리를 탐색하는 경세치용적 실천 이론학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청대 실학에서의 실사구시와 경세치용, 이용후생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지식 체계의 수립, 즉 학술의 목표로서 일체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실학을 연구할 때에 그것을 분리된 세 영역, 내지 단계론적으로 심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은 중국의 경우에서 본다면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9) 명사, 양정화전, 5037쪽.
10) 예에 관한 학술적 논쟁(예송)의 형식을 통해 정치 투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명대 대례의의 경과는, 사안 자체는 조금 다르지만, 조선의 경우와 대단히 닮았다. 그것은 유교 국가에서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논쟁이었다. 그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궁극적으로는 ‘계사’와 ‘계통’을 둘러싼 의문, 즉 유교 질서의 근본적 두 이념에 내재한 갈등과 모순이었다는 점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정치-학술 논쟁이 아니라 유교적 통치 구조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교 예의 근본 구조인 尊과 親(충과 효, 의와 인)의 우열의 논쟁이었으며, 왕위 계승의 장에서 그 문제는 계사와 계통으로 부각되었을 뿐이다.
11) 사마광, 「言濮王典禮箚子」(治平2年, 1065년, 司馬溫公文集 권6 참조)
12) 그의 아들이 되는 것(=爲之子)과 아들처럼(=若子, 如眞子) 되는 것은 다르다. 다산과 단옥재는 그 미묘한 차이를 지적하여, 爲之子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밝힌다.
13) 정이천, 「논복왕칭친소」(하남정씨문집, 권5)
14) 구양수, 「濮議」 (구양수전집 권3)
15) 다시 청 중기 이후에 예학의 이학에의 복속을 비판하고, 예의 복권을 주장하며 송명 이학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학술적 입장이 부활하는데, 대략 다산의 활동기와 겹치는 1750년을 전후한 청 중기 이후에는 그러한 학술적 경향은 以禮代理라는 구호로 나타난다. 그것은 청대 학술의 중요한 한 측면이며, 필자가 이 논문에서 다산과 연관시켜 강조하고 싶은 측면이다.
16) 정이천의 “天而在上, 澤而在下, 上下之分, 尊卑之義, 理之當然, 禮之本也.”(「주역정씨전, 리괘」)라는 규정, 주희의 “仁義禮智, 豈不是天理.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豈不是天理.” “禮卽天之理, 非禮卽己之私也”는 대표적인 것이다.
17) 물론 제왕은 천리에 복종해야 한다. 천리에 복종하는 것을 公이라고 하고, 천리에서 벗어나 는 것을 私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학의 입장은 일종의 권력견제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학적 정치론의 한 측면인 天譴論(災異思想에 의한 譴責論)은 天理論에 근거한 왕권견제론의 한 형태였다.
18) 예기 「大傳」에서는 ‘人道親親’이라고 하면서, 親親의 근원성을 밝힌다. 그리고 「상복사제」에서도 親親과 연결되는 恩을 仁과 동일시함으로써 尊尊의 원리 즉 義 보다 恩을 앞세우고 있다. 또, 「중용」에서도, ‘仁者人也, 親親爲大’라고 하여, ‘義者宜也, 尊賢爲大’ 보다 우선시한다. 「상복소기」에서도 親親을 尊尊보다 우선시한다. 고전 유교에서는 親親과 尊尊의 병렬적 균형이 중시되고 있었지만, 그 균형은 親親을 근간으로 삼는 균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 고전유학의 부흥을 꿈꾸는 성리학이 고전유학의 근본이념을 벗어나 존군 중심으로 나가는 것은 고대의 부흥이 하나의 레토릭으로 기능하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청유나 다산은 다시 고전유학의 부흥을 기치로 내세우면서 이학을 부정한다. 그것이 다산이 내세웠던 洙泗學의 성격이다.
20) 혈연관계의 정치화를 의미하던 종법제 하에서 親親과 尊尊은 母와 父의 긴장 관계로 드러났지만, 그 종법제에 대한 회귀적 향수가 사라진 시대에는 親과 尊은 더 이상 단순히 母와 父의 긴장이 아니라, 父와 君의 갈등을 포함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 문제로 변질된다. 경전에 표현된 고전 유교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산의 관심은, 성리학의 예론에서 깨어진 친친과 존존의 긴장적 조화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친친과 존존의 관련에서 말해보자면, 다산이 추구하는 것은 송명이학의 尊尊=尊君 우위에 의해 이지러진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親親을 회복하고, 그 親親을 근본으로 하면서 親親과 尊尊의 긴장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산이 군주권의 강화를 지지했다는 정치적 입장이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다산의 입장이 尊尊=尊君 중심으로 흘렀다고 본다거나, 단순히 親親 중심으로 흘렀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다산이 비판하는 예학적 입장이 성리학의 입장인 관계로, 다산은 우선 성리학의 관점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다산은 이학의 존존(=존군) 우월주의가 유교의 고전적 이상과 괴리되어 있음을 비판하였고, 이학적 예학에서 상대적으로 열위에 처해있었던 親親의 권위를 회복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두 원리가 긴장적 조화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입장을 단순히 존존, 친친 혹은 존존친친의 균형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그의 학문적 배경과 문제의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결과 발생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미 고대의 종법제가 깨어진 현실에서 그 두 원리의 완전한 황금분할, 완전한 조화를 꿈꾸는 것 자체가 이미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친친과 존존의 긴장과 조화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21) 그러한 예학적 관점은 이학의 예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陳澔의 예기집설에서 제시된 “義斷恩”, “以義絶恩”(恩=仁=孝=父=親親 / 義=忠=君=尊尊=尊君), “爲君絶父”라는 군권 독존을 위한 예학적 논리 속에서 그 전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진호, 예기집설 상해고적판, 339, 진호의 존군적 입장은 명대에 과거 표준서로 편찬된 예기대전에서 확고하게 수용된다.
22) 청대에 주자학적 사유의 전통이 단절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사상계의 주류는 여전히 주자학이었다. 과거시험이 주자학적 경전 주석서를 채택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강상윤리를 강조하는 주자학이 절대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는 제격이 아닌가. 특히 예학에서의 강상윤리적 이학은 아주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다.
23) 이런 주장이 당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최근에 청대학술을 재평가하는 학계의 흐름 속에서 이 방면의 연구가 속속 등장한다. 그 바람이 한국 학계에 불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24) 사실 문제제기에 그치는 이 소논문에서 청대에 등장한 위인후(친친/존존을 포함하여) 문제를 둘러싼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다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중국 고전학에 남겨진 거대한 영토이다. 중국 고전학의 연구는 청대에 수집된 방대한 문헌에서부터 거꾸로 들어가야 한다. 멀지 않은 장래에, 지금까지 해왔던 중국학(고전 중국학과 현대중국학 모두)의 방향 전체를 근본적으로 역전시키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 혁명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선진과 당송에 치중해왔던 우리의 중국학은 그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25) 명사의 편수 직무에 종사하기도 했던 모기령은 大禮議 논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引經據史, 明指其禮, 以示於衆”이라는 방법과 목표를 가지고 「변정가정대례의」(1695)라는 글을 지어 그 현안을 총괄하고자 시도한다. ( 서하문집, 사고전서 1320책 ) 이 모기령은 복잡한 인물이다. 다산은 모기령을 자주 비판한다. 하지만, 학술적 차원에서 다산은 모기령의 학설을 상당 정도 수용하면서 나름대로 재조정하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26) 「변정가정대례의」, 권1.
27) 모기령, 앞의 책, 제1권, “先入者爲昭, 後入者爲穆, 昭卽爲父, 穆卽爲子, 一昭一穆, 毋容紊亂.”
28)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국학술의 중세적 발전 양상과 그것의 근대적 전환을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건가기의 학술사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의 단계에서 유교적 지식의 근대적 전환을 탐색하는 과제는, 적절한 답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지 않다. 더구나, 주자학 중심주의, 송명이학 중심주의가 강고하게 지배하는 한국학계에서 그런 논의는 시기상조임을 확인하며 논의를 진행해보자.
29) “爲人後者不必皆子行, 孫後祖, 弟後兄者, 皆是受重於此人, 卽爲此人後. 爲此人後, 卽爲斬衰三年, 一體若眞子.” 「明世宗非禮論二」 단옥재유서, 1054쪽.
30) 앞의 책.
31) “經之爲人後言繼統也. 宗廟社稷土地人民崇高富貴謂之統, 父子相承謂之嗣. 嗣絶而無統所歸, 於是乎立之嗣以任其統.”(「非禮說一」)
32) 「非禮論四」 「非禮論七」
33) 「국조전례고」 참조.
34) 다산 예학의 다양한 문제들, 특히 상복례에 관한 다산의 입장, 국조전례고, 정체전중변 등의 분석에 대해서는 장동우, 최진덕, 박종천, 이봉규 등 이미 여러 논자들이 정리해 놓았다. 필자의 다산 논의는 그 논문들을 참조하고 있다.
35) 다산은 구양수, 양정화의 입장에도 반대하고, 장총의 입장에도 반대한다. 존존=존군 우위의 이학적 입장이나, 친친 우위의 장총, 세종의 입장에 대한 양비론이다. 그 양비론은 상대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원리가 어느 일방으로 치우칠 수 없는 균형․병렬․조화 관계여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위에서 본 모기령, 단옥재와 거의 같은 방향이다. 다산의 해석은 독창적이지만, 고립된 입장이라고 보기에는 청대 학자들의 견해와 너무도 비슷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36) 처음에 흥헌왕의 추숭을 주장했던 장총조차도 세종이 흥헌왕을 ‘睿宗皇帝’로 추존하고 太廟에 祔入하며 皇極殿에서 上帝에게 大饗祭를 올릴 때 配享되는 신분으로 격상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모기령 역시 다산과 같은 입장이다.
37) 考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명칭. 다산은 「立後論」에서 “父母之名, 不可易也, 生曰父母, 死曰考妣”라는 칭위에 관한 논거를 제시한다. 毛奇齡도 “父死稱考, 母死稱妣.”라고 하여 다산과 동일한 논거를 제시한다. 친생부를 皇伯으로 부르는 것에는 두 사람 모두 다 반대한다.
38) 父는 친생 부에게만 쓸 수 있는 개념이고, 禰는 의례적 명칭이다. 四廟에서 父輩의 묘를 禰廟라고 한다. 모기령은 피계승자인 의례적 父는 엄격하게는 父輩라고 그 차이를 명확히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