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해군 수상비행장과 일본군 부대
신월리 봉양. 물구미. 신근 등 3개 자연부락으로 1940년 당시 239호수에 인구는1,339명이었다. 신월리는 ㄷ자형 천혜요새로, 1942년 8월경 이곳에 해군수상비행장과 군부대 및 군수공장을 건립하였다.
비행장공사는 일본토목회사가 맡았는데, 인부들은 여수사람과 전남동부6군에서 끌려온 근로보국대들이 2개월씩 교대로 작업을 하였다. 해방직전까지 비행장은 90%정도 완성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곳에는 남양군도로 보낼 군수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는 군수품을 만든 공장이 가동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증거로는 현재남아 있는 굴뚝이다.
수상비행장은 2500제곱미터에 수상비행기 5대가 이착륙할 수 있는 210m길이 활주로가 가막만에 그 모습으로 남아있다. 또한 한화 여수공장에는 격납고4동,지상탄약고(추정)2동, 지하탄약고1곳, 지하무기고(추정)1곳,굴뚝1개(높이 40-50m)가 일제강점기 이곳을 증명하고 있다. 기록에는 군사시설을 포함해 44개동의 공장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즉 일제가 태평양전쟁(1941년)을 도발하고 대량의 군수품이 필요하였고, 이를 제조하기 위한 곳이 이다. 현재 한화공장이 있는 곳은 해군수상비행장을 비롯하여, 군부대와 함께 군수품을 제조하기 위해 일제가 건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굴뚝의 규모와 지하무기고 등에는 도르래가 천장에 설치 된 것으로 보아 무언가가를 제조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2. 넘너리 터널
신월리에서 생산된 군수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이곳에서부터 미평역까지 철도를 놓기 위해 강제동원이 이루어졌다. 이철도건설을 위해 신월리에서 넘너리를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터널(일명 넘너리 터널)을 뚫었는데, 이일에 광주형무소 수감자를 동원했다고 한다. 넘너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을 식수로도 사용했으며, 1950년 초반에는 이곳을 통행하여 넘너리와 신월리를 오고갔다고 한다. 넘너리 터널은(현 자동차학원) 현재 그대로 본존되고 있다.
(참고자료) 한반도내에서도 수감자 동원은 일상적이러서 각 형무소 마다‘보국대’를 조직해 운영하기도 했고, 1943년 평남 안주군 간척사업에는 신의주형무소 수감자400명 전원이 동원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감옥 내에서도 군수물자 제작은 수형자들 몫이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흥남비료공장을 비롯한 각종 작업장에 동원했다. 신고내용에 의해 국내 동원 수형자의 수감원인을 살펴보면‘징용기피’나 ‘작업장 탈출’로 판단되는데, 이들의 사망시기는 특정시기에 몰려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41명 전부가 1945년1월20-8월20일에 걸쳐 사망하였는데, 특히 5월(12명),6월(12명),7월(8명)에 집중되었다. 더구나 5월12-15일간 5명, 21-22일간3명, 7월6-8일간 3명 등 연속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특이한 양상을 보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요
올해로 84岁이신 순천 제 아버지도
6.25한국전쟁시에 신월동비행장에서 훈련을 받고 전장터로 가셨답니다.
물론 구사일생 하셨기에 이렇게 댓글쓰는
저를 두셨지요~^^
엊그제 해상케이블타러 오셨을때도
신월동 바닷길을 지나면서 여기쯤이 그 때 비행장 일거라고 하시며
만감이 교차 하신 얼굴이셨답니다.
네,그런 곳이었군요...역사가 있으데 슬픈역사이군요
유용한정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