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의 이유
오양진
ARCADE 0020
2023년 12월 20일 발간
정가 23,000원
A5(138×210)
291쪽
ISBN 979-11-91897-68-5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우리에게는 신이 없지만 대신 이렇게 문학이 있다
[문학의 이유]는 오양진 평론가의 네 번째 비평집으로, 「문학의 이유」 「사랑의 위기」 「청자의 시」 등 22편의 비평이 실려 있다.
오양진 평론가는 1969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제1회 중앙신인문학상([중앙일보])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연구서 [소설의 비인간화], [데카당스], [문학적 서사와 서사적 문화], [성격과 모더니티], 평론집 [중심의 옹호], [쉰 목소리로], [물러섬의 비평], [문학의 이유] 등을 썼다.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책머리에
조지 손더스의 ‘똥 무더기 언덕’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소설가 조지 손더스는 작가 지망생이었을 때, 아니 이미 작가로 이름을 얻은 이후에도, ‘헤밍웨이라는 높은 산’을 등산하며 열등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거기서는 모방의 시종일 뿐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그 산을 비틀거리며 내려오다 어떤 ‘똥 무더기 언덕’과 마주친다. ‘손더스 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작은 똥 무더기를 바라보며 조지 손더스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 너무 작은데. 게다가 이건 똥 무더기 언덕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이것은 어떤 예술가에게나 중대한 순간(승리와 실망이 결합된 순간), 만드는 과정에서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고 마음에 든다고 완전히 자신할 수도 없는 예술 작품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작다. 우리가 원했던 크기보다 작다.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하다. 대가들의 작품과 비교하여 판단하면 작고 약간 한심하지만, 그래도 있는 건 분명하고, 다 우리 거다.
내 생각으로는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수줍게 그러나 대담하게 똥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언덕 위에 올라서서 그게 커지길 바라는 것이다.
이미 미심쩍은 이 은유를 더 끌고 가자면 그 똥 언덕을 커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퍼붓는 노력이다.(조지 손더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정영목 역, 어크로스, 2023, pp.175-176.)
자학을 자부로 전환하는 조지 손더스의 은유에 기대 내 비평적 재질이 가진 볼품없음과 평범함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손더스의 ‘똥 무더기 언덕’에 빗대 나의 ‘똥 더미’를 조지 손더스급으로 격상시키려는 볼썽사나운 책략을 숨기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다만 자학이 자부가 되는 그 마법적 전환의 순간이 보편적인 인간 심리와 관련된다는 점에 주목할 뿐이다. 아울러 탁월성에 미치지 못한 채로 낮은 수준의 작업을 계속하는 것은 그저 허영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고 싶다. 사실 누군가는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 찾기를 위해서 보잘것없는 작업일지라도 그 실행에 절실하다.
나의 네 번째 ‘똥 더미’를 내놓는다. 이 ‘똥 더미’를 커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퍼붓는 노력이다”라는 조지 손더스의 말에 용기를 얻어, 또 내 ‘똥 더미’가 조지 손더스의 ‘똥 무더기 언덕’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 저자 소개
오양진
1969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00년 제1회 중앙신인문학상([중앙일보])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연구서 [소설의 비인간화](월인, 2008), [데카당스](연세대학교출판부, 2008), [문학적 서사와 서사적 문화](한국학술정보, 2013), [성격과 모더니티](청동거울, 2018), 평론집 [중심의 옹호](서정시학, 2008), [쉰 목소리로](황금알, 2013), [물러섬의 비평](푸른사상, 2018), [문학의 이유](파란, 2023) 등을 썼다.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차례
005 책머리에
제1부
013 문학의 이유
028 물러섬의 비평
036 전자문화 시대의 글쓰기
048 한국문학의 범주
062 성찰로서의 비평
071 새와 운명, 그리고 형식
제2부
079 사랑의 위기
091 아이러니라는 이름의 감옥
104 사고실험으로서의 소설
118 욕망과 사회화의 이중주
128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그 가상의 현실성
136 폭력과 제의, 그리고 놀이
143 묘사와 비밀
151 아홉 빛깔 소설의 마음
177 소설과 제목
194 비극의 심화와 확대
203 도덕적 상상력의 실험
215 역사소설과 패러디
제3부
227 청자의 시
245 숭고의 시
260 나비 무덤의 시
271 어느 문학 교실의 풍경
•― 책 속으로
문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이 질문은 얼핏 형이상학적 분위기를 풍기지만 꽤 현실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문학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이 좀 더 솔직하고 분명하게 바뀌어야만 하지 않을까? 삶에 대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의 현실적 기능과 역할을 묻는 이 물음은 문득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평론가 김현의 문학적 예지를 떠올리는 순간 너무 속된 물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무용에서 소용을 찾는 한 모더니스트의 그와 같은 신조는 삶의 어려움과 비극 앞에서는, 가령 ‘세월호 참사’와 같은 것을 놓고 보면, 궁색할 뿐만 아니라 왠지 허울 좋은 캐치프레이즈처럼 보인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느낌이다. 도대체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학의 이유」, p.13.)
“우리에게는 평론가들이 있을 뿐 비평가는 없다. 백만에 이르는 유능하고 청렴한 경찰관은 있지만 판사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오래전 언급은 그대로 우리 비평의 ‘친밀한 사정’을 가리킨다. 실은 경찰관조차 드물다. 비평가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어떤 대상을 보면서 무엇이 거칠고 섬세한지, 또 무엇이 유치하고 성숙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 있다. 꼭 엄격한 규범의 적용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평의 시작은 ‘취향’(월터 카우프만)에서 이루어지고, 비평의 중간은 ‘전투적인 활력’(윌리엄 진서)으로 채워지며, 마침내 비평의 끝에서는 ‘적’(피터 셸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평의 그러한 판단적이고 형성적인 임무는 요즘 친밀성에서 비평의 보람을 찾는 평론가들에게는 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무처럼 보인다. 비평의 솜씨는 아무래도 ‘매만지는 맛’이 아닌 ‘베는 맛’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물러섬의 비평」, pp.28-29.)
글쓰기와 문학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문화의 한 가지, 그것도 별로 영향력을 갖지 못한, 인기 없는 문화적 지류에 불과해졌다. 글쓰기와 문학을 한다는 것은 실존적 결단의 문제가 되었을 만큼 절박한 사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과거에도 그것은 사명을 동반해야 하는 실존적 결단의 문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땐 문화적 중심의 위엄이 그 결단에 보상으로 주어졌지만 지금 그런 것은 기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제 그러한 결단에는 모멸과 오욕의 형벌이 주어진다. 황순원과 서태지, 이 두 사람은 그런 정황을 설명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예이다. 황순원의 죽음은 그것이 죽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문 저 귀퉁이의 작은 부고란처럼 초라하게 다가왔고, 서태지의 컴백은 한 대중 스타의 재등장일 뿐인데도 대중적 각광을 받으며 신문의 일 면 머리기사를 차지했다. (「전자문화 시대의 글쓰기」, pp.45-46.)
문학사 서술은 무엇보다도 읽을 만한 작품들의 의미 있는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읽을 만한 작품들을 ‘선택’하고 선택된 작품들을 의미 있는 연결이 되도록 ‘배열’하는 것은 문학사가의 임무가 된다. 일반적인 역사 서술이 그렇듯이 문학사 서술은 기본적으로 선택과 배열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사 서술은 또한 그 선택과 배열의 작업에 있어 역사 서술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서술에 입각한다는 측면도 아울러 가진다. 그런데 사실과의 합치로부터 오는 역사 서술의 객관성과 다르게 문학사 서술의 객관성은 선택된 가치가 보편적인 동의를 얻는 데서 생겨난다. 문학적 가치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의 보증이 아니라 사실의 점증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선택과 배열의 작업이 보다 많은 문학적 자료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면 문학사 서술은 그만큼 객관성을 위협하는 반증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사 서술이 수행하는 선택과 배열의 작업은 그 대상이 되는 문학적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확보하면 할수록 좋다. (「한국문학의 범주」, pp.48-49.)
김우창의 비평은 중후하다. 몸이나 마음, 혹은 생각을 함부로 놀리는 것을 두고 우리는 중후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만큼 김우창의 비평은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물론 그 신중함과 조심스러움이 입장의 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비평적 판단의 대상 앞에서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것은 판단의 섣부름이 사유의 중단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김우창의 비평적 사유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되 절대로 주저앉는 법은 없다. 그의 비평적 사유는 멈춤을 모른다. 그런 이유에서 김우창의 비평을 ‘움직임의 방법’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김우창에게 비평이란 ‘중단 없는 사유’의 다른 이름인 셈인데, 우리는 그 ‘중단 없는 사유’를 종종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찰로서의 비평.’ 이것은 아마도 변증법적 상상력으로 충전된 김우창 비평에 대한 최상의 요약일 듯싶다. 여기서 잠시 저 유전(流轉)의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리는 것도 무익한 일은 아니다. 흐르는 것은 깊어진다고 했던가. 김우창 비평이 지닌 ‘깊이’는 바로 그 중단 없는 ‘흐름’에서 온 것일 터이다. (「성찰로서의 비평」, p.68.)
새는 회색 공간―아홉 평의 비좁은 공간을 만들고 있던 사면의 벽들은 흰색 페인트로 칠해졌을 것이 분명했지만 오랫동안 개칠을 하지 않아 빛이 바래 있었고, 더구나 날이 흐려 있어서 사무실은 회색빛으로 연출되고 있었다―에 자신의 몸이 빨려 드는 순간, 막연하게 어떤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테고, 본능적으로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손쉬운 방편으로써의 출구 찾기에 열중했을 것이며, 운 좋게도(?) 아주 쉽게 커다란 유리창이 비추어 준 낯익은 풍경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때 새는 그 풍경을 만드신 신(神)께 감사했을 것이고, 망설일 것 없이 이제는 그리로 향하리라 작정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유리창은 새를 푸른 창공으로 인도하는 비상구(非常口)가 아니라 음습한 바닥에 눕히려는 매혹적인 덫이었다. 새들에게는 비상구가 없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세상을 뜨는(飛翔) 것일 게다. 그 몸짓 자체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비상구(飛翔口)이기에. (「새와 운명, 그리고 형식」, p.72.)
소설은 사실 태생부터 ‘사랑의 형식’이었다. 근대 이래 초월성의 퇴조와 더불어 태양계 내 한 작은 행성의 외로운 승객이 되었다는 실존적 자각은 사람들의 근본적 기분을 불안으로 물들였다. 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구원하겠지만 그가 없다면 우리가 뮌히하우젠 식 자기 구제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러한 휴머니즘의 심란한 비전은 인류의 우주적 고립무원에 대한 서사적 응전을 긴급히 요청하였다. 소설은 바로 선험적 고향을 상실한 그때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불안을 감당하기 위해 우주 속 홀로됨을 자각한 사람들이 신의 은총을 대신할 인간적 구원의 가능성을 서로 연민하고 사랑하는 일에서 찾은 서사적 해결책이었다. 구원을 신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함양함으로써 서로를 도울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서술의 스케일과 묘사의 디테일을 결합한 소설 형식은 실존적 불안으로 교착된 허무한 삶의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서술과 나보다 타인에게 관심을 집중하도록 이끄는 묘사는 실제로 연민과 사랑의 마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연민의 감정을 진작하고 사랑의 태도를 고양시키는 데서 자기 형식의 의무를 발견했던 소설은 그렇게 현재의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사랑의 위기」, pp.79-80.)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한 여대생의 말과 행동을 통해 속물적인 현실을 희화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략)
그런데 정이현의 소설에서 희화화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도덕적인 차별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이현 소설의 풍자적 교의가 실행하려는 것이 과연 인간다움의 이상인지 아니면 경멸 그 자체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포함한 독자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아이러니의 감옥’ 안에 갇히게 된다. 물론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양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루시앙 골드만)는 근대소설은 아이러니라는 개념을 통해 타락한 양식의 알리바이를 고안해 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락한 양식이 타락한 사회의 일부인지 진정한 가치의 구현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그렇게 손쉬운 문제가 아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우리 삶의 왜곡된 양상에 대한 비판을 재현하는가, 아니면 그런 삶의 단순한 첨가물인가? (「아이러니라는 이름의 감옥」, pp.93-94.)
「태평양 횡단 특급」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호라티우스에 대한 콜로세움의 우월성”을 말하고자 하는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은 ‘에드워드 드 비어의 소네트 한 편에 대한 다리의 돌덩어리와 철골들의 우월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사실 ‘정신에 대한 육체의 우월성’, ‘유심론에 대한 유물론의 우월성’, 그리고 ‘남자에 대한 여자의 우월성’ 등으로 바꾸어 말해도 상관없어 보인다. 이것은, 예컨대 “대륙 횡단 철교의 거대함”을 놓고 벌이는 ‘나’의 남편과 ‘아즈텍 신성 공화국’의 신학자 사이의 열띤 논쟁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고실험으로서의 소설」, p.104.)
표제작 「바늘」은 거절당한 욕망이 뒤틀리는 위험한 방식을 보여 줌으로써 그동안 가부장적 사회가 거부해 온 여성들의 욕망이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위협적으로 말하는 소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엄마의 욕망’을 매개로 하여 ‘나의 욕망’이 가진 잠재적 치명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실제로 여주인공 ‘나(박영숙)’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늘이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공격을 가한다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힘 한번 못 쓸 것 같다.” (「욕망과 사회화의 이중주」, p.118.)
‘허구’와 ‘사실’ 사이, 혹은 ‘가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의 역사에서 최초 힘의 우위는 ‘사실’, 혹은 ‘현실’이 가진다. 흔히 ‘전통적인’이라는 한정사가 붙는 모든 미학상의 조류에서 ‘허구’나 ‘가상’은 ‘사실’이나 ‘현실’에 종속되어 ‘진리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물론 전통적인 미학 내에서도 ‘허구와 사실 사이의 긴장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관철되어 간다. 아울러 참(眞)과 거짓(僞),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원론에 의해 뒷받침된 그 담론 안에서, 모든 미학적 현상들은 예외 없이 도덕적인 범주로 환원된다. 그러나 최근의 현대적인 미학 조류에서 ‘진리의 담론’은 점차 힘을 잃고 ‘가상의 담론’에 그 권좌를 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나 ‘현실’이 거꾸로 ‘허구’나 ‘가상’에 예속되는 관계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제 ‘가상의 담론’은 진리나 도덕을 허무의 지평 위에 풀어놓음으로써 모든 미학적 현상들로 하여금 ‘자기 준거성’을 향유하게 만든다. 이 말은 미학이 비로소 진정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그 가상의 현실성」, p.129.)
지라르는 폭력이 근본적으로 모방적이어서 그것은 끊임없이 전염된다고 주장합니다. 그 모방과 전염을 그치게 하기 위해선 폭력을 속이는 폭력, 즉 ‘제의적 폭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입니다. 달리 말해 폭력의 모방은 ‘짝패’를 증식시켜 차이를 지우고 이어서 차이의 무화는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와 ‘상호적 폭력’의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위기의 절정에서 그것을 막는 제물, 즉 ‘희생양’을 선택하여 상호적 폭력을 일인에 대한 다수의 폭력으로 이행시켜야만 폭력을 정화할 수 있다고 지라르는 봅니다. 그에게 ‘나쁜 폭력’을 ‘좋은 폭력’으로 대치하여 순화하는 ‘희생 제의’라는 허례(虛禮)는 곧 혼란을 질서로, 전쟁을 평화로 대체하는 위약 같은 것입니다. 일테면 지라르는 그 허례가 치료 약은 못 되지만 평화의 유지에 불가피한 고의적인 오해의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폭력에 ‘좋은 폭력’이니 ‘나쁜 폭력’이니 하는 것들이 있을 턱은 없지만, 지라르에 의하건대, 일부러라도 그런 게 있다고 오해할 때 폭력의 제어는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지라르에겐 폭력의 제어와 조정과 예방은 가능한 것이어도 그것의 퇴치와 박멸과 치료는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폭력은 다만 은폐될 수 있을 뿐이라고 지라르는 비감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인간성에 내재한 폭력성은, 지라르가 보기엔, 어떤 인간도 면제받지 못한 선험성을 갖습니다. 지라르는 인간성에 관한 한 어쩔 수 없이 비관주의잡니다. (「폭력과 제의, 그리고 놀이」, p.140.)
‘묘사’는 ‘비밀’의 거처지요. ‘묘사’는 탕진되지 않는 의미의 원천입니다. 그것의 진상이 누설되지 않는 한 ‘비밀’은 탕진을 모르니까요. 결국 ‘서술’은 단일한 ‘주제’의 명료성을 지향하고 ‘묘사’는 ‘비밀’을 덮어 두는 복잡한 변형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제’는 소진된 서사를 결과하게 되고 ‘비밀’은 풍요로운 서사를 보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미학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지요. (중략)
이렇게 얘기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서술’에 의해 드러난 ‘주제’를 읽어 내는 독자는 범상하여 흔하지만 ‘묘사’에 의해 가려진 ‘비밀’을 풀어내는 독자는 그 비범함으로 인해 드물다구요. 구성의 짜임을 계산해 내는 능력보다 문체의 조각들을 즐기는 능력이 윗길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다음 진술은 어느 정도 저의 그런 생각을 지지합니다. ‘독서 과정에 있어서, 독자는 반드시 세부들을 인지하고 그것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 책이 사랑스럽게 수집한 빛나는 조각들을 접한 이후에 일반화를 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묘사와 비밀」, pp.147-148.)
조해일의 「매일(每日) 죽는 사람」(1976)은 영화 촬영장에서 일용직 엑스트라로 일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 가장(家長)의 가장 암담한 초상을 그리고 있다.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엑스트라로서 죽음의 배역을 맡아 매일 죽어야만 하는 사람처럼 주인이 아닌 노예로서 한 가정과 어떤 조직을 위해 과로로 탈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은 노예와도 같은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진짜 죽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죽고 싶어 할는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가장은 자꾸 눈에 밟히는 가족의 얼굴 때문에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는 노예와도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의 죽고 싶은 충동을 한 줌의 희망으로라도 다독거리며 다시 내일의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홉 빛깔 소설의 마음」, p.160.)
간판이 소비자가 사려는 물건의 목록을 요약하여 암시하도록 설계된 장식물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이 장식물인 만큼 소비자의 구매 의욕을 자극하는 화려한 외양을 뽐낸다고 해서 또한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없다. 아마도 그래서이겠지만 어떤 물건의 구입을 위해 하나의 상점을 선택하려는 경우 우리가 선택의 지표로 삼게 되는 것은 대개 그 상점의 간판이다. 일반적으로 상품 목록을 요약하고 암시하려는 실용주의적 의도와 소비자의 시선을 끌고 구매욕을 자극하려는 심미주의적 의도는 간판의 제작 의도 속에 함께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학’은 소설의 독서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 소설을 읽고자 할 때 독자가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것은 그 소설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이다. 간판을 상점의 제목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제목을 소설의 간판이라 불러 어색하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의 제목도 독자에게 그 소설의 내용을 요약해 주거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거기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독서 의욕을 촉진할 수 있는 제목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소설 제목의 작명(作名) 작업에도 두 가지 의도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소설과 제목」, pp.177-178.)
하근찬의 「수난 이대」(1957)는 그 상징적 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상징성의 활용은 ‘말하기(telling)’의 유혹을 거절하게 하고 ‘보여 주기(showing)’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서사적 활력이 되어 있다. 구구한 주석과 논평을 간단한 상징을 통해 압축해 보임으로써, 「수난 이대」는 ‘단편소설’의 전범으로 손색이 없는 단아한 구성력을 과시한다. 이와 같은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외나무다리’라는 압축력 있는 서사적 공간에서 구성상의 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에 양보 없는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외나무다리’라는 공간은 일제시대 징용에 나갔다가 한 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와 6.25 전쟁으로 국군에 징집되었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들 ‘박진수’의 비극적 상처가 겹쳐지는 상징적인 자리로서, 그것은 ‘상처들의 포개기’를 통해 비극을 심화의 양상으로 이끄는 역할을 맡는다. ‘민족적 비극의 형상화’라는 서사적 목표가 ‘비극의 심화’라는 양상을 통해 달성될 때, ‘외나무다리’의 상징성은 빛나게 된다. (「비극의 심화와 확대」, pp.194-195.)
김성한의 「오 분간」(1955)은 ‘신’과 ‘프로메테우스’의 ‘오 분간’의 회담에 관한 이야기다. 역시 ‘우화’의 형식을 빌고 있는데, 「개구리」가 동물 우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오 분간」은 신화적 모티브(motive)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개구리」와 「오 분간」은 모두 ‘의식의 조작’이라는 명제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 ‘자유와 질서의 변증법’에 그 주제를 정위시키고 있다. 김성한은 신(神)의 죽음을 매개로 한 ‘질서’에서 ‘자유’로의 이행이 사람살이에 어떤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는 통속적 철학에 동조하면서도, 그 질서의 파시즘화가 수반하는 어떤 종류의 교조주의에 대해서는 자유라는 실존적 덕목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중요한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유’는 ‘질서’에 의해서, ‘질서’는 ‘자유’에 의해서 ‘제삼존재’로의 지양(Aufheben)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상상력의 실험」, p.208.)
‘역사소설’은 바로 소설사의 통시적 전개와 결부된 사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과 긴장의 문제를 공시적으로 맥락화하여 안고 있는 문제적 소설 범주이다. 때문에 사실의 우위냐 허구의 우위냐라는 소설사의 패러다임이 그 범주 자체 내에서 고스란히 발생반복(recapitulation)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사실의 우위와 허구의 우위라는 소설사 전개의 두 양상은 ‘역사소설’이라는 공시적 문맥 속에 재구축되어서 그 범주를 바라보는 두 개의 상이한 관점으로 전이된다. 사실의 제약을 충실히 따르기로 한다면 역사소설은 ‘역사’소설이 되지만 허구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작정이라면 역사소설은 역사‘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사실의 우위를 수용한 역사소설’과 ‘허구의 우위를 수용한 역사소설’이 모두 가능할 수 있다는 뜻에 다르지 않다. 아울러 사실과 허구 사이의 거리를 균형 있게 조율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가능한 ‘역사소설’도 빼놓지는 못한다. (「역사소설과 패러디」, pp.216-217.)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유형의 시인을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눈과 연결된 입을 가진 시인으로서 자신에 앞서 세상을 바꾸려고 통찰의 힘을 내세우는 오연한 ‘견자’로서의 시인이고, 다른 하나는 귀에 이어진 입을 가진 시인으로서 세상에 앞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변화의 힘이라는 것을 믿는 겸허한 ‘청자’로서의 시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유안진 시인은 후자에 속하는데, 물론 시인 유안진이 보여 주는 ‘듣기의 시학’은 현실의 변화를 모색하는 거창한 이상의 실현 욕구가 잦아들고 자신의 변화로서 현실과 조화되기 위해 작고 소박한 실천 의지만을 발휘하는 이른바 ‘노년의 시학’에 관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숙맥노트]가 귀로 깊어지는 일을 통해 보여 준 겸허와 성숙의 미덕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에게 듣기는 이미 “종교”의 차원에 육박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이비인후과」라는 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 의미에 대한 짐작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긴다. (「청자의 시」, p.243.)
신승철의 시편은 우리를 시간의 영원성 앞에 데려다 놓고, 일상의 초조와 근심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한 것이며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부질없는 세상사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마음을 경계하고 인생의 무상한 본질에 기꺼이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서만 불행한 인간 조건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는 성숙한 인식을 전한다. 신승철 시인의 시집 [기적 수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보다도 여기에 있다. (「숭고의 시」, p.257.)
박광숙의 시를 읽으면서, 우선 세 가지 종류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자아의 시’, ‘초자아의 시’, ‘무의식의 시’와 같은 것. 어떤 시들은 법이나 윤리처럼 사회문화적으로 합의된 금지의 현실을 바탕으로 참됨과 거짓됨에 대한 감각을 주로 표현하는 ‘초자아의 시’라 할 수 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하려는 그러한 ‘양심’의 언어들은 때로 분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분별 때문에 죄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관습이나 가치와 결합된 도덕적 현실의 금지 반대편에서 성욕이나 본능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정신의 에너지를 담아내는 ‘무의식의 시’도 있다. 이 ‘리비도’의 언어들은 그 자체가 존재의 희열을 표현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그 희열이 차단된 일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수가 많다. 마지막으로는 현실을 경험하는 자기를 통해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과 우리가 해 보고 싶어 하는 것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갈등과 고뇌를 표현하는 ‘자아의 시’가 있는데, 이런 ‘의식’의 언어들은 현실을 아무 이상 없이 지내는 의식 안쪽에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의식이 덧대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비 무덤의 시」, pp.260-261.)
의무적인 글쓰기는 언제나 상상력을 제한하고 편협한 사고를 하게 합니다만, 끊임없이 뻗어 가는 방만한 상상력에 제동을 거는 썩 괜찮은 여건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뭉뚱그려져 있는 생각의 언어로의 분절은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거죠. 언어의 몸을 입기 전의 상상력은 형상(形象)을 얻기 전의 진흙 덩어리처럼 다만 하나의 질료(質料)에 불과할 뿐입니다. 질료는 공유할 수 없는 체험입니다. 형상만이 공유가 가능한 체험이죠. 그 형상을 철학에서는 ‘의미’라 부르고 문학에서는 ‘이미지’라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함께 나누는 것이 가능한 체험인 ‘형상’을 통해서만이 보편적 체험은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팔복」의 분석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해석 체험을 어떻게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으니까요. 말을 바꿔,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이 글은 윤동주의 「팔복」 한 편에 한정된 분석이니까, 윤동주의 시 세계를 해명하는 데에는 전연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시 한 편의 분석을 통해 지금까지 윤동주 시에 대한 모든 분석이나 해석을 백지화하겠다는 해체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 단지 윤동주의 시 「팔복」과만 마주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구 묻지는 마세요. 여러분들이 묻지 않는다면 저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겠지만, 어떻게든 알아야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저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문학 교실의 풍경」, p.2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