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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에 있는 벽돌이다.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라는 노래다. Alan Parker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더욱 유명해진 이 노래는 획일화된 교육에 강한 저항을 담았다. 벽 속의 벽돌처럼 한국교육은 박제화되거나 별로 쓸모가 없다. 다만 1%의 금수저들을 위한 그들만의 게임이자 리그다. 가문의 영광이나 입신출세가 그 목적이 된 교육/공부를 순종적으로 따랐던 범생이들은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를 갖추지 못한 채 고위직에 임명되거나 독제체제 기생하여 권력에 아부하고 치부를 일삼았다.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은 직업윤리와 소신을 내팽긴 채 국가의 사법 개입에 저항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공익에 헌신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모범생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잘못된 교육관 때문이다. 주어진 내용을 최대한 빠르게 이해하고 흡수하여 자기 조절에 능한 그들은 ‘세상물정’에 대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경제자본과 권력 그리고 학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서울 강남, 특히 전문직 자녀들은 주로 명문대에 진학한 후 대학원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서울대 진학률의 경우 일반고보다 특수목적고/자립형 사립고가 5~10배를 넘는다. 1970~80년대 계층상승의 통로였던 사법고시는 철폐되고 이제는 로스쿨로 진학해야 한다. 로스쿨 진학도 특목고와 자사고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제 한국에서 교육은 계급과 계층을 고착화시키는 일방통행로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처럼 계급사회가 도래했다. 교육은 벽이다. 학교는 벽돌이다. 우리 모두 벽 속에 있는 벽돌이 되었다. 벽을 넘어야 별이 보인다. 별이 보이지 않는 사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
경쟁이 배제된 동네축구나 야구 시합을 할 때는 참가자 모두가 즐겁다. 하지만 ‘돈’이 걸린 시합을 하게 되면 승패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동네축구나 야구는 놀이처럼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경쟁이지만 ‘국가나 기업의 경쟁’은 적대적 경쟁이다. 적대적 경쟁은 강자가 승리하는 경쟁이기에 불퇴전으로 용기로 승리를 쟁취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수확은 권력과 명성 혹은 ‘자본의 축적’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많이 가진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본디 경쟁(competition)이란 어원은 라틴어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는 뜻이었으며, 자본의 어원은 동물의 머리(capita)로 그 머릿수를 하나씩 불려나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자본은 물물교환에서 상업으로 상업에서 수공업으로 수공업에서 기계화를 통한 대공업으로 규모와 영역을 키워 나갔으며 여기에 제국주의 세력은 식민지 개척과 전쟁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은 초국적기업과 세계금융자본이다. 여기에 그들의 모임인 G7, G20, WEF 등이 있으며, 나아가 범지구적 관리 조직인 IMF, WTO, FTA, WB 등이 있다.
1%의 자본가와 99%의 인민이 존재하듯이 한국 교육에도 1%의 금수저와 99%의 흙수저가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 거기에 걸맞는 직업이나 지위가 보장되고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과 계층 상승의 가능성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서울 강남 거주자 중 20퍼센트는 사교육비로 월 150만 원 이상을 쓴다고 한다. 이 중 자녀 1인당 월 평균 1,000만 원 이상을 쓴다는 사람도 3퍼센트다. 중산층이나 서민의 경우 자녀 1인당 월 평균 30~70만 원 쓰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결국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의 사교육비 격차는 교육의 질뿐만 아니라 일류대라는 학력자본을 쟁취하는 데도 격차가 발생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농지개혁은 한국사회를 반상(班常)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다. 문중(門中)이나 농촌 공동체가 공동화가 진행되고, 6.25전쟁의 후유증은 가족에 대한 집착과 결속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에 대한 집착은 교육열로 표출된다. 교육열은 입시 경쟁이다. 입시 경쟁은 입신출세다. 입신출세를 위한 교육 열풍은 사교육(선행학습)의 확대다. 농촌을 떠난 농민 그리고 피난민/월남자 등 대규모 인구 이동은 도시의 인구를 팽창시켰으며 도시민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 경쟁의 출발은 자녀 교육을 통한 가문 일으키기다. 오늘날에도 면소재지 출신학생이 일류대에 진학하면 현수막이 걸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명문대 진학은 세속적인 가치인 부와 명예 그리고 인맥을 얻기 위한 자격증이다. 조선시대로 얘기하면 양반(兩班)되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집착과 양반이 되기 위한 엄청난 교육열은 유교적 가치의 산물이다. 한 번의 시험 혹은 몇 차례의 시험을 거쳐 양반이 되면 신분상승이 용이해지는 것이 학벌이다. 학벌은 우월감이며 남을 차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1970~80년대 까지 학벌은 동문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연대감이었지만 오늘날의 학벌은 위계적 질서의 진원지다.
자녀들을 위한 한국 부모들의 희생 역시 놀라운 일이며 거의 종교적 신앙에 가깝다. 공부 잘해서 출세하자는 신앙은 아직도 유효하다. 가난한 집의 아이가 학업에 매진하면 빈곤 탈출의 가능성도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만일 다른 모든 조건들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정배경에 의한 사교육이 없거나 사교육이 있다하더라도 격차가 미미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육이 공정한 경쟁의 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가정배경과 학업 성취의 관계를 보면 부모의 학력과 소득이 높은 계층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개인의 노력과 지능보다 가정 배경에 의해 학력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학교 제도 자체가 노동자 문화보다 엘리트 계급의 문화를 교육 내용과 평가의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상류층 아이들이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폴 윌리스(Paul Willis)도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학교 교육도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투영되는 공간으로 계층 상승의 기회 또는 불평등을 완화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사회 구성원들이 간파(看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부를 더 많이 하는 데도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결국 교육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 구조를 온존시키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영향과 제약(制約)의 메커니즘 때문에 교육이 충분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탈정치화 됨으로써 계급이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계급 간의 경쟁이라는 엄혹한 현실이 존재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가정 배경이나 부모의 직업 등이 학업 성취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물론 1970~80년 고도의 경제성장기에는 ‘누구나 공부하면 잘살 수 있다’는 신화가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도입 이후 소득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경제성장과 교육의 효과는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장 원리로 도입된 특목고, 자립형 사립고, 과학고 등을 일반고 출신들이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옛날처럼 고학생이 성공했다는 신화는 사라져버렸으며, 이제 일반고는 ‘교육 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교실에서 한두 명만 수업을 듣고 나머지는 떠들거나 잔다. 서울에서만 매년 1만 6,000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고, 전국에서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은 17~36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교육 시스템으로는 취약 계층이 공부를 잘하거나 좋은 직업을 가질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를 잘 해 빈곤이나 노동계급에서 탈출하라는 조언도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다. 예외적 성공 사례를 무슨 법칙인 양 일반화하고, 계층상승의 실패를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으로 폄하하는 것은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70~80년대는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시를 읽거나 그림전시회, 강연회 등을 동무들과 함께 다니다가 2, 3학년 때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이후 10년이 흐른 뒤에는 중1 때부터, 또 다시 10년 이 흐른 뒤에는 초등학교부터 영어 과외, 과학 영재 교육, 논리적 토론과 대화, 원어민 회화 과외 등을 받으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한다. 이제 문학소녀들은 사라지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같은 선생들도 사라졌다. 적성은 성적으로 바꿔 읽는 과도한 경쟁만 남은 사회가 정상적 사회인가? 아니다. 범생이들이 만든 한국 사회는 살만한 사회인가? 아니다. 박정희는 유신(維新)이라는 독재체제를 만들고 ‘충효’와 ‘국적 있는 교육’ 강조했으며 오직 출세해서 가문의 영광과 국가에 충성하는 일만 가르쳤다. 이 결과 복종하는 국민으로 훈련된 청소년들은 2014년 “가만히 있으라”라는 방송에 수장되어 버렸다. 모든 학생들의 공부의 목적은 명문대 진학이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한 공부는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지 않고, 노동자는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공부를 잘하지 못했기에 이런 대우와 차별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학벌을 획득한 모범생들은 세속적 가치에만 몰두하다보니 책임의식과 직업윤리를 갖추지 못하고 그들만의 카르텔로 사회를 재단하거나 운영한다. 1990년대 이후 학벌 서열, 학력 차별은 조선시대처럼 신분 계급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교육 제도는 식민지, 개발 독재 시대의 교육보다 한 발짝도 발전하지 못한 사회문제의 온상이자 질곡이 되어 버렸다. 모범생이 만들어 놓은 이런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른다.
헬조선.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있는가. 없다. 하지만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본디 경쟁이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무의미하고 피곤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놀이처럼 즐겁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 살아가는 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 만약 원시사회에서 협동이 없다면 사냥과 채집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생존도 위협받게 된다. 그래서 경쟁은 필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히말라야 산맥 주변의 라다크 마을, 북미 원주민, 한국의 두레와 품앗이는 우애와 호혜의 전통이다. 까마득한 옛날 얘기이지만 나의 어머니는 가족들의 옷 등을 손빨래로, 경조사는 이웃사람들의 도움으로, 채소나 달걀 같은 먹거리 등은 집안 텃밭에서 직접 기르거나 키웠다. 길도 아스팔트가 아니라 흙길이었다. 비가 오면 진탕이 된 길은 장화 없이는 걷기 힘들었고, 땅 위로는 땅강아지와 날벌레 지렁이가 기어 다니고 장마 때는 하늘에서 미꾸라지가 비를 타고 떨어지지도 했다. 동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논과 밭이었으며, 여름에는 연못에서 멱을 감고, 저녁이 되면 동무들과 뒷동산에 모여 달을 보고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그곳에서 모기에 뜯기며 잠을 청했다. 살림살이는 팍팍했지만 이웃과 마을 공동체의 정을 나누던 아름다운 시절이었으며 적대적 생존경쟁도 없었다. 하지만 개발독재와 발전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는 정글과도 같은 시장경쟁의 질서와 함께 한국 ‘사회’는 철저히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양극화와 불평등은 99퍼센트 광범위한 패자들의 희생양으로 그들의 눈물방울이 흘러 강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통과 공감은 사라지고 경쟁과 격차만 남은 사회가 살만한 사회인가. 강수돌은 ‘경쟁과 격차가 있는 사회에서는 그 승자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생존경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 영화를 잘 보기 위해 의자 위에 올라서기 시작하면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영화를 관람할 수 없는 ‘극장의 비유’로 설명한다. 이는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경쟁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포착할 수 있는 비유로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 욕망이 ‘미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로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는 대학입시 경쟁으로 ‘수험생의 비유’다. 그런데 모두들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야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는 생존경쟁에 목을 매는 사다리꼴 사회가 아니라 서로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원탁형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로 최첨단 장비의 pc방이 생기면서 기존 pc방이 몰락하는 ‘pc방의 비유’다. 이 비유는 통닭집, 커피전문점, 문구점 등 소규모 자영업에 해당되는 것으로 적대적 생존 경쟁은 공멸한다는 말이다.
이 비유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어느 누구도 영원한 승자로 남을 수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무한 경쟁을 하는 세계는 각 개별 자본의 수익률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른바 맑스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다. 셋째, 무한 경쟁이 형식적으로는 생산성 경쟁으로 나타나지만 ‘노동과 자연’을 희생시켜 이윤을 착취하기 때문에 결국 무한 파괴성 경쟁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그리고 적대적 생존경쟁은 한계와 모순을 지니고 있다. 승패를 가르는 기득권 경쟁, 생존경쟁은 극소수만을 위한 게임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또한 기득권 경쟁의 다른 한계는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승자나 패자 모두가 사회적 파괴의 공범자가 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적대적 공존은 장기적으로 ‘공멸의 경쟁’임을 알아야 한다. 경쟁이 격화되는 사회일수록 사람과 사람의 소통과 공감, 단결과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래야 잘못된 구조와 모순을 바로 잡고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시장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공유지의 비극’도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전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공유지가 비효율적이기에 민영화 혹은 사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기심이란 편협함이야말로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하는 뿌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문제다. 바로 그 이기심이 세상을 험악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 면도 있지만, 이타적인 면도 있다. 아기가 생존을 위해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이기적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아이는 내면이 행복해지고 충만해지면서 주변을 사랑하게 된다. 즉 이기심과 더불어 이타심도 공존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는 사회적 상황이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레기네 슈너이더가 쓴 『소박함에 대하여』를 따르면 우리는 ‘공유지의 희극’도 가능하다. 북독일 함부르크 어느 지역의 공원은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어 있었다. 공유지의 비극이다. 그런데 한 여성이 이웃집과 함께 공원에 꽃을 심고 깨끗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공유지의 희극이다. 바로 이것이 희망의 근거다. 우리는 이기적인 면도 있지만 이타적이고 공동체적 마음도 갖고 있다. 사실 개인(individual)이란 말의 뿌리도 공동체(community)로부터 하나씩 분리된 쪼가리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적 개인’일 수밖에 없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하고 단결하면 ‘공동체의 희망’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교육에서도 공동체의 공생공략을 원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스템이 창조되어야 한다. 경쟁과 분열이 아니라 연대와 협동, 증오와 차별이 아니라 우애와 호혜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공생공략이다. 예컨대 고교평등화, 대학평등화, 직업평등화 등이다. 임재홍 교수(영남대)는 ‘서민경제와 사교육비’란 발표에서 사교육비는 한국의 교육전쟁을 치르기 위한 ‘전쟁비용’이라며 그 심각성을 지적하고, 대학입시로 승부가 갈리는 교육전쟁의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양질의 일자리 창출 방법과 직업/학력 간 임금격차의 차이를 줄이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임 교수는 교육정책에 있어 ‘대학교육기회의 평준화’정책을 도입하는 것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대학의 서열화, 그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책임을 들어 대학의 무상교육으로의 이행 혹은 등록금후불제의 실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등록금 후불제는 대학생들이 재학 중 등록금을 일체 납부하지 않고 교육을 받는 대신 졸업 후 교육비의 일정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
전 세계의 교육 연구에서 확인된 한 가지 진실은 교육을 통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는 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평등해져야 교육 기회의 평등도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도한 경쟁이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정책이나 해결방법보다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나부터 소수가 다수를 차별하고 착취하는 돈벌이 구조를 타파하고, 상부상조하는 호혜의 살림살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자세는 ‘나’에서 출발해 ‘더불어’ 어깨 겯고 나가야 가능해진다. 스웨덴 등 복지 선진국들은 마을이나 지역마다 수많은 공부/토론 모임과 동아리가 있으며, 노조 조직도 50~80%에 이른다. 수많은 모임과 투쟁 그리고 새로운 시도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었다. 결국 우리가 후손들에게 상속해야 할 것은 호혜를 바탕으로 한 경제민주화와 더 살기 좋은 마을이요 더 행복한 사회다. 개인적 상속보다 사회적 상속이, 생존경쟁보다 사회적 연대가 더욱 절실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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