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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증렬미(拯劣米)
정의
조선시대 세곡의 운송 과정에서 물에 잠겼던 쌀을 건져 낸 증미와 증미의 부족분인 열미의 합성어.
개설
조선시대 세곡의 운송 과정에서 조운선(漕運船)의 난파와 침몰 등으로 물에 잠겼던 쌀을 건져 낸 증미(拯米)와 증미를 다른 쌀로 바꾸고 난 뒤의 부족한 쌀을 지칭하는 열미(劣米)를 합하여 증렬미라고 하였다. 전자를 침수미(浸水米), 후자를 건열미(乾劣米)라고도 하였다. 증렬미는 조운선이 난파한 지역이나 세곡을 납부한 지역에서 다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조정은 부세 수입의 감소를 방지하고자 침몰된 조운선에 대한 세곡 처리 방법을 규정해 두었다. 본래 조운선이 침몰하면 건져 낸 세곡 전량을 연해읍 백성에게 나누어 준 뒤 새 세곡으로 납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침수되었다가 건져 내 말린 쌀이 완전히 보존될 리가 없던 까닭에 해당 백성의 불만이 높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663년(현종 7) 조정은 조운선이 침몰한 장소가 세곡을 납부한 지역에서 1일 거리이면 증미와 열미는 모두 납부 지역에서 부담하지만, 2일 거리 이상이면 증미는 침몰한 지역에서, 열미는 납부 지역에서 준비하여 납부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운선의 침몰이 잦아 증렬미에 대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지는 못하였다. 백성들은 한 번 상납했던 세곡을 또다시 납부해야 하는 첩징(疊徵)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비싼 운송비의 부담도 감내해야 했다. 이런 까닭으로 영조 연간에는 증렬미의 미납액을 감면해 주거나 돈으로 대신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1789년(정조 13) 채제공은 증렬미의 부담을 개선하고자 연해안 지역의 증렬미를 돈으로 대신 거두고, 동시에 증렬미의 연조(年條)를 감안하여 줄여 주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따라 미납된 증렬미는 연조에 따라 1~2년은 1석당 3냥, 3~4년은 2냥 5전, 5년 이상은 2냥씩 수취하였다. 즉, 증렬미에 대한 대전납(代錢納)을 통하여 백성의 부담을 완화했던 것이다. 증렬미의 대전납은 19세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형태
물에 빠져 건져 낸 세곡은 햇볕에 잘 말린다 하더라도 그 수량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쌀 1석을 건져 내어 말리면 얻을 수 있는 쌀, 즉 증미는 9두 1승 2홉이었다. 그러면 5두 8승 8홉이 부족한데 이것이 바로 열미였다. 다만,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쌀은 백성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처분하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증렬미는 조정의 정규 부세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규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건져 내지 못한 쌀은 조운선에 승선한 감색(監色)·사공(沙工)·격군(格軍)에게 징수하였는데, 이들은 보통 10차례의 형신을 당하고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다만, 큰 바다에서 익사한 승선자에게는 징수하지 않았다. 한편 수령은 건져 내지 못한 쌀을 재임 기간 중에 반드시 상납해야 했고, 원 수량 중 1/10을 납부하지 못하면 해유(解由)에 구애를 받아야만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탁지지(度支志)』
『만기요람(萬機要覽)』
지토선(地土船)
정의
조선시대 지방의 토착민이 소유한 배.
개설
조선시대 중앙에 상납되는 전세는 경기와 강원도의 몇 개 고을에서 서울에 있는 경창(京倉)에 직접 가져다 바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할 조창(漕倉)에 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각 조창에는 중앙에 세곡을 상납하는 조운선(漕運船)이 배치되었으며, 각 고을에서 조군(漕軍)으로 차정된 이들에 의해 세곡이 운송되었다. 다만 조창까지의 거리가 멀어 조창, 수참에 속하지 않은 고을의 경우 민간에서 배를 임대하여 세곡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 민간에서 빌리는 배는 지토선(地土船)을 우선으로 하고, 지토선이 없는 고을에서는 경강선(京江船)을 이용하도록 법제화하였다. 1698년(숙종 24)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따르면, 각 고을의 전세는 경강선에 실을 수 없으며, 반드시 본 고을의 지토선이나 인근 고을의 지토선을 빌려 싣도록 하고, 만일 각 고을에서 지토선을 빌리지 못하면 서울에서 활동하는 경강선을 이용할 수 있으나, 이때에는 선주(船主), 사공(沙工), 격군(格軍)의 신원이 명확한지를 살피고 건실한 선박을 골라 싣도록 하였다.
임운하는 데 있어 경강선보다 지토선을 우선시한 이유는 일부러 침몰 사고를 일으켜 세곡의 손실을 야기하는 고패(故敗)를 염려한 것이었다. 지토선의 경우 고을에 등록되어 있고, 선주(船主)와 그 가족이 고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배를 관리, 감독하는 것이 수월하였다. 더욱이 지토선은 인근 고을뿐 아니라 원거리 항해에 있어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에 17세기 초부터 지토선은 세곡을 임운하는 데 있어 우선권을 부여받았다.
연원 및 변천
17세기에 운영되던 조창을 살펴보면, 충청도의 공진창, 전라도의 성당창, 군산창, 법성창, 그리고 수참(水站)으로서 충주의 가흥창이 운영되고 있을 뿐이었다. 각 조창에 속하여 전세곡과 대동미를 상납하는 읍은 모두 48읍에 그쳤다. 선운하는 고을이 184개 읍에 달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136읍이 사선 임대를 통해 세곡을 운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말부터 사선임운을 경강선이 장악해가면서 지토선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영조대 초반 경강선의 대규모 침몰 사고로 인해 다시금 그 역할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세곡 운송에 참여하는 지토선인들은 기일 안에 무사히 세곡을 경창에 상납하면 1척 당 50석의 운송 대가를 받거나 거리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뱃삯을 받았다. 뱃삯의 경우, 충청도에서는 10석당 1석을, 전라도와 경상도는 10석당 2~3석을 받았기 때문에 선인들은 가능한 세곡을 많이 실어 많은 뱃삯을 받고자 하였다. 이처럼 지토선이 세곡 운송에 대거 참여하게 된 것은 모든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한 대동법(大同法)이 큰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전세곡의 2~3배에 달하는 대동미가 추가로 중앙에 상납되어 세곡의 운송과 보관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16세기 이후 관선 조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상황에서 대동미의 운송을 고민하던 중앙 정부는 지방에 산재한 지토선과 경강선을 활용하여 대동미의 수송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토선은 선박의 규모가 관선이나 경강선에 비해 작은데다가 궁방이나 아문에서 지토선을 점탈하는 사례가 많아 세곡 운송에 동원되는 지토선의 수가 줄어드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더욱이 18세기 초 한강에는 최소 200~300석에서 최대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京江船]가 300여 척이나 운영되고 있을 만큼 경강선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경강선의 침몰 사고로 지토선이 세곡 운송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지만, 정조대 주교사(舟橋司)의 설치로 사선임운의 권한이 경강상인에게 넘어감으로써 지토선은 경강선인들과의 경쟁에서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수교집록(受敎輯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고동환, 「조선후기 연안항해와 외양항로의 개척」, 『동방학지』16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3.
최완기, 「朝鮮後期 地土船의 稅穀賃運」, 『한국사연구』57, 한국사연구회, 1987.
직전법(職田法)
정의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 수조권을 나누어 주던 제도.
개설
조선의 건국 세력은 고려말의 문란한 토지제도를 수습할 목적으로 139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토지 분급제인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였다. 그 내용은, 전·현직 관료들을 대상으로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해 준 것이었다. 과전의 지급은 경기도의 토지만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는 과전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과전은 분급받은 당사자가 사망하더라도 부인이나 자식들이 있는 경우 수신전(守信田)이나 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혜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과전은 실제로 세습될 여지가 다분하였고, 건국 직후부터 신진 관료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국가에서는 과전의 세습을 방지하고 관료들에게 골고루 토지를 지급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에 따라 1466년(세조 12)에 전직 관료들을 배제하고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 수조권을 분급하는 직전법이 실시되었다. 이후 직전은 그 분급 규모가 점차 축소되었고, 명종 연간에 이르면 더 이상 직전이 분급되지 않게 되었다. 직전법의 소멸로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토지 수조권을 분급하는 제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세조실록』에는 직전법과 관련된 논의 과정 등이 전혀 전하지 않고, 다만 세조 12년 8월 25일 기사에 ‘과전을 혁파하고 직전을 설치한다.’라고만 되어 있어 그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초부터 과전의 부족을 토로하는 기록이 많고, 이미 태종 말엽부터는 과전의 부족 문제가 본격적인 현안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세조대에 이르러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고 아울러 수신전·휼양전 등을 지급하지 않는 직전법이 도입된 것이었다.
내용
고려말 조선의 건국 세력은 고려의 문란한 사전(私田)들을 정리하는 전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토지의 수조권은 국가로 귀속되었고, 국가에 복무하는 관원과 유직자들에게는 그 물질적 대가로 과전이 지급되었다. 이미 사적 수조권이 팽창하면서 권력자들에 의해 토지 겸병이 자행되고, 하나의 토지에 대해 수조권(收租權)이 중첩적으로 행사되는 등 토지제도의 문란과 국가 재정의 궁핍을 경험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과전을 경기도에만 설정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서 사전의 팽창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1391년 양전 당시 경기도 일원의 토지는 100,000결(結)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당시 지급해야 할 과전의 양과 비슷한 규모였다. 따라서 국초 과전의 분급은 큰 무리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나아가 조선 건국의 물적 기반으로 성공적인 운영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과전은 개국 이후 얼마 안 되어 곧 문제점을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과전은 본래 전·현직 관료를 대상으로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료의 수는 증가하는 반면, 지급해야 할 토지는 부족하게 된 것이다. 한 번 지급된 토지가 국가로 환수되기 위해서는 관료가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이에 비하여 과거나 음서 등의 방법으로 충원되는 관원들은 해마다 증가하였다. 특히 사전 팽창을 억제하기 위하여 설정한, 과전을 경기도에 제한하는 원칙은 이러한 과전 부족의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하였다.
과전 부족의 문제를 부추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과전이 실제 대대로 상속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관원이 사망할 경우 남겨진 부인이나 자식들에게 수신전과 휼양전이란 이름으로 과전을 점유하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과전의 세습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특히 휼양전과 같은 경우, 아버지의 과전을 일단 점유하다가 이후 본인이 관원이 되면 아버지 과전에서 자신의 직품에 맞는 과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합법적인 세습은 관원들 중 일부만이 과전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과전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태종대에는 수신전의 규모를 줄여서 자식이 있는 경우 2/3, 없는 경우에는 1/3만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과전을 가진 관원이 사망할 경우, 그 사망한 관원의 과전을 관에 보고하고 보고한 사람이 직접 그 과전을 지급받도록 하는 진고체수제(陳告遞受制)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고체수제는 다른 사람의 사망을 기회로 본인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어서 잘못된 사회 기풍을 조장하는 제도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또한 토지가 부족한데, 주로 권력을 가진 상급의 관원만이 과전을 지급받는다는 문제가 지적되어 전 관원을 4등급으로 나누어 각 등급의 과전은 같은 등급의 관원들 사이에서 체수받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로는 근본적인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1466년(세조 12)에는 과전을 혁파하고 직전법이 도입되었다[『세조실록』 12년 8월 25일]. 직전법에서는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이에 따라 수신전이나 휼양전과 같은 명목의 토지도 모두 폐지되었다. 또한 새로운 직전법에서는 토지의 지급량도 이전 과전법에 비하여 축소되었는데, 과거 과전법에서는 1품 관료의 지급량이 150결이었던 반면, 직전법에서는 110결이었다.
직전법의 도입은 관료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수신전과 휼양전은 관원 사후 가족에 대하여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유교적인 예의와 염치를 잃지 않도록 하는 제도로 인식되어, 그 폐지가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한때 수신전과 휼양전의 복구가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직전법을 고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변천
기존의 과전법에서는 과전 주인이 전세(田稅)를 직접 거두어들였는데, 직전에서도 그와 같은 관행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일반 공전(公田)이 풍흉에 따라 세를 납입했던 반면, 사전인 과전 혹은 직전에서는 그러한 풍흉의 판단을 사전 주인이 직접 행사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세액 감면 혜택을 거의 기대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하여 과전 혹은 직전으로 설정된 토지의 농민들은 사전 주인에게 전세 외에도 건초를 납입할 의무까지 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도 경기도민들의 부담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해결하려 하였다.
성종대에는 각 직전의 수조권자가 직접 답험(踏驗)하는 관행을 고쳐 국가에서 일괄 답험하고 세금을 거둔 이후 이를 사전 주인에게 나누어 주는 관수 관급(官收官給)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다[『성종실록』 1년 4월 20일]. 관수 관급의 도입은 수조권자와 경작자들이 직접 마주할 계기를 차단한 것으로, 사전 주인이 그 권리를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없애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강제훈, 『조선전기 전세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02.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 제도 연구: 토지분급제와 농민 지배』, 일조각, 1986.
이재룡, 『조선 전기 경제 구조 연구』,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9.
진전(陳田)
정의
토지대장인 전안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휴경 상태에 있는 토지.
개설
진전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하였다. 경작자의 건강 문제나 자연재해와 같은 직접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요인으로도 진전이 발생하였다. 정부 입장에서 진전은 세금 수취액의 축소를 가져왔으므로, 진전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진전은 더욱 큰 폭으로 늘었고, 여기에는 다양한 사회적 폐단과 모순이 작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진전은 다양한 이유로 발생하였다. 토질이 나빠 투입한 노동력에 비하여 수확이 적은 경우, 지력을 높이기 위한 휴경 때문에 진전이 발생하였다. 점유한 농경지에 비하여 투입할 노동력이 부족한 경우에 진전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 조세의 부담이 너무 커서 잉여생산물이 없는 경우나 농민의 질병·사망 등의 이유로도 진전이 발생하였다. 진전 중에는 자연재해 등으로 휴경된 토지는 원래의 소유주가 소유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 생산자인 전호(佃戶)의 유망 등으로 휴경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토지는 소유권이 소멸되었다.
진전이 늘어나면 조세 수입이 감소되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진전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질병으로 경작할 수 없는 경우에 이웃이나 친족이 대신 경작하도록 하였다. 또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묵히고 다른 사람이 경작하는 것 또한 금하게 하는 사람은 신체적 형벌을 가하였다. 10부(負)에 태형(笞刑) 10대를 집행하고, 10부마다 1등을 가하여 죄가 장형(杖刑) 80대에 그치게 하였다. 그 땅은 토지가 없거나 적은 사람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였다. 아울러 토지의 개간 정도로 수령의 업무 능력을 평가하였다. 3등급으로 나누어, 무능한 수령을 해임하고, 유능한 수령을 중용하였다[『태조실록』 3년 4월 11일]. 그 결과 수령들은 문책을 두려워하여 관할 지역의 진전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농민들은 면세를 받지 못하는 피해가 커졌다.
변천
1444년(세종 26)에 제정된 공법(貢法)에서는 정전(正田)의 경우에는 진황의 정도와 상관없이 모두 전세(田稅)를 징수하였다. 속전은 각 군·현의 수령이 경작자의 신고서[告狀]를 받아 진황의 정도를 직접 심사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감사(監司)나 수령관(首領官)이 다시 사실관계를 조사한 뒤에 보고하여 전세를 면제해 주었다.
정전이나 속전 중에 수해(水害)로 침몰된 토지도 경작자의 신고를 받아서 수령이 직접 답사하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런 뒤에 감사나 수령관이 해당 사실을 조사하여 재상경차관의 고험(考驗)을 받은 뒤 피해를 입은 토지의 면적을 문서에 기록하고, 중앙정부에 보고하여 면세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그러나 진전의 설정과 세금 징수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경국대전』에서는 경작자의 질병으로 인하여 발생한 진전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조세 징수를 결정하였고, 자연재해로 발생한 진전에 대해서는 피해 정도에 따라 차등 있게 전세를 줄여 주었다.
16세기 이후 진전의 수세는 하하(下下)의 연분(年分)을 적용하여 계속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제도가 문란해지고 각종 부가세가 늘어나 농민들의 이농현상이 많아졌다. 그 결과 진전이 더욱 확대되어 국고 수입이 감소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강진철, 「麗代의 陳田에 대한 권리문제 - 촌락경제의 기반 , ‘농민적 토지소유’와 관련시켜 -」, 『진단학보』 64, 진단학회, 1987.
김쌍규, 「朝鮮前期의 陳田收稅問題」, 『歷史敎育』 66, 역사교육연구회, 1998.
이재룡, 「16세기의 量田과 陳田收稅」, 『孫寶基博士 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8.
조인성, 「朝鮮初 陳田의 發生」, 『高麗末·朝鮮初 土地制度史의 諸問題』,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7.
참리전(站吏田)
정의
참리들의 공무 수행 대가로 지급한 전지.
내용
조선시대 역(驛)의 명칭은 역뿐만 아니라 역이 위치한 지역에 따라 참(站)·관(館)·합배(合排) 등으로도 불렸다. 예를 들면 황해도에서 참이, 평안도에서는 참·관·합배가, 함경도에서는 참·관이 혼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의 참은 수참(水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참 소속의 참리(站吏)에게 공무 수행의 대가로 절급한 전지(田地)가 참리전(站吏田)이었다.
용례
司憲府啓 七站察訪李伯善 以逃亡站吏田 不給立馬之人 與人幷作 所出雜穀 視爲己物 贈遺於司譯院直長任孝連前判事李讌等九人 又聽其妻之請 以粟五石 給平壤判官崔悌男妻李氏 又聽吏曹判書權孟孫女壻前直長金係權之請 贈蓑衣及鹿皮 又以眞荏子十斗 暗賂孟孫 爲後日之地[『문종실록』 1년 11월 24일]
참고문헌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5.
이장우, 「조선초기의 역전」, 『역사학보』 142, 1994.
창정(倉正)
정의
창고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임무를 맡은 유역인.
내용
창정(倉正)은 각 고을 소재의 창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유역인(有役人)으로, 역에 종사하는 대가로 창정위전(倉正位田)을 절급받았으나,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田制改革) 때 병정(兵正)·창정(倉正)·옥정(獄正)·객사정(客舍正)·국고직(國庫直)·지장위전(紙匠位田)과 함께 혁파되었다.
용례
議政府據戶曹呈申 今田制改詳定事及可革條件 磨勘後錄 (중략) 京畿各官人吏位田 每一結稅二斗 納廣興倉 忠淸全羅慶尙江原黃海道各官人吏位田 每五結內 二結屬廣興倉 三結爲口分 然廣興納二結之稅六十斗 每年不足 以口分充之 位田有名而無實 況他艱苦軍役之人 亦皆無位田 今悉革之 兵正倉正獄正客舍正國庫直及紙匠位田 亦竝革之 (중략) 從之[『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천반포락(川反浦落)
정의
홍수 등으로 내의 물길이 다른 곳으로 터져 흐르면서 경작지가 떨어져 나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경우.
개설
조선후기에는 자연재해가 빈번하였다. 천반포락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진전(陳田)이 그렇듯이 천반포락전(川反浦落田) 역시 순수하게 자연현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천반포락전은 면세 대상이었으므로 정부는 가능하면 천반포락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한편에서는 이를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존재해, 이들 사이에서 다양한 갈등이 빚어졌다.
내용 및 특징
질병(疾病)으로 사망한 자의 전지이나 재해를 입은 재상전(災傷田), 모래가 떠밀려 와 경작을 할 수 없게 된 복사전(覆沙田)과 함께 천반포락전도 전세(田稅)를 면제받도록 법령으로 규정되었다[『성종실록』 5년 1월 25일]. 하지만 현실에서는 전세가 부과되는 경우가 많았다[『성종실록』 19년 윤1월 25일].
수령들은 재상전과 천반포락전 등에 대한 연분(年分)을 판정할 때마다 직접 살피는 것을 꺼려 수하의 아전들에게 맡겨서 답험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뇌물을 주고받는 폐단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촘촘한 관찰 및 보고 체계를 확립하였다. 즉, 각 지역의 권농관이 완전히 재상(災傷)을 입은 전지[全災傷田], 반이 넘게 재상을 입은 전지[過半災傷田], 병으로 인하여 경작하지 못하여 모두 묵힌 전지[因病未耕全陳田], 천반포락전(川反浦落田) 등을 직접 살펴서 수령에게 보고하면, 수령 역시 그 사실관계를 면밀히 따져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다시 감사는 보고된 장부를 조사한 다음 되돌려 주게 하였다. 그런 다음 중앙정부가 재상경차관을 파견하여 확인한 뒤 전세를 면제시켰다[『성종실록』 3년 8월 12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 관리들의 농간은 근절되지 않아 천반포락전에 전세가 부과되는 폐단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후기가 되면, 처음부터 파종하지 못한 전지와 모내기를 하지 못한 전지, 모내기 때를 놓친 전지, 전혀 낫을 대지 못한 전지, 이삭이 패지 못한 진지, 벌레 때문에 피해를 입어 감손된 전지, 게[蟹] 때문에 피해를 입어 감손된 전지, 말라서 감손된 전지, 서리의 재해를 입은 전지, 우박의 재해를 입은 전지, 해일이나 물에 잠긴 전지 등은 그해에만 면세를 적용하는 당년재(當年災)로 규정한 반면, 천반포락전은 영구적으로 경작이 불가해져 세금징수 대상에서 제외되는 영재(永灾)로 간주하였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철법(徹法)
정의
중국 고대 주나라에서 시행되었던 토지 경작 및 세금 수세 방식.
개설
철법은 정전제(井田制) 하에서 농민이 토지를 경작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방법을 일컫는 용어였다. 철법은 『맹자집주』의 「등문공편」에 그 내용이 보이는데, 농부 1명이 정(井) 자로 구획된 토지 중 1필지를 분배받아 개인 소유의 사전(私田)으로 경작하는 한편, 가운데 필지의 토지는 8가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본래 은나라의 조법과 유사한 형태였는데, 다만 1가호가 경작하는 토지의 크기가 증가하였다는 것과, 조법과 달리 각 사전도 8가호가 힘을 합쳐 경작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철법은 은나라 조법과 더불어 1/10의 과세를 이상적으로 구현한 제도로 인식되었다.
내용 및 특징
하나라의 공법은 농부 1명에게 50무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거기서 1/10을 수취하는 제도였다. 이에 반하여 은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정전제를 실시하면서 630무의 정방형 토지를 우물 정 자로 구획하고 가운데 70무 토지는 공전으로, 나머지 8필지의 각각 70무 토지는 각 농부에게 사전으로 나누어 주었다. 농부들은 사전을 경작하여 생활을 영위하고, 공전 70무는 8가호가 힘을 합하여 경작하여 세금으로 납부하였다. 따라서 농부 1명이 경작하는 총 토지 중 세금에 충당되는 공전의 경작 면적은 약 1/9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공전을 통하여 세금을 납부하면 각 사전에는 다시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법은 주나라에 들어와 철법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대체적인 내용은 거의 같았다. 다만, 1가호가 받는 토지가 100무가 되고, 공전의 크기 역시 100무가 되었다. 또 조법과는 달리 각 사전의 경우도 8가호가 힘을 합쳐 경작하였다. 철(徹)이란 글자가 본디 ‘뚫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철법이란 명칭은 바로 8가호가 힘을 합쳐 한 정(井) 내의 공전과 사전 모두를 경작한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철법은 은나라의 조법과 더불어 유학자들에게 이상적인 제도로 인식되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종대 공법 도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철법은 은나라의 조법과 더불어 1/10세의 이상을 잘 구현한 제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이를 근거로 세종의 공법 도입에 반대 논거로 활용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1년 7월 21일]. 성종대에는 세종대 도입된 공법이 1/20의 세금을 부과시키는 제도임에도 감사나 수령이 연분 등제를 낮게 매기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조법은 1/10세가 세금의 올바른 원칙임을 주장하는 논거로 활용되었다[『성종실록』 16년 9월 16일].
변천
정전제와 1/10 과세를 이상적으로 구현한 철법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 진나라 상앙이 토지개혁을 실시한 이후 역사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유학적 소양을 지닌 학자와 관료들은 철법을 조법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인 세금제도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시대적 맥락에 맞게 이 제도의 핵심 사안들을 구현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다. 세종대 공법 도입,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의 개혁안 등이 모두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반계수록(磻溪隨錄)』
『목민심서(牧民心書)』
『맹자집주(孟子集註)』
이정철, 『대동법 - 조선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1.
이세영, 「주자의 『맹자집주』에 보이는 ‘井田制’의 성격」, 『역사문화연구』 32,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9.
타량(打量)
정의
토지에 등급을 산정하고 그에 따른 기준척으로 측량하여 양안에 기록하는 일.
개설
타량은 토지를 측량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경국대전주해』에 따르면 ‘타(打)’ 자는 조어(助語)라고 쓰고 있어서 결국 토지조사를 뜻하는 양전과 같은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용례 상에서는 양전과 같은 말로 쓰이기도 하고, 혹은 양전의 전체 업무 중 토지의 측량을 지칭하는 용어만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양전은 원칙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3등급 내지는 6등급으로 판정한 이후, 각 등급에 해당하는 기준척으로 면적을 측정하여 토지대장인 양안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전이 20년마다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막대한 비용과 행정력이 투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 측정이 아니라 이전의 양안을 토대로 넓이만 환산하여 다시 양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토지측량 방식은 세종대 공법 도입을 전후하여 크게 바뀌었다. 조선초기에는 토지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각 등급별로 길이가 다른 기준척으로 측량 업무를 행하였다. 세종 공법 도입 당시 이러한 3등전을 보다 세밀히 하여 6등급으로 토지 등급을 세분화하였고, 또 각 등급 토지 1결의 절대 면적을 넓히도록 하였다. 6등전 분류 하에서도 마찬가지로 각 등급별 기준척을 달리하였다. 이때 6등전 토지의 1결 면적은 1등전 토지의 4배였다.
토지측량 업무는 중앙에서 파견된 양전경차관이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산사(算士) 등을 대동하여 시행하였다. 지방의 수령과 아전 등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민폐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경차관의 수가 많아 이들을 수행하는 일이 각 지역에 부담이 되기도 하였고[『중종실록』 37년 7월 19일], 때로 궁방 등 권력 기관에서 타량할 때에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였다[『현종실록』 3년 8월 1일].
변천
토지측량 방식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전기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기준척을 달리하여 측정하던 방식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효종대의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에 따르면 기존 6등급에 각각의 자를 모두 사용하는 방식 대신, 1등급 자를 사용하여 면적을 구한 다음 각 등급에 맞게 환산하여 면적을 산출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방식은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에서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속대전(續大典)』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
판적사(版籍司)
정의
호조에 속한 세 아문 중 하나.
개설
호조는 태종 초년에 이미 국가 재정의 중심 기구로 확립되었다. 호조는 그 산하에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급전사(給田司)의 세 아문(衙門)을 두고 호조의 기능을 나누어 맡기었다. 이렇게 확립된 기구가 큰 변화 없이 지속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호조 기능이 점차 분화하고 복잡해졌다. 그에 따라 판적사도 그 아래 여러 소속 기구를 포괄하게 되었다. 조선의 다른 아문이나 기구가 그렇듯이 판적사 역시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직후 국정 담당자들은 고려의 재정아문인 삼사(三司)를 존속시켜 국가 재정의 출납 운영과 회계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401년(태종 1)에 삼사의 명칭이 사평부(司平府)로 바뀌는 등 점차 그 위상이 약화되다가 마침내 1405년(태종 5) 삼사가 호조에 귀속되면서 호조가 국가 재정의 중추 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호조는 호구(戶口)·전토(田土)·전곡(錢穀)·식화(食貨) 등 일반적인 행정 업무와 세금 수취 관련 업무 등 국가 재정과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에 판적사·회계사·급전사를 두었고, 각각 정5품인 정랑(正郞)과 정6품인 좌랑(佐郞)을 1명씩 배치하여 담당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중 판적사는 호구·부역·공물 등에 대한 관할과 농상의 장려, 경작 상태와 자연재해 실태 파악 및 빈민 구제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1455년(세조 1)에 판적사 낭관(郎官)이 하천의 제언(堤堰) 관리를 감찰하는 업무를 새로 맡는 등 직제와 기능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경국대전』에 위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변천
호조의 삼사 분장 체제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훈련도감 병사들의 급료를 관리하기 위한 별영색(別營色)이 설치되었다. 1640년(인조 18)에는 각 관서의 부족한 물종과 중국·일본과의 무역가 등을 보관하거나 관리하는 별고색(別庫色)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규정에는 없지만 각사에서 추가로 지출해야 할 예산을 조달하기 위하여 판별방(版別房)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판적사가 관장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사섬시(司贍寺), 1767년(영조 43)에 사축서(司畜署)가 각각 혁파되면서, 호조의 직제는 정조대 초반에 3사 14방(房)의 체제로 정비되었다.
새롭게 갖추어진 체제에서 판적사에는 잡물색(雜物色)·금은색(金銀色)·주전소(鑄錢所)·수세소(收稅所)·사섬색(司贍色) 등 5방이, 경비사에는 전례방(前例房)·별례방(別例房)·판별색(版別色)·요록색(料祿色)·세폐색(歲幣色)·응판색(應辦色)·별고색·별영색·사축색(司畜色) 등 9방이 각각 소속되었다. 회계사에는 하위 기구인 방, 색이 설치되지 않았다. 판적사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호조가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탁지지(度支志)』
이장우, 「삼사와 호조」, 『조선초기 전세제도와 국가재정』, 일조각, 1998.
평전(平田)
정의
산전과 대비되는, 평지에 위치한 일반적인 경작지.
개설
조선은 모든 경작지 면적을 결부제(結負制)로 평가하였다. 결부제는 같은 생산량을 내는 토지를 같은 면적으로 파악하는 평가 방식이었다. 때문에 비옥한 토지에 비해서 척박한 토지는 절대 면적에서 비옥한 토지에 비해서 몇 배나 넓었다. 정부는 토지를 파악할 때 기본적으로 평전과 산전을 먼저 구분하고, 평전을 수세에 관한 국가 제도 수립의 기준으로 삼았다.
내용
조선에서는 모든 경작지를 양전(量田)하여 결부제로 평가한 뒤 양안(量案)에 기록하였다. 결부제란, 1결에서 나오는 소출을 같게 맞추기 위하여 비옥한 땅은 짧은 자[尺]로 1결을 재고, 황폐한 땅은 긴 자로 1결을 재서 황폐한 땅의 1결이 비옥한 땅의 1결보다 넓게 측정하는 제도였다. 이처럼 결부제 하에서는 서로 다른 면적의 토지라도 양안 상에 1결로 파악되면 동일한 세금을 납부하였다. 그런데 토지의 면적 산정에서 중요한 것은 각 토지의 토질과 수원(水源)의 유무, 배수의 유무 등이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토지를 등급화하고 각 등급의 기준이 되는 자를 가지고 경작지의 면적을 측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결부제 산정에 앞서 먼저 고려되는 요소가 바로 해당 토지가 산전인가 평전인가 하는 점이었다. 조선은 산지가 많은 지형이기 때문에 많은 경작지가 산비탈이나 산 정상에 위치하였고, 이러한 토지를 산전(山田)이라 하였다. 반면 평지에 위치한 경작지는 평전(平田)이라고 지칭하였다. 일단 해당 토지가 평전으로 인정되면 양안 작성 시에 정전(正田)으로 평가되어 양안에 기재되었다. 반면 산전의 경우 속전(續田)으로 평가되어 기재되었다.
평전은 산전에 비하여 산출이 우세한 토지였다. 때문에 비옥도에 따라 토지 등급을 3등급 내지는 6등급으로 매기는 것은 평전만을 그 대상으로 하였고, 산전은 평전의 최하등급의 토지와 비교하여 그 경작 여건을 평가하여 결부를 산정해 주었다. 보통 산전 1결(結)의 절대 면적은 평전 최하등급 1결 토지 넓이의 몇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조선초에는 이러한 토지 등급을 ‘갑(甲)’이라는 단위로 표현하였다. 즉, 산결 2갑전은 평전 최하등급 1결에 비하여 2배의 넓이가 되는 산전 1결을 의미하며, 3갑전·4갑전 역시 3배·4배만큼의 평전 넓이를 1결로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평전은 산전에 비하여 진황(陳荒) 여부나 손실분 인정에서 불리한 토지였다. 1466년(세종 27년)에 공법(貢法) 도입이 결정되었는데, 공법에서는 평전에서의 진황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평전으로 등록된 토지의 경우 매해 농사를 지어야 했으며, 평전에서 농사를 짓지 않았더라도 그해 풍흉 정도에 따라 부과되는 세액을 부담해야만 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표재(俵災)
정의
흉년이 든 때에 조세의 일부를 면제해 주는 일.
내용
재해(災害)를 입은 전지에 대하여 그 정도를 조사하여 전세(田稅)를 차등 있게 줄여주거나 면제해 주는 일을 표재(俵災)라고 하였다.
용례
慶尙監司李益輔上書 請加俵災 答以令廟堂稟處[『영조실록』 31년 12월 14일]
한전법(限田法)
정의
토지 소유 규모의 상한을 정하여 그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
개설
전통시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산업의 근간은 농업이었고, 따라서 부의 축적은 토지와 노동력의 확보를 의미하였다. 이 때문에 어느 왕조에서든 권세가나 부호가 토지를 광범위하게 소유하는 일이 항상 발생하였다. 한전법은 이미 중국에서는 한나라와 송나라에서 시행된 적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권세가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토지가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전법이 논의되었다. 이후 중종대나 영조·정조대에도 이따금 한전법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한전법에 대한 건의는 세종대 유정현(柳廷顯)에 의해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이후 15세기 말부터 간간히 토지 소유에 상한을 정하는 한전제 시행 논의가 있었다. 한전법이 진지하게 논의된 때는 중종 12과 14년이었는데, 경연에서 신용개(申用漑) 등이 건의한 바 있다[『중종실록』 12년 7월 29일]. 이때 50결(結)이 상한으로 제시되었는데, 중종 14년 시강관 기준(奇遵)의 발언에 의하면 근자에 50결을 상한으로 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하였다[『중종실록』 14년 7월 2일]. 50결을 소유한 백성이 거의 없어 정책의 실효성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이후 영조대에도 한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입법화되지는 못하였다. 한도 이상의 토지를 강제로 국가가 몰수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컸고, 이를 국가가 매수하여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 역시 재정적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대 역시 30결을 기준으로 토지 소유 한도를 정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이 또한 시행되지 못하였다.
정전법(井田法)을 이상으로 하는 조선시대 지배층의 사고에서, 토지의 균등 분배라는 이상을 그나마 정책적 차원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제도가 한전법이었다. 그러나 한전법 역시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제도였으며,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시대에 한전법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변천
한전법은 실현되지 못한 제도였으나, 이에 대한 논의는 관료뿐 아니라 국가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그중 이익(李瀷)은 정전법에 근거한 한전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한전법은 토지에 대한 강제 몰수 등이 아니라 점진적인 매매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업전(永業田)으로 묶인 100묘(畝)에 대해서는 매매를 금지하고 그 외의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매매를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시일이 지나 토지가 100묘 소유로 균등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이러한 발상의 바탕 역시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고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실현하려는 성리학적 사고였다.
참고문헌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Ⅱ: 농업 경영과 지주제(地主制)』, 일조각, 1998.
한지(閑地)
정의
경작된 적이 없는 토지.
내용
한지는 진전(陳田)과 대비되었다. 진전은 전안(田案)에 기경지(起耕地)로 등재되었지만, 자연재해나 소유주의 사정 따위로 휴경 상태에 있는 전지(田地)를 가리켰다. 반면에 한지는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어도, 경작한 적이 없는 토지로 간주되어 국가의 전안에 등재된 적이 없는 전지를 가리켰다.
용례
京畿右道江原道察訪副使楊秩啓自綠楊至銀溪驛興利除害事件 下議政府六曹擬議以啓 (중략) 司僕寺無主馬 量宜分給無馬各驛 且轉運急走奴子 以三丁爲一戶 將閑田及多占田地人陳荒之田 每一戶各給五十卜 命依議得[『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참고문헌
이장우, 「조선초기의 군자전」, 『역사학보』 118,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