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수상자 : 김철희
수상 년도 : 2024년
수상 작품 : 삶의 시간을 걸어오다
ㅡ 이경은의 『주름』을 읽고
삶의 시간을 걸어오다
이경은 수필가의 『주름』은 표지부터 눈길을 끈다. 양귀비꽃처럼 붉은 바탕에 나무의 나이테가 한 켠에 세로로 빗방울이 유리창에서 흘러내리듯 자리하고 있다. 책이 일러주는 말, ‘주름’은 ‘나이테’이다. 세월의 더께가 어디 이마에만 오롯이 새겨져 있을까. 나무는 속으로 생애주기를 묵묵히 새겨왔다. 겉으로 드러난 크기와 몸집만으로 얼추 연도를 가름할 수 있지만, 진짜는 속에 가두고 있다. 작가는 이 ‘주름’을 인생과 문학 속에서의 굴곡과 흔적이라고 말한다. 영혼에 파문을 일으키는 알 수 없는 그 무엇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그녀의 『주름』 수필집이다.
책은 언어, 과학, 여행, 기억, 음악이라 정한 5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그 207쪽 안에 들어있는 깊이와 세계를 돞아보기 위해 책을 펼쳤다.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며 머리로는 정신적인 희열을 즐겼다. 지난해 그녀의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를 읽은 적이 있다. 해서 기대를 하고 읽은 책이다.
그녀의 언어는 별처럼 빛이 난다. 다양하고도 번뜩이는 어휘는 많은 양의 독서를 통한 습득일 테지만, 유난히 그녀만의 독특한 글맛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잘 읽히는 매력이 있다. 매혹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문학뿐 아니라 미술과 음악, 역사와 철학, 영화와 드라마, 과학 등 다방면의 학문이 집결된 총화이다. 그는 ‘작가에겐 책은 밥이고 공기’라고 속삭인다. 작가에겐 학자가 아니니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박학다식이나 ‘알쓸신잡’의 경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일독하고 나면 지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 출판 에디터 등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일반적인 글쓰기 작가보다는 글의 범주가 다양하고 특별한 데가 있다. 드라마 작가라는 특성이 살아있는 그녀의 글은 중간에 읽기를 그만둘 수 없을 만큼 이야기가 생동감이 강하게 느껴지고, 언어는 리드미컬하고 잔잔하다. 교향곡을 이른 아침에 듣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아졸라의 <망각(Oblivion)>이 책에서 들려온다.
「수필을 구하다」라는 글에서 그녀는 “손이 예술이다. 예술은 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손은 애인으로 삼은 ‘파킨슨’으로 인해 떨려 글씨가 예쁘지 않다. ‘필체는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을 굳이 빌리자면 성립하는 등식이다. 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를 글씨 모양만으로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친구 ‘파킨슨’으로 인해 작가가 슬퍼했을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차피 평생을 같이 가야 한다면 아름답게 웃으며 지내는 게 나을성싶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곤경을 딛고 나온 결과물이라 남다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격언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행복할까. 그녀는 수필의 결미에서 “수필(手筆)은 못 써도 수필(隨筆)은 쓰잖아”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책은 온통 언어에 대한 사유로 가득하다. 마치 언어의 연금술사 같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등 밥은 안 굶을 만큼 말한다는 그녀다. 언어를 아는 게 세계를 아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쏟은 결과물이다.
하물며 부채에도 언어가 있다고 말한다. 일테면 “여인이 은밀하게 입술에 부채를 갖다 대면 ‘저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라던지, 왼손으로 자신을 부채질하면 ‘그 여자와 바람 피지 마세요’ 라고 표현이 된다”고 귀띔한다.
또한 반딧불이가 가진 불빛 언어는 꽤 낯설고 매혹적이다. 암컷 반딧불은 꽁무니의 불을 깜빡여서 수컷에게 짝짓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한다. 그러면 풀숲에 숨어있던 반딧불이가 여기저기서 나와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켜진 듯 환해지는 황홀경이 연출된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밝은 곳에만 살아서 볼 수 없어 안타깝다. 그녀에게 반딧불의 불빛 언어는 잃어버린 유년의 상징이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아이가 갖는 아픈 기억이다.
그녀는 방랑자를 품고 살만치 여행을 좋아한다. 공항에서 나왔을 때 갑자기 무대가 바뀌는 장면전환이 환상적이라서 배가 아닌 비행기를 더 선호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몸이 책 속의 세계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 같을 때 도망가듯 훌쩍 떠난다고 고백한다. 제주의 바람, 고립된 섬 오키나와, 백야의 노르웨이, 남프랑스의 마티스 미술관, 스위스의 실스마리아, 부다페스트의 뒷골목 등등이 그렇게 떠났던 흔적들이다.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는 ‘여행은 문학 창작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문방사우인 먹 하나를 얻기 위해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열 근이 필요하다지 않은가. 아교와 물을 혼합해 별기(別器)에 담아 연(煙)이 섞일 때까지 물을 뿌리면서 찧어 만들어내는 먹. 작가의 문력(文歷)도 어느덧 29년. 삶의 시간을 통과해서 인쇄되어 나오는 책의 냄새를 맡는 게 미치도록 황홀해서 걸어온 길이다.
동백꽃처럼 붉디붉은 빨강을 유독 좋아하는 것도 남은 생애 대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평범하게 살다 사라질 이름이기를 거부하고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긴 시간 불을 지피는 장인의 모습과 닮았다. 먹으로 쓰인 글씨가 담백하듯이, 굳어가는 근육을 이겨내며 쓴 작품집에서는 ‘땀’ 냄새가 흠뻑 난다. 인고의 시간 끝에 만들어진 ‘먹’처럼. 여느 작가와 다르게 그녀는 ‘파킨슨’ 병을 앓은 후부터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도망 다닐 수 없다는 반심(叛心)이다. ‘열정’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절제된 단문, 말하듯 술술 풀어가는 문장은 정이 많은 작가 자신과 닮았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길 바라는 따듯함을 가진 그녀의 온정이 가득하다. 『주름』은 지금 그녀의 인생이 화양연화(花樣年華)임을 반증하는 작품집이라 생각하는 건 무리일까.
눈을 감는다. 그리고 듣는다. “글을 쓰지 못할 때는 마음으로 인생을 쓴다.”는 그녀의 영혼의 숨소리를.
수상 소감
책은 운명, 행운과 좋은 인연의 결과
바람이 차갑다. 이른 아침 강변을 마주하고 있는 창문을 여니 희뿌연 안개가 잔뜩 하다. 미지의 세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윤곽이 희미하나마 보인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살아온 나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날에 대한 막연함을 두려워하며 바지런함만으로 버텨온 궤적이 순탄치 않음은 당연하다.
호락하지 않은 세상사를 살아오면서 의지한 것은 독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선연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글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접한 운명이고 생업이 됐다. 기자라는 레터르를 달고 이 업계에 발을 디뎌놓은 지도 어언 삼십 년이 넘는다. 이런 지경에도 책을 놓지 않은 건 나의 천성일 테지만, 책은 분명 읽으면 읽을수록 중독이 되는 묘한 마력이 있다고 본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 ‘글을 백번을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뜻으로, 어려운 글도 자꾸 되풀이하여 읽으면 스스로 깨쳐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이 문구를 책 속을 거닐다 알게 돼 국전(국전) 출신의 서예가에게 부탁해 조그만 족자에 써서 글 쓰는 자리 뒷머리에 두고 자주 본다. 곱씹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명언이다.
이번에 한 편의 수필집을 읽고 쓴 글이 뜻하지 않은 상을 받게 된 건 행운이기도 하거니와 좋은 사람과의 인연 때문이다. 두툼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게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닐 터. 책을 쓴 작가의 삶도 순탄치 않음을 알기에 공감하며 3일 만에 완독할 수 있었다. 전적으로 작가에게 감사할 일이다.
김철희
2019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산문, 리더스에세이 회원, 데일리한국 대구경북 본부장. 저서 : 수필집 『흰눈과 돼지고기』(2023). 경북작품상 수상(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