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
박정미
PARAN IS 20∣2026년 9월 1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41쪽
ISBN 979-11-94799-43-6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신간 소개]
가문비나무는 무엇으로 울음의 깊이를 만들었을까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는 박정미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소리의 벽」 「꽃밭에서」 「만약에 그때」 등 54편이 실려 있다.
박정미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났고, 2019년 [문장 21]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를 썼다.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면, 우리는 하나의 삶이 노동과 애도와 사색과 여행을 거쳐 어떻게 마침내 “착륙”에 이르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그 “착륙”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거둘 생각이 없는 그물을 던져 놓고” 바다를 바라보는 자의 가벼움이며, “사절입니다”라고 뻣뻣함을 내려놓는 자의 유연함이며, “나에게 돌아가는 길”이라는 이유만으로 퇴근길의 모멸을 견뎌 내는 자의 담담함이다.
박정미의 시는 화려한 수사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그는 부산의 산복도로와 방직공장, 화장장과 병실, 카지노와 스위스의 산악마을을 같은 밀도의 언어로 옮겨 적는다. 이 균질한 정직함이야말로 이 시집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는 삶을 미화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삶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다 말린다라 쓰고/실은 내다 버리는 것”이라 고백했던 「시인의 말」처럼, 그는 자신이 견뎌 온 모든 것을 정직하게 볕에 내다 널었다. 그리고 그 볕 속에서, 눅눅했던 것들은 마침내 조금씩 마르며 다른 빛깔의 열매가 되었다.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는 그 마르는 과정의 정직한 기록이며, 동시에 그 기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착륙”이다. (이상 성윤석 시인의 해설 중에서)
[저자 소개]
박정미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9년 [문장 21]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를 썼다.
[시인의 말]
긴 장마 끝에 볕 든 날
여물지 못한 열매를
내다 말립니다
내다 말린다라 쓰고
실은 내다 버리는 것입니다
부디
훨훨 날다가
환한 꽃밭에 내려앉아
저마다의 계절로 무성하기를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다시 백지를 꺼낸다
강 넘기 – 11
제로섬 게임 – 13
첫날의 매직 – 14
겨울, 해인사 – 16
뒷모습 – 18
소리의 벽 – 20
밤의 낮 – 22
눈사람 찾기 – 24
잠수함은 교신 중 – 26
별들의 고향 – 28
올리브 상담실 – 30
경전이 말하길 – 32
제2부 달빛 가계
사과꽃은 파스타를 먹고 잠든다 – 37
종잇밥 – 40
내 이름은 – 42
파음 – 44
꽃밭에서 – 46
검은 눈 – 48
나비잠 – 50
안개 – 52
안개‥ – 54
안개… – 56
페넬로페의 거미줄 – 58
초대 – 60
명랑한 젠가 – 62
재첩, 국 – 64
퇴근길 – 66
제3부 자꾸 멈추는 날이 있다
아주 잠깐 사이 – 69
천국을 읽다 – 70
봄밤의 일 – 72
깃들다 – 74
벚꽃 엔딩 – 77
아무것도 아니다 – 80
사과 – 81
연꽃 필 때 – 84
가장 – 86
유턴 지점 – 87
세 개의 시선 – 90
티파니의 아침 – 92
제4부 착륙
햇살 유서 – 95
혼술 아닌데요 – 98
다녀왔습니다 – 100
이사를 가면 – 101
어긋났대요 – 104
빗소리듣기동호회 – 106
셋이서 쿠바 – 108
만약에 그때 – 110
저녁 일곱 시―인터라켄 – 112
회귀 – 115
다시 오고 – 118
오늘 도착한 어제 – 120
줌 아웃 – 122
허공 착륙기 – 124
밤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놓고 – 126
해설 성윤석 내부의 이야기를 꺼내 든 실루엣 – 128
[시집 속의 시 세 편]
소리의 벽
딸칵―
전원을 살리면 벽이 생긴다
소리로 만든 벽이다
파도가 오고 바람이 오고 물이 흐르고
새가 울고 청소기가 울고 드라이기가 운다
벽 안에서 소리들은 섞인다
바깥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들으라는 것인지 듣지 말라는 것인지
소리는 조용하고 편안하다―그게 벽의 방식이다
딸의 방 문고리에
작고 동그란 것이 남아 있다
딸은 갔는데
백색소음기는 같이 가지 않았다
남아서, 들려준다
나는 누워 있다
밤바다 모래밭에―
파도를 건너온 바람이 솔숲으로 흩어지고
검은머리물떼새가 그 위를 간다
날개를 치며, 간다
하얗게 세워진 벽을
오랜 불면의 내가 오르고 있다
소리 없이
감은 눈이 자꾸 떠진다
불면
이제 볼 수 없는 얼굴이 있다 ■
꽃밭에서
비가 진눈깨비처럼 흩뿌리던 저녁 해주국밥집 뒷마당에서 엄마는 기타의 목을 잡고 화단 돌담에 내리쳤어 맨드라미 목이 꺾이고 있었어
순간이었지 아버지가 주먹으로 엄마의 뺨을 치고 기타를 빼앗은 건
두 사람의 눈은 번개 치는 동굴이 되고 있었어
기타는 목이 부러진 채 작은방 구석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픈 자식 들여다보듯 한참씩 보곤 했어
퇴근하는데 경비실 모퉁이에 낡은 악기 가방을 멘 아버지가 서 있었어 누가 볼세라 팔을 끌고 택시를 잡아탔지
―역전 세고비아 악기점 갑시다
작정하고 왔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내가 다니는 회사를 알고 있었어 오늘이 월급날이란 것도
―수리가 가능할까요
물으려는데 이미 아버지의 눈은 벽에 걸린 기타를 보고 있었어
가방 속 단단히 넣은 월급봉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어
가문비나무로 만들어 울림이 깊다는 새 기타를 메고 버스 정류장에 선 아버지
먼 산을 보고 있는 축축한 눈
매일매일 꽃밭에서는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소리 없이 금이 메워지고 있었어
그런데 가문비나무는 무엇으로 울음의 깊이를 만들었을까
맨드라미 목에 새살이 돋고 있어서 다행이야 ■
만약에 그때
마지막 실업급여를 신청해 놓고
먼 곳으로 갔다
버스가 다리를 지나면서 나라 이름이 바뀌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언어가 달라지는
지중해의 햇볕이 유리 가루처럼 쏟아지는
리스본 광장이었다
하필 에그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던 그때
알람이 왔다 실업급여가 입금됐다는
한 오백 년은 산 것 같은데
더 이상 새로운 두려움 따윈 없을 만도 한데
왜 늘 허물어진 성 앞에 서 있는 것 같을까
국경을 넘는 게 일상인 이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온몸에 무수한 선을 그으며 살지 않아도 됐을까
귀퉁이가 닳은 이력서를 또 어디에
내밀어야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