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다란 첩첩 산줄기 안에 이토록 너른 벌판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거창은 글자로만 풀어본다면 ‘크고 밝은 벌판’ 의미라고 한다.
거창은 바람도 잠시 숨을 고르다 가는 곳이자 어머니 같은 대자연이 품어낸 풍요가 배움의 열정이 약속하는 밝은 내일이 신명나는 풍류 앞에선 절로 흥취가 문화와 예술의 짙은 향취가 흐르는 땅이다. 거창은 운무에 싸인 덕유산 자락이 아름답게 바라다보이는 첩첩 산골이다. 그렇지만 들어와 보면 먹을 것도 많고 계곡들의 풍광이 수려해서 선풍(仙風)이 감도는 동네이다. 강선대가 그렇고 수승대의 경치가 일품이다. 뾰족한 문필봉의 기백산과 통 바위의 암기가 강하게 뭉쳐 있는 금원산을 바라보고 자리 잡은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 선생의 고택 등은 왠지 모를 호쾌한 기운을 느꼈다.
늘 그러하듯 답사지의 수많은 역사문화유산 중 일정상 모두다 돌아다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이번 거창기행도 거창박물관~황산마을~동계고택~수송대에 위치한 구연서원을 둘러보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아래는 여천 김동용교수님 해설과 여러자료들을 참고하여 뜻은 있었으나 함께 기행에 참여 못한 분들을 위해 이 글을 남긴다.
"거창의 유물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거창박물관"
거창의 역사 유물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거창박물관은 한옥구조의 2층 건물로 거창읍 김천리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2,600평의 부지에 1, 2층 250평의 전시실과, 강당 및 전시실을 갖춘 120여평의 별관, 그리고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을 만들게 된 배경은 이 지역의 독지가인 계림농원 최남식 대표와, 제창의원 김태순 원장 두 사람이 평생 수집한 귀중한 자료들을 당국에 기증하고, 직접 건립운동에 앞장서면서 1988년 5월 거창유물전시관으로 개관되었다고 한다.
소장되어 있는 유물의 수는 1,200여 점으로 중요소장품은 대동여지도(유형문화재 제275호), 송림사지석조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311호), 정온선생 관복(중요민속문화재 제218호), 이보흠선생 실기책판(유형문화재 제248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다수의 중요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본관 1층에는 선현유품, 안방, 사랑방, 한약방, 농기구 민예품,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본관 2층에는 거창군 연혁ㆍ년표 , 둔마리 벽화고분 모형, 대동여지도, 가야 및 삼국유물, 금속유물, 고려자기, 조선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별관에는 시청각실, 자료실, 특별전시실(2층), 학예연구실이 갖춰져 있다.
거창박물관은 둔마리고분벽화 자료를 비롯하여 소장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거창 지역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어 지역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기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먹거리다. 돼지머리 눌린 수육에 산초를 넣은 생김치 맛은 과히 일품이었다.
"거창 황산마을"
황산마을은 거창신씨 집성촌으로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지주들이 살던 곳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활처럼 휜 담장길이 고가들과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절제된 풍경을 이룬다. 물빠짐을 위해 아랫단 60~90cm 정도는 커다란 자연석으로 돌만 이용하는 메쌓기 방식으로 쌓고 그 위에 황토와 작은 돌을 교대로 질서 있게 쌓아 올렸다. 담장 위에는 대부분 한식 기와를 올렸다
18세이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선생이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거창 신씨 집성촌인 황산마을에 있으며, 주요 건물로는 솟을대문을 시작으로 사랑채, 중문채,안채,곳간채, 후문등으로 건립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7년에 건립한 것으로 건축주의 부와 권위를 보여주는 전통한옥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후,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황산마을은 기와집 사이로 흙담길이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모습이 호젓하다. 황산마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 낮은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며 걷다 보면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담장 너머로는 기와지붕과 장독, 적막하게 서 있는 감나무도 보이고 까치발을 하면 담장 너머로 집과 마당이 훤히 바라보였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택이 궁금하면 들어가 구경하는 것도 가능라다. 야박한 도시와 달리 대부분의 집이 낮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있었다.
문풍지를 바른 곁문과 툇마루,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항아리 등 우리네 전통가옥에서는 비움과 열림의 미학, 넉넉한 인심의 향기가 배어 나왔다. 푸근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 마을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집이 10여 가구쯤 있었다. 개중에는 아직도 장작불을 들이는 방을 가진 집도 있다한다.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들어오고 소쩍새 우는 소리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한다.
황산마을의 멋스런 담장길만큼이나 예쁜 벽화를 만날 기회도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황산2구마을 담장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황산2구마을에 들어서자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와 명승지인 수승대의 수려한 경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발길 가는 대로 벽화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걷다 보면 벽에 그려진 나비와 잠자리, 주인 대신 집을 지키는 강아지, 담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온 황소,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만날 수 있다. 담장 위에는 손짓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이고.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황산마을은 고즈넉한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동계고택”
고택을 소개하기 전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에 대해서 알아보면 그는 1569년(선조 2년) 안음현 역동리에서 태어나 1610년(42세)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2년(44세) 영창대군을 옹호하다 제주도에 유배가기도 했고, 1627년(59세)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벼슬은 병조참판, 대사간, 도승지, 이조참판, 대사현을 역임하고 1636년(68세)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에 항복을 결정하자 자결을 시도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인조가 항복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해서 1638년(70세) 덕유산 골짜기 모리(某里)에 은거하다가 여생을 마감하였다. 돌아가신 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追贈) 되었다.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강동마을에 동계(桐溪)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고택은 조선시대 충절(忠節)로 이름난 동계 정온(桐계 鄭蘊, 1569-1641) 선생의 종택으로 후손들이 1820년(순조 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고택은 조선후기의 사대부 주택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건축물로 안채는 영남 내륙에 위치한 거창 기후 특지에 알맞게 우리나라 북부지방의 보편적인 겹집형태와 남부지역의 특징인 높은 툇마루를 두어 두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 고택의 구조는 문간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곳간채, 뜰아래채, 가묘,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은 고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솟을 대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위에 걸린 현판은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선홍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 쓰여 있는 정려(旌閭)라고도 부르는 정문(旌門)이다. 이것은 1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면서까지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한 충절과 병자호란 때에는 끝내 화친을 반대하여 절의를 굽히지않았던 동계(桐溪)선생을 기려 인조 임금이 내린 정문(旌門)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남향의 사랑채와 그 왼편에 조금 물러선 중문간채가 나란하다. 사랑채가 이 집의 특징을 골고루 보여준다. ㄱ자형의 평면에 앞의 6칸, 옆면은 전퇴(前退)있는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나온 내루(內樓) 부분이 1칸 반 크기이다. 평면상으로 보면 앞뒤 두 줄로 방이 배열되어 있다. 바로 두 줄박이 겹집이다. 겹집 구조는 특히 겨울철에 보온의 높은 북방의 주거양식인데, 거창지역에서 채택된 점이 주목된다. 아마도 이 지방이 남부이면서도 내륙에 치우친 까닭인 듯하다. 반대로 남방적 요소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보면 화강암을 다듬어 두벌대 기단을 돌린 위에 툇마루를 깔았는데, 상대적으로 기단이 낮은데 비해 툇마루가 높다. 이처럼 고상성(高床性)이 짙은 구조는 습기가 많은 남부 지역에서 흔히 취하는 방식이다. 용마루를 보면 눈썹이 있다. 눈썹이란 용마루가 시작되는 착고와 부고위에 기와 한 장 너비로 용마루를 따라가며 짧운 기왓골을 낸 것을 말한다. 장식적인 효과와 아울러 비가 많은 곳에서 용마루에서 흘러내린 빗물에 지붕이 쉬이 상하는 것을 막아주는 실용적이 구실을 하니 역시 남방적 요소라 한다.
사랑채 내루 부분에는 원 지붕 아래로 <눈썹지붕>이 덧대어져 있다. 이 눈썹 지붕은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내루의 3면에는 <들어열개>를 <사분합문>을 달아내루 공간을 언제든지 쉽게 틔우고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남향받이이고 두 집채 사이에 서향한 뜰아래채와 곳간채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넉넉한 곳간채는 칸마다 살창을 달아 곳간의 기능성을 충실히 살렸다. 마루와 방으로 구성된 뜨아래채는 외줄박이 4칸 집으로, 사랑채와 안채와는 차등을 두어 부속건물로서의 성격을 금세 읽을 수 있다.
안채는 규모만 다를 뿐 건축적인 특색은 사랑채와 닮았다. 정면 8칸 측면 3칸 반에 앞뒤로 퇴가 달린 구조로, 퍽 큰 덩치를 자랑한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두줄박이 겹집에다 툇마루가 높직하고 용마루에 눈썹이 달려 있다. 안방문은 두 짝 여닫이와 미닫이는 겹으로 달았는데, 숫대문 무늬를 먹인 미닫이는 서로 “짝짝이‘이다. 곧 문의 한가운데 작고 긴 네모꼴 틀을 박고 한 쪽은 그대로 창호지를 바른 대신, 다른 쪽은 유리를 끼워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의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한쪽은 눈곱재기창의 구실을 하는 셈인데, 그로 인해 전체적으로 대칭이면서 부분적으로는 비대칭이 되어 기분 좋은 불균형을 이룬다. 안채로 들어가면 따로 담장을 두른 안에 사당 즉 가묘가 있다. 정조 임금이 동계선생의 지조를 높이 사 손수 지어 보냈다는 제문과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어 후손들이 자랑거리로 여긴다고 하는 데, 오늘은 이것을 볼 수가 없지만 정조 임금이 지어 보낸 시를 소개하면
日長山色碧嵯蛾(일장산색벽차아) 세월이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
種得乾坤正氣多(종득건곤정기다) 천하에 떨친 정기 여전히 드높아라
北去南來同一義(북거남래동일의) 북으로 떠난 사람 남으로 내려간 이, 그 의로움이 매한가지精金堅石不曾磨(정금견석불증마) 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註>
‘北去南來’ 는 병자호란 때 김상헌과 정온이 화친을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한사람은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떠난 것과 또 한 사람은 자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여 은둔한 사실을 가리킨다.
동계고택은 집의 규모가 상당한 데다 부재들도 옹색하지 않아 칠칠하면서도 여유롭다 묵은 재목들에서 번져나오는 깊고 부드러운 따뜻함, 구석구석 배인 청결함이 마음을 쓰다듬어준다. 새로 덮은 기와는 고풍을 잃은 대신에 새뜻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동계 정온선생의 고택에서 겹처마 매무새가 눈길을 사로잡는 동계 고택엔 지금도 경주 최부자집 딸로 이곳에 시집온 종부가 명문 종가를 지키고 있었으며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었다. 그 분이 바로 동계의 14대 종부 최희 할머니였다. 최희 할머니. 그는 누구인가. 바로 저 유명한 경주 최씨 최부자 집 딸이다. 할머니가 자란 방은 신라 때 설총의 어머니 요석공주가 살았던 바로 그 터라고 한다. 명문가의 딸답게, 명문가의 종부답게 곱게 늙은 얼굴에 풍기는 교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흔이 다 된 연세에도 젊은 시절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지 할머니는 망부가를 벽에 붙여놓고 저승에 간 낭군을 그리고 있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 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 사우, 내삼문, 관수루, 전사청, 요수정, 함양재, 정려, 산고수장비와 유적비, 암구대 등이 있다. 이는 거창군과 거창 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다.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희귀식물인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구연서원
구연서원은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세 분의 행의와 학덕을 경모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들이 세운 서원으로 1540년 신권이 구연재를 완성하였으나 1694년 구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1868년)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지속되어지고 있다.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로 1740년 창건되었다. 자연암반을 활용하고 틀어진 재목을 하부기둥으로 사용하는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형태 또한 대단히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암반 사이에 조성된 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웠다. 누하부 정면에 출입을 위한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개방하였다. 상층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올려 종보를 받고 다시 종보 위에서 상부에 소로를 끼운 사다리꼴의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좌우측면에는 충량으로 가구를 구성하였는데 끝단을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기둥머리는 초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며 처마앙곡과 기와의 와곡을 크게 하였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자연과의 조화라는 한국건축의 가장 큰 특징을 잘 보여주며, 누정건축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입면에 비례가 뛰어나 학술적 가치가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맺으면서.....”
거창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한국전쟁이 빚은 거창사건이다. 덕유산 자락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산골, 거창은 이웃한 함양이나 산청에 비해 덜 알려진 곳이다. 대부분의 땅이 산으로 둘러싸여 눈에 번쩍 뜨이는 볼거리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석루 이경전(李慶全) 선생은 거창을 보고 “푸른 산봉우리들 사방에 모였는데, 한 가닥 냇물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흐르도다”라고 했다. 거창땅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거개가 해발 1,000미터를 넘는 고산으로 평지는 거창읍과 남하면 대야리 일부 지역뿐이다. 오죽하면 ‘경남의 하늘마을’로 통할까. 그러나 이 땅을 찬찬히 둘러보면 의외로 절경들이 많다는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짧은 여정을 마치고 수송대에서 부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오징어무침의 뒤풀이도 기행의 잊지못할 하나의 추억(秋憶)됐고, '거창군'에 3행시 짓기에 동참한 회원 모두가 시인에 다름 아니었다. 참고로 여심의 3행시는 "거" 거창하면 밝고 넓은들이 한편의 산수화와 다름 아닌 곳 "창" 창대한 벌판아래 황산마을, 구연서원, 동계고택등 문화유산의 보고(寶庫), "군"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따로 있으랴
이로써, 2013년 파랑새문화회 경남 창녕기행(4월, 우포늪, 창녕박물관,석빙고, 관룡사), 충북보은 속리산 기행(5월, 선병국가옥, 정이품송, 법주사), 경북 봉화기행(10월, 청량산, 다덕약수, 닭실마을) 그리고 이번 경남 거창기행(11월)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내년엔 3월 충남 논산기행(관촉사, 윤증고택, 개태사), 6월충남 공주기행(박물간, 공산성, 무령왕릉, 계룡사 갑사), 9월 전남 구례기행(천은사, 사성암, 화개장터, 최참판댁), 11월 경남 통영기행(세병관, 동파랑, 달아공언, 박경리문학관, 김춘수문학관) 등 4회에 걸친 역사문화탐방이 계획돼 있다. 많은 회원들이 함께해 일상에 지친 심신에 재충전 계기가 됐으면 참 좋겠다. 한편, 거창에 거주하고 계신 오리알님께서 거창사과 3박스를 차에 실어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이번 답사도 “역사적 기억없이는 아름다움도 없다”는 명제를 실감있게 일깨워 주었다. 우리 카페 역사문화탐방은 혼자는 쉬이 가볼 수 없는 곳을 찾아가는 기쁨,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 막연한 역사가 문화유산을 통해 살아나는 듯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끝으로,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 받을 수 없다" 내년에는 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旅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