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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송인부수안군」 이수 황정욱
[ 送人赴遂安郡 二首 黃廷彧 ]
其一(기일)
詩才突兀行間出(시재돌올항간출) 시의 재주 특출하여 무리 중에 뛰어난데
宦路蹉跎分外奇(환로차타분외기) 벼슬길 이지러졌으니 매우 기구해라
摠是人生各有命(총시인생각유명) 모두 인생은 각각 운명이 있나니
悠悠餘外且安之(유유여외차안지) 많고 많은 세상사 편안히 보내시게
〈감상〉
이 시는 1604년 좌천되어 수안군수로 부임하는 허균(許筠)을 보내면서 지은 것으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허균의 삶 속에 자신의 분노의 심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황정욱은 손녀가 선조(宣祖)의 아들 순화군(順和君)과 혼인하여 외척으로 권력을 누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하여 강원도에 가서 의병을 소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임해군(臨海君)·순화군과 함께 안변(安邊)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낼 항복권유문을 쓰라고 강요받았다.
이에 거부했으나, 그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아들 황혁(黃赫)이 이를 대신 썼다. 그는 항복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한글로 썼는데, 이를 입수한 체찰사(體察使)가 항복권유문만을 보내고 사실을 밝힌 글은 전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듬해 부산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항복권유문이 문제가 되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1597년 풀려났지만 도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성 근교인 노량진 근처에서 살았다.
시를 써 준 허균 역시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예속(禮俗)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것 때문에 탄핵을 받아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1구와 2구에서는 허균의 시재(詩才)가 우뚝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야 하는 기구한 현실을 노래하고, 3구와 4구에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운명이니 편안히 받아들이라는 당부로 맺고 있다.
황정욱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 만하다(本朝詩體(본조시체) 不啻四五變(불시사오변) 國初承勝國之緖(국초승승국지서) 純學東坡(순학동파) 以迄於宣靖(이흘어선정) 惟容齋稱大成焉(유용재칭대성언) 中間參以豫章(중간삼이예장) 則翠軒之才(칙취헌지재) 實三百年之一人(실삼백년지일인) 又變而專攻黃陳(우변이전공황진) 則湖蘇芝(칙호소지) 鼎足雄峙(정족웅치) 又變而反正於唐(우변이반정어당) 則崔白李(칙최백이) 其粹然者也(기수연자야) 夫學眉山而失之(부학미산이실지) 往往冗陳(왕왕용진) 不滿人意(불만인의) 江西之弊(강서지폐) 尤拗拙可厭(우요졸가염)).”라고 언급한 것처럼, 송풍(宋風)의 영향을 받았다.
〈주석〉
〖遂安郡(수안군)〗 황해도 북부에 있는 군. 〖突兀(돌올)〗 기이하면서 특이함. 〖行間(항간)〗 행오(行伍)의 사이로, 군중(軍中)을 의미. 〖蹉跎(차타)〗 어긋남. 〖分外(분외)〗 특별함. 〖摠是(총시)〗 모두~이다. 〖悠悠(유유)〗 매우 많은 모양.
각주
1 황정욱(黃廷彧, 1532, 중종 27~1607, 선조 4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던 종계변무에 성공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호조판서로 승진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했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으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병조판서로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하여 강원도에 가서 의병을 소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임해군(臨海君)·순화군과 함께 안변(安邊)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보낼 항복권유문을 쓰라고 강요받았다. 이에 거부했으나, 그의 손자와 두 왕자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아들 황혁(黃赫)이 이를 대신 썼다. 그는 항복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는데, 이를 입수한 체찰사가 항복권유문만을 보내고 사실을 밝힌 글은 전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듬해 부산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뒤 항복권유문이 문제가 되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東人)의 탄핵을 받아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1597년 풀려났다. 관각삼걸(館閣三傑, 정사룡(鄭士龍), 노수신(盧守愼))의 한 사람으로 문장·시·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시는 독창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뒤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흥유감」 변계량
[ 晨興有感 卞季良 ]
早年遊學也悠悠(조년유학야유유) 젊어서 유학하던 일 아득하더니
只向名途走不休(지향명도주불휴) 다만 명예의 길을 향해 쉼 없이 달렸네
昨夜燈前倍惆悵(작야등전배추창) 어젯밤 등불 앞에 매우 서글퍼지니
雨聲如別一年秋(우성여별일년추) 빗소리 한 해의 가을을 이별하는 듯
〈감상〉
이 시는 새벽에 일어나 감흥(感興)이 있어 지은 것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회한(悔恨)에 잠겨 읊은 노래이다.
가을비 오는 밤, 등불을 켜 두고 스승의 문하에서 수업하던 예전을 추억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대의(大義)는 이룬 것이 없고 공명(功名)에만 빠진 자신을 되돌아보니, 서글퍼진다.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는데, 벌써 한 해가 또 가려나 보다.
이 외에도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변계량과 정사룡(鄭士龍)의 시를 서로 견주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 춘정 변계량이 지은 ‘강마을에 새벽 되자 환한 빛이 하늘과 닿았고, 버드나무 방죽에 봄이 찾아오니 누런빛이 땅 위에 떠도네(「장부경도(將赴京都) 장단도중(長湍途中) 기정정곡(寄呈鼎谷)」)’라는 시구가 있고, 호음 정사룡이 지은 ······라는 시구가 있다. 두 사람 또한 모두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춘정의 시는 경물묘사가 신선하기는 하지만 신령스러움을 볼 수 없다. 호음의 시는 지극히 맑고 허허로운 기상이 있으니, 신령의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我東卞春亭季良(아동변춘정계량) 虛白連天江郡曉(허백련천강군효) 暗黃浮地柳堤春(암황부지류제춘) 鄭湖陰(정호음) ······兩公亦皆矜神助(양공역개긍신조) 春亭詩寫景雖神(춘정시사경수신) 未見其神處(미견기신처) 湖陰詩極有淸虛之氣(호음시극유청허지기) 雖謂之神助(수위지신조) 亦非過許(역비과허)).”
〈주석〉
〖悠悠(유유)〗 아득한 모양. 〖惆〗 슬프다 추, 〖悵〗 슬프다 창
각주
1 변계량(卞季良, 1369, 공민왕 18~1430, 세종 12): 본관은 밀양.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4세 때 고시(古詩)의 대구(對句)를 암기하고 6세 때 글을 지었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가 되었고, 1392년 조선 건국 때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郞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乙科)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이 되고 예조우참의가 되었다. 태종말까지 예문관대제학·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지내다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집현전대제학이 되었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이르렀으나 전대의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에 비해 격이 낮고 내용도 허약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조선 왕조를 찬양하고 수식하는 일이었다.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에서는 태조를 칭송하면서 조선 건국을 찬양했고, 경기체가인 「화산별곡(華山別曲)」에서는 한양도읍을 찬양했다. 정도전에게 바친 「봉정정삼봉(奉呈鄭三峰)」에서도 정도전이 완벽한 인재라고 칭송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조선 초기 관각문학(館閣文學)을 좌우했던 인물이다. 20년 동안이나 대제학을 맡고 성균관을 장악하면서 외교문서를 쓰거나 문학의 규범을 마련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를 고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저서에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만사암박상공(순)」 성혼
[ 挽思菴朴相公(淳) 成渾 ]
世外雲山深復深(세외운산심부심) 세상 밖 구름 덮인 산은 깊고도 깊어
溪邊草屋已難尋(계변초옥이난심) 시냇가 초가집은 이미 찾기가 어렵구나
拜鵑窩上三更月(배견와상삼경월) 배견와 위에 뜬 한밤의 달은
應照先生一片心(응조선생일편심)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어 주리
〈감상〉
이 시는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위해 쓴 만사(輓詞)이다.
박순(朴淳)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이이(李珥)의 탄핵을 받자 포천 창옥병(蒼玉屛)에 배견와(拜鵑窩, 두견새에게 절을 하는 움집)를 지었는데, 그곳은 세상 밖 구름이 덮인 깊고도 깊은 산속이다(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함). 박순이 살던 초가집은 벌써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니,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의 집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임금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음을 뜻하는 배견와 위에 뜬 달은 또렷이 그 일편단심을 보여 주고 있다.
신흠(申欽)의 『청창연담(晴窓軟談)』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박순(朴淳)을 애도한 시에, ······라 하였는데, 사암을 애도하는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成牛溪渾哭思庵詩曰(성우계혼곡사암시왈) 世外雲山深復深(세외운산심부심) 溪邊草屋已難尋(계변초옥이난심) 拜鵑窩上三更月(배견와상삼경월) 曾照先生一片心(증조선생일편심) 可謂善哭思庵矣(가위선곡사암의)).”라 하였고,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사암이 세상을 버리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었는데, 유독 성우계의 절구시 한 편만이 절창이다. 그 시에 이르기를, ······끝없는 감상(感傷)의 뜻이 말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서로 아는 것이 깊지 않으면 어찌 이러한 작품이 있을 수 있겠는가(思庵相捐舍(사암상연사) 挽歌殆數百篇(만가태수백편) 獨成牛溪一絶爲絶唱(독성우계일절위절창) 其詩曰(기시왈) ······無限感傷之意(무한감상지의) 不露言表(불로언표) 非相知之深(비상지지심) 則焉有是作乎(칙언유시작호))?”라 하였다.
〈주석〉
〖拜鵑窩(배견와)〗 배견와는 박순의 영평산 속에 있는 재호(齋號)임(주(注)에 “배견와(拜鵑窩) 상공영평산중재호(相公永平山中齋號)”라 되어 있음).
각주
1 성혼(成渾, 1535, 중종 30~1598, 선조 31):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10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牛溪)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 6)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尙書)』 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李珥)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만났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의 영수가 되어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 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고,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문비파」 서거정
[ 聞琵琶 徐居正 ]
司馬靑衫盆浦泣(사마청삼분포읍) 사마는 푸른 적삼으로 분포에서 울었고
明妃紅袖塞天愁(명비홍수새천수) 명비는 붉은 소매로 변방에서 시름했다네
我無今日愁兼泣(아무금일수겸읍) 나는 오늘 시름할 일도 울 일도 없지만
細聽絃聲不下樓(세청현성불하루) 자세히 비파 소리 들으니 누각을 내려가지 못하겠네
〈감상〉
이 시는 50대 중반에 비파 소리를 듣고 쓴 시이다.
1구와 2구에서는 좌천된 백거이(白居易)와 흉노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의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있다. 3구와 4구에서는 백거이처럼 좌천되거나 왕소군처럼 흉노에 시집갈 일이 없어서 시름겹거나 울 일도 없지만, 비파 소리를 자세히 듣고 있자니, 이들의 슬픔에 공감되어 차마 이러한 정서를 뿌리치고 누각을 내려갈 수가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는 한 구도 유래처가 없는 곳이 없다. ······구마다 모두 유래처가 있는데, 새로 다듬거나 남의 시구를 따온 것이 스스로 오묘해서 격률이 자연히 삼엄하다(古人作詩(고인작시) 無一句無來處(무일구무래처) ······句句皆有來處(구구개유래처) 粧點自妙(장점자묘) 格律自然森嚴(격률자연삼엄))”라고 했는데, 이 시에서도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자신의 심정을 표출하고 있다. 사장적(詞章的) 가치를 중요시했던 서거정의 문학의식(文學意識)을 보여 주는 시라고 하겠다.
〈주석〉
〖司馬靑衫盆浦泣(사마청삼분포읍)〗 백거이(白居易)가 일찍이 강주(江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어 있을 때, 하루는 분강(湓江)의 포구에서 손님을 전송하다가 어느 배 안에서 들려오는 비파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가서 물어보니, 그는 본디 장안(長安)의 창녀였는데 젊어서는 호화롭게 지냈었지만 늙어서는 색이 쇠하여 마침내 장사꾼의 아내가 되어서 초췌한 몰골로 강호(江湖) 사이를 이리저리 전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거이는 그녀의 말에 감동을 받아 그녀에게 다시 비파 한 곡조를 청하여 들은 다음 스스로 「비파행(琵琶行)」을 지어서 그에게 주었는데, 그 비파행의 끝에 “나중 탄 곡은 먼저 탄 곡보다 더더욱 처량해, 온 좌석의 사람들이 거듭 듣고 다 얼굴을 가리고 우는데, 그중에서 눈물을 누가 가장 많이 흘렸던가, 이 강주 사마의 푸른 적삼이 흠뻑 젖었네(凄凄不似向前聲(처처불사향전성) 滿座重聞皆掩泣(만좌중문개엄읍) 座中泣下誰最多(좌중읍하수최다) 江州司馬靑衫濕(강주사마청삼습)).”라고 한 데서 온 말임.
〖明妃紅袖塞天愁(명비홍수새천수)〗 명비는 한(漢) 원제(元帝)의 후궁 중에 미색이 가장 뛰어났던 왕소군(王昭君)을 말한다. 원제는 후궁이 매우 많아서 화가 모연수(毛延壽)를 시켜 궁녀들의 용모를 그려 오게 해서 그 그림을 보고 궁녀를 골라서 합방을 하곤 했다. 이 때문에 궁녀들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 용모를 좋게 그려 주도록 청탁을 했었으나, 유독 왕소군은 그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한 번도 임금의 은총을 입어 보지 못했다. 뒤에 흉노 호한사단우(呼韓邪單于)가 입조하여 미인을 요구하자, 원제가 왕소군의 얼굴을 알지 못한 나머지 왕소군을 보내라고 명함으로써 그는 끝내 흉노에게 시집가게 되어, 떠나는 길에 융복(戎服) 차림으로 말에 올라 시를 지어 비파를 타면서 원한의 정을 하소연했던 데서 온 말임.
각주
1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의(權近) 외손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端宗) 폐위와 사육신(死六臣)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金時習)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각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서로는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官人)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압강춘망」 정희량
[ 鴨江春望 鄭希良 ]
邊城事事動傷神(변성사사동상신) 변방 성에선 일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데
海上狂歌異隱淪(해상광가이은륜) 바다 위의 미친 노래는 은자와는 다르네
春不見花猶見雪(춘불견화유견설) 봄에도 꽃은 보지 못하고 아직도 눈만 보이며
地無來雁況來人(지무래안황래인) 이 땅에는 오는 기러기도 없는데 하물며 올 사람 있으랴?
輕陰漠漠雨連曉(경음막막우련효) 엷은 그늘이 스산한데 비는 새벽까지 연달았고
細草萋萋風滿津(세초처처풍만진) 가는 풀이 무성한데 바람이 나루터에 찼구나
惆悵芳時長作客(추창방시장작객) 슬프다, 꽃다운 때에 오랫동안 나그네 되었으니
可堪垂淚更沾巾(가감수루갱첨건)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 적심 어이 견디랴?
〈감상〉
이 시는 의주(義州)에 유배 갔을 때, 압록강의 봄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변방 성에서는 일마다 정신이 상하는데, 자신의 처지를 마음대로 노래한 광가(狂歌)는 은둔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다르다(은둔한 사람들은 은둔의 즐거움이나 세상에 대한 탄식이 들어 있지만, 자신은 나라를 근심하는 현실에 대한 애착이 들어 있음). 이곳은 변방이라 봄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눈만 보이며, 기러기도 오지 않은 극지(極地)라 고독에 차 있다. 거기다 스산한 그늘에 새벽까지 비는 내리고, 무성한 풀에 나루터에 바람이 가득하다(나그네의 근심과 고통을 한층 증폭시키는 소재들임). 한창나이에 오랫동안 나그네가 되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러니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을 적신다.
3구에 대해 허균(許筠)은 『국조시산』에서 “(시상을) 안배하였으면서도 뜻이 있다(배이지(排而旨)).”라 평하고 있다.
『성소부부고』에는 함련(頷聯)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싣고 있다.
“매계(梅溪) 조위(曺偉)·뇌계(溪) 유호인(兪好仁)은 일시에 함께 성대한 명성을 드날렸으나 순부(淳夫) 정희량(鄭希良)보다는 못했다. 그 「혼돈주가(渾沌酒歌)」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蘇東坡)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맘 비춰 고국에 다다르고, 새벽 별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라고 한 구절은 극히 신일(神逸)하며, ······ ‘봄이 와도 꽃 안 보이고 눈만 보이나니, 기러기 안 오는 곳 사람 어이 찾아오리.’라 한 구절은 비록 다듬은 흠이 있으나 또한 다정다감하다(曺梅溪兪溪(조매계유뇌계) 一時俱有盛名(일시구유성명) 不若鄭淳夫(불약정순부) 其渾沌酒歌甚好(기혼돈주가심호) 酷似長公(혹사장공) 如片月照心臨故國(여편월조심림고국) 殘星隨夢落邊城之句(잔성수몽락변성지구) 極神逸(극신일) 而客裏偶逢寒食雨(이객리우봉한식우) 夢中猶憶故園春(몽중유억고원춘) 有中唐雅韻(유중당아운) 春不見花唯見雪(춘볼견화유견설) 地無來雁況來人(지무래안황래인) 雖傷雕琢(수상조탁) 亦自多情(역자다정)).”
〈주석〉
〖隱淪(은륜)〗 세상을 피하여 은둔(隱遁) 생활을 하는 것. 〖輕陰(경음)〗 조금 그늘진 하늘색. 〖漠漠(막막)〗 고요하여 소리가 나지 않는 모양. 〖萋萋(처처)〗 풀이 무성한 모양. 〖惆悵(추창)〗 슬픔. 〖堪〗 견디다 감, 〖沾〗 더하다 첨
각주
1 정희량(鄭希良, 1469, 예종 1~1502, 연산군 8):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菴), 산은(散隱)으로 해주 사람이다. 27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무오사화로 1498년 가을에 의주로 유배를 가고, 1500년 5월에 김해로 이배되는 등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조강(祖江)에 투신자살하였다.
「유거」 송익필
[ 幽居 宋翼弼 ]
春草上巖扉(춘초상암비) 봄풀은 바위 집에 돋아나고
幽居塵事稀(유거진사희) 그윽한 거처에 세상일 드무네
花低香襲枕(화저향습침) 꽃이 드리우니 향기 베개에 젖어들고
山近翠生衣(산근취생의) 산이 가까우니 푸른 기운 옷에 생겨나네
雨細池中見(우세지중견) 비가 가늘어 연못 가운데서야 보이고
風微柳上知(풍미류상지) 바람이 살랑 불어 버들 위에서야 알겠네
天機無跡處(천기무적처) 하늘의 기미는 자취가 없어
淡不與心違(담불여심위) 담담함은 마음과 더불어 어긋나지 않네
〈감상〉
이 시는 은거(隱居)하며 지은 시로, 조용히 관조(觀照)하는 가운데 세상의 기미(幾微)를 터득하고자 하는 구도(求道)의 자세를 노래한 것이다.
봄이 와서 봄풀이 은자(隱者)의 거처인 바위 집에 돋아나고, 은자의 거처는 세상과 떨어진 그윽한 곳이라 세상일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아 그윽한 정취를 즐긴다. 꽃이 피자 홀로 베개에 누우니 향기가 베개에 젖어들고, 주변에 산이 가까우니 푸른 기운이 옷에 스며들어 은자의 생활이 한적(閑寂)하다. 가는 비가 내린다. 그런데 너무 보슬비라 비가 온 줄도 몰랐는데, 연못 가운데의 빗방울 때문에 물결이 이는 것을 보고서야 비가 온 줄 알았다. 봄바람이 분다. 그런데 봄바람이라 살랑 불어 바람이 분 줄도 몰랐는데, 버들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바람이 분 줄 알았다. 이렇듯 하늘의 기미(幾微)는 뚜렷한 자취가 없어 그 기미를 알기가 어렵지만, 하늘의 담담함은 내 마음과 더불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언젠가 송익필(宋翼弼)은 어떤 사람인지 묻자, 연신(筵臣)이 송익필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소강절(邵康節)과 같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교하기를, ‘나는 이 사람이 끝내 분수에 편안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이 외우(畏友)로 인정했으니, 생각건대 그에게도 남보다 매우 뛰어난 면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嘗問宋翼弼何如人也(상문송익필하여인야) 筵臣對以翼弼天品甚高似康節(연신대이익필천품심고사강절) 敎曰(교왈) 予以爲此人終是不安分(여이위차인종시불안분) 然先正許以畏友(연선정허이외우) 想亦有大過人處(상역유대과인처)).”
〈주석〉
〖扉〗 집 비, 〖襲〗 들어가다 습, 〖翠〗 비취색 취(여기서는 취람(翠嵐)을 의미함), 〖跡〗 자취 적
각주
1 송익필(宋翼弼, 1534, 중종 29~1599, 선조 32):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와 비첩(婢妾)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庶孼)이었다. 아버지 안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安處謙)을 역모자로 고변(告變)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켰다. 이 공으로 안사련은 당상관에 오르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죄상이 밝혀져 1566년(명종 21)에 안씨 일가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따라서 송익필은 서얼인데다 아버지 사련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고, 이후 출세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기도 고양(高陽) 구봉산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유했으며,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탁월한 지략과 학문으로 세인들이 ‘서인(西人)의 모주(謀主)’라 일컬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가 죽자 동인(東人)의 질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동서(東西)의 공방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인(東人)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에서 그의 신분을 들어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다. 1586년(선조 19) 마침내 그의 형제를 비롯해 일족 70여 인이 환천되었다. 이후 그는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이름을 바꾼 그는 황해도에서 복술가(卜術家)로 변신하고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키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다. 은인인 이산해가 궁중과 결탁해 세력을 굳히려 하자 시로써 풍자한 것 때문에 이산해의 미움을 사서 극지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유배 중 임진왜란을 당해 명문산(明文山)으로 피했다가 면천(沔川)에서 김진려의 집에 기식하다 1599년(선조 32) 66세로 객사했다. 학문적으로는 사변적인 이론보다 실천 윤리인 예(禮)를 통해 이(理)에 접근할 것을 중시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은 그의 제자이다. 문학적으로는 시·문에 다 능해 시는 성당시(盛唐詩)를 바탕으로 청절(淸絶)했으며, 문은 고문(古文)을 주장하여 논리가 정연한 실용적인 문체를 사용했다.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이며, 「은아전(銀娥傳)」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전기체(傳記體)의 글이다.
「춘주독좌」 송익필
[ 春晝獨坐 宋翼弼 ]
晝永鳥無聲(주영조무성) 낮이 길어 새는 소리 없고
雨餘山更靑(우여산갱청) 비 넉넉하여 산은 더욱 푸르네
事稀知道泰(사희지도태) 일이 없으니 도가 형통(亨通)함을 알겠고
居靜覺心明(거정각심명) 사는 곳이 고요하니 마음이 환함을 깨닫겠네
日午千花正(일오천화정) 해 중천에 떠 천 개의 꽃이 바르게 나타나고
池淸萬象形(지청만상형) 못이 맑으니 모든 형상이 드러나네
從來言語淺(종래언어천) 지난날 언어는 천박했으니
默識此間情(묵식차간정) 말없이 이 사이의 뜻을 아노라
〈감상〉
이 시는 봄날 낮에 홀로 앉아 있다가 느낀 소회(所懷)를 노래한 것이다.
낮이 길어 새는 울지 않고 비로 씻긴 봄산은 더욱 푸르다. 아무런 일이 없으니 도가 형통(亨通)함을 알겠고 내가 머무는 거처(居處)가 고요하니 마음이 환함을 깨닫겠다(도(道)와 마음의 본체에 대한 깨달음). 해가 중천에 떠서 천 개의 꽃이 바르게 나타나고(꽃이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임), 못이 맑으니 모든 형상이 드러난다. 지난날 도(道)와 마음과 깨달음에 대해 말했던 그 말은 천박(淺薄)했으나, 지금은 말없는 사이의 뜻(고요함 속의 참맛)을 알겠다.
〈주석〉
〖更〗 더욱 갱, 〖泰〗 태괘(음양이 조화되어 사물이 통리(通利)하는 상(象)) 태
각주
1 송익필(宋翼弼, 1534, 중종 29~1599, 선조 32):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와 비첩(婢妾)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庶孼)이었다. 아버지 안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安處謙)을 역모자로 고변(告變)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켰다. 이 공으로 안사련은 당상관에 오르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죄상이 밝혀져 1566년(명종 21)에 안씨 일가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따라서 송익필은 서얼인데다 아버지 사련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고, 이후 출세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기도 고양(高陽) 구봉산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유했으며,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탁월한 지략과 학문으로 세인들이 ‘서인(西人)의 모주(謀主)’라 일컬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가 죽자 동인(東人)의 질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동서(東西)의 공방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인(東人)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에서 그의 신분을 들어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다. 1586년(선조 19) 마침내 그의 형제를 비롯해 일족 70여 인이 환천되었다. 이후 그는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이름을 바꾼 그는 황해도에서 복술가(卜術家)로 변신하고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키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다. 은인인 이산해가 궁중과 결탁해 세력을 굳히려 하자 시로써 풍자한 것 때문에 이산해의 미움을 사서 극지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유배 중 임진왜란을 당해 명문산(明文山)으로 피했다가 면천(沔川)에서 김진려의 집에 기식하다 1599년(선조 32) 66세로 객사했다. 학문적으로는 사변적인 이론보다 실천 윤리인 예(禮)를 통해 이(理)에 접근할 것을 중시했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은 그의 제자이다. 문학적으로는 시·문에 다 능해 시는 성당시(盛唐詩)를 바탕으로 청절(淸絶)했으며, 문은 고문(古文)을 주장하여 논리가 정연한 실용적인 문체를 사용했다.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이며, 「은아전(銀娥傳)」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전기체(傳記體)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