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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
2014. 6. 1.(주일낮예배) 요한복음 13:1, 34-35
지난 주에는 주사랑 공동체의 이종락목사님이 쓴 고마워 내게 와 줘서 라는 책을 읽었다. 거기에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12월 중순 아주 추운 겨울에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주차장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알려주었다. 급하게 주차장으로 달려갔더니 주차장 셔터문 아래에 가방 2개가 있었다. 비닐가방을 열어보니 거기에 입술이 파란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이 울고 있었다. 그 아기에게 두터운 이불을 덮고 산소호흡기를 채워 주었더니 20분이 지나 얼굴 색깔이 빨갛게 돌아왔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로 다른 가방을 열어보았더니 거기에는 아기용품과 2장의 종이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염치가 없고 자격이 없는 엄마이기에 목사님께 저의 아들을 맡기려 합니다. 생일은 12월 18일입니다. 미성년자라 아기와 같이 살 수가 없어요. 입양도 되지 않는 상태고 저 혼자 너무나도 막막해 하던 시기에 목사님을 우연히 알았어요. 목사님이라면 우리 아들이 잘 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목사님, 정말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 아들 잘 키워 주세요. 비록 엄마 아빠와 함께하지 못하지만 바르게 착하게 건강하게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목사님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엄마가 목사님을 믿고 맡긴다는 말에 가슴이 찡해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앳된 목소리로 목사님 아기요.. 아기 데리고 들어가셨어요? 말 끝에 눈물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결국 엄마는 하염없이 울면서 연거푸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사님은 그렇게 하염없이 우는 엄마에게 아기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기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요. 우린 엄마 얼굴을 모르니까 봉사자로 와서 얼마든지 만나세요. 공동체 카페에 아기 크는 모습을 올릴거예요. 자주 들어와 봐요.
그러자 아기 엄마는 어떠한 모습으로든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그 엄마가 다녀갔는지 다녀가지 않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종락목사님의 사역을 보면서 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아기를 버려야 하는 엄마가 잘됐다 잘못됐다는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아기를 버릴 수 밖에 없는 힘든 형편의 엄마를 이해하려 하고, 또 버려지는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사님의 마음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감동이 있는가? 우리의 삶이 무미건조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삶에 의미가 없고 재미가 없는 것은 지금 내 삶에 사랑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이 없으면 감동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세상 속에서 이런 감동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2장에는 일곱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우리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에베소교회는 수고와 인내를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3)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환란과 핍박을 견디어 내는 교회였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교회는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의 거짓됨을 밝혀내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한 교회가 에베소교회였다. 그런데 에베소교회가 외적으로 다가오는 핍박과 환란을 견디어 내고, 또 안으로는 이단의 공격 속에서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정말 가져야 하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설교를 준비하다 1855년 10월 10일 챨스 피니가 요한계시록 2:4 을 본문으로 한 설교문을 읽게 되었다. 챨스피니는 죄악의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참된 평화와 기쁨을 느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자세가 첫사랑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전에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첫사랑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첫사랑을 잃어버리면 주님이 명하신 일에 대한 부담감을 호소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앙생활이 지루해지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에베소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겠는가? 에베소교회는 외적으로 핍박을 견디어내고, 또 내적으로는 이단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치열한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치열한 영적전쟁을 하는 가운데 에베소교회는 핍박은 견디어 내고, 또 이단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가슴 속에 있어야 하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일곱촛대 사이로 다니시면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에베소교회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애를 썼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구원의 감격으로 행하는 그 첫사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첫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저의 가장 큰 문제는 목사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 주중에도 어떤 분이 교회에 기도하러 오셨다.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자신이 출석하지도 않는 교회에 오신 것을 볼 때 꽤 급한 일이 있어보였다. 그런데 마침 2층에는 2여전도회가 찬양연습을 하고 있어서 3층 본당 문을 열어드렸다. 그리고 카페에 부탁을 하여 3층에 낯선 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돌아가실 때 시원한 차한잔 준비했다가 드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분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 카페에서 목사님이 시원한 차 한잔 드리라고 했다면서 차를 드렸더니 그 분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다. 그 분이 목사님셨습니까? 어딜봐도 제가 목사같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교회에 목양실에 있다가 나갔는데도 전혀 목사같이 보이지 않는게 문제이다.
그런데 제가 그 분을 탓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저의 생각이나 행동이 목사답지 못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지난 목요일에 새벽기도에도 그랬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차량운전을 할 때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격하며 저도 모르게 이런 노래를 불렀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그대 사는 작은 섬으로 나를 이끌던 날부터
그대 내게 단 하나 우산이 되었지만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이젠 지나버린 이야기들이 내겐 꿈결같지만
하얀 종이위에 그릴 수 있는 작은 사랑이어라.
잊혀져간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내게 우산이 되리라.
우순실씨의 잃어버린 우산이다. 물론 이 노래는 남녀청춘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안개비가 내리는 날 밤에 사랑하는 남자와 둘이 한 우산을 가지고 걷는 그 길을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안개비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내리고 있는데, 우산을 씌여주는 남자는 어디가고 없고 혼자서 그 추억을 우산삼아서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처음에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서 봉사하고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 추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가진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최근 뜨고 있는 하상욱시집의 내용이다. 내용의 주제를 한번 맞추어 보기 바란다.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해도 -야식집-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듣게 돼 - 애니팡-
어디갔어.-월급-
바꾸려고 애쓰지마 다를거라 기대도마 - 프로필사진-
고민하게 돼 우리 둘 사이 -축의금-
또 어딜 간 거니 -리모콘-
이거 받자고 내가 그동안 -적립 포인트-
이게 뭐라고 이리 힘들까 -메뉴선택-
그런데 하상욱시인의 글을 읽어보면 우리가 별 것 아닌 것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루에 세끼 먹는 밥인데 매번 먹을 때마다 뭘 먹을까? 고민하고 리모콘 없어도 죽지 않는데 매일 찾는게 리모콘인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이렇게 사소한 것에 얽매여 사는 동안에 정말 가져야 하는 것을 빼앗길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소중한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살았다. 그 부분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사탄에게 받은 시험이 돌이 떡덩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탄의 이 시험은 그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였고, 또 그 다음에는 천하만물의 영광을 보여주며 절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탄의 시험은 예수님의 공생애 순간순간 나타났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사탄이 마지막으로 하는 시험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배신자 유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는 예수님이 유다를 과연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하여 요한복음 13:1은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사탄은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받았던 제자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유다를 믿어서 돈궤를 맡겨 주면서 유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그 사랑과 신뢰를 버리고 예수님을 배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유다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를 사랑하였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에 많이 나오지만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내가 떡을 나누어 주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면서 유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것을 알리는 방법이 떡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겠는가? 그 해답은 시편 41편에서 찾을 수 있다.
(시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지금 이 말씀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신하여 대적자가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이를 떡을 나눠 먹던 친구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시편의 말씀을 기억하셔서 유다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너는 나를 배신하여 대적자 역할을 하지만 나는 너를 가까운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적자가 되어 있는 유다를 보면서 21절에서는 괴로워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거절하고 떡은 받은 후 그 자리를 나가버렸다. 그렇게 사탄이 들어와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절한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계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계명인 사랑은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탄에게 마음이 빼앗겨서 스승을 팔아버리는 유다였지만, 그 유다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 저는 주사랑공동체 이종락 목사님이 쓴 고마워 내게 와줘서 라는 책의 내용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 마무리도 그 책의 내용으로 하려고 한다. 이종락목사님은 둘째를 유산하였다. 임신 중에 검사를 하였더니 의사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유산을 권하였을 때 그때는 예수님을 믿기 전이라 아무 생각없이 유산을 하였다. 그런데 아이를 유산한 후에 목사님은 꿈틀거리는 그 아이가 생각나서 죄책감속에 살았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은만이다. 그런데 은만이를 낳고 4개월이 지났을 때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이 울기 시작했다. 119를 불러서 병원에 갔는데 몸이 불덩어리였고, 은만이는 축 늘어져버렸다. 겨우 은만이를 살려내었는데 뇌에 산소공급이 되지 않아서 뇌에 손상이 생겨 평생 누워서 지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은만이는 코에 삽입을 하여 우유를 먹어야 했고, 또 목에 구멍을 뚫어서 목구멍의 가래를 뽑아주어야 했다. 오랜 병원생활에 목구멍이 망가진 탓에 자주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은만이를 간호할 때 한 할머니가 아저씨~하고 목사님을 불렀다. 그 당시는 은만이 간호를 하다가 틈만 있으면 다른 환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해 주었기 때문에 그 할머니를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그 할머니가 목사님에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부여에 사는 할머니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손녀를 데리고 와서 잠시만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목사님 생각에 이 시골에 오죽 답답했으면 자기 자식을 맡기겠나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주를 맡았다. 그렇게 딸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할머니가 손녀를 키운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코딱지만한 집에서 아이는 보이지 않아 놀래서 손녀를 찾았더니 손녀가 화장실 변기에 빠져서 손만 나와 있는 것이었다. 급하게 아이를 건져서 물바가지로 대충 씻긴 후에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래서 목에 구멍을 뚫어 산소를 공급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아이가 축 늘어져 버렸다. 그래서 겨우 아이를 살려내었는데, 그때 머리에 산소공급이 되지 못하여 전신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당신의 이야기를 다 한 후에 목사님에게 예수 믿을 테니까 늙은이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부탁이 뭔지를 물어보았더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아저씨가 우리 손녀딸을 좀 맡아 주면 안될까? 내가 요 며칠 지켜봤는데 아저씨라면 우리 애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장 그러라는 게 아니구, 내가 죽은 다음에 그래야 이 늙은이가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같아.
목사님은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말에 예 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 손을 잡았더니 할머니는 활짝 웃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접기도도 하였다.
그리고 은만이가 퇴원하여 할머니와 만남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목사님은 아저씨라면 맡기겠수 하는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 손녀를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모님과 의논도 하지 않고 집으로 손녀를 데리고 갔다.
이것이 주사랑공동체가 사역의 씨앗이 되었다. 이종락목사님은 자신에게도 장애가 있는 아들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남기고 간 상희도 맡아서 키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은 베이비 박스를 통하여 버려진 아이를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는 그 사여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고 절망하여 무너지는데, 어떻게 이종락목사님은 상희를 가슴으로 낳은 딸로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그 정답은 사랑이다. 가슴 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고 그 사랑의 힘으로 주사랑공동체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사역을 펼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이 사랑이 있는가? 우리 예수님은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는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제 사명감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의 일을 감당해 나가는 충성된 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