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 읽기 ⑨:
어떤 한 사람 믿음의 발자취는 죽은 후에도 증거로써 일한다. ②
朴埰同 (2015.03.15.19:13)
다음은 ‘{목사의 딸} 정성욱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추천의 글>’에서 옮깁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약점이 본의 아니게 한국 교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교적인 권위주의, 샤머니즘의 결과였던 기복주의, 복음을 왜곡한 율법주의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본서를 읽으면서, 오늘날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가 갱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 발견한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가 복음을 회복할 것을 권면합니다. 저자는 복음으로 돌아가 복음을 회복할 것을 권면합니다.
정성욱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윗글은 ‘박윤선 목사님 따님 박혜란 님이 공부한 덴버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복음은 순전한 복음이고, 고 박윤선 목사님이 교수로 하나님을 섬기셨던 예장 합신 수원 합동신학원, 수원 합동신학원에서 가르치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다.’는 행간의 의미를 지닌, 아주 교만한 글입니다. 그러면 {목사의 딸}에서 말하는 이른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 발견한 순전한 복음”, 그 하나로 갑니다. 다음은 ‘{목사의 딸} <프롤로그: 목사의 딸, 그 수레바퀴 속에서>에서’ 옮깁니다.
1. Beholding is (a way of) Becoming.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닮아가는 것이다.
‘Beholding’은 그냥 쳐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시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을 계속 주시하면 그분을 닮아간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힘쓰는 대신 하나님을 주시하라. 이 말씀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을 요약한 것이다.
···(중략)···
그리고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이 말씀은 소망과 평안으로 나를 항상 새롭게 한다.
‘주님 안에서 박윤선 목사님께 은혜의 빚을 진 자’로서 고 박윤선 목사님 제자 분들은 ‘박윤선 목사님 신앙과 신학’을 ‘숭상’하십니다. 즉, 높이 우러르며 소중하게 여기며 본받으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런데 {목사의 딸}에서 박혜란 님이 박윤선 목사님 제자 분들을 두고 쓰신 “숭상”은 ‘우상숭배’ 뜻이 강합니다. 그래서 {페북}에서 “우상숭배”, “유훈통치”라는 말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주시하는 일’에서 그 ‘주체’를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며 ‘주님’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구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바른 성경} 히브리서 13장 7절: 하나님 말씀을 너희에게 말하던 너희 인도자들을 기억해라. 그들 행실과 결과를 주의해 보고 그 믿음을 본받아라.
* {표준새번역} 히브리서 13장 7절: 여러분의 지도자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하나님 말씀을 일러줬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페북} ‘황00 목사님이 {목사의 딸}을 다루신 글’,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사회, 유훈통치라고도 해요.”라는 댓글이 올라온 이 글 댓글란에 지난 11일 “존경했으니, 따라하겠죠?”라는 댓글까지 올라왔습니다. ‘존경하니, 박윤선 목사가 아내 김애련 사모에게 분을 내며 손찌검을 했던 일도 박윤선 목사 제자들이 따라하겠죠?’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의미대로 행하는 박윤선 목사님 제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박윤선 목사님 신앙과 신학을 ‘숭상’하는 제자들이 아니라 ‘박윤선 목사를 우상숭배’하는 자들입니다.
박윤선 목사님 성화의 여정, 신앙의 여정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요셉의 여정’과 같았다면, 박윤선 목사님 발자취를 뒤쫓는 우리 신앙의 여정에 더할 나위가 없었겠습니다만, 요셉의 여정이 최선의 여정입니다만, 우리 신앙의 여정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요셉의 여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지고 볶는” 성화의 여정, 넘어지면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일어서는 차선의 여정, 회개하는 여정, ‘믿음의 용사로서 삼손(히 11:32)의 여정’도 있습니다.
다음은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⑧: 너희가 믿을 때에 성신을 받았느냐?} (서울: 성약출판사, 2011)’ 313쪽~317쪽에서 옮기는 강설입니다.
우리가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셔서 생활하신 자태를 복음서를 통해 알되, 자세하게 진지는 어떻게 잡수셨고 잠은 어떻게 주무셨고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는 인사는 어떻게 하셨고 나오실 때는 어떻게 하셨고, 그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활 기록으로 써 놓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목적으로 전체 내용을 통틀어서 생각해 봐도 한 달이나 많아도 두 달 이내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쓰고 만 것이지, 3 년 이상에 걸쳐서 자세히 일기를 쓰듯이 혹은 전기(biography)를 쓰듯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그런 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언제 하셨는데, 그 이야기는 이것이다.’ 그런 것만을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천 년 전에 육신을 입고 땅에 와 계셨던 그 예수님 뒤를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모양을 따라서 해 보겠다고 하고, 그것도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한 것을 따라서 행하고 가는 것을 마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인 줄로 오해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만, 이천 년 전에 고린도 교인들도 ‘주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면,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서를 쓸 때부터 벌써 이십 몇 년 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이니까 이십 몇 년 전에 발생한 일을 나이 많은 사람은 혹시 기억하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본받아 보려고 한들 그 내용을 본받을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신인神人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본받는다는 말입니까? 본받을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모든 권세를 쥐고 거기 앉아 계시는 분이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본받으려면 무엇을 본받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에도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께서는 그것을 충분히 지실知悉하고 계시는 까닭에 ‘주를 직접 본받는다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과 함께 한 인간적인 교통과 같은 가장 지근한 교통을 너희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바울 선생께는 그러한 교통이 있어서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 따라서 행하고 ‘나는 이렇게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하셨습니다만,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육신적이고 사욕적인 교인들이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너희 눈에 환히 보이는 내가 있지 않느냐? 너희와 함께 오래 지내면서 내가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갔는지, 너희가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했는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연구해서 내가 목표를 향해 가는 그 길로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받는다’는 말뜻은 ‘여기 한 샘플이 있으니 너도 그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사람을 본받는다 할 때는 그 사람의 활동과 생활의 방향과 그 사람의 사상의 경지에 대한 한 이미지를 그린 다음에 거기에 의해서 그 뒤를 따라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 선생께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도 예수님의 사상과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그 길과 행보의 목표와 또 행보할 때에는 어떠한 조건 하에서 간다는 것, 예를 들면 주를 사랑해서 가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를 따라간다는 것,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간다는 것, 이러한 주님께서 정해 놓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을 순종해서 따라가는 것을 뜻입니다. 이것이 ‘본받는다’는 말뜻입니다.
‘본받는다’는 말이 영어 성경에 ‘imitate’로 번역돼 있지도 않고, 또 원어를 볼 때도 그런 의미로 나와 있지 않고 다만 ‘추종자들(follower),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라는 의미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중략)···
행렬을 지어서 가는데 선두에 예수님께서 가시면 그 선두를 보고서 따라가는 사람이 뒷사람에게 “너희는 내가 이렇게 가니까 여기만 따라오면 바른길로 간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더 훌륭하고 교만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분명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로 그분의 사상을 품고 그분께서 지라고 하신 짐을 지고 그분께서 내놓으신 조건 하에서 지금 움직이는 사람만이, 그것을 예수님께서 승인해 주시고 확인해 주시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확인하셔서 실증을 주셨으니까 너희들도 보기 쉬운 이것을 보고서 따라오너라.” 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사람 믿음의 발자취는 죽은 후에도 증거로써 일한다!
해명된 진리도 진리이다. 그러므로 해명된 진리도 진리로 받고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