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향 역사탐구①---------
공예태후(恭睿太后)
윤재근(오산 대덕초 29회, 전 공무원)
출생일: 1109년(고려 16대 예종 4년), 사망일: 1183년(고려 명종 13년)
고려 16대 인종(仁宗)의 비(妃) 성(姓): 임(任) 본관:장흥 임원후(任元厚)의 딸 임원후는 1089년(고려 13대 선종 16년)에 출생하여 1156년 9월(고려 18대 의종 10년)에 사망하였다.
임원후의 어릴 때 이름은 임원애,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신(文臣)이며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가 되었다.
1135년 1월(인종 13년)에 서경(평양)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되어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동덕좌리공신(東德佐理功臣)의 시호를 받았다.
그 후 고려시대 행정을 총괄하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중서령(종 1품)을 거쳐 고려 시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時中: 총리) 종 1품으로 정안후에 봉해지고 1148년(의종 2년)에 수태위로써 정한공에 진봉되었다.
임원후는 정사에 밝았고 청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정공이다. (문헌: 고려사) 고려 때 관등은 태조 왕건 때는 9등급으로 채택되었다가 995년(고려 6대 성종 14년)에 정(正)1품 종(從)1품으로 시작하여 정, 종 9품까지 총 18등급으로 되었다. 최고 직위는 정1품이었으나 정1품은 왕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으로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실무 직급의 최고 관등은 종1품(從一品)이었다.
공예태후 임씨는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에서 1109년에 임원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가 꿈을 꾸었는데 왕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언니가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그 꿈을 사겠다고 하자 언니가 그 꿈을 팔았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임원후)가 고향에 왔다 개경(고려수도)으로 가면서 언니를 왕비로 삼기 위해 언니와 같이 가려고 하자 동생이 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언니한테 샀다며 자기가 가겠다고 하자 임원후는 둘째 딸과 같이 개경으로 가서 인종의 비(妃)가 되게 하였다.
그 후 언니는 동생이 왕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후 그 우물을 아사지(娥: 예쁠 아, 死: 죽을 사, 池: 못 지)라고 하였다. 예쁜 처녀가 스스로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그냥 아지(我池)라고 한다.
그 우물은 관산읍 옥당리 동네 앞에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은 관산읍 옥당리에서 계속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럼 고려 17대 인종의 비(妃)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문하시중 임원후의 딸 공예태후 임씨, 이자겸의 셋째딸과 넷째딸(후에 폐비됨) 병부상서 김예의 딸, 선평 황후 김씨(문헌: 고려사)가 있고 공예태후는 처음에는 황후가 되어 연덕궁(延德宮: 고려 황후가 거처하던 집)의 주인이 되었다.
그래서 보통 연덕궁주라고도 하였다. 공예태후는 인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고 매우 똑똑하고 인물이 뛰어났다고 한다.
공예태후와 인종은 1109년 동갑내기다. 계산을 해보니 두 분이 기축생 소띠생이었다. 인종이 1123년 15세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였다. 다음 해인 1124년 공예태후 16세 때 인종과의 사이에 장남 "현"을 낳았다. 이분이 고려 18대 의종이다.
공예태후는 인종 때는 황후였으며 인종이 승하하고 장남 현이 의종으로 즉위하자 황태후로 옹립되었다. 여기서 참고 사항으로 고려 24대 원종 때까지는 왕을 황제(皇帝)라 칭하고 폐하(陛下)라고 하고 왕의 계승자를 태자(太子)라고 하였다. 그런데 25대 충렬왕 때부터 원(몽고)의 간섭으로 왕을 전하(殿下)라고 하고 왕의 계승자를 세자(世子)라고 하였다. 모든 관제도 변경하여 한 등급씩 낮춰버렸다.
공예태후의 자녀는 아래와 같다.
장남 의종(18대 왕), 대령후(경), 명종(19대 왕), 충희(원경국사: 흥왕사승통), 신종(20대 왕) 아들 5형제와 승덕, 덕녕, 창락, 영화 4공주를 합쳐 총 9남매를 낳았다.
다음은 이자겸이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자겸의 둘째 딸이 16대 예종의 비(妃)로 책봉되자 이자겸은 익선 공신이 되고 권세를 누렸다. 16대 예종이 승하하자 이자겸은 왕위를 탐내던 왕동생들을 물리치고 외손자 "인표"를 15세 나이로 왕으로 즉위시키니 이가 곧 17대 인종이다. 인종은 이자겸의 둘째 딸인 순덕황후 이씨와 예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1124년 8월(인종 2년)에 이자겸은 셋째딸을 인종의 비(妃)로 삼게 하더니 다음 해 1125년 1월(인종 3년)에 또다시 이자겸은 넷째딸을 인종의 비로 삼았다.
이자겸은 셋째딸과 넷째딸을 외손자(인종)에게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자겸의 셋째딸과 넷째딸은 인종의 이모가 된다. 이자겸은 두 딸이 인종의 비가 되자 위세가 켜져 자기 일파를 내외(內外) 요직에 심고 권세를 누리던 중 십팔자(十八子李)가 임금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1126년 2월(인종 4년)에 난을 일으켰다. 궁궐에 불을 지르고 왕(인종)을 자기 집으로 옮겨 모시고 독살까지 하려 들으며 정횡 하였다.
인종은 척준경 등을 시켜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고 1126년 5월에 이자겸을 생포하여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이렇게 되자 이자겸의 셋째 딸과 넷째딸도 인종의 비(妃)에서 폐위되었다. 고려 때는 근친결혼을 많이 하였다.
고려 제4대 광종 때는 근친(近親)결혼을 장려하였다. 우리 고장 장흥도 17대 인종이 장흥으로 개칭하였다.
백제 때는 오차현(烏次縣) 신라 경덕왕(35대) 때는 오아현(烏兒縣)으로 백제 마지막 의자왕 때는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며 고려 초기에는 안정현(安定縣)이었는데 고려 17대 인종이 공예태후 임씨 고향이라 하여 장흥으로 개칭하여 부(府)로 승격하였다.
고려 24대 원종 때는 회주목(懷州牧) 조선 3대 태종 13년에는 도호부(都護府)가 되고 조선 7대 세조 때는 진(鎭)을 설치했으며 1895년(고종 32년)에는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공예태후는 우리 고장 관산 출신으로 고려 17대 인종의 비(妃)가 되어 총 9남매를 낳아 그 중 3형제가 황제가 되어 우리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장흥을 빛낸 인물로 후세까지 남을 것이다.
이처럼 공예태후에 관한 내용은 고려사 등에서 하나도 거짓 없이 사실대로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기록했다는 것을 밝혀 둡니다.